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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0088 vote 0 2010.02.11 (19:59:08)




구조라고 하면 제자리에 붙박혀 고정되어 있는 딱딱한 어떤 형태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불완전하다. 이는 구조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라 하겠다.


 


 

딱딱한 구조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발전소에 붙잡혀 있는 이 송전탑처럼 다른 것에 종속되어 독립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하부구조다. 살아있는 구조, 역동적인 구조, 에너지가 순환하는 구조, 완성된 구조를 포착해야 한다.


 

 

 

결승테이프가 '축'이면 두 선수의 경쟁이 '대칭'이다. 달려오는 코스는 '방향성'을 지시한다. 주최측이 이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아 시합을 진행시키는데 성공하는 것이 완전성이다.

 

옳게 포지션을 갖추고서야 구조는 완성된다. 하나의 포지션이라도 빠지면 구조는 붕괴하고 시합은 무산된다. 구조란 시합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갖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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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면 이 그림 안에도 구조의 축과 대칭, 그리고 에너지가 움직여가는 방향성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눈 팔고 있는 선수의 시선과 관중의 환호를 묶어서 하나의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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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는 밖으로 난 창문과 같다.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거기서 에너지를 끌어들여서 내부에서 이를 처리하는 형태로 구조는 일을 한다. 일하여 낳는다. 일하는 구조, 낳는 구조가 열린 구조다.

 

세상을 딱딱한 알갱이의 집합으로 보는 닫힌 세계관이 아니라 부드러운 낳음의 수평적 네트워크로 보는 열린 세계관을 얻어야 한다.

 


 

 

 

구조의 대칭성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양은 침투한다.

 

 

 

모든 존재는 구조가 같다. '질, 입자, 힘, 운동, 량' 다섯 ‘인자’로 조직된 하나의 플랫폼을 세상의 모든 존재가 공유하고 있다. 구조론은 이 다섯 인자들 사이에서 완전성과 불완전성을 추적한다.

 

인간이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은 자연의 ‘대칭성 원리’를 모방하는 것이다. 자연은 하늘과 땅, 밤과 낮, 해와 달, 암컷과 수컷, 산과 강, 풀과 나무, 길짐승과 날짐승으로 항상 둘씩 짝지어져 있다.

 

인간은 자연의 대칭성을 모방하여 이상과 현실,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문과와 이과, 임금과 신하로 짝짓기에 분주하다. 이는 동양과 서양, 문명사회와 원시사회를 막론하고 공통된 속성이다.

 

자연의 짝짓기 성질, 곧 ‘대칭성 원리’가 바로 우리가 포착해야 할 구조다. 인간은 구조를 통해 사물을 이해한다. 어떤 둘씩 세트로 짝지어져 대칭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 안에 구조가 있다.

 

근대과학의 역사는 구조적 대칭성 원리의 토대 위에 구축되었다. 그러나 대칭성은 불완전하다. 에너지 개념이 빠졌기 때문이다. 대칭성은 에너지를 보유한 다른 존재에 종속된 형태로만 기능한다.

 

구조론이 새로 완전성 개념을 제시한다. 대칭성 위에 완전성이 있다. 이에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대칭성에 집착하는 닫힌 세계관을 극복하고 완전성에 기초한 열린 세계관을 얻어야 한다.

 

 

구조의 완전성

 

근대과학이 대칭성을 포착하는 방법은 분석이다. 덩어리를 잘게 쪼개서 내부를 뜯어본다. 그런데 생명을 뜯으면 어떻게 되지? 죽는다. 분석적 인식은 뜯어헤쳐져 죽은 구조를 포착할 뿐이다.

 

살아있는 구조를 포착해야 한다. 대칭성은 존재의 한 가지 측면일 뿐이다. 쪼개기가 아니라 합치기로 눈을 돌려야 한다. 합치는 것은 에너지다. 존재의 근본은 에너지다. 생명의 근원은 에너지다.  

 

존재를 뜯으면 에너지가 이탈한다.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다. 내부를 뜯어보기 위한 인간의 개입이 본래의 완전성을 훼손한다. 불완전하다. 복원해야 한다. 에너지를 태워 도로 살려내야 한다.

 

완전성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어떤 것이 완전한가? 완전한 구조는 창조한다. 창조하여 낳는다. 낳아서 증식하고 번성한다. 생명은 낳음에 의해 성장한다. 역사와 문명도 낳음에 의해 발전한다.

 

자본의 증식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의 분석적 접근은 자본의 본질이라 할 ‘시장지능’을 해체한다. 자본의 생명성을 포착 못한다. 사회의 진보 역시 마찬가지다. 제도나 법률의 진보는 껍데기다.

 

불질적 부나 마음의 행복 또한 진짜가 아니다. 집단지성에 의한 사회지능의 발달이 진보의 참된 본질이다. 개인의 사회적 지능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명성 자체가 일종의 지능을 가진다는 말이다.

 

금융, 증권, 보험에 의하여 관계의 밀도가 향상됨으로써 시장의 아이큐가 올라가는 것이 자본의 발달이다. 언론, 집회, 선거로 사회관계의 밀도를 증대하여 사회의 아이큐를 올리는 것이 진보다.

 

분석적 방법은 기왕에 만들어져 있는 사물을 해체하여 피상적으로 관찰할 뿐 처음 존재가 만들어지는 과정, 생생한 낳음의 현장을 포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에너지 개념을 빠뜨린다.

 

‘계’에 밀도가 걸려 있으면 에너지다. 분석적 방법으로는 밀도차를 포착하지 못한다. 밀도는 관계의 밀도이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되 입으로만 말고, 눈과 귀로도 즐긴다면 관계의 밀도가 증가한다.

 

음악을 듣되 리듬과 템포, 멜로디, 화성, 하모니를 두루 챙겨본다면 관계의 밀도가 증가한다. 사람 사이에서 관계의 밀도를 증가시킨다면 그것이 사랑이다. 밀도차에 의한 계의 방향성이 에너지다.

 

기관차와 객차사이, 엔진과 바퀴사이에 밀도차에 의한 방향성이 있다. 여러 요소로 이루어진 계가 통합되어 전체가 한 방향으로 진행한다. 분석은 관계를 해체하므로 방향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기관차와 객차를 분리해놓고 어디고 앞이고 뒤인지 모른다. 계의 방향성은 밖으로 열려있는 상부구조에만 있다. 닫혀있는 하부구조는 방향성이 없다. 방향성이 없으니 에너지를 태우지 못한다.

 

에너지가 없으니 진보와 보수가 서로 발목잡고 교착되어 상황을 타개하지 못한다. 방향성 개념을 얻어야 한다. 계에 밀도차가 있다. 방향성이 있다. 에너지가 있다. 그것을 가진 완전성이 있다.

 

구조의 이해는 첫째 근대과학의 토대라 할 대칭성의 이해다. 둘째 그 대칭성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게 하는 완전성 개념의 이해다. 에너지를 태웠을때 성립하는 계가 진행하는 방향성이 완전성이다.   

 

우주는 팽창하고 생물은 진화한다. 문명은 발달하고 역사는 진보한다. PC는 업그레이드 되고 인터넷은 빨라진다. 자본은 시장지능이 발달하고 공동체는 사회지능이 발달한다. 점점 아이큐가 높아진다.

 

명백히 계가 진행하는 방향성이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가는 길이 있다. 도(道)가 있다. 그 방향성을 알았을 때 교착은 타개되고, 위기는 수습되고, 문제는 풀려진다. 구조론이 문제를 해결한다.

 

 

 

구조주의 세계관

 

근대과학의 토대는 인과율이다. 인과율은 원인과 결과를 짝짓는다. 삼단논법은 A와 B가 짝을 짓는다. 수학의 풀이법 역시 ‘=’를 고리로 삼아 연속적인 짝짓기를 전개한다. 대칭성은 짝짓기다.

 

짝짓기 방법으로 인간은 지식을 창출한다. ‘원숭이 밑은 빨갛다, 빨간 것은 사과다, 사과는 둥글다’로 계속된다. 연속적인 짝짓기로 지식을 대량생산한다. 그러나 파편화된 부스러기 지식일 뿐이다.

 

자연의 전개 역시 짝짓기가 중심이다. 물질의 분자구조든, 돌턴의 원자가설이든, 표준모형이론이든 연속적인 짝짓기 구조다. 문제는 불완전하다는 데 있다. 에너지를 태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칭성을 발견하고 곧 흥분한다. 마치 세상을 다 알게 된듯이 기고만장해 한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대칭성은 내부구조일 뿐이다. 외부와 관계맺지 못하는 닫힌구조다.

 

에너지가 있는 상부구조에 딸려있는 하부구조다. 에너지를 들여오려면 안의 짜임새가 아니라 바깥세계와의 관계설정이 중요하다. 상부구조가 밖에서 에너지를 들여와 하부구조를 통제한다.

 

열린구조 안에 닫힌구조가 있다. 상부구조에 하부구조가 포함된다. 구조 위에 구조가 있어서 이중구조를 이룬다. 그러나 인간은 위를 보지 못한다. 정상에서 전모를 바라보는 열린 시야가 없다.

 

한사코 아래쪽에만 현미경을 들이댄다.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여전히 대칭성에 매달리는 닫힌 세계관이다. 흑백논리, 이원론적 사고, 이분법적 사고, 이항대립적 사고, 선형적 사고다.  

 

파편화된 인식을 극복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에 꿰어 하나의 논리로 일관되게 설명해야 바르다. 서말의 구슬을 꿰어 보배로 삼자면 무엇으로 인식의 구슬을 꿸 것인가? 에너지라는 끈이다.

 

에너지 흐름을 따르면 길이 열린다. 에너지의 일방향성이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하나의 체계아래 통일하여 입체적인 인식을 이룬다. 그래야 낳는다. 낳아서 증식된다. 진보하고 발전하고 성장한다.

 

세계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흑백논리로 대칭구조에 갇혀 교착되지 말고 에너지 흐름을 갖춘 통짜덩어리 인식을 얻어서 교착을 타개해야 한다. 열린 세계관의 입체적사고로 비약해야 한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서해바다의 밀물과 썰물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바다 내부의 어떤 사정 때문은 아니다. 밤 하늘의 달은 왜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변덕을 부리는 것일까? 달 내부의 어떤 속사정 때문은 아니다.

 

바깥밖을 보라. 바깥에서 작용하는 달의 인력 때문에 밀물과 썰물은 일어난다. 밖에서 작용하는 태양과의 관계 때문에 달은 커지거나 작아진다. 우리가 알아야 할 진짜는 항상 바깥에 있다.

 

산봉우리는 뾰족하다. 왜일까? 산의 성격이 별나게 까칠한 때문은 아니다. 밖에서 깍아대는 빗방울 때문이다. 그러나 조상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관악산 내부의 화기(火氣) 때문이라 여겼다.

 

관악산의 화기가 작용하여 대궐에 화재가 날까봐 남대문 건축때 액막이 비방을 썼다는 속설도 있다. 안에서 답을 찾은 것이다. 근대과학의 역사는 현미경 대고 사물의 안쪽을 들여다 본 역사다.

 

양파껍질을 계속 깐 것이다. 그 안에 신통한 것은 없었다. 분자를 까서 원자를 찾고, 원자를 까서 소립자를 찾았지만 결론은 없다. 현대 물리학은 끝내 미궁에 빠져버렸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안에도 구조가 있지만 반쪽이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구조는 항상 대칭의 쌍을 이룬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밖의 작용과 짝지어진다. 안에 무언가 있다면 밖에도 관련된 무언가 있다.

 

안의 뼈대는 밖의 중력과 맞선다. 안의 내장은 밖의 음식과 맞선다. 안의 손과 발은 밖의 핸들과 브레이크에 각각 맞선다. 우리는 건물 내부의 딱딱한 뼈대를 구조로 알고 있지만 잘못이다.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의 동선이 구조다. 밖에서 새가 들어오면 둥지고, 밖에서 개가 들어오면 개집이다. 안쪽의 딱딱한 구조는 진짜가 아니다. 바깥의 살아서 움직이는 부드러운 구조가 진짜다.

 

누구나 구조를 말한다. 기업이면 구조조정이고 건물이면 구조변경이다. 구조주의 철학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부족하다. 알려진 구조는 안쪽의 내부구조, 닫힌 구조, 하부구조에 지나지 않는다.

 

바깥의 외적연관, 열린구조, 상부구조여야 한다. 바깥에 무엇이 있는가? 에너지가 있다. 에너지를 태워야 완전하다. 바깥에서 에너지가 들어오는 입구가 우리가 알아야 할 열린구조, 상부구조다.

 

자연계의 모든 변화는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치는 형태로 일어난다. 구조는 포지션이다. 에너지의 입구가 상위 포지션이다. 에너지를 장악한 상부구조가 에너지가 없는 하부구조를 지배한다.

 

상위 포지션을 선점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경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하위 포지션에서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 주도하지 못하고 종속된다. 계약에서는 갑이 아니라 을이 된다.

 

시합에서는 패자가 되고 경쟁에서는 뒤처진다. 우리는 딱딱하게 죽은 구조, 다른 것에 종속된 하부구조만을 구조로 잘못 안다. 유능제강(柔能制强)이라 했다. 팔팔하게 살아있는 구조가 진짜다.

 

부드러운 구조, 열린 구조가 진짜다. 바깥을 둘러싼 부드러운 유(柔)의 근육이 안에 박힌 딱딱한 강(剛)의 뼈대를 지배한다. 구조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항상 바깥이 먼저고 안은 나중이다.

 

부드러운 구조, 성장하는 구조, 진보하고 발전하는 구조, 우일신 하는 구조, 생명의 구조가 진짜다. 열린구조가 진짜다.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맥이 뛰고, 피가 돌고 자발적인 호흡을 해야 한다.

 

 

 

수학적 구조

 

세상은 집합이고 집합에는 원소가 딸려있다. 원소들 사이에 연산이 규정되어 있을 때 이를 구조라 한다. 구조는 집합에 부여된 수학적 성질이다. 집합과 원소 사이를 규정하는 조건이 구조다.

 

세상은 일(work)로 이루어져 있다. 일은 에너지 순환의 1 단위다. 일이 집합이면 에너지는 원소다. 일과 에너지 사이에 연산이 규정되어 있다. 그것은 에너지의 질서다. 구조는 에너지의 질서다.

 

자연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은 수학적 질서에 에너지를 입혀서 2차적으로 유도된 결과다. 수학은 질서다. 질서는 길이다. 에너지는 일하여 그 길을 간다. 그 결과로 물질이 유도된다.

 

● 수학은 질서다≫일은 에너지다≫질서에 에너지를 태우면 자연의 물질이 유도된다.

 

어떤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그것이기 위한 이전 단계가 있다. 모든 존재는 그냥 존재가 아니라 어떤 절차를 거쳐 유도된 존재다. 구조론은 존재가 성립하기 이전 단계에서의 유도절차를 해명한다.  

 

근대과학에서 존재의 유도과정을 밝히는 논리는 인과율이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자연의 물질이 유도된 ‘결과’면 ‘원인’은 원자다. 원자 개념은 물질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착상되었다.

 

그러나 근대과학의 발달한 물리학으로도 최종입자를 찾아내지 못했다. 구조론으로 보면 그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은 알갱이의 집합이 아니라 관계단위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관계단위는 ‘작용 반작용의 법칙’으로 해명된다. 외부에서 작용했을 때 어떻게든 안에서 반작용이 일어난다면 ‘거기에 무엇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반작용이 없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다.

 

세상은 원자의 집합이 아니라 작용반작용 단위의 집합이다. 우리가 입자로 치는 것은 작용반작용의 대칭성이 축에 의해 보존되는 성질이다. 곧 포지션이다. 시공간 상의 포지션이 있으면 존재다.

 

존재는 물질 이전의 상위개념이다. 존재에 에너지를 태워 2차적으로 유도한 것이 물질이다. 어떤 포지션이 있을 때 밖에서 에너지로 작용해서 안에서 에너지로 반작용하면 그것이 바로 물질이다.

 

존재 - 작용 반작용의 포지션 단위

물질 - 에너지의 작용 반작용 포지션 단위

 

인과율에 따라 존재가 ‘결과’면 ‘원인’은 인자(因子)다. 구조론은 '질, 입자, 힘, 운동, 량' 다섯 인자로 모두 설명한다. 모든 시스템은 다섯 인자에 의해 조직된 하나의 기본적인 플랫폼을 공유한다.

 

인자(因子)는 원자론의 원자(原子) 개념을 대체한다. 원자론은 오류다. 물질은 원자 알갱이의 집합이 아니다. 존재는 물질보다 상위 개념이다. 존재는 인자의 구조적인 집적이다. 그것은 포지션이다.

 

포지션은 축이 인과율에 따라 작용 반작용의 대칭성을 보존하는 성질이다. 관계맺기의 1단위가 된다. 인자는 관계를 맺는다. 에너지를 태우면 일(work)이 일어나서 자연의 물질이 유도된다.

 

● 인과율≫작용반작용(존재)≫축과 대칭의 포지션(원인)+에너지=물질(결과)

 

구조는 에너지 통로다. 다섯 인자는 에너지가 꺾이는 마디들이다. 에너지는 다섯가지 형태로 방향이 꺽인다. 다섯가지 에너지의 진행방향이 있다. 5회에 걸쳐 진행방향이 결정되어 만유를 낳는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구조 개념과 다르다. 문제는 우리가 구조를 모른다는 점이다. 알려진 닫힌구조는 구조의 일부일 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조는 보다 복잡한 모듈로 되어 있다.

 

 

구조의 개념

 

구조(構造)는 ‘에너지의 질서’다. 수학적 질서 개념에 에너지 개념을 태운 것이다. 에너지는 일을 한다. 그러므로 구조는 일(work)의 질서, 사건(event)의 질서다. 이는 존재(存在)의 유도과정이다.

 

어원으로 보면 구조(構造)의 구(構)는 통나무를 정(井) 자로 얽히게 쌓는 것이다. 조(造)는 작업의 진행이다. 우리말로 풀면 구(構)는 ‘얼개’이고 조(造)는 ‘지음’이다. 구조는 ‘존재를 짓는 얼개’다.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구조는 구(構)만 강조되고 조(造)의 의미가 약하다. 에너지 개념, 사건의 현재진행 개념이 없다. 구조론은 살아서 움직이는 구조, 진보하고 발전하는 구조를 이야기한다.

 

구조는 존재의 탄생이전 단계를 해명한다. 건축이면 집이 지어지는 절차다. 벽돌에 구조를 부여하면 건물이 탄생한다. 예술의 조형(造形)이라도 그러하고, 생명의 창조(創造)라도 마찬가지다.

 

모든 낳는 것, 창조되고 제조되는 것에 구조가 숨어 있다. 웹에서 사전이 제시하는 구조개념을 발췌, 인용한다. 역시 얼개 개념만 강조되어 있다. 고정된 구조를 설명할 뿐 창조개념이 없다.

 

 

위키백과  

구조(構造)는 때로는 형태가 없으면서도 근본적인 어떤 것으로 둘러 싸인 존재의 관계 및 개념 인식, 관찰, 자연, 양식의 안정성 등을 나타내는 말이다. 구조의 개념은 탐구와 과학, 예술, 철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필수적인 기초다. 어떤 구조가 어떠한 체계로 이루어졌다고 정의한다. 그것은 항목의 구성이다.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구성요소의 모음이다.

 

백과사전

◎ 구조[構造, structure]는 건축물의 형성양식을 말한다.

 

◎ 수학적 구조[數學的構造, mathematical structure] 어떤 집합에 부여된 수학적 성질이다. 군(群)·환(環)·체(體)등이 집합이 되고, 그 집합의 원소들 사이의 연산이 규정될 때를 말한다.

 

◎ 구조주의[構造主義, Structuralism]  

어떤 사물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여, 개인의 행위나 인식 등을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총체적인 구조와 체계에 대한 탐구를 지향한 현대 철학 사상의 한 경향이다.

 

국어사전

구조[構造] 부분이나 요소가 어떤 전체를 짜 이룸. 또는 그렇게 이루어진 얼개.

 

 

살펴보았듯이 대개 정(靜)적인 관점이다. 동(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먼저 질서에 대한 고정관념부터 해체해야 한다. 딱딱한 질서,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질서는 진짜 질서가 아니다.

 

독재자의 가부장적 질서는 죽은 질서다. 불완전하다. 참된 질서는 동적인 짝짓기 질서다. 암수가 짝지어 생명을 낳는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질서이며 부드러운 사랑의 질서, 예술의 질서다.

 

시계 속의 톱니바퀴처럼 빼꼭하게 맞물리지 않고 넓은 운동장에 양팔간격으로 벌려선 여유로운 질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짝짓기가 가능하니까. 그래야 낳을 수 있고 창조할 수 있으니까.

 

그래야 완전하니까. 외부에서 에너지가 들어오고 다시 빠져나갈 통로가 필요하니까. 구조가 작동할 여유공간이 필요하니까. 딱딱한 구조도 있지만 그것은 연장이 되어 주인을 위해 봉사할 뿐이다.

 

병사는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야 한다. 그래서 군생활은 딱딱하다. 그러나 지휘관은 유연한 사고를 해야 한다. 우리는 병사의 딱딱한 질서만 강조하고 리더의 유연한 질서, 창의적 질서는 까먹었다.

 

컨셉을 어떻게 잡느냐가 중요하다. 엄마의 품속처럼 편안하고 부드러운 낳음의 구조를 머리 속에 그려야 한다. 거기에 드라마가 있고, 반전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 이상이 있고 미학이 있다.  

 

 

구조론의 효용

 

구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IMF로 구조조정 난리를 친게 불과 10년 전이니까.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떨어지는 것이 다 구조적인 결함 때문이다. 뭐든 문제가 생기면 구조 때문이다.

 

역으로 뭐든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구조를 손봐야 한다. 이정도는 누구나 안다. 그런데 정작 구조를 모른다. 문제가 생겨도 구조를 조사하지 않고, 대부분 남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따라한다.

 

구조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점에 확신을 가지고 파고드는 사람이 없다. 구조를 모르기 때문이다. 구조를 봐도 구조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

 

60억이 산다는 이 세상에 구조를 아는 사람이 없다. 21세기 현대문명의 구조를 뜯어고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그래도 구조의 중요성은 알아서 성공사례가 나오면 재빨리 구조를 베낀다.

 

남이 만든 구조를 베껴 메뉴얼만 찍어낸다. 남의 구조를 복제한 다음 껍데기 디자인만 슬쩍 바꿔서 자기가 작곡했다고 우긴다. 세상이 통째로 짝퉁이다. 원본의 향(香)이 없고 기(氣)가 없다.

 

아이팟이 나왔다. 애플은 시장을 만들었고 삼성은 물건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 구조적인 차이가 있다. 애플이 만든 시장에 종속되어 물건을 파는 이상 삼성은 갑이 되지 못하고 을의 신세다.

 

하청기업과 같다. 종속되고 착취당한다. 삼성이라고 그러고 싶었겠는가? 문제는 구조를 모른다는 사실에 있다. 삼성 직원 중에 구조를 아는 사람이 없다. 주로 천재들만 채용했을텐데 말이다.

 

물건의 구조는 아는데 시장의 구조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물건의 구조는 딱딱하게 죽은 구조다. 이런건 뜯어보고 잘 안다. 시장의 구조는 살아서 움직이는 역동적인 구조다. 뜯어볼 수 없다.

 

확실히 마인드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애플은 구조를 아는가? 알았다면 빌 게이츠에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장의 중요성을 알고 변신을 꾀했지만 옛버릇이 남아서 폐쇄형 시장을 만들었다.

 

스티브 잡스 역시 시장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해커도 설치고 보안업체도 설치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진화형 생태계가 아니라, 해커도 없고 보안없체도 없는 공산주의 생태계를 만들었다.

 

이렇듯 좀 안다는 사람들도 구조를 모른다. 구조는 에너지를 제어하는 툴이다. 에너지가 들어오는 입구가 상부구조, 출구 쪽이 하부구조다. 언제나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치는 형태로 작동한다.

 

구조는 포지션이다. 포지션들 사이에 질서가 있다. 구단주가 포지션이 높고 다음이 감독, 코치, 선수, 관객 순이다. 포지션이 높은 구단주가 이득을 챙기고 포지션이 낮은 관객이 돈을 낸다.

 

겉으로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가 있고 안으로 내부에서 제어하는 축과 대칭이 있다. 합쳐서 다섯 포지션이다. 포지션들이 완전성을 이루고 주도권을 만들고 역설과 대칭을 낳고 단서를 남긴다.

 

이들이 문제해결의 우선순위와 접근경로를 조직한다. 구조론을 알아야 좋은 포지션을 얻는다. 을이 아닌 갑, 하청업체가 아닌 원청업체, 꼬리가 아닌 머리, 관객이 아닌 선수, 조연이 아닌 주연이다.

 

구조론은 앉아서 전략을 짜는 것이 아니라 전략툴을 보급하는 것이다. 꾸려야 할 시장은 그 과정에서 저절로 만들어진다. 책상머리에서 짠 전략은 가짜다. 항상 실행과정에서 시행착오로 무너진다.

 

새로운 위기는 언제나 새로운 방향에서 오기 때문이다. 과거의 패턴을 믿다가는 패퇴할 뿐이다. 툴의 보급과정에서 저절로 얻어진 전략이 진짜다. 딴거없고 전략의 요체는 포지션 우위에 있다.

 

에너지 입구쪽을 차지하고 출구쪽을 친다. 입구를 장악하고 출구를 바라보아야 한다. 전략툴을 공유하면 에너지의 흐름으로 걸려져서 저절로 자원이 입구 쪽으로 모인다. 거기서 전략이 나와준다.

 

구조를 모르면 나쁜 포지션을 차지하고 열심히 일해서 남준다. 자기도 모르게 남이 세운 줄 뒤에 가서 서거나, 혹은 한때 반짝했던 일본처럼 얼떨결에 앞섰다가도 뒤에서 쫓아올때까지 기다린다.

 

 

 

구조론의 콘텐츠

 

구조론은 문제를 해결한다. 구조론을 이용하여 문제해결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콘텐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점에서 구조론은 그 많은 ‘무슨주의’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마르크스주의라도 원고지 1매로 압축될 수 있는 간단한 이야기다. 독립적인 자기 콘텐츠가 없다. 포지션의 독립없이 기왕에 존재하는 기성질서에 대립각을 세우는 식이라면 구조적으로 종속될 뿐이다.

 

결과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를 개선시켜 자본주의 발달에 이바지했다. 기성질서에 하부구조로 편입된 것이다. 깃발도 있고 구호도 있었으나 방법론이 없었다. 자체 엔진이 없었다.

 

혁명이론이 있지만 정치투쟁의 방법론일 뿐 사회주의 자체의 엔진은 아니다. 반면 자본은 자체 엔진이 있어서 독립적인 생명력을 가진다. 외부개입없이 저절로 발전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외부에서 타격하면 그 힘을 흡수하여 더욱 크게 자라난다. 자본은 비판할수록 오히려 건강해진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생명성에 맞설 별도 엔진을 제작하지 못했다. 원래 가능하지 않았다.

 

명목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는 많으나 실상 지식집단의 인적 네트워크에 불과하다. 그들이 사회주의 이름을 내걸고 생산하는 지식과 시장이 생산하는 자본은 정면으로 대립되지 않는다.

 

‘자본에 맞선다’는 구호는 그들의 자존심을 충족시킬 뿐 세상은 여전히 시장원리에 의해 작동한다. 그 밖에 실존주의니 분석철학이니 하는 다른 많은 철학사상들도 콘텐츠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이 목청높여 주장하는 것은 대략 하나의 입장, 태도, 관점에 불과하다.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장비’다. 병사에게는 총, 농부에게는 낫, 장사치는 주판, 선비에게는 붓이 장비다.

 

왜 많은 주의, 주장들이 잠시 눈길을 끌 뿐 결국 외면당하고 마는가? 장비가 없기 때문이다. 물고기를 낚으려면 낚싯대가 있어야 한다. 그게 없다. 구조론은 수학과 같아서 분명한 콘텐츠가 있다.

 

구조론은 어떤 주의, 어떤 철학, 어떤 사상, 어떤 사조에 의해서도 이용될 수 있다. 진보든 보수든 구조론의 방대한 체계 안에서 각자 입맛에 맞는 부분을 빌어갈 수 있다. 넉넉히 제공한다.

 

장비는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툴이다. 선비는 붓으로 작가와 독자를 연결한다. 포수는 총알로 타겟까지 연결하고, 낚시꾼은 낚싯대로 물고기를 연결하고 운전수는 차량으로 목적지까지 연결한다.

 

가짜들은 연결하지 않는다. 큰 산이 하나 있다면 가짜들은 자기 자신을 그 산의 위나 아래나 혹은 옆에다가 포지셔닝 시킨다. 산은 건들지 못하면서 자기 자신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것이다.

 

혹은 위에서 굽어보는 주의, 혹은 아래서 쳐다보는 주의, 혹은 옆에서 흘겨보는 주의를 발표하지만 다 자기입장이다. 객관적이지 않다. 거기서 ‘자기’를 제거해야 객관의 과학으로 올라설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본다’는 식의 선언은 필요없다. ‘나’를 배제해야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빼고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장비만 제공하라. 그 장비를 누구라도 가져다 쓰게 개방하라.

 

구조론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장비다. 장비를 사용하여 대상을 건드릴 수 있다. 선비가 붓으로 건드리고, 요리사가 칼로 건드리듯, 구조론으로 원하는 대상을 입맛대로 요리할 수 있다.

 

‘나’를 이리저리 옮겨다닐 필요는 없다. 장비가 알아서 다 연결해 준다. 완전성의 망을 깔고, 주도권의 서버를 놓고, 역설의 PC로 접속하여, 대칭의 웹사이트를 찾아, 단서의 데이터를 읽게 한다.

 

구조론이 챙겨야 할 장비는 첫째가 완전성, 둘째가 주도권, 셋째가 역설, 넷째가 대칭, 다섯째 단서다. 이 다섯은 구조의 포지션들이다. 이 포지션들이 모여서 이루는 것은 생명성의 시스템이다.

 

시스템 안에 출발점이 되는 패턴이 있고, 패턴들 사이의 밸런스가 있고, 그 밸런스의 축과 대칭이 있다. 이들 사이에서 치고 나가는 에너지 입구와 출구가 있다. 맵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된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있다. 둘을 한줄에 꿰어내는 것은 인과법칙이다. 인과법칙을 성립시키는 것은 일의적 결정원리다. 거기에 인간의 시선을 대입시켰을 때 나타나는 것은 존재론과 인식론이다.

 

이들이 일의 전체과정을 이룬다. 그 안에 우선순위와 접근경로가 있다. 상대경로와 절대경로가 있다. 근본적으로 ‘에너지를 태운다’는 개념을 알아야 한다.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에너지 통로다.

 

자동차의 구조를 알되 그것이 가솔린이 지나는 통로임을 잊는다면, 사람을 알아도 그것이 밥으로 들어와서 똥으로 나가는 통로임을 모른다면 실패다. 에너지가 진행하는 길 개념이 없으면 가짜다.

 

질≫입자≫힘≫운동≫량이 인자가 된다. 질은 완전하고, 입자는 주도하며, 힘은 역설이고, 운동은 대칭되며, 양은 단서다. 구조론을 안다는 것은 다섯 포지션들 사이의 에너지 질서를 아는 것이다.

 

 

 

질은 완전하다

 

* 시스템의 완전성 -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개입하지 않아도 저절로 돌아가는 시스템이 완전하다. 자동차는 불완전하다. 운전자가 있어야 움직인다. 그러나 씨앗은 들판에서 저절로 싹튼다.

 

완전한 것은 생명의 성질을 가진다. 자신을 복제하여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우주의 팽창, 생물의 성장, 역사의 진보, 문명의 발전, 예술의 성취에는 완전성이 있어서 작품의 완성도가 된다.

 

* 완전성은 낳음의 방향성이다. - 진정한 가치는 낳음에 의해 얻어진다. 모든 창조하는 것에는 반드시 낳음이 있고, 낳음이 있는 곳에는 일정한 방향성이 있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깨달음, 소통, 공명, 증폭, 전파, 생장, 생명, 진보, 발전, 성공, 완성들은 창조의 언어, 낳음의 언어들이다. 이 개념들은 공통적으로 중심부와 주변부가 구분되며 그 사이에 일정한 방향성이 있다.

 

에너지를 태우고 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에너지가 가는 길이 있다. 모든 살아서 숨쉬고, 호흡하고, 맥박이 뛰고, 피가 돌고, 사랑하며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에 완전성이 있다.

 

 

입자는 주도한다

 

* 조직의 주도권 - 성장하고 발전하여 점점 커지는 것이 조직이다. 조직의 내부에는 반드시 주도권이 있다. 주도권이 깨지면 조직 전체가 죽기 때문에 조직은 주도권을 보호하려는 속성이 있다.

 

악당이 주도권을 쥐면 이 점을 악용한다. 주도권이 붕괴할 때 전체가 다 죽는다는 점을 내세워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을 조정한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이기도록 각본을 짜서 판을 설계할 수 있다.

 

* 점점 커지는 것이 주도권이다. - 운동이라면 가속도가 있을 때, 정치라면 점점 세력이 불어날 때, 자본이라면 이윤이 점점 증가할 때 그 점점 불어나는 기세를 타고 흐름을 타는 것이 주도권이다.

 

흐름을 잃고, 가속도를 잃고, 기세를 잃으면 주도권은 사라진다. 나쁜 정치인은 고의로 마찰을 일으켜 일을 크게 벌인다. 나쁜 사업가는 사업이 어려울수록 오히려 더 큰 사업을 벌이려든다.  

 

 

힘은 역설이다

 

* 싸움의 역설 - 역설은 자신의 의도와는 반대의 결과가 얻어지는 것이다. 모든 싸움은 역설의 원리에 지배된다. 이기는게 결과적으로 지는 것으로 되고 지는 것이 오히려 이기는 것으로 된다.

 

싸우는 양측이 대칭을 이룰 때 축이 대칭보다 높은 포지션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밸런스 원리가 작용하여 역설을 일으킨다. 정치판에서 관찰할 수 있다. 유권자가 축이 되어 여야의 승부를 뒤집는다.

 

연인의 사랑싸움이라도 그러하다. 사랑이라는 축이 여자와 남자의 대칭을 제어하여 밸런스를 회복하므로 승부가 뒤바뀐다. 싸움은 축을 해체하려 하고, 축은 자신을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형제가 싸우면 가정이 해체된다. 축 역할의 부모가 개입하여 대칭되는 형제의 승부를 뒤집어 놓는다. 패자에게 승리를 주고 승자에게 패배를 준다. 그래야만 가정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 종속된 것에 역설이 있다. - 역설은 주도권을 뒤집은 것이다. 흐름을 탔을 때 모든 것이 유리하게 되는 것이 주도권이고, 반대로 흐름을 놓쳤을 때 모든 것이 불리하게 나타나는 것이 역설이다.

 

힘이 있는 쪽이 주도권을 쥐면 힘이 없는 쪽은 역설에 지배된다. 엔진이 없이, 에너지가 없이, 돈이 없이, 다른 어떤 힘센 것에 빌붙어 있으면 항상 자신의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를 얻게 된다.

 

기업이면 하청업체, 저택이면 하인, 계약서면 을이 역설의 원리에 의해 지위가 불안정해진다. 잘하면 시기를 당하고, 나서면 미움을 받고, 가만 있으면 내쫓긴다. 힘 없으면 싸우지 말아야 한다.

 

 

 

운동은 대칭된다

 

* 움직이는 것의 대칭 - 상부구조에 일원적인 주도권이 있다면 하부구조에는 2원적인 대칭성이 있다. 모든 흑백논리, 이분법, 이항대립적 사고, 이원론적 사고, 선형사고의 출발점이 대칭성이다.

 

공이 있다면 앞도 없고 뒤도 없다. 공이 움직이는 순간 앞과 뒤, 진보와 보수, 주인과 하인, 임금과 신하, 음과 양, 여자와 남자로 쪼개진다. 이때 그 이원적 질서가 공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공과 환경과의 만남에서 앞과 뒤가 성립한다. 그 공이 투수에 의해 타자 앞으로 던져졌기 때문에 대칭성이 생겨난 것이다. 모든 흑백논리, 이원론, 이분법적 사고는 운동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운동이 정지할 때 음양도, 남녀도, 군신도, 장유도, 앞뒤도 모두 사라진다. 진보도 사라지고 보수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대칭은 그 일원적 질서를 찾아가는 중간 정거장이다.

 

더 많이, 더 길게, 더 넓게, 더 크게, 더 높이, 더 빠르게 하려는 모든 것에 운동의 대칭이 있다. 전후좌우, 고저장단, 주류와 비주류, 리듬과 템포, 4계절, 모든 반복되는 패턴에 대칭이 있다.

 

모든 비교 판정되는 것에 대칭이 있다. 승자와 패자, 일등과 꼴찌, 합격과 불합격, 흑인과 백인, 여성과 남성, 강자와 약자, 빈자와 부자로 분별하여 나누는 것에 대칭이 있다. 모두 허상이다.

 

* 대칭을 알면 시합에 이긴다. - 스포츠맨은 들숨과 날숨을 알아야 한다. 그 들고 나는 호흡의 대칭성에 집착할게 아니라, 그 대칭되는 양자를 동시에 통제하는 축으로서의 밸런스를 알아야 한다.

 

투수라면 마운드에서 치켜드는 발과 뒤로 젖히는 팔 사이의 밸런스를 알아야 한다. 그 대칭되는 둘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인체의 축을 찾아야 한다. 그러고서야 무너진 투구폼은 바로잡힌다.

 

먼저 내 안의 대칭이 있다. 왼발과 오른발의 대칭이다. 이 내부대칭을 피아간의 외부대칭과 연동시켜야 한다. 오른발과 왼발의 대칭원리를 상대선수와 나의 대칭과 연계시킬 때 힘은 발휘된다.

 

더 나아가 피아간의 대칭을 선수와 관객 사이의 근원적인 대칭으로 지평을 확대시킬 때 진정한 힘이 얻어진다. 프로야구팀의 감독이라면 시합에 들어가기 전에 선수단 내부의 대칭성이 존재한다.

 

시합중에는 우리팀과 상대팀의 대칭성이 있다. 시합이 끝나고 나면 관객과 리그 사이의 대칭성이 있다. 이 세 가지 대칭을 한 줄에 꿰어 하나의 하모니로 연동시킬 때 힘은 극대화 된다.

 

골퍼라면 공과 퍼터의 대칭이, 퍼터와 몸의 대칭으로 연장되고, 다시 몸과 대지 사이의 대칭으로 확대되며 셋이 전부 한줄에 꿰어져야 한다. 그러한 지평의 확장이 우주끝까지 도달해야 한다.

 

 

양은 단서다

 

* 사건의 단서 - 사건은 항상 작고 사소하고 엉뚱한 것에서 외부로부터의 침투 형태로 촉발된다.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점점 커진다. 거기에 필연의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조짐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작은 단서에 민감해야 한다. 단서는 반드시 외부에서 이질적인 것의 침투 형태로 나타난다. 어딘가 뚫렸다면 아주 작은 일이라도 크게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조짐이기 때문이다. 가장 작은 힘으로 가장 큰 것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사건이 처음 시작되는 첨단부, 변방의 파수보는 뾰족한 지점들을 미리 확보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 주변부에 단서가 있다. - 사건은 반드시 주변부에서 시작된다. 중심부에서 일어난 사건은 설사 큰 일이라 하더라도 뒤로 조정하여 숨길 수 있다. 사전에 안배할 수 있고 사후에 수습할 수 있다.

 

주변부에서 일어난 사건은 작게 시작해도 한번 바람을 타기만 하면 갑자기 훅 옮겨붙는다. 반면 중심부는 가운데 몸통이 끼어있어서 활동이 제약되므로 자유롭게 사건을 진행시킬 수 없다.

 

역사의 위대한 변혁은 주변부에서 일어나고, 아웃사이더에 의해 촉발되며, 변방에서 중심을 치는 형태로 진행된다. 중심의 지식인이 변하면 달라지는것이 없다. 변방의 대중이 변하면 세상이 바뀐다.

 

질≫입자≫힘≫운동≫량 중에서 양이 낮다. 사건은 양적 변화로부터 촉발된다. 내가 양으로 작업하면 상대방은 더 많은 양으로 반격할 것이다. 이때 운동의 포지션으로 옮겨가면 승리한다.

 

상대가 더 센 운동으로 나오면 힘으로, 상대가 더 센 힘으로 나오면 입자로, 상대가 더 센 입자로 나오면 질로 포지션을 옮겨서 제압한다. 처음부터 질로 승부하려 하면 싸움이 촉발되지 않는다.

 

진정한 고수는 낮은 곳에 머무르며 대중과 호흡을 같이 한다. 그러나 거기에 빠져들지는 않는다. 대중의 마음을 읽는 방법을 알았거든 대중을 이끌어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서야 한다.

 

 

구조의 발견

 

짝지어진 것은 모두 구조다. 하늘과 땅, 해와 달, 음과 양, 암컷과 수컷, 선과 악, 참과 거짓, 존재와 무, 플러스와 마이너스. 추상적인 개념이든 자연의 물질이든 둘씩 짝지어져 있으면 구조다.

 

먼저 패턴을 찾아야 한다. 외형이 닮았으면 패턴이다. 대칭성을 포착해야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속성이 닮은 것이 대칭이다. 해와 달은 둥글다. 닮았다. 닮았으므로 그 안에 패턴이 있다.

 

더 진도 나가야 한다. 대칭을 찾아야 한다. 해와 달을 대칭시키려면 축이 필요하다. 축은 지구다. 지구를 중심으로 해와 달이 운행하여 밤과 낮을 교대로 담당한다. 천동설 개념이 만들어진다.

 

축을 찾지 못했다면 대칭이 없는 것이며 외형적 유사성에 불과하다. 그 경우 속성이 다르다. 나비의 날개와 새의 날개는 외형이 닮았지만 본질이 다르다. 매미울음과 황소울음은 소리가 닮았다.

 

외형이 닮았지만 발성기관이 다르다. 매미는 날개로 겨드랑이를 비벼서 소리를 내고 소는 성대를 울려서 소리를 낸다. 오른손과 왼손은 닮았을 뿐 아니라 마주보고 있다. 가운데 몸통이라는 축이 있다.

 

왼발과 오른발도 닮았다. 손발과 마찬가지로 몸통이라는 대칭축을 공유한다. 이때 두 손의 닮음에 대한 이해가 두 발의 닮음에 대한 이해로 확대된다. 손과 발이 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패턴에서 대칭을 찾고, 대칭에서 축을 찾았으면, 다음에는 방향성을 찾아야 한다. 물고기가 꼬리를 어느 쪽으로 흔들어도 배는 앞으로 간다. 범선이 어느 쪽에서 바람을 맞아도 항상 앞으로 간다.

 

처음에는 잘하면 칭찬을 듣고 못하면 꾸지람을 듣지만 자리를 잡으면 잘해도 칭찬을 듣고 못해도 격려를 받는다. 구조가 일정한 수준 이상 고도화 되면 어떤 경우에도 한 방향으로만 진행이 된다.

 

마지막으로 밀도차를 찾아야 한다. 에너지가 들어오는 입구다. 주변과 더 많은 관계를 맺은 쪽이 밀도가 높다. 승객은 좌석과 관계를 맺을 뿐이다. 운전기사는 신호동도 보고 차선도 살펴야 한다.

 

바둑이라면 처음 두는 화점 부근은 주변과 많은 관계를 맺는다. 바둑이 진행되어 반상의 361로가 메꿔질수록 관계는 엷어진다. 수가 진행될수록 관계의 밀도가 낮아지므로 정석이 있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더 많은 외부의 다양한 촉수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곳에서 에너지가 유입된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는 화살과 과녁과 궁수와 활몸과 동시에 관계를 맺고 있다.

 

화살을 쏘고 나면 관계는 사라진다. 궁수는 떠나고 화살도 떠나고 과녁은 알수없고 시위가 풀어져서 활몸도 등을 돌리고 있다. 물이 높은 곳에 있으면 관계의 밀도가 높다. 거기서 낙차가 얻어진다.

 

1) 패턴을 찾는다.. 외형이 닮았는가?

2) 대칭을 찾는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가?

3) 축을 찾는다.. 둘을 통일하는 하나가 있는가?

4) 방향성을 찾는다.. 점점 세력이 커지고 있는가?

5) 밀도차를 찾는다.. 에너지가 들어오는가?

 

각각 량≫운동≫힘≫입자≫질이 된다. 이들 다섯을 각각 나누어보지 않고 하나로 통일시켜 보는 시야가 중요하다. 질이 가장 앞선다. 질 속에 입자, 입자 속에 힘, 힘 속에 운동, 운동 속에 양이다.

 

량이 먼저 눈에 뛰고 질이 가장 나중 발견되지만 에너지는 질에서 촉발되어 양으로 이행한다. 여기에 질서가 있다. 에너지가 가는 길이 있다. 길이 도(道)다. 이들 사이에 숨은 질서가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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