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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821 vote 1 2020.09.30 (14:15:50)

    세상은 구조다


    구조의 '구'는 공간의 얽힘이고 '조'는 시간의 진행이다. 구조의 각별한 점은 시간적인 사정이라는 점이다. 공간의 사정은 낱낱이 분석하면 되지만 시간의 사정은 바둑처럼 복기해봐야 한다. 공간의 분석은 조각조각 떼어보는 것이고 시간의 복기는 합쳐서 덩어리로 보는 것이다.


    구조는 얽힘에 의해 짝지어진 둘이 외부의 대상과 하나의 라인으로 연결된다. 둘이 하나의 라인을 통과하려면 순서를 정해야 한다. 여기서 복잡해진다. 차원의 점프가 일어난다.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바둑의 복기는 순서가 있다. 흑돌과 백돌이 하나의 게임을 연출하고 있다.


    바둑을 두는 시간순서를 따라가야 한다. 귀납이 아닌 연역이다. 귀납은 결과에서 원인을 찾고 연역은 원인에서 결과를 찾는다. 방향이 다르다. 과학의 성과는 재현을 통해 검증된다. 과학의 재현 역시 바둑의 복기와 같은 시간적인 과정이다. 경찰의 수사라도 현장검증이 있다. 


    거기서 탐정의 추리로는 도달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정보가 얻어진다. 그 정보는 힘이 있다. 역시 사건의 재현이다. 사건현장에만 있는 구조의 얽힘을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 연역이냐 귀납이냐다. 귀납은 관측자가 있다. 관측자가 사건의 결과측에서 원인측을 되짚는다.


    귀납은 관측자와 관측대상의 관계에서 정보가 획득된다. 그런데 바둑의 복기는 관측자가 없다. 바둑을 두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정보가 획득된다. 빈집을 수색한다면 사람이 공간의 이곳저곳을 들춰본다. 그러나 TV드라마를 시청한다면 주연과 조연이 서로를 탐색하게 된다.


    주연이 조연을 들쑤시고 조연이 주연을 찔러본다. 둘의 상호작용이다. 건물은 어디를 먼저 보든 상관없지만 영화는 시작부터 봐야 한다. 순서가 틀리면 안 된다. 주연과 조연의 둘이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둘이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는 반드시 순서가 있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접촉하여 대상 내부에 숨어 있는 정보를 표면으로 노출시키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들쑤심 그 자체가 정보라면 어떻게 될까? 추론과정에서 정보가 왜곡되는 것이다. 건물은 들쑤셔도 되지만 라이브 방송을 들쑤시면 안 된다.


    양과 염소를 같이 키우면 양이 염소를 자극하고 염소가 양에 반응한다. 서로를 들쑤시는 상호작용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얻어야 할 정보다. 그런데 목동이 개입하면? 염소를 따르던 양들이 태세전환하여 목동을 따른다. 내부사정이 왜곡되는 것이다. 염소는 길을 잘 찾는다.


    시력이 나쁜 양은 길잡이 염소에 의지한다. 염소와 양을 같이 키우는 이유다. 양치기 개가 끼어들면? ‘염소가 없어도 양들이 길을 잘 찾는군.’ 틀렸다. 사실은 자신이 양들에게 길을 알려준 것이다. 돼지셈과 같다. 자기를 빼고 다른 돼지만 세는 오류다. 관측자의 개입 문제다.


    사물이냐 사건이냐다. 정지해 있는 사물은 관측자가 개입해도 상관이 없지만 움직이는 사건에 관측자가 개입하면 왜곡된다. 말에 올라타고 달리는 말의 속도를 재면 돼지셈을 하게 된다. 자동차에 타고 자동차의 위치와 속도를 알 수 없다. 내려야 한다. 내리면 차는 떠난다.


    정적세계와 동적세계라는 두 세계가 존재한다. 세상을 구조로 본다는 것은 사물이 아닌 사건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은 관측자가 빠지고 관측대상 내부에서 작동하는 자체질서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 여기에 대전제가 있다. 존재는 공간의 사물이 아니라 시공간의 사건이다. 


    우리는 존재를 공간의 사물로 안다. 틀렸다. 존재는 사건이다. 사물은 정지해 있다. 사건은 살아서 움직인다. 세상을 사건의 관점으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자동차를 탄 채로는 자동차의 속도를 잴 수 없다. 자동차 안에서는 자동차가 정지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동차에서 내리면 자동차는 떠난다. 자동차를 세우면 속도를 알 수 없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 자동차의 속도를 알려면 피스톤이 한 번 움직일 때 바퀴가 몇 차례 회전하는지 둘의 관계를 봐야 한다. 완전히 다른 방법의 접근이 요구되는 것이다. 관측자는 빠진다.


    관찰하면 안 된다. 자체의 질서를 따라가기다. 엔진과 바퀴가 서로를 관찰하게 하자. 우리는 여전히 세상을 정지한 공간의 사물로 보는 잘못된 관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사물은 공간의 사정이고 사건은 시공간의 사정이다. 바둑은 정적인 사물이 아니라 동적인 사건이다. 


    사건은 의사결정의 연결이다. 우리는 물질의 고유한 성질을 규명하여 답을 얻으려 하지만 실패한다. 물질의 고유한 성질은 없다. 의사결정이 있을 뿐이다. 의사결정은 어떤 둘의 모순을 해소하는 수학적 절차다. 하나의 모순을 해결하면 그 결과가 또 다른 모순을 촉발시킨다.


    사건은 연쇄적으로 파급되며 요동친다. 사건을 해결하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움직이는 도미노의 머리를 쳐야 한다. 제 1 원인을 해결하기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바둑이라면 초반의 포석을 잘 두어야 한다. 시간의 순서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연역을 해야 한다. 


    연역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귀납은 부분에서 전체로 간다. 연역은 원인에서 결과로 가고 귀납은 결과에서 원인으로 간다. 연역은 얽힘이 해소되는 마이너스고 귀납은 얽힘이 생겨나는 플러스다. 왜 연역이어야 하는가? 사건 전체에는 부분에 없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둘이 공유하는 토대가 있고 구조의 얽힘에 따른 모순이 있고 대칭의 축이 있고 둘을 동시에 움직이는 상호작용이 있고 사건의 방향성이 있다. 의사결정구조가 있는 것이다. 부분에는 그것이 없다. 모순이 없고 에너지가 없고 얽힘이 없고 토대의 공유가 없고 대칭의 축이 없다. 


    상호작용이 없다. 방향성이 없다. 의사결정구조가 없다. 사실은 많은 것이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있는 것이다. 핵심이 빠져나갔는데 거기서 무엇을 알아내겠는가? 문제는 관측자의 입장이다. 공간의 사물은 항상 관측자가 있다. 전후좌우에 동서남북은 관측자가 기준이 된다. 


    우주공간에는 동서남북이 없고 전후좌우가 없다. 우리는 관측자가 개입하여 왜곡된 상태로 파악하는데 익숙하다. 언제나 틀린 정보를 얻고 거기에 패치를 남발하여 보완하니 일이 거추장스럽게 된다. 안다는게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안다는 것은 관측자와 대칭시키는 거다.


    눈과 귀와 코와 혀와 피부와 대칭시켜 칼라와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을 얻는다. 관측자가 누구냐에 따라 얻어지는 정보가 다르다. 색맹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는다. 곤란하다. 특히 관측대상이 움직이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축이 없어서 대칭을 장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본인은 어떻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인들에 대해서만 어떠하다. 우리는 미국인은 어떻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인들에 대해서만 그러하다. 관측자인 당신에 대해서만 그러하다. 나를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사건으로 보고 의사결정으로 보는 눈이다.


    그것은 관측대상의 내부의 자체질서로 보는 것이다. 바라보고, 먹어보고, 들어보고, 맡아보고, 만져보고 아는 것은 인간의 개입에 의해 왜곡된 정보다. 북을 쳐보고 소리를 들어서 안다. 그런데 누가 그 북을 쳤지? 북잡이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 바이얼린과 피아노의 합주라면?


    앙상블을 알고 화음을 아는 것은 수준이 다른 것이다. 바이얼린과 첼로와 비올라가 서로 침범하고 서로 끌어당기며 얻어내는 정보는 레벨이 다르다. 재즈라면 트럼펫과 색소폰이 때로 경쟁하고 때로 도우며 완전히 새로운 경지로 간다. 클래식의 악보놀음과는 차원이 다르다. 


    죽은 것과 산 것의 차이다. 정적 세계와 동적 세계의 차이다. 미술이라도 마찬가지다. 자체적으로 돌아가는 그 바닥의 내부질서가 있다. 원근이 있고 명암이 있고 배색이 있고 구도가 있고 대비가 있다. 이는 관측자와 상관없는 그림 자체의 내재한 질서다. 그냥 봐서는 모른다. 


    안료를 칠해봐야 안다. 대수와 기하의 차이다. 대수는 관측자가 있다. 셈하는 사람이 대상을 보고 손가락을 꼽아가며 셈한다. 기하는 선과 면의 관계를 추적한다. 그것은 자체의 질서다. 삼각형과 원이 만난다면? 둘 사이의 관계다. 거기에 관측자가 없다. 사람이라도 그렇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궁합이라면? 겪어봐야 아는 것이다. 커플이면 몇 개월은 동거를 해봐야 알게 된다. 점쟁이가 궁합을 맞춘다지만 거짓말이다. 팀 케미스트리는 차원이 다르다. 좋은 선수만 골라 모은다? 그러다 망한게 다저스다. 


    젊은 선수와 베테랑의 균형은 차원이 다른 세계다. 베테랑만 모아놓으면 큰 경기에서 필패다. 젊은 선수의 기세와 베테랑의 관록이 조화되어야 한다. 큰 경기는 세밀하게 분석하므로 베테랑은 털린다. 가을야구에 흥분한 젊은 선수의 기세는 분석되지 않는다. 호르몬의 힘이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수학이든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같다. 인간이 개입한 관측질서에서 대상 내부의 자체질서로 넘어가면서 거대한 차원도약이 일어난다. 개인의 기량을 겨루는 육상과 팀을 이루는 구기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육상경기 한 종목 우승보다 월드컵 우승이 낫다. 


    재미도 낫고 수준도 높고 훨씬 복잡하다. 정적 세계에서 동적 세계로의 도약이다. 갑자기 난이도가 급상승한다. 우리는 빨강과 파랑을 안다. 크레용 색깔을 안다. 중학생이 되면 갑자기 어려워진다. 빨강과 파랑이 만나서 얻어지는 2차 효과는? 화음과 화음이 만나는 효과는? 


    사각형에 내접하는 원을 제거하고 남은 면적은? 우리는 자동차와 배와 마차와 비행기를 구분할 줄 안다. 고작 그 정도 지식으로 안다고 믿는다. '나는 차를 알아.' 꼬맹이 생각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브레이크와 기어가 만나면? 차원의 도약이 일어나며 현기증을 느낀다.


    정보의 절대량이 급증한다. 어느 분야든 깊이 들어가면 차원의 도약이 있다. 그러나 인류의 문명은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우주는 동적차원인데 문명은 정적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 바닥에서 작동하는 자체의 질서는 소수의 해당 분야 전문가만 알아도 되는 걸로 친다.


    그러다가 학문 간의 장벽이 공고해졌다. 도처에서 막혀 버렸다. 서로 통하지 않는다. 인간은 곳곳에서 고립되었다. 지적인 차원도약을 일으켜야 한다. 자체 질서를 알아야 한다. 바닥의 생리를 알고 내막을 알아야 한다. 동적차원을 알아야 한다. 의사결정구조를 알아야 한다.


    색깔을 구분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색깔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어울리는 색깔 찾기다. 어울리는 음색, 어울리는 메뉴, 어울리는 복장, 어울리는 조합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그 시대의 트렌드를 알아야 한다. 비싼 선수만 모아 벤치에 앉혀 놓는 뉴욕 양키즈 방식으로 안 된다. 


    서로를 밀어내려는 반발력 때문이다. 포지션이 겹치면 밀어낸다. 인력과 척력을 정밀하게 디자인해서 최적의 조합을 찾아야 한다. 스마트 시대다. 문명은 완전히 다른 세계로 와버렸다. 여전히 인류는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정적차원에 갇혀 있다. 쓰는 언어부터 다르다. 


    '나는 이것이 좋다.' 하는 식으로 말하면 곤란하다. 수준을 들키잖아. ‘이것에는 저것이 매치가 된다.’는 식으로 말해야 한다. 전문가 냄새 나주잖아.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마찬가지다. 수준을 높이자. 관측자가 개입하면 자기소개가 된다. ‘나는 빨강이 좋아.’ ‘나는 좌빨이 싫어.’ 


    언제까지 이 수준에서 놀 텐가? 유아어 쓰는 초딩의 유치함 졸업하자. 무엇을 말하든 그러하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패션이든 음식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반드시 그 바닥에서만 통하는 자체질서가 있다. 논리를 넘는 생리가 있다. 내부에서 작동하는 에너지의 결이 있다. 


    서로 간에 연결되는 궁합이 있다. 관측자를 배제해야 그것이 보인다. 선악의 논리, 정의의 판단, 도덕의 논리, 옳고 그름의 논리는 사실이지 유치한 것이다. 어린이에게 크레용 색깔을 알려주는 수준이다. 통제가능성을 논해야 어른이다. 옳고 그름의 판단에는 판단기준이 있다. 


    그 기준선을 변화시키는게 통제가능성의 세계다. 철이 들어야 한다. 코로나19가 만연한데 드라이브스루 집회라면 괜찮다는 식은 유치하다. 그들은 어린이다운 평면적 사고에 머물러 있다. 인간이 원칙밖에 모르는 것은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원칙 이상의 것을 알아야 한다.


    사건의 연결로 보고 자체질서로 보고 통제가능성으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세상은 구조다. 구조는 만남이다. 어떤 식으로 만나는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우리는 그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실은 만나는 순간에 결정된다. 대응하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 


    사물로 볼 때는 미리 선택을 잘해야만 한다. 친구를 사귈 때, 진로를 정할 때, 결혼을 할 때, 직장을 잡을 때의 선택이 인생을 결정한다. 태어날 때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금수저와 흙수저가 가려지는 것이다. 선택 기회는 몇 차례만 주어진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죽는다. 


    사건으로 보면 진행과정이 중요하다. 어떤 경우에도 상황에 맞는 조합과 구성이 있다. 어느 코스로 가든 최적의 진행이 있다. 방향을 바꾸고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그래서 희망이 있다. 지면 지는 대로 힘을 비축해 재도전하고 이기면 이기는 대로 여세를 몰아 전진할 수 있다. 


    세상을 구조로 보는 눈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묻노니 당신은 이미 눈을 떴는가? 아니면 아직 눈을 뜨지 못했는가?


[레벨:4]고향은

2020.10.01 (13:22:26)

관측 대상에 빙의?[憑依]하여 동일시하고,
그 대상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의사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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