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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306 vote 1 2019.09.03 (11:51:19)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용팔이들이 하는 말이 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물건에 가격표를 붙이는게 아니라 거꾸로 고객에 가격표를 붙인다. 살지 안 살지를 고객이 정하는게 정상인데 팔지 안 팔지를 상인이 정한다. 상대방 카드를 보고 치려는 불공정거래의 시도다. 용산상가를 찾는 중딩이나 고딩들을 만만하게 보고 이런 짓을 하는 것이다. 


    용팔이에게 당하지 않는 방법은 가격정보를 확실히 알아보고 가는 방법뿐이다. 이 세상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는가? 고대 인도인은 순진한 데가 있었다. 지구 위에는 천계가 있는데 수미산이 천상세계를 떠받치고 있다. 지구 밑바닥은 세 마리의 거대 코끼리가 받치고 있고 코끼리 발밑은 한 마리의 거대 거북이 받치고 있다.


    거북이 발밑은 거대 코브라가 받치고 있는데 코브라의 머리와 꼬리는 천계와 연결되어 커다란 동그라미를 이루고 있다. 동그라미 형태가 깔끔하게 떨어지는 완전성의 느낌을 준다. 코브라 발밑은? 코브라는 일단 발이 없다. 코브라의 머리가 꼬리를 물고 천계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아래로 떨어질 걱정은 없다. 나름 아이디어 된다.


    문자가 보급되지 않아 암송으로 결판내는 판에 천계와 지구와 코끼리와 거북이와 코브라까지 가주면 의심이 많은 제자라도 대략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이다. 하늘의 여신 누트라와 대지의 신 게브라의 대칭구조로 설명하는 이집트 신화보다는 내용이 알차다. 이집트 신화의 대칭구조든 인도신화의 원형구조든 소박한 완전성이 있다.


    코브라 발밑은 없고 코브라는 천계에 매달려 있는데 그 천계는 수미산 위에 올려져 있다. 대지의 신 게브라는 누트라에 매달려 있고 천상의 신 누트라는 게브라 위에 올라타고 있다. 순환의 오류에 속은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이 정도 성의만 보여도 감복하는 시대다. 뭔가 아귀가 맞는 것 같다. 어쨌든 공간의 구조로 설명한다.


    기독교의 창세기도 나름 당시의 지리학적 지식과 생물학적 지식이 총동원되어 있다. 세상은 여러 날을 공사하여 만들어졌다고. 그 세상을 만든 놈은 누가 만들었지? 거기까지 물어보는 사람은 없다. 첫째날에 뭐를 짓고 둘째날에 뭐를 짓고 하며 일곱째 날까지 가주다 보면 이미 첫째날 둘째날 공사내용을 까먹고 있기 마련이다.


    까먹지 않으려고 집중하다 보면 감히 질문할 생각 따위는 못하는 거다. 어쨌든 창세기는 시간의 연결을 제출한다는 점에서 아이디어가 참신하다. 유물론자는 간단한 방법을 쓴다. 모르는 물질 속으로 도망가 버리는 것이다. 곧 생텍쥐뻬리의 기술이다.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하면 어린왕자는 말없이 상자 하나를 내민다.


    '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용팔이가 기함을 하고 도망간다. 모자 속에는 코끼리가 들어 있다. '그게 사실은 모자가 아니고 보아뱀이걸랑요.' 어린왕자가 그려주기 원하는 양은 상자 속에 있다. 상자의 이름은 유물론이다. 저급한 회피기동이다. '여러분이 궁금해하는 모든 것은 물질 속에 들어 있는데 물질의 정체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모른다는 말이잖아. 모르니까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도 하나의 대응이 되지만 물질은 공간의 존재고 창세기는 시간의 진행이다. 여기서 틀어진다. 시간을 물었는데 공간으로 도망가다니 얍삽하다. 마음속에 불만이 또아리를 튼다. 시간이 공간보다 윗길이다. 이미 좋은 것을 봐서 눈을 버렸는데 하찮은 것이 눈에 들어오랴?


    유물론에 대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낡은 종교가 여전히 버티는 이유다. 세상에 나서 진리를 추구하려는 마음을 가졌다면 진지해야 한다. 게다가 지금은 양자역학 시대이다. 양자역학은 점차 존재의 근원이 공간의 물질이 아닌 시공간적 사건이라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많은 힌트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빅뱅이론이 그렇다.


    빅뱅은 시공간의 어느 점을 찍는다. 출발점을 찍어버린다. 공간의 최소크기가 있고 시간의 최소길이가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믿도 끝도 없는 물질 속으로 도망간다면 답답하다. 양자역학은 불연속의 세계다. 불연속은 끊어진다. 우주 이전에 다른 우주가 있었고 그 이전에 또 다른 우주가 있었다는 식의 무한대를 쓰면 비겁하다.


    딱 떨어져야 한다. 연속은 도망가기 좋은 동굴이다. 우주에 연속은 없다. 모든 존재는 관측자를 필요로 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존재는 없는 존재다. 상호작용이 출발점이다. 둘이 만나는 일치점이 있다. 특이점이 있다. 거기서부터 사건은 시작되는 것이다. 삼국지라면 도원결의로부터 시작된다. 세 사람이 한 장소에 모여 만난다.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는가? 세상은 사건이다. 사건은 시작과 끝이 있다. 사물은 우연으로 도피하고 무한으로 도피하면 된다. 강가에 조약돌이 수억 있으니 그중에 하나 아귀가 맞는 게 있지 않을까? 없다. 몽돌 해변에는 좋은 수석이 없다. 탐석가는 남한강 상류지역을 선호한다. 그곳은 특별히 지질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석탄이 굳어 검은 돌이 되며 형태를 만든다. 환경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환경은 외부에 있다. 그리고 쳐들어와서 관계를 맺는다. 마침내 사건은 일어난다. 우주는 일어난다. 사건은 반드시 머리와 꼬리가 있다. 반복되는 패턴이다. 인도인은 공간의 구조를 해부하고 창세기는 시간의 구조에 편승한다. 거기서 완전성을 찾으려 한다.


    답은 공간에도 없고 시간에도 없고 시공간을 합친 사건 속에 있다. 우리가 찾는 완전성은 그곳에 있다. 만유의 자궁이 된다. 유물론이 섬기는 물질은 공간의 성질이다. 세상의 작은 일부만을 보고 아는 척한다면 성의가 없는 것이며 이는 건방진 태도다. 물질은 전혀 세상의 큰 부분이 아니다. 우리는 막연히 다양성을 좋아한다. 


    확률은 물질의 다양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틀렸다. 확률은 사건 속에 있고 사건은 획일적이다. 단, 사건은 상호작용하며 환경의 다양성을 품는다. 결정적으로 물질은 다양성이 없다. 모든 물질은 양성자와 전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졌다. 자연계의 힘은 넷뿐이고 그 넷은 다시 하나로 통합되고 있다. 우주는 뭔가 단순하고 담백하다.


    유물론자는 막연히 물질이 허벌나게 많으므로 그 안에서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하고 미루지만 양자역학은 물질의 단순성을 증명하고 있다. 우주가 커도 단순한 것의 반복일 뿐 특이구조는 없다. 망원경으로 잘 찾아봤는데도 우주 어느 구석에 천국이 없고 지옥이 없더라. 격실로 이루어진 신들의 사랑방이 되는 특이구조는 없더라. 


    왜 몽돌해변에 돌이 없을까? 원래 돌밭에는 돌이 없다. 돌이 거기까지 굴러갔다면 그 과정에 획일화된다. 원심분리기를 거쳤다. 원심분리기를 거치지 않은 순수한 장소는 한강 상류다. 소백산맥은 지질구조가 복잡하므로 돌이 좋다. 태백산 돌이 굴러온 영월 동강도 나쁘지 않다. 사건은 마이너스로 가므로 점차 획일화가 된다.


    사건은 대신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다양성을 담보한다. 세상이 있는 것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환경의 다양성과 사건의 획일성을 동시에 담보할 수 있는 우주의 얼개는? 우주는 크고 넓지만 동시에 매우 단조롭다. 십의 백칠십승으로 가면 우주에서 가장 작은 것에서 우주에서 가장 큰 것까지 모두 담아낼 수 있다.


     숫자 안에 다 들어간다. 간단하잖아. 우주를 자루에 담아서 짊어지고 갈 수도 있다. 거대한 게임 프로그램을 작은 USB에 담아가듯이. 우주에는 단 하나의 사건이 있을 뿐이다. 다중우주는 없다. 우리우주 바깥에 어떤 것이 있지만 그게 다른 우주인지는 분류기준을 정하기 나름이다. 우리 우주 안의 다른 구역일 수 있다는 말이다.


    양성자와 중성자와 음전자로 이루어진 우주가 아닌 다른 우주는 없다. 있어도 연결되지 않는다. 연결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우리은하만 우주로 알고 있다가 안드로메다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다른 우주로 봐야할지 그냥 우리우주가 생각보다 큰 것인지는 과학자가 기준을 정하기 나름이다. 그냥 우주가 큰 거였다.


    우리우주 바깥에 우주가 있다 해도 차원이 같으면 우리우주다. 호주를 대륙으로 볼 것인가 섬으로 볼 것인가와 같다. 그린란드는 왜 섬이냐고? 덴마크가 영국보다 국력이 약해서다. 대영제국이 아니라 대덴마크제국이라면 아마 그린란드대륙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의미없는 것은 없다. 사건으로 보면 전부 연결되어 하나를 이룬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완전성이다. 유물론이 섬기는 물질은 공간의 장소에 해당하므로 개념이 좁다. 사건은 공간을 아우르고 시간을 타고 가므로 개념이 크다. 사건의 완전성을 이해했을 때 좀 알아보고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우주 바깥에 다른 차원의 무엇이 우리우주의 환경을 이루고 상호작용하며 우리우주를 디자인한다.


    다른 차원의 무엇은 다른 우주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근원우주다. 우주의 자궁쯤 된다. 자궁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며 그 자궁은 사건의 자궁이다. 사건은 복제되므로 우리우주의 모습과 어느 면에서 비슷하다. 우주를 떠받치는 거대 코브라는 천계에 매달려 있다. 우리우주는 근원우주에 매달려 있다. 그 가운데 완전성이 있다.


    세상은 사건의 연결이고 사건은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원인에는 결과가 없고 결과에는 원인이 없다. 즉 전지전능한 신은 없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근원의 완전성이다. 복제된 사건이 원본과 연결되어 있는지다. 수염난 할배가 신이라면 없는 것과 같다. 의미가 없으므로 없다. 그것은 죽음의 두려움을 표현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아는 것이 의미다. 사건의 완전성이 있고 연결되어 있으므로 내가 해야할 일을 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것은 똥개가 똥을 먹고싶다는 것과 같아서 본능의 표출일 뿐 의미가 없다. 천국이 좋다는 생각은 그냥 느낌이다.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다. 내 할 바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수평으로 더 넓은 공간에 우리가 모르는 것이 더 있다는 것은 의미없다. 숫자에 동그라미를 하나 더할 뿐이다. 수직으로 우리가 모르는 차원에 하나가 더 있고 그것은 우리가 아는 우주와 관계를 맺고 있다. 광원과 빛 입자와 피사체와 스크린과 그림자의 관계다. 그사이에 우리가 신으로 여기는 완전성이 있고 역할분담이 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19.09.04 (09:25:41)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아는 것이 의미다. 사건의 완전성이 있고 연결되어 있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안다."

http://gujoron.com/xe/112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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