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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아란도
read 4435 vote 0 2013.06.30 (13:12:48)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

 

<일체 유심조의 현재  까지의 불교적 해설>

一 : 한 일

切 : 모두 체

唯 : 오직 유

心 : 마음 심

造 : 지을 조

 

 

<내 생각>

일체.... 부처는 일체는 12처(색수상행식- 안이비설신의)라 했다. 즉 일체는 존재를 의미한다.

유...     오직 , 접속어...~뿐, ~ 일지라도 , 대답하다 , 누구<사전적 의미>

심...     마음-----

조...     짓다. 만들다. 만나다.이르다. <사전적 의미>

 

 

일체유심조로 조합 가능한 말을 만들어 보자면....?

 

1)존재는 마음만을 만든다.

  존재는 마음만을 지어낸다.

 

2)존재는 색을 만든다.(지어낸다. 만난다.)

 

3)존재는 마음으로만이 만날수 있다.

 

4)존재는 오직 마음에 이른다.

   존재는 정신으로만 만난다.

   존재는 정신으로 만나고 대답한다.

   존재는 정신으로 상대를 만난다.

   존재는 정신으로 상대에 이른다..... 소통?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 그래서, 마음이 만들어 내므로 마음을 조정하면 된다는 의미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 한것인듯. 그러나 마음먹기에 달리려면, 어느쪽을 보는가? 인데, 이 어느쪽에 대한 해석을, 긍정과 부정이 아닌, 원인이면  결과이다.에 대입하여 본다면, '원인측을 보는 힘' 이라는 가설도 세울 수 있다. 마음을 먹는 것도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바꾸는 이유는?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변하지 않으면 마음을 바꿀 이유가 없다. 자꾸 상황이나 세상이 변화하기 때문에 마음이 바뀌는 것이다. 환경적응이나 대처에 따른 것.

그런데 원인과 결과측에서, 결과측만을 보고 마음을 바꾸면 늘 낭패다. 원인측으로 올라서야 한다. 그럴때 원인과 결과가 따로 노는 이분법이 아닌 일원론의 동시성을 획득해 원인과 결과를 두 개로 분리된 사물이 아닌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리 따져보면, 위에 써놓은 일체를 존재로 바꿔 다시 풀어보자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존재는 정신으로만이 일어선다.->존재는 정신을 일으킨다.(세운다.)

 

존재는 마음이 만들어 낸다....존재로 보자면, 관측자 기준이 자신이 된다.

존재를 마음이 만들어 내면? 마음은 무엇이 만들었을까? 마음은 세상이 만들었다. 마음은 존재가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면 다시, 마음이 존재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마음은 존재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라는 순환적 결론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마음은 존재보다 먼저도 아니고 나중도 아닌 존재안에 이미 포섭되어 있는 형태라서, 존재가 주체로서 서 있어야 얘기가 성립된다. 하여, 여기서 마음은 정신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어진다.

 

심(心)을 그냥 통털어 마음이라고 사용하는데, 마음은 불교적으로 보자면 정확히는 심-의-식 이다. 심(마음부수)-의(의처=마노) - 식(6식)...이는 뇌의 활동 영역이다. 이 심의식은 다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심은 무의식적인 영역이라고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존재는 이미 색수상행식(오온)- 안이비설신의(6처- 감각기관) = 일체로서, 6식을 모두 포함하여 18계이다. 18계가 마음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여기서 6식은 이미 대상(법)을 인지하고 일어나는 의식이다. 하여 존재라는 의미에는 이미 몸과 정신 그리고 그 바깥의 대상 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환경과 상황을 포함하여 존재라고 한다는 의미이다.

 

하여, 일체유심조를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 모든 것이라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바깥을 포함하는 의미이므로, 여기서 관측자는 자신이므로, '모든 것을'  '존재' 로 바꾸고, '마음(心)'은 '정신'으로 바꾸어서, 문장을 다시 만들어 보면,

' 존재는 정신으로 소통한다' 라는 말을 끌어 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존재에는 이미 12처와 대상을 보고 일으키는 6식이 포함되어 있고, 심은 심의식을 모두 포함한다고 여겨지며(의처인 뇌와 뇌의 정신활동 부산물 모두), 조(造)는 짓고, 이루고, 만나고,만들고, 세우고..등등의 여러 의미가 있지만, 이러한 것은 모두 행위적 산물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이므로 '소통적 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체유심조를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라고만 해석한다면, 순환적 오류에 빠질 확률이 있다. 불교는 변하는 것은 무상하다고 하였기에 고라고 한 것이고, 그래서 무아를 강조 한 것이므로, 불교는 변하지 않는 것에 관심을 둔 것이라고 여겨진다. 참나 혹은 진아라는 말이 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물적 늬앙스을 풍기고 있다.

 

마음은 변한다. 세상도 변한다. 변하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그런데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라고만 해석 한다면, 이는 뭔가 2%가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를 유추해 내어야 한다고 보인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가 정신으로 소통한다는 그 자체' 이다.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은 변화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원리를 보는 것으로 축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절대성이다. 불교가 상대성으로 절대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은 대상에 따라 변한다. 이것은 상대성이다. 절대성은 마음이 대상에 따라 변한다는 것 그 자체이다. 절대성은 상대성을 넘어서야 드러난다. 몸과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상대성, 이분법, 사물적 관점), 대상을 포함한 존재, 즉 하나(절대성, 일원론, 시건적 관점)로 일어서야 몸과 마음의 분리가 아닌, 존재라는 하나의 축이 될 수 있다. 존재의 절대성은 존재가 상호작용을 통하여 뭔가 일을 한다는 것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연기법은 상대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 설명안에서 절대성을 설명하고자 하고 있다. 우리가 연기법을 설명하면 상대성으로 설명하지만, 드러나는 것은 절대성이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그 절대성은 우리 마음안에서 느껴지고 그려진다. 연기법이라는 원리 그 자체가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6.30 (13:13:10)

걍..여기다 새 글로 써 봤어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6.30 (13:30:23)

원래 언어는 동사에서 나와서 명사로 변합니다.

 

바람이

불다>불음>바람

 

입으로 불어서 불을 붙이므로 불이 불입니다.

불다는 동작을 해보면 불불 하는 소리가 납니다.

 

구조론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있고 동사는 운동과 량입니다.

명사로 변하면 입자와 힘으로 상승하는데 질까지는 갈 때도 있고 못갈 때도 있습니다.

 

즉 원래 동사로 출발해서, 량으로 출발해서 운동과 힘을 거쳐

귀납적으로 계단을 밟아올라갑니다.

 

이 과정에서 그 단어가 과연 질까지 왔느냐 하면 안 왔다는 거죠.

근데 사이비들은 편한대로 질까지 간걸로 쳐주자 하는 수법을 씁니다.

 

대부분 인간의 언어는 입자에 멈춰 있습니다.

질까지 도달하면 만유인력이나 자기장이나 통일장이론처럼

 

어떤 시공간의 장을 나타내게 됩니다.

마음은 동사의 의미도 있고 명사의 의미도 있습니다.

 

마음은 운동이거나 양일 수도 있고 질이나 입자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사이비들은 운동의 의미로 써놓고 질의 의미로 썼다고 우깁니다.

 

이건 귀납적 사고인데 근본적으로 귀납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의미로 썼던 간에 무조건 아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질의 의미로 썼다 해도 안쳐준다는 거죠.

연역이 아니고 귀납이기 때문에 안쳐주는 겁니다.

 

연역이면 상부구조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떤 맥락으로 쓰는지는 간파됩니다.

 

일체유심조가 어떤 의미인지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귀납인지 연역인지만 보는 겁니다.

 

일체유심조는 귀납이므로 아웃입니다.

아란도님의 말씀은 전부 귀납입니다.

 

연역하는 사람은 마음을 설명할 때 마음이라는 단어를 안 씁니다.

대신 비유를 들지요.

 

마음으로 마음을 설명하면

3초도 안 듣고 '아 이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구나' 하고 떠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6.30 (13:41:18)

일체유심조를 그동안 그냥 해석되어진데로 계속 써왔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입니다. 크게.

그래서 이러한 것은 그 당시 설명을 하는 이는 그것을 제대로 보고 썼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뭔가 조금은 부족하게, 사물적 관점에서 설명이 계속 고착되어 흘러 왔기 때문에, 지금은 해석의 관점을 달리 해볼 필요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해석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사건적 관점에서 재해석을 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면, 일체유심조는 한문이므로, 한글로 풀어서 써 놓은 글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한글은 조선시대에 발명되었으므로...) 한문으로 남아있는 기록적 관점에서만 접근을 해왔다고 여겨지므로, 재해석의 여지는 남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인 것이겠지요. 하지만, 일체유심조를 맨 처음 쓴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알 수가 없고, 설명을 구조론식으로 해 보자면 그런다는 것이기 때문에, 더 달리 할말은 없네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6.30 (13:48:38)

스승이 질문을 했는데 제자가 어떤 대답을 하든 아웃입니다.

왜냐하면 질문에 대답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답하면 이미 귀납입니다.

아 누가 대답하랬냐고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대답하지 않고 가만 있으면 역시 아웃입니다.

쓸데없이 스승의 시간을 빼앗았으므로.

 

그러므로 질문의 모형을 간파하고

그 모형과 같은 모형의 이야기를 제시해야 정답이며

 

그 정답에는 스승이 사용한 단어가 사용되지 않아야 가치가 있습니다.

그게 연역이라는 거죠.

 

3초만에 연역하여 동일한 모형을 복제하려면

사전에 충분한 이야기들을 자기 안에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통해 깨닫는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마음은 자동차의 운전입니다.

 

이미 자동차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아웃입니다.

이미 남의 자동차에 요금 안 내고 올라탄 거죠.

 

어떤 대답을 하든 대답하면

스승의 자동차에 요금 안 내고 탔으므로 아웃입니다.

 

자기 자동차를 끌고와야 진짜입니다.

질문에 대답하는 즉 대칭행동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6.30 (14:07:20)

마음을 통제하여 뭔가 쥐어 짜는 방식은 좀 아닌거죠.

그동안 그렇게 하여 그렇게 흘러왔다는 것에 너무나 익숙들 하지만, 이제는 그 방법이 별로 먹히지 않는 다는 것을 인정할 때도 되었죠.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6.30 (14:15:36)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관점에서 보면 이미 실패입니다.

문제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이냐 하는 관점에서 봐야 연역입니다.

일체유심조는 이미 문제를 해결할 의도가 있으므로 실패입니다.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 이미 남의 버스에 탑승한 거죠.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6.30 (14:24:02)

 

일체유심조의 기존 해석은, 자신이 혼자서 어떻게 해 보겠다는 것이어서, 상대가 혹은 세상이 노! 하면 좌절인 거지요.

혼자서 백날 마음을 고쳐 먹는다 하여 뭔가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서로가 대화가 될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만남이 이루어질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 거지요.

혼자서 되는 것이 아니라 2인 이상 팀을 이루어야 가능해지는 지점이 있는데, 대체로 혼자서 마음을 먹으면 다 잘 될거라 여깁니다. 너만 마음을 바꾸면 돼, 나만 마음을 바꾸면 돼....되기는 뭐가 돼. 바뀐애밖에 더 되나.....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6.30 (14:28:09)

현대사회는 문제를 만드는 사람

어샌지나 스노든 같은 사람이 인정을 받습니다.

문제적 인간이라고들 하지요.

 

기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의 문제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6.30 (14:31:32)

어쨌든, 하나의 새로운 문제가 만들어 짐.

일체유심조의 관점은 틀렸다.

그렇다면 새로운 관점의 대두.... 방향성이 생겨남.

사람이 기존의 관점이 잘못되어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갈 방향이 막연하기 때문에 거기에 계속 머무는 것이고 보면,

새로운 방향성 제시가 뜨면, 얘기는 달라지게 됨.

프로필 이미지 [레벨:20]냥모

2013.07.01 (18:17:04)

일체유심조는 축구로 치자면 정신력을 강조하는 것과 같소. 히딩크 이전까지 한국축구는 유독 정신력 강조하면서 선배가 후배 못살게구는 것, 방향도 없이 엄청나게 뛰어다니는 것이었음. 어렵게 한 골을 넣고, 쉽게 한 골 내주고, 어쩌다 겨우겨우 이기면 정신력 타령하는 것이오. 


군대에서 군기를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 선임이 건수 잡아서 후임 괴롭히는것이 군기라오. 그런데 미국이 세계최강인 이유는 군기 때문이 아니라, 최고의 무기를 가졌기 때문.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시스템, 포메이션을 구축했기 때문. 


심조를 강조하는 것은 안되는 일을 어거지로 되게 만드는 것이고, 구조를 강조하는 것은 되는 일의 범위를 더 넓혀가는 것이오. 안되는 일을 정신력으로 극복해 최고가 되는 것은 영화에서는 그럴듯한 소재이겠지만, 현실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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