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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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7737 vote 0 2009.04.02 (21:07:58)

왜 현대성인가?

철학은 여러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실존주의가 우뚝하게 있을 뿐이다. 그 외에는 제대로 된 철학이 아니다. 물론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연금술에도 일부 과학의 요소가 있고 민간비방에도 의학의 속성은 있다.

그러나 따질건 따져야 한다. 민간비방은 다만 의학에 준할 뿐 제대로 된 의학이 아니며, 샤먼의 주술이나 고대의 연금술에 일부 과학의 요소가 있더라도 과학에 준할 뿐 제대로 된 과학은 아니다. 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철학이 뭐냐?’고 질문하면 ‘철학이 뭐냐고 질문하는 그것이 바로 철학이야.’ 하고 응수하거나 ‘왜 사느냐?’고 물으면 ‘왜사냐건 웃지요.’ 하고 대답하는 따위의 떠도는 말들은 그냥 우스개일 뿐 철학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체계를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도량형(度量衡)이라는 말을 우리가 흔히 쓰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자(度)와 됫박(量)과 저울(衡)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냥 도량형은 도량형이라고 알고 있다. 진시황이 도량형을 통일했다고도 안다. 요런건 시험문제에 나오니까. 하기사 뭐 대략 통일했겠지 임금이 그딴거나 하지 다른 할일이 있겠나 하는 정도로 수박 겉핥고 있다.

구조적으로 안다는 것은 도와 량과 형의 관계를 아는 것이다. 그것이 체계다. 체(體)는 사람으로 치면 몸통이다. 계(系)는 팔과 다리와 목이 갈라지고 이어지는 부분이다. 겨드랑이와 목과 사타구니가 계다.

연결부위가 계다. 합치는 체와 갈리는 계를 더하여 체계를 성립시켜야 비로소 학문이 된다. 낱개가 둘 모여 도(度)를 이루고, 도가 둘 모여 규(規)를 이루고, 규가 둘 량(量)을 이루고, 량이 둘이 모여 형(衡)을 이룬다.

● 낱개≫도≫규≫량≫형

● 점≫선≫각≫입체≫질량

여기서 도는 낱개의 체가 되고, 규는 도의 체가 되고, 량은 규의 체가 되고 형은 량의 체가 된다. 반대로 량은 형의 계, 규는 량의 계, 도는 규의 계, 낱개는 도의 계가 된다. 이들은 서로 체와 계의 관계를 맺는다.

서로의 몸통이 되고 팔다리가 되는 것이다. 량은 형에서 나왔고, 규는 량에서, 도는 규에서, 낱개는 도에서 유도되어 나온 것이다. 출처가 있고 주소지가 있다. 반드시 모태가 있고 자궁이 있어야 한다.

학문이 체계를 갖춘다함은 학문을 구성하는 개별 정보들이 서로간에 이런 식의 긴밀한 상호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냥 무질서하게 줏어섬기는 경험방이나 민간비방 따위는 아직 학문이 아니다.

철학 역시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학문이 된다. 철학의 머리는 무엇이고, 철학의 가슴은 무엇이고, 철학의 몸통은 무엇이고, 철학의 팔다리는 무엇인지 낱낱이 규명하여 학문의 체계를 세워야 한다.

###

우상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철학은 시작되었다. 우상의 시대는 기본적으로 철학이 필요없다. 노예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주인이 규정하고 군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상관이 결정한다.

자신에게 결정권이 없으므로 철학할 자격이 없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면서부터 비로소 이성의 시대, 철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전은 철학할 필요가 없는 우상의 시대였다.

‘왜 철학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왜 병을 치료해야 하는가?’하는 질문과 같다. 환자가 없다면 의학은 존재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상의 시대에는 신이 인간의 삶을 결정해 버렸으므로 철학의 존재이유가 없다.

‘왜 사는가?’ 하느님이 답을 정해놓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역시 하느님이 답을 정해놓았다. 그러므로 목사님의 말을 실천하면 그뿐 철학은 존재이유가 없는 거다. 외양간의 소가 어떻게 살것인지 고민할 이유가 없듯이.

그러므로 니체에서 실존주의로, 근래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오는 계보를 따라 철학은 학문적인 체와 계를 이루는 것이며 -그것도 여전히 부실한 맹아단계이긴 하지만- 그 외에는 볼것이 없다.

학문이 체계를 가진다는 것은 계속 가지를 쳐나간다는 뜻이다. 체는 몸통이고 계는 갈래다. 큰 나무가 자라듯이 계속 갈래가 뻗어나가야 한다. 수학이나 과학에서 이러한 학문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철학은 어떻게 가지를 쳐나가야 하는가? 여기서 현대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철학이 삶을 규명한다면 그 삶은 21세기의 삶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필연적으로 ‘21세기의 해석’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현대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modern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주물을 뜨는 거푸집(mold)이다. 여기서 mode, model라는 개념이 나왔다. 빵가마에서 빵을 굽더라도 매일 새로 구워낸 빵을 먹어야 한다.

현대(modern)란 아침에 새로 구운 빵과 같이 mold에서 나온 model이 mode가 맞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현대성이란 mode를 일치시킨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은 문명의 진보와 호흡을 일치시켜야 한다.

체계로 보면 자연은 애초 신의 완전성에서 진리가≫진리에서 역사가≫역사에서 진보가≫ 진보에서 문명이 나왔다. 인간은 팀에서 무대가≫무대에서 자격이≫자격에서 포지션이≫포지션에서 임무가 나왔다.   

● 완전성≫진리≫역사≫진보≫문명

● 팀≫무대≫선수≫포지션≫임무

이전 글에서 언급했지만 팀이나 무대, 선수라는 표현은 스포츠나 연극에 비유한 것이다. 팀이 공동체 혹은 가족, 동아리, 사회라면 무대는 그라운드, 근거지, 고유한 영역, 집이 되겠고 선수는 자격이다.

노예들은 자격이 없다. 가축들도 자격이 없다. 그들은 결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자격은 어떤 파트너, 어떤 짝을 가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포지션은 파트너와의 상대적인 관계다. 임무는 mode의 일치다.

역사가 전개함에 따라 문명이 진보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 역시 그 문명의 진보와 mode를 일치시켜야 하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고 이에 노예들에게 없고 가축들에게 없는 철학이 시민에게 특별히 요청된 것이다.

남이 세워놓은 줄 뒤에 가서 서는 자들은 시민이 아니므로 논외다. 철학은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의사가 있는 역사의 리더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딴거지나 수구떼나 강아지나 지렁이에게는 철학이 없어도 된다.

문제는 modern이라는 말에 다른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modern을 포드아저씨가 컨베이어벨트를 고안한 덕택에 만들어낸 것으로 착각한다. 왜냐하면 modern의 어원인 mold가 대량생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한다. 현대는 천년 전에도 있었고 천년 후에 있다. 언제나 오늘이 현대이다. 오늘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바로 현대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갓구운 신선한 빵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니체의 인간선언에서 촉발되어 실존주의로 발달해 왔다. 실존주의란 곧 우리가 찾아야 할 mode의 근거인 체와 계를 찾는 것이다. 곧 인생의 팀≫인생의 무대≫인생의 선수자격≫인생의 포지션≫인생의 임무를 찾는 거다.

왜냐하면 팀≫무대≫선수≫포지션≫임무가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공동체와, 개인의 자유영역과, 인권의 자격과, 사회관계의 포지션과 현대성의 임무가 우리의 실존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질려버렸다. 실존주의 담론은 허무할 뿐 곧 포드아저씨의 막대한 물량공세에 밀려버렸다. 그래서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곧 현대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천만에! 그건 바깥에서 끼어든 돌발영상에 불과하다.

확실히 modern에는 mold의 대량생산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만 일종의 우스개일 뿐 진정한 현대는 mode의 문제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량생산 대량소비에 각을 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즘은 mode를 고민하는 것이지 대량생산-전체주의에 각을 세워 소량다품종으로 전환하고 해체하고 패러디하고 야유하고 풍자하는 것이 아니다. mode가 아니면 철학도 무엇도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탈근대니 하는 담론이 대량생산-집단주의에 대항한다는 발상은 일회성의 해프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는 포드아저씨의 컨베이어벨트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표피적 현상의 피상적 관찰로는 안 된다. 한겹 더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된다. 밑바닥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시대 문명의 본질은 우상이냐 이성이냐의 대립각이지 대량생산-집단주의가 아니다.

물론 대량생산-집단주의가 이 시대의 새로운 우상으로 떠오르고 있고 확실히 그 점에 대응할 필요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곁가지에 불과하다. 문명의 본류가 아니다. 우상인가 이성인가 하는 본질로 승부해야 한다.

초딩 반사놀이다. 저쪽에서 대량생산-집단주의를 외치니 이쪽에선 소량해체-개인주의로 맞서려 한다. 저쪽의 집단주의가 군대를 조직해 공세를 전개하면 이쪽은 개인주의가 유격대를 조직해서 맞서는 식이다.

정신차려야 한다.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라. 현대성은 포드아저씨가 콘베이어 벨트를 조립했기 때문에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세잔이 형태를 그렸을 때 이미 스위치가 켜지고 불이 들어온 것이다.

현대는 세잔이 발명하고 고흐가 선전하고 바우하우스와 앤디워홀이 퍼뜨린 것이다. 백남준이 했고 김기덕이 하는 바로 그것이 현대다. 왜냐하면 현대는 mold가 아니라 mode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입은 옷, 그대가 사는 집, 그대가 쓰는 사무실 집기들을 보라. 그 디자인과 생활양식의 출처는 근본 예술가들이 만든 것이지 앞집 건희아저씨나 뒷집 몽구형이 만든 것이 아니다. 부디 현대를 사유하기 바란다.

저쪽에서 대량생산-집단주의 하면 이쪽에서 소량생산-개인주의로 맞서며 포스트모더니즘 운운한다면 본능수준의 대응이다. 벌레도 그 정도는 한다. 표층의 레이어를 벗기고 이면의 숨겨진 레이어를 발견해야 한다.

‘21세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여기서 모드의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의 임무가 된다. 우리의 팀과, 그라운드와, 선수와, 포지션이 확정되었다면 다음은 임무의 실천이다. 그래서 현대성이다.  

http://gujoron.com


[레벨:1]백당시기

2009.04.10 (11:35:50)

modern 과 post modern을 구분하는게 좋을게요.
짬뽕하지 말고.

modern(근대, 현대), post modern(포스터모던 혹은 근대후기)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09.04.10 (13:07:25)

무슨 말씀인지?
[레벨:1]맑은하늘

2009.04.13 (08:05:00)

저도 대량생산 획일성 등등에 질려서
반동적으로 개인화 개성 이런것들에 몰빵했던 1인 이었던 것 같네요.
한꺼풀 더 벗겨서 본질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 감사합니다.

팀>>선수>>무대>>포지션>>임무 순서를 조금 더 자세해 풀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팀--선수--무대 간의 관계설정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포지션이 정해지면 그에따른 임무는 정해지는 것은 조금 이해가 됩니다만
그 외는 조금 친절하신 설명 부탁드립니다.
(아니면 어떤 글을 읽어야 하는지 -_-;;;)

꾸벅...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09.04.19 (12:13:17)

구조론을 읽으면 만사형통입니다. 좀 어렵다는 소문이 있지만.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09.04.19 (19:52:39)

팀≫무대≫선수≫포지션≫임무 순으로 썼습니다만.

팀이 가족이면
무대는 가정이겠고
선수는 식구들이겠고
포지션은 엄마 아빠 하는 거고
임무는 그 엄마와 아빠의 역할이겠고

가족이 있어야 나의 존재가 탄생했을테니 가족이 먼저고
가족 안에서 엄마와 아빠의 응응응 작업이 있어야 내가 탄생했을테니 가정이 먼저고
(그 응응응 작업은 필연 공간, 무대, 그라운드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 다음에 내가 탄생했고
내가 그 가족 안에서 포지션을 얻고
임무를 수행하는 순서는 그냥 자연의 전개순서일 뿐입니다.

사회인 야구나 조기축구를 하더라도
먼저 팀을 결성하고
다음 시합을 진행할 그라운드를 구하고
다음 누구는 선수, 누구는 후보를 정하고
선수들 간에 포지션을 정하고
그 다음 공을 차는 거지요.

구조론의 질 입자 힘 운동 량에 맞춘 겁니다.

[레벨:1]맑은하늘

2009.04.20 (07:06:33)

감사합니다. 꾸벅...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 같습니다.

항상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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