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칼럼
read 12316 vote 0 2008.04.24 (20:50:23)

“문화로 간다”
‘지성의 시대를 열어가며’

(고이즈미와 명박 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중국인들은 지금 올림픽을 한다고 한껏 고무되어 있겠지만.. 우리가 보기엔 우스울 뿐이다. 돌이켜보면 88년에 일본인들이 한국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중국인들에 대해 가진 생각과.. 그때 그시절 일본인들이 우리에 대해 품은 생각은 같다. 섬찟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예서 주저앉지 말자고. 더 높은 목표를 가지자고. 남들이 하는 것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고작 그 정도로 성에 차겠느냐고.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생존의 닫아걸기 생활의 펼쳐내기

인간은 환경의 억압에 맞서 생존을 추구하지만.. 결국 그 환경에 적응하고서는 생활로 전개시켜 간다. 자기 내부의 갖추인 것을 전부 쏟아낸다. 다 펼쳐보인다. 그게 삶이다. 그것으로 무엇을 남기는가?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무력과 경제력이다. 생활은 문화다. 문화는 양식을 남긴다. 무력은 어떤 정치적 의사결정을 용이하게 하고.. 그 장애물을 제거하며.. 경제력은 일정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돕는다.

무력은 어떤 역사의 격변기에.. 정치적 의사결정의 장애물이 있을 때.. 예컨대 작금의 부시사태를 유발한 유류난과 근래의 식량난 따위.. 1회적으로 유의미할 뿐이며 그것도 국가의 정상이 악수할 때나 의미있는 것이다.

개개인의 일상적 삶과는 상관없다. 반면 경제력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문화는 최종적으로 남긴다. 비유하자면 무력은 입학허가서 획득이며.. 경제력은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이며.. 문화는 최종적으로 졸업장을 받는 것이다.

생존의 대책은 생활의 전개를 위한 디딤돌로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냥 생존은 의미가 없다. 무력과 경제력은 그 생활을 보장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그 생활은 기술적으로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냥 산다는 것은 안 쳐준다.

생활은 삶의 과정에서 완성을 추구함이다. 미학적 양식의 획득에 의해 진정으로 가능하다. 삶의 성공은 잘 살았는가는 혹은 배가 불렀는가로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의 완성 여부로 판명된다.

일관성 없이 요랬다 조랬다 하는 이명박식 요령주의 삶은 안 쳐주는 것이다. 본 받을만한 양식을 완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잘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돈 벌고 출세하면 잘 사는 것인가? 잘 먹고 잘 입으면 잘 사는 것인가? 무공해 식사에 웰빙이면 잘 사는 것인가? 천만에! 양식의 완성에 성공해야 잘 된 삶이다.

미학적 삶이 잘 사는 것이다. 심미안을 얻어야 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보는 눈 말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좋은 친구를 얻는 것이다. 그 친구와 함께하고 기어이 완성하고 최종적으로 낳아내는 것이다.

원시시대 부터 그랬다. 암컷과 수컷은 좋은 짝을 만나 좋은 자식을 남기는 일에 몰두했다. 태초 이래 그 외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은 남기는 거다. 인간은 남기기 위해서 산다. 무엇을 남길까?

문명시대에 이르러 인간은 좋은 친구를 만나 좋은 삶의 양식을 남기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혼자 힘으로 되지 않는다. 힘을 합쳐야 한다. 기록하고 축적해야 한다. 그것이 진보다. 문명이다. 그 외에 없다.

물질을 남긴다고 해봤자 이쪽에 있던 금덩이를 저쪽에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원래 지구에 있던 거다. 땅 속에서 파낸 거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포지션 변경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문명을 남긴다. 문명을 건설해야 남길 수 있다. 그 문명의 하드웨어는 집과 자동차와 도로 따위다. 그 문명의 소프트웨어는 문화다. 하드웨어는 결국 소프트웨어를 구동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가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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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간다. 작금의 한류 따위를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문화의 중핵은 지성이다. 지성이란 무엇인가? 지식인의 냉소주의를 극복하게 하는 힘이다. 왜 지식인은 냉소적인가? 무력하기 때문이다.

왜 지식은 무력한가?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은 당황해 한다. 대중이 지식인들의 잘 만들어진 고급요리를 기피하고 심형래의 너절한 짬뽕 따위를 먹으려 들기 때문이다. “쟤들 왜 저래?”

지식인들은 모른다. 왜 대중이 엘리트를 혐오하는지. 왜 고급요리 놔두고 짬뽕을 찾는지. 소통의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대중이 위의 지식인을 이해하기란 불가능이다. 그러므로 지식인이 대중을 배워야 한다.

대중 속으로 녹아들아가서 대중의 욕망을 이해해야 한다. 대중을 이해하게 될 때 위대한 소통은 이루어진다. 그것은 어떤 일의 전체과정에 참여하고 1 사이클 진행의 전 과정에 대한 경험을 얻는 것이다.

지식인은 자기분야만 알기 때문에 소통의 접점을 모른다. 북은 있는데 북채는 없다. 그 북은 울리지 않는다. 꽃은 피지 않고 향기는 전파되지 않는다. 울림이 없고 떨림이 없다. 공명하지 않는다.

대중은 감동으로, 공감으로, 체험의 공유로 소통한다. 그 소통의 맥을 짚을 수 있어야 한다. 대중과 소통하기는 실로 어렵지 않다. 대중은 언제라도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그 본질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지식인이 냉소적인 이유는 그들이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밑바닥에서 스스로 커 올라가기 위해서는 동료와 힘을 합쳐야 한다. 다 같은 후보들인데 누군가의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밑에서 목마태워주어야 한다.

엘리트들에게는 이런 과정이 없다. 가만 있어도 하늘에서 ‘보이는 손’이 내려와 돋보이는 녀석을 집어간다. 선택되는 것이다. 궁녀가 간택되듯이 간택된다. 동료에 대한 애정이 있을 리 없다. 우정이 없다. 배려가 없다.

그러므로 엘리트들에게 1 사이클을 완성시키려는 욕구가 있을 리 없다. 선택되는 순간 이미 단절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찌질한 동네 소꿉놀이 친구와는 전부 결별이다. 저 높은 곳에 멋진 재벌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배신을 경험했다. 선택되는 순간 이미 동료를 배신했다. 배신을 경험한 사람이 또 배신한다. 엘리트가 하늘에서 내려온 너무나 잘 보이는 손에 의해 선택될 때 이미 소꿉친구와 결별한다.

가슴 밑바닥에서 거대한 균열이 일어난다. 결국 대중의 배신자가 된다. 왜? 지긋지긋한 배신자의 양심의 가책 따위는 벗어던지고 싶어서. 양심의 가책을 벗어던지려면 더 많은 배신을 일삼아서.. 배신을 일상화해서..

배신을 정규의 룰로 만들어 물타기 해야하므로. 모두가 배신하는데 내 한번 배신이야 어떠리? 단절이다. 폐쇄다. 배타다. 대중의 품 속으로 녹아들어갈 수 없다. 본능적으로 기피한다. 다른 종(種)이 되어버린다. 종자가 다르다.

소통이란 무엇인가?

게시판에 리플 써놓고.. 그거 읽고 답글 다는 것이 소통이라고 믿는 분도 있는데 깝깝한 아저씨다. 노무현 대통령이 리플을 달아도 그게 소통은 아니다. 그런 가짜배기 소통은 정청래도 한다. 좀 있으면 이명박도 따라한다.

이명박 네티즌 나오셨네. 딴나라 사이트에 리플 다셨네. 이런 풍경 멀지 않도다.

소통은 포지션 분담이다. 대통령이 자리 깔아주면 거기서 논객이 뼈대 올리고 눈팅이 기왓장을 들고오고.. 이렇게 함께 큰 그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소통이다. 소통은 막힌 것을 뚫는 것이다.

이미 뚫려있는데 문 앞에 죽치고 앉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시장바닥에서 떠드는 것은 헛되다. 잎에서 뚫리면 가지로.. 가지에서 뚫리면 줄기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 죽치고 앉아서 거기에 점방을 개설하려 들지 말라.

애들하고 노는 것이 소통이 아니고.. 애들이 놀도록 자리를 만들어주고 적당한 때 어른은 빠져주는 것이 소통이다. 소통은 서로를 이용하는 것이다. 공격수는 수비수를 필요로 하고 수비수는 공격수를 필요로 한다.

지식인이 대중을 이용하고.. 대중이 지식인을 이용할 때 소통이 이루어지며 그렇게 연출할 수 있는 사람이 지성인이다. 그런데 그런 능력이 없다. 그들은 대개 대중으로부터 배척된다. 왜? 소통의 미학을 모르기 때문에.

소통의 미학

꽃을 사랑하는 이유는? 예쁘니까? 과연 그런가? 천만에! 예쁜건 색종이다. 프라스틱 조화가 더 예쁘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꽃이 인간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거기에 소통의 의미가 있다.

문학작품에는 주제가 있다. 그것으로 독자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평범한 밥그릇처럼 보이는 이도다완이 일본 국보인 이유가 그러하다. 분청사기가 추사체와 마찬가지로 미학의 극치와 닿아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예술이 인간에게 말을 거는 것이 이른바 ‘아우라’다.

지성인의 소통이란 대중에게 말을 거는 것이며.. 대중의 잠재한 역량을 끌어내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최고의 화음을 끌어내듯이 대중으로 부터 숨은 열정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들이 잠재력을 발휘할 장을 개설하고 자신은 빠져주기다. 그냥 리플 몇 개 달고.. 이건 쇼에 불과하다. 박정희가 농부와 막걸리 마시면 쇼다. 쇼는 이명박도 하고 정동영도 한다. 그들은 대중의 잠재력을 끌어내지 못한다.

백화점의 선물용 상품은 과대포장 된다. 상품의 내용보다 그 포장에 더 많은 비용이 지출되는 수 있다. 선물이 그 상품을 이용하는 데 따른 실용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말을 걸기 위한 목적을 가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정성을 쏟았는가를 통하여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상품은 구실이고 그 숨은 메시지가 오히려 진짜다. 미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수준별 소통의 방식이다. 그 숨은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다.

그냥 말로 의사를 전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그 메시지는 포지션에 대한 메시지이며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의 포지션을 바꾸기 때문이다. 그냥 말로 떠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여자가 혹은 남자가.. 연인에게 프로포즈 한다면 그것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그냥 메시지로 끝나지 않는다. 상대방의 물리적인 포지션을 바꾼다. 아들은 남편으로 승격되고 딸은 아내로 상승한다. 완전히 차원이 바뀌는 것이다.

자연에서 자연이 자연스럽게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이 아름다움이다. 아기의 얼굴이 귀여운 이유는 엄마에게 ‘보호해줘’ 하는 메시지를 전함이며.. 젊은이들이 아름다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좋은 사람 없나’ 하는 메시지를 담는다.

미학은 결국 소통의 학문이며 소통은 포지션의 변경에 대한 소통이다. 축구시합에서 공격수와 수비수 간에 손발이 척척 맞는 것은 이심전심에 의한 소통이다. 언어가 필요없다. 포지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

눈빛 만으로 통해야 진짜다. 말로 한다면 학습이다. 소통이 아니다. 포지션 변경 없이 그냥 수다를 떤다면 정동영식 스킨십에 불과하다. 소통은 막힌 것을 뚫는다. 뚫는다는 개념이 중요하다. 에너지가 투입되는 물리적 사건이다.

네티즌과 수다를 떠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새로 길을 뚫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뚫린 길을 오가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남녀가 첫 만남이라면 길을 뚫는 것이다. 첫 출근, 첫 소풍, 첫 입학, 첫 데이트는 설레인다. 소통이 있기 대문이다.

소통은 만나기, 맞물리기, 맞서기, 하나되기, 통하기의 순으로 그 질이 상승된다. 최종적으로는 통하는 것이며 그 이전에 만남, 맞물림, 맞섬, 하나됨이 있다. 그 러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통하는 것이다.

만나지 않고 통할 수 없다. 맞물리지 않고 통할 수 없다. 맞서지 않고 통할 수 없다. 하나되지 않고 통할 수 없다. 소통의 밀도가 있다. 절절해야 한다. 높은 수준의 맞물림이어야 한다. 불협화음 아니고 화음이어야 한다.

소통의 결론은 낳음에 있다. 꽃은 나비와 통하더니 열매를 낳더라. 여자는 남자와 통하더니 자식을 낳더라. 모든 통하는 것은 낳는다. 가치를 창출한다. 그것은 창조다. 문화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한다.

불임.. 낳음이 없는 소통은 가짜다. 이명박이나 정청래나 정동영이나 밤새 네티즌과 떠들어봤자 낳음이 없다. 농부와 막걸리 마셔봤자 농부가 변하는게 없다. 그 농부는 10년 후에도 그냥 농부다. 입력이 있는데 출력이 없다.

노무현은 다르다. 낳아놓은 것이 여럿이다. 노사모를 낳았고 서프를 낳았다. 아류인 박사모도 낳았다. 지금 더 큰 것을 낳으려고 일을 꾸민다. 거대한 세력을 낳을 참이다. 둥지를 꾸미기 위하여 지성의 문화가 필요하다.

소통의 밀도 5단계

인간은 언어로 소통하지만 자연은 미로 소통한다. 미는 수준 별로 다섯 단계가 있다. 예쁘다≫곱다≫어울린다≫아름답다≫멋있다 순으로 미의 질이 상승한다. 멋있다에 이르러서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예쁘다는 것은 눈에 띈다는 것이다. 만남에서의 판정이다. 곱다는 것은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가시가 있다면, 혹은 표면에 끈적한 이물질이 묻어 있다면, 혹은 냄새가 고약하다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징그러운 것이다. 곱다의 반대는 징그럽다이다. 포유류가 부드러운 털을 가지는 것은 상대를 거절하지 않고 무난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어울린다는 뜻은 콜라와 햄버거처럼 서로를 보완한다는 의미다.

앙상블이다. 포도주와 치즈, 막걸리와 김치, 소주와 삼겹살처럼 궁합이 있다. 홍탁이나 삼합처럼 서로의 단점을 보완한다. 그것이 어울리는 것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요소들이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이다. 아름은 팔로 안아서 한 아름이다. 요소들이 서로 마찰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에피소드들을 한 줄에 꿰어내는 테마가 있다. 문학이라면 주제가 있다. 뼈대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아름은 성립한다.

멋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양복에 넥타이라면 어울린다. 양복에 고무신이라면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는 것을 어울리게 하려면 특별한 분위기가 필요하다. 그 특별한 무엇이 멋이다.

남자는 남자끼리 어울리고 여자는 여자끼리 어울린다. 남자는 축구경기장에서 어울리고 여자는 까페에서 수다떨며 어울린다. 어울리지 않는 남자와 여자를 어울리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멋이다.

양복에 넥타이는 어울리지만 양복에 고무신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양복입은 남자와 고무신 신은 여자가 결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둘 사이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멋이다.

사랑의 결론은 낳음이다. 창조다. 멋은 창조다. 모든 창조는 어울리지 않는 것을 어울리게 한다. 천에 잉크가 묻으면 천을 버린다. 천과 물감은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는 천과 물감이 어울려 멋진 그림을 만든다. 낳음이다. 창조다.

미는 궁극적으로 소통으로 가는 과정이며 소통은 창조의 과정이다. 고기와 야채는 각각의 맛을 가진다. 각자의 동 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다. 그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뛰어난 요리사는 두 세계를 소통하게 한다.

고기의 맛과 야채의 맛이 어우러져 보쌈의 세계를 열어젖힌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지평의 세계다. 창조된 세계다. 고기만 먹는 서구인과 야채만 먹는 일본인이 모르는 한국인들이 창조한 세계다. 그것이 멋이다.

자연은 낳음에 의해 창조된다. 꽃도 풀도 나무도 동물도 그렇게 낳아진 것이다. 통해야 낳는다. 통하지 않으면 창조하지 못한다. 태초 이래 통하지 않고 성립한 낳음은 없다. 통함이 멋이다. 멋 없이 이루어진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여기서 완전성의 개념이 제시된다. 예쁘다≫곱다≫어울린다≫아름답다≫멋있다로 미의 수준이 차츰 상승하여 위대한 소통에 성공하고 마침내 낳음에 이르는 것이 완전한 것이다.

완전해야 통하고 통해야 창조할 수 있지만.. 그래야 진짜지만 그 과정에 무수한 시도가 있고 중간평가가 있다. 모방이 있다. 하나의 진짜를 위하여 무수한 복제품이 있다. 소통에 성공하지 못하고 낳음에 도달하지 못하는 아류가 있다.

진위≫선악≫미추≫주종≫성속

진위, 선악, 미추의 판단에 계급이 있다. 진선미는 주종을 거쳐 성속으로 가는 과정이다. 주는 종속되지 않고 주도하기다. 성은 소통이고 소통은 낳음이고 낳음은 창조다. 아름다움은 인간을 창조로 이끄는 자연의 방법이다.

진(眞)을 단순히 진짜인가 가짜인가로 판단해서는 부족하다. 만남이므로 진이다. 진정한 만남인가 잘못된 만남인가이다. 진짜는 바른 만남이요 가짜는 잘못된 만남이다. 수컷과 수컷이 만나서는 짝짓지 못한다.

조화에 날아든 벌은 꿀을 얻지 못한다. 여러 가치들 중에서 진(眞)이 으뜸인 이유는 진으로 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은 시작일 뿐 끝은 아니다. 완성은 아니다. 완성은 소통이다. 성(聖)이다.

무엇이 선(善)인가? 받아들여지는 것이 선이다. 가난뱅이에게 자비심을 발휘하여 동전을 던져주었는데도 상대가 도리어 화를 내는 수가 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악(惡)이다. 악이 악인 이유는 사회로부터 배척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미(美)인가? 서로를 보완하는 것이 미다. 단점을 감추고 장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무엇이 주(主)인가?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주다. 가운데서 중심을 잡아주므로 가지가 자유로이 뻗어나갈 수 있게 돕는다.

만약 주(主)가 없다면 마른 논에 올챙이처럼 오골오골 모여있게 된다. 쪼그라들어서 실패다. 리더가 있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마음껏 날개를 편다. 흩어져서 각자 자유로운데도 그룹이 유지가 된다.

집안에 어른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들판에서 뛰논다. 어른이 없다면? 구걸해야 할 판이다. 마음껏 뛰놀지 못한다.

무엇이 성(聖)인가? 성은 본래 완성을 의미한다. saint는 본래 제사에 쓰일 희생의 몸에 상처없음이다. 상처가 없는 것이 완전하다. 그 완전함이 신을 불러낸다.  신과 소통한다. 신탁이다. 통하는 것이 성이다.

속(俗)은 무엇인가? 불완전한 것이다. 통하지 않는 것이다. 흉내내는 것이다. 원숭이가 사람을 흉내내듯 학습본능에 휘둘리는 것이다. 낳음이 없다. 불임이다. 모방이다. 복제품이다. 향기가 없다. 아우라가 없다.

왜 문화인가?

문화란 결국 소통의 기술이다. 이스라엘이 아프리카와 유럽의 길목에 있었듯이 한국도 소통의 길목에 있다. 길목에 있는 나라가 흥한다. 역사적으로 그러했다. 일찍이 이집트가 아랍과 아프리카의 길목에 있었다.

문명이 확대되자 이집트는 더 이상 길목이 아니게 되었다. 사람들이 해상으로 다녔기 때문이다. 그러자 지중해로 문명의 중심이 옮겨갔다. 게르만이 등장하자 새로운 장이 섰다. 게르만시장으로 통하는 길목의 로마가 먹었다.

신대륙이 발견되자 역시 길목인 스페인이 먹었고 아시아시장이 개척되자 여러 목 좋은 곳에 거점을 개설한 영국이 먹었다. 길목에서 소통이 일어나므로 인도와 홍콩에 길목을 차지한 자가 먹은 거다.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 우리가 환호한 이유는 조중동과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출발선에 서서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자 우리가 이겼다. 인터넷에서는 확실히 우리가 조중동을 이겼다.

지금껏 우리가 서구에 뒤진 이유는 문명의 중심에서 멀어서 같은 출발선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명은 반드시 핵과 배후지를 가진다. 지금 그 배후지는 중국과 러시아다. 그 길목에 우리나라가 있다.

왜 문화인가? 같은 출발선에 선다면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문화의 자원이 있다. 무력과 경제력은 인구와 땅뙈기로 일단 먹고들어가는 것이고. 문화는 양으로가 아니라 질로 승부하는 세계이다. 공동체의 문화적 동질성이 강할 때 유리하다.

무에서 유가 생겨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문화는 문화의 유전인자에서 나오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소스가 있어야 한다. 유전에서 석유가 나오고 금광에서 금이 나오듯이 반드시 그 출처가 있고 원전이 있고 소스가 있다.

서구문화도 알고 보면 대략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을 무수히 표절하고 복제한 것에 불과하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불리했지만 구조적인 이유로 그 소스경쟁에서 우리가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돈 없고, 표 없고, 힘 없는 우리가 가진 것은 지혜 뿐이다. 우리가 지혜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자부심 뿐이다. 자부심은 좋은 친구를 구하는데 쓸모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좋은 터를 닦아 좋은 사람을 발굴할 수 있다.

좋은 사람들만의 좋은 만남을 연출할 수 있다. 돈은 꽤 있는데 친구가 없다는게 이 시대의 비극이다. 그래서 돈의 이건희도 쪽 팔고 물러났다. 그에게 조언해줄 지성인 친구가 있었다면 그 망신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돈으로 친구를 살 수 있었다면 지성인 친구를 구했을 것이다. 돈으로 썩은 친구야 백 트럭이라도 살 수 있다. 노무현 같은 친구는 못 사고 서프 사람들 같은 친구는 못 산다. 수준 차가 나기 때문이다. 왜? 비중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벼운 것은 위로 동동 뜨기 때문이다. 이건희들은 표면 위로 떠서 부는 바람에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무거운 진짜들과의 거리는 멀어져만 간다. 지성인과 친구가 될 수 있어야 진짜다. 그것이 가능하게 자리 깔아주는게 문화다.

지성이란 결국 미추를 구분하는 눈이다. 많이 안다고 지성이 아니다. 많이 알아도 흙 빚는 도공과 대화가 안 된다. 미추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추를 구분할 수 있다면 음악을 전혀 몰라도 음악가와 대화할 수 있다.

몸으로 느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도공과도 대화할 수 있고 목수와도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단 그 세계의 최고수라야 한다. 이명박이 농부와 막걸리 마실 수 있겠지만 최고농부 강기갑에게 걸리면 귀싸대기 돌아가는 수 있다.  

어느 세계든 최고는 있다. 농부에게도 목수에게도 도공에게도 예술가에게도 청소부에게도 시인에게도 학자에게도 있다. 그 세계의 그 분야의 최고수와 대화해야 진정한 소통이 일어난다.

모든 분야에서 최고수를 발굴할 수 있어야 한다. 지성인이라면. 지식인이 낮추어 대중의 욕망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는 그런 뜻이다. 대중의 진짜 욕망은 자신이 그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지식이 모자라서 자신은 낮지만.. 자기 분야의 최고는 세상의 그 누구와도 대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공 될 자격이 있다는 거다. 거기서 열정이 일어난다. 바로 그것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돈 없고 표 없고 힘 없는 우리는 사람이 가진 매력으로 승부할 밖에 없다. 그것이 지성이다. 우리는 저들과 종자가 다르다. 소통의 능력이 있다. 특별한 매력이 있다. 그 장점을 키워나가자는 것이다.

언젠가 대중의 분노가 대폭발을 일으킬 때를 대비하여.. 사전에 소통의 코드를 맞춰놓고 있자는 것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은 중심이다. 중심을 건설해야 한다. 문화로 가능하고 지성으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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