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칼럼

진보진영의 재편을 바라보며
‘가짜 자주와 가짜 평등의 동반퇴장을 환영한다’

“인류 역사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고,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디 그 어느 역사책 속에 있었던가? 이 민족의 울분, 순결한 학도의 울분을 어디에 호소해아 하나?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1인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

1960년 2.28 대구학생의거 선언문 일부다. 이승만 독재의 315부정선거에 항의하여 대구가 먼저 일어났고 마산이 그 뒤를 이었다. 서울은 김주열님의 죽음이 알려진 후에 일어났다.  

왜 대구와 마산인가? 과거 대구, 마산은 야도로 불렸다. 해방전후 중요한 노동자 파업은 섬유공장이 있는 대구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곳에 강한 변혁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건 사회학 이전에 물리학이다. 에너지가 뭉쳐있는 곳을 때리면 터진다. 뇌관을 건드린 셈으로 된다. 폭발한다. 분출한다. 실제로 그곳에 밑바닥의 에너지가 고여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여촌야도라는 조어가 널리 쓰이던 시절이 있었다. 박정희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70년대다. 그 시점에 도시빈민이 변혁의 주체였다. 서울을 야도로 만든 것은 농촌에서 상경하여 달동네에 정착한 빈민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여촌여도가 되어 있다. 도시빈민이 목청을 높이던 시절은 지나갔고 바야흐로 강남부유층, 일산중산층, 분당아파트 거주자들이 목청을 높이는 시대가 되었다. 가난뱅이도 참고 있는데 부자가 울다니 세상이 바뀌긴 바뀐 것이다.

농가부채 탕감이 단골 대선공약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김영삼도 농기계 반값 공약을 내놓았다. 그때는 농민이 중심이었다. 농민의 불만이 태풍의 핵이었다. 불과 십여년 전이다. 한국인의 1/3이 농민이었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80년대 민주화 투쟁을 이끈 세력은 대학생이었다. 왜 대학생인가? 대학생 숫자는 80년대에 급증했다. 절대 숫자가 증가한 것이다. 소수의 엘리트가 대학을 다니는 나라에서 대부분의 젊은이가 대학진학을 하는 나라로 완전히 바뀌었다.

무엇인가? 실제로 세상을 바꾸어 가는 힘이 어디서 작동하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해방직후 대부분의 공장들은 북한에 있었다. 남한에서 그나마 공단이 돌아가던 곳이 대구였기 때문에 대구가 먼저 일어난 것이다.

농민이 도시로 이주하여 도시빈민이 되었기 때문에 70년대와 80년대의 여촌야도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슈퍼 301조 폭탄을 맞아 농촌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발언권이 높아졌고 그 결과로 여촌야도 현상이 역전되어 일부 농촌지역의 지지를 받아 김대중정권이 탄생한 것이다.

97년 이후 여촌야도라는 조어는 언론 지면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2002년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킨 주역은 인터넷이었다. 변화는 끝없이 일어났고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는 현장에서 그 변화의 중심을 지배한 자가 항상 역사의 큰 줄기를 주도했던 것이다.  

50~60년대의 대구파업≫70~80년대의 도시빈민≫80년대의 학생시위≫90년대 농민의 분노≫2002년의 인터넷 혁명으로 변혁의 에너지가 물리적으로 이동하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여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변화는 또 일어난다. 이명박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는다. 지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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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모르는 지식인이 골방에서 어설프게 소설 쓴 사회학의 관점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물질의 토대를 근거로, 두 눈 부릅뜨고 변화의 현장을 지켜보며 물리학의 관점에서 논해야 바르다. 물질에서 에너지가 나오고, 그 에너지에서 변혁의 토대가 얻어지는 것이다. 역사이래 항상 그래왔다.

역사에서 항상 반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참여자의 절대숫자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PC통신 초창기에는 소수의 똑똑한 사람이 네티즌이었다. 국민의 절대 다수는 네티즌이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분위기 좋았다. 악플러는 거의 없었다.

네티즌들은 먼저 와서 동호회를 건설하고 공동체의 문화를 일구어 놓은 선배 네티즌을 존중했다. 내부에 질서가 있었다. 이심전심 의사결정구조가 확립되어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초딩이 대세를 점하고 있다. 물이 흐려졌다.

아무개님 하며 ‘님’자를 붙이는 호칭도 90년대 초 소수의 선도적 네티즌들이 만들어 전파한 것이다. 이제 ‘님’ 호칭은 인터넷 동호회를 넘어 사회 일반에 두루 쓰인다. 그들이 세상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지금 한국은 씨파와 님파로 나누어졌다. 2002년의 승리가 님파의 약진에 놀란 씨파가 숨죽이며 ‘저 사람들이 무슨 묘기를 보여줄란가’하고 관망한 결과라면 2007년의 패배는 ‘지켜봤는데 별볼일 없네’하고 씨파가 반격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밑바닥에서 부터 바뀌고 있다. 님파가 지난 5년간 뿌려놓은 씨앗이 자라나는 5년후 세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어떤 하나의 동그라미 안에서 참여자의 숫자가 증가할수록 초기에 리더십을 발휘하던 명망가들의 권위는 추락하고, 보다 대중화된 노선이 대두된다. 그러한 세력교체 과정에서 리더십 자체가 소멸해버리는 수가 있다.

학생운동도 그렇다. 초창기는 소수 엘리트 명망가 중심이었다. 대중화 되어 참여자 숫자가 늘어나면서 지도부의 선도적 역할이 붕괴된다. 명망가도 없고, 엘리트도 없고, 선배도 없고, 지도부도 없는 난맥상이 일어난다. 그것이 반동의 원인이다. 지금 한총련은 거의 붕괴되고 있다.

전교조도 그렇다. 2000년 전후로 온건파가 지도부를 구성하고 세불리기를 시도하자 많은 교사들이 전교조에 가입해서 외부적으로 힘은 커졌는데 내부적으로 의사결정은 오히려 어렵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우향우 되어서 전교조의 존재가 무의미해졌다. 몸집은 커졌지만 대사회적인 발언권은 도리어 축소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이다. 혼자가는 열 걸음이 아니라 함께가는 한 걸음을 추구하다가 오히려 뒷걸음질 친 셈이다. 이를 단순히 역사의 후퇴로 보고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싸움걸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 위치에서의 진보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대중화 되었다면 다시 소수 명망가 위주로 되돌릴 수는 없다. 지금 민노당 PD파의 돌출행동은 명망가 중심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 있을까?

대중화 되었을 때는 대중을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노선이 나와주어야 한다. 절대숫자가 늘어났을 때는 다수의 의사를 결집할 수 있는 혁신된 의사결정구조가 나와주어야 한다. 그러한 의사결정구조의 건설에 게을렀다는 반성이 필요하다.

서태지 때문에 가요시장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확실히 서태지 이후 가요시장이 10대 위주로 옮겨가서 전체적으로 몰락했지만 그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속되어온 역사발전의 변증법이다. 언제라도 정반합의 법칙은 적용된다.

누구 탓이나 하며 주저앉아서 안 된다.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가요인들 모두의 책임이다. 시장의 파이가 커지면 당연히 질이 떨어진다. 하향평준화 된다. 끊임없는 의사결정 구조의 혁신으로 변화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운동이 70년대의 엘리트 위주에서 80년대의 보다 대중화된 노선으로 바꾸면서 농활운동, 그림패, 탈춤패, 노래패 등이 활약한 사실을 기억하라. 몸집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늘어난 몸집에 맞게 내부에서 부단히 의사소통 구조를 혁신해왔기 때문에 전두환 독재를 끝장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다. NL의 가세로 민노당의 몸집이 커졌다. 커진 몸집에 맞게 내부적인 의사결정구조의 혁신이 일어나 주어야 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민중과의 소통 노력이 증대되어야 했다.

민노당은 어떠했는가? 내부적으로 혁신하지 않았고 외부적으로도 소통하지 않았다. 내적인 의사결정구조의 실패 그리고 외적인 의사소통구조의 실패다. 그리하여 그들은 붕괴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본질을 지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발뺌하며 네탓하기에 주력할 뿐이다. 왜 망하는지도 모르고 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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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이 변하고 있다. 공룡이 멸종하고 포유류가 득세한다. 그렇다면 구조와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내적인 의사결정구조와 외적인 의사소통구조를 부단히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더 이상 농민의 힘을 빌어 어떻게 해보려는 시도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농민의 숫자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대학생의 역할도 감소되고 있다. 대학생 숫자가 급증하던 80년대는 선배의 권위가 후배를 이끌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선배의 권위가 소멸하고 있다. 이는 자연계의 물리현상이므로 이명박류 신권위주의로 되돌아간다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2002년은 네티즌 숫자가 급증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먼저 기반을 닦은 선도적 네티즌들의 발언권이 커져서 노사모의 역할이 가능했다. 지금은 초딩대란이 일어나 완전히 물을 버려 놓았다. 구성원 숫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지 않으면 선도적 대학생, 선도적 네티즌의 역할은 소멸한다. 마찬가지로 지금 선도적 지식인의 역할도 소멸하고 있다. 진보가 이러한 본질을 외면해서 안 된다.

홍세화, 진중권 등의 돌출행동은 과거 한때 먹히는듯 했던 선도적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함에 불과하다. ‘그때 그시절이 좋았지’ 하는 나약한 지식인의 과거회상에 불과하다. 조선시대라면 양반이 집권해도 나라가 태평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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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은 ‘노조+주사교+지식수입상’의 3자결합이라 하겠다. 노교학 연대다. 내부에 다양한 세력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내부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구조를 건설하는데 실패했다.

그 책임을 소수 주사교 신도들의 머리나쁜 탓으로 돌리고 있다. NL파 다수가 주사교 신도는 아닐 것이다. 명망가 PD들이 머리나쁜 NL들과 함께 머리 맞대고 의사결정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자 넌더리를 내는 것에 불과하다.  

노조의 힘은 약화되었다. 노조가입자 수가 급증할 때 선도적 노동자의 역할이 주목되었듯이 지금은 가입자 수가 정체된 때문이다. 홍세화, 진중권, 박노자류 지식수입상의 선도적 역할도 감소되었다. 그들이 번역해주는 외국책을 읽기 보다는 배낭메고 직접 해외여행 해서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명망가의 선도적 역할은 구성원 숫자가 급증할 때, 현장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날 때 물리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며, 그 시점이 지나면 쇠퇴한다. 민노당의 노교학 연대의 모델은 이제 그 수명을 다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의미있는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변두리에서 추임새나 넣고 양념이나 쳐주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에너지가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학이 아니라 물리학이다. 배터리 고갈에다 기름이 엔꼬다.

여촌야도 옛말이고 야촌여도 옛말이다. 대학생도 옛말이고 노동자도 옛말이다. 농민도 옛말이고 도시빈민 옛말이다. 지식인도 옛말이고 네티즌도 옛말이다.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새로움을 낳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민노당 딜레마는 자주파가 있어야 대중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평등파에 속하는) 명망가 논객이 있어야 자신의 입장을 대외적으로 선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주파를 배제하면 민노당의 장기인 시위, 집회에 아무도 안 온다. 홍세화, 진중권이 둘이서 1인시위는 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PD출신이 대부분인 명망가 논객 배제하면 방송에 나갈 사람이 없어서 홍보가 안 된다.

무엇인가? 민노당의 딜레마를 역으로 접근하면 문제해결의 정답이 찾아지는 것이다. 진보를 재건하려면 머리와 몸통이 있어야 한다. 머리는 논객이고 몸통은 대중이다. 머리는 PD고 몸통은 NL이다. 문제는 그 머리와 몸통이 가짜라는 데 있다. 진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붕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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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자주와 가짜 평등의 대결이다. 자주라는 개념은 민족 이전에 개인에게서 나와야 한다. 철저한 개인주의를 전제로 하지 않은 국가주의, 민족주의는 사기다. 그것은 파시즘의 변종일 뿐이다.

자주는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 개인이 자기세계를 가져야 한다. 나의 하늘이 있어야 하고 나의 땅이 있어야 한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세상을 향한 나의 마지노선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내 안에 이상주의를 품어야 한다.

그 이상주의는 철저하게 나다움에 초점을 맞춘 나만의 이상주의라야 한다. 나의 이상주의와 너의 이상주의가 공동의 적 앞에서 전술적 행동통일을 꾀할 뿐 절대로 나의 본질을 양보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이 없이, 그러한 자기세계 없이, 줏대도 없이, 정체성 없이, 자기다움이 없이, 민족이나 국가를 들먹이는 자가 있다면 사기다. 나가 없는데 어찌 무수한 나들의 모임인 민족이 있겠는가? 철저한 개인주의에 근거를 두고 그 개인의 연장선상에서 국가와 민족을 말해야 진짜다. 강한 개인이 아니면 안 된다.

그 나라, 그 사회의 자주의 수준은 그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개인주의의 수준의 평균값이 결정한다. 그러므로 자주가 옳다. 철저한 개인주의를 전제로 하지 않은 민족운운, 자주운운은 사기다. 그것은 파시즘의 변종이다.

그래서 민노당 자주는 가짜 자주다. 가짜라서 문제일 뿐 진보가 절대로 자주를 버려서는 안 된다. 진보는 외국에서 수입해 올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낳아낸 진보가 아니면 안 된다. 진짜가 아니라서 안 된다.

PD가 평등을 말하지만 실로 외국에 유학한 선도적 지식인의 헤게모니에 불과하다. 민노당 평등은 가짜 평등이다. 비정규직의 울분 주장한다고 다 평등은 아니다. 진짜는 대외적인 의사소통 구조의 합리화다. 이것이 본질이다.

의사소통 안 되는 평등은 가짜 평등이다. 진정성에 기반한 민중과의 이심전심  소통이 비정규직 문제보다 더 근원의 문제다. 그런데 홍세화, 진중권들이 어디 의사소통이 되는 자들인가? 이심전심이 되는 자들인가?

민중은 정치가의 진정성을 읽고 이심전심을 하는데, 진정성이 없으니 이심전심이 안 되고, 이심전심이 안 되니 민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현학적인 논리로 우겨대고 그럴수록 민중과의 거리는 멀어질 뿐이다.

소통이 안 되므로 그들의 평등은 가짜다. 대중이 그들의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발언해서 극소수 먹물들이 살롱에서 수다떠는 코드가 맞아졌을 뿐 대중의 눈높이가 상승한 것은 전혀 아니다.

진정한 평등은 소통의 평등이다. 대중과의 수평적 대화를 거부하는 것이 차별이다. 그들은 진정 대중과 소통하지 못한다. 맡바닥 세계를 겪어보지 않은 그들에게는 대중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방송에 출연하여 대중을 모욕하는 발언을 일삼아 한나라당에 백만표를 안겨주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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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재건되어야 한다. 민노당의 난맥상을 되짚어 보면 그 안에 정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적으로는 합리적 의사결정구조의 건설, 외적으로는 수평적 의사소통구조의 건설이 이 시대 진보의 정답이다.

의사결정구조는 반드시 자주의 노선이어야 하고 그 자주는 민족나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서 출발하는 진짜 자주여야 한다. 북한 추종하는 가짜 자주 버리고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낳아내는 자주여야 한다.

의사소통구조는 평등의 노선이어야 하고, 그 평등은 분배의 평등 이전에 의사소통의 평등, 눈높이의 평등이어야 한다. 허풍떠는 지식 수입상들은 일단 배제하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언제라도 구조의 혁신에 정답이 있다.

민노당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 성공의 길을 찾아야 한다. 빈 터에 스스로 깃발을 꽂고 새로 설계도를 그리고, 기초를 놓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려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경쟁하여 이겨보여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다. 2002년에 이겨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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