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칼럼
read 15620 vote 0 2008.11.20 (21:42:24)

주류와 비주류 그리고 전복

파울로 코엘료가 다보스 포럼에 참석하여 제법 우쭐대며 인기를 끌었다지만.. 그래봤자다. 그는 영원한 비주류다. 죽고 난 다음에도 인정받지 못한다. 무려 1억부를 팔아치웠다지만 그에 걸맞는 평가는 기대하기 어렵다.

왜? 누구도 그의 책이 가진 특별한 비밀을 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가를 하는 위치에 있는 ‘주류집단’이 코엘료 소설의 문학성, 그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이나 조앤 롤링과 같은 급으로 절하된다.

왕년의 ‘칼릴 지브란’도 비슷하다. 한국의 이외수도 마찬가지다. 많은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책도 무진장 팔렸지만, 명성도 얻었지만.. 스티븐 킹이나 조앤 롤링이 노벨상 수상을 기대할 수 없듯이..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주류가 있다. 역사의 중심부로부터 뻗어나가는 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다. 그 어름에 각자의 포지션이 있다. 그 뻗어나가는 가지들 중에서 어느 위치에 붙여주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끼워주지 않는다.

아웃사이더다. 문명의 흐름, 역사의 흐름, 진보의 흐름, 지성의 흐름에서 동떨어진 별개의, 변방에서 일어나는, 우발적인, 1회성의, 신기한 현상 정도로 치부된다. 노라노와 앙드레김의 차이와 같다.

어떤 의미에서.. 앙드레김의 옷은 패션이 아니다. 앙드레김이 좋은 옷을 만들었다 해서 그 옷이 시중에 유행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유행한다 해도 21세기 문명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호흡을 맞추어 연동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떨어진 것이다. 혼자 노는 것이다. 왕따다. 대중이 알아줘도 그 분야의 주류가 알아주지 않으면 의미없다. 대중의 눈요깃거리가 되어 업계를 망신시킨다고 여겨진다.

앙드레김은 왜 TV에 나오는가? 또 왜 나와야만 하는가? 왜 나와서 웃음거리를 마다하지 않아야만 하는가? 이외수는 또 왜 나오나? 비애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제자를 키우려고 노력하지만 제대로 된 제자가 없다는 것이다.

주류라면 굳이 제자를 키울 이유도 없다. 저절로 흐름이 생겨나고 세력이 형성되고 역할이 분담되고 포지션이 나눠진다. 그냥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디자이너와 디자인학원과 명동상가와 패션잡지가 공생하는 시스템이 있다.

앙드레김은 그 사이클이 돌아가는 시스템 바깥에 있다. 혼자서 사이클을 돌릴 수 없으니 연예인을 섭외하고 스포츠스타 섭외하고 외국대사관 부인들 끌어들인다. 바깥에서 혼자 별도 시스템을 돌린다. 얄궂다.

디자이너와 패션학원과 패션잡지가 공생하는 시스템 안에서 주도적인 자기 포지션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제자가 모여든다. 노라노에게는 저절로 제자가 모여들고, 제자들이 시스템 안의 각 분야에 고루 자리잡는다.

앙드레김에게는 제자가 모이지 않으며, 설사 있다해도 의미가 없다. 시스템 안의 각 분야에 자리잡지 못하니까. 의학과 한의학의 차이와 같다. 한의학 혹은 민중의학이라는 것은 스승의 비술(?)이 제자에게 전수되지 않는다.(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일부 그런 점이 있다.)

시스템이 미비한 것이다. 부실한 시스템은 다듬으면 된다? 주류에서 받아들이고 포용하고 인정하면 된다? 그게 잘 안 된다. 어쨌든 서울대는 한의학과가 없다. 요즘 한의업계가 파산직전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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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인류문명이다. 역사의 진보다. 세상 모든 것은 전부 연결되어 있다. 예수와 석가는 통한다. 한국의 선비스타일과 일본의 젠스타일, 바우하우스의 현대적 스타일은 확실히 통한다.

문제는 그 연결의 접점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접점을 일러주어야 할 학자와 평론가들이 침묵했기 때문에. 분명히 말하면 코엘료와 칼릴 지브란과 이외수와 오르한 파묵은 통한다.

그러나 평론가들의 침묵 때문에.. 현실에서는 단절되어 있다. 오르한 파묵은 노벨상을 받고.. 누구는 구차하게 TV에 나와서 얼굴디밀기를 해야하고 누구는 다보스 포럼에 나가서 몸빵하기로 팔 빠지게 사인도 해주고 그런다.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는 여타 교육기관과 달랐다. 다른 예술교육기관들이 그리스 로마와 르네상스로 부터 시작되는 예술사부터 이론적으로 차근차근 가르치는데 비해 바우하우스는 공구다루는 법과 소재이용법부터 가르쳤다.

나치의 등쌀에 바우하우스는 문을 닫았다. 그러나 배출된 제자들이 미국 건축계를 지배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단번에 주류로 등극해버린 것이다. 거대한 세력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핵심을 잡은 것이다.

그들이 강단과 업계와 평론계에 고루 포진하고 밀어주고 당겨주며 다해쳐먹은 것이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극우세력이 준동하고 있던 1925년의 바이마르로 시계바늘을 되돌려 보자.

데사우 시의 한 귀퉁이에 얄궂은 대안학교가 들어섰다. 젊은이들이 제멋대로 방종하며 풍속을 어지럽힌다. 청년들이 웃통을 벗고 거리를 쏘다니지를 않나.. 완전 개판이다. 미친 빨갱이 집단이 틀림없다.

그 시점에 바우하우스는 어디가나 있는 진보세력의 실험적인 대안학교로 끝나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바우하우스는 하나의 실험이었다. 빨갱이 소굴로 알려져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다.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오늘날 서구중심의 철학이나 미학 따위는 지적 사기에 불과하다. 왜? 배출된 제자들을 취직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바우하우스와의 본질적인 차이다. 진짜라면? 당연히 공구다루는 법부터 가르쳐야 한다.

오늘날 철학자들은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철학사를 가르친다. 미학자들은 미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미학사를 가르친다. 그들은 실상 역사학의 한 분과로 퇴행해 있다. 그들 역시 한의사와 같은 운명이다.

나름대로 버티고는 있지만 주류는 아니다. 가끔 TV에도 나와서 전문가 행세도 하지만 세력은 없다. 기반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한의학과 철학을 깎아내리려는 말처럼 보일 수 있지만, 논하려는 것은 따로 있다.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그 연결의 접점이 애매한 경우가 있다. 한의학 철학, 미학 따위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는 정체가 뭘까? 지들이 뭔데 건물 지어놓고 사람 모아놓고 집금하고 있는 걸까?

오늘날 종교도 쇠퇴하고 있다.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 세력이 정치에 개입하는 이유는 궁지에 몰린 가짜들의 마지막 몸부림이라 하겠다. 그들 역시 뭔가 일 사이클이 작동하지 않는 지경에 몰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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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나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다. 질서가 있고 체계가 있고 시스템이 있다. 가지쳐 뻗어나가는 것이 있다. 흐름이 있다. 변화가 있고 유행이 있고 트렌드가 있다. 결정적으로 제자를 취직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그들은 배타적인 독점권을 갖는다. 비주류를 제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심사하고 배척한다. 그들은 중세의 길드와 같은 폐쇄성을 가지고 자신을 보호한다. 그들 중에는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다.

바우하우스도 처음 출발은 중세의 길드와 같은 퇴행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성의 어떤 핵심을 잡아버렸기 때문에, 이후 모든 건축이나 디자인과 상품들이 바우하우스를 모방했기 때문에 그들은 길드의 한계를 극복했다.

우리가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주전자나 의자나 가구들이 그 뿌리를 더듬어보면 바우하우스에 가닿기 때문에 그들은 주류가 된 것이다. 그들은 시스템을 만들었고 체계를 만들었고 모여드는 사람들을 먹여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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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본의는 변방에서 중심을 치는 것이다. 우리가 꿈 꾸는 것도 바우하우스와 같은 모델이어야 한다. 지적 사기에 지나지 않는 현대 철학이나 미학의 뜬구름 잡기를 지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체계화에 실패한 한의학이나 풍수지리 따위 변방 찌그러기들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또 대중성은 있으나 제자를 키우지 못하고 세력을 얻지 못하는 앙드레김의 지리멸렬함을 극복해야 한다.

종교가 그렇다. 대중성 있고 상업성 있다. 장사 된다. 그러나 가짜다. 그들은 운명적으로 비주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건재할 것이다. 왜? 주류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으니까. 일단 수요는 있으니까.

주류가 주류인 것은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2천년 전 부터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왔다. 흐름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도 있고 선교사업도 있다. 그러나 본질에서는 없다.

과학은 흐름이 있다.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르다. 앙드레김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옷을 짓는다. 흐름이 없다. 변화가 거의 없다. 패션은 유행인데 그는 변하지 않다. 발전하지 않는다.(이런 표현은 과장일 수 있다.)

르네상스는 과학에 근거하고 있다. 매너리즘은 르네상스에 눈이 휘둥그래진 신흥졸부들의 허영심에 근거하고 있다. 바로크는 왕실의 권위에, 로코코는 귀족의 취향에, 고전주의는 다시 과학자집단의 권위에 기대고 있다.

낭만주의는 신흥 부르조아들의 취향에 기대고, 사실주의는 다시 근대 과학의 권위에 기대고, 인상주의는 다시 누벨바그 예술가의 안목에 근거하고 있다. 가지쳐 나가는 법칙이 있는 것이다. 진짜이기 때문에.

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같은 소리를 반복해 왔지만.. 문예사조는 르네상스 이후 끈임없이 변신해 왔다. 19세기에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나타나는 패턴과 20세기에 네오리얼리즘에 이어 누벨바그가 나타나는 패턴은 같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이유는 그 안에 과학성이 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바로크와 로코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나타나는 순서는 사회의 발전단계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역사의 흐름과 동떨어진, 뚱딴지 같은, 혼자 노는, 일과성의 돌발적인 그것이 아니라 분명히 역사와 호흡을 같이 하는 것이다. 실제로 변화한 사회.. 그 사회가 요청하는 시대의 욕구에 대응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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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깨달음을 말한다. 누구는 말할 것이다. ‘그거 2500년 전 석아무개 시절부터 하던 그 이야기 아니오?’ 맞다. 2500년 된 낡은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미학을 말하는 것이다. 미학 역시 오래된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말한다. 사랑 역시 오래된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연장을 든다. 바우하우스가 공구다루는 법부터 가르쳤듯이 나는 구조론이라는 연장다루는 법부터 가르치기로 한다. 이것은 실질적인 것이다.

무엇인가? 칼릴 지브란, 파울로 코엘료, 이외수는 대중성과 상업성 있으나 역사의 흐름과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는지 알 수 없다. 접점이 단락되어 있다. 앙드레김이 그렇듯이 변방에서 혼자 놀고 있다. 왕따다.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아도 그 분야에서 외톨이면 왕따다. 코엘료가 다보스포럼에서 무하마드 알리와 대화한다면 이상하다. 문학가가 왜 권투선수와 대화해? 다보스포럼이 과연 코엘료가 낄 자리인가? 왕따니까 거기 가 있는 거다.

물론 필자의 이 말은 상징적인 것이다. 실제의 코엘료는 왕따이기는 커녕 자신이 당당한 주류라고 여길 것이다. 저 넘쳐나는 팬들과 추종자들을 보라고 큰소리칠 것이다. 그러나 숨길 수 없다. 이면에 숨은 한가닥 비애는 떨칠 수 없다.  

한국의 강남아줌마들이 자신이 당당한 주류라고 믿지만.. 뻐기고 다니지만 진보세력에 대한 그들의 적대적인 태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비주류의 깊은 원한이다. 복수심이다. 증오심이다. 그들은 자본의 주류일 뿐 역사의 비주류다.

진짜 주류라면? 당당하게 진보지식인, 모험가, 발명가, 개혁가, 예술가, 시민단체 인사와 사귀어야한다. 그러나 한국의 재벌들은 문화인을 후원하지 않고, 진보단체를 후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대한다. 왜? 숨길 수 없는 열패감 때문이다.

그들은 주류를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비주류다. 그들 자신이 잘 안다. 행동에서 나타난다. 악에 받친듯한 그 얼굴들 보라! 그들은 서구의 부자들과 달리 당당하지 않다. 그들은 상처받은 자들이다. 그런거 있다.

6년전 노무현 대통령 당선 직후 민주당 풍경이다. 진념, 이헌재 등 DJ시절의 경제인 몇이 국회에 출입하고 있다. 등 뒤에서 새파랗게 젊은 친노의원인지 보좌관인지가 한 마디 쏘아붙인다.

“야 요즘 세상 좋아졌네. 세상 좋아졌어. 감방 한번 안갔다오고 민주화운동 한번 안한 주제에 금뺏지씩이나 달고 말야.”

이 말 한마디로 민주당과 우리당은 완전히 적이 되어버린다.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다. 그것이 주류와 비주류의 원천적인 갈등이다. 가슴에 비수가 꽂혀버린 것이다. 이런 비극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그 말을 한 친노초선인지 보좌관인지는 .. '저 사람들이 주류고 우리는 비주류인데 뒤에서 볼멘소리 좀 하는거 뭐 어때?' 이렇게 생각하지만 듣는 사람은 반대다. '운동권 친노는 주류고 우리는 이제 토사구팽이고.. 끝났군!'

다섯명만 모여도, 아니 세명만 모여도 주류와 비주류가 구분되고 서슬퍼런 배제의 법칙이 작동을 개시한다. 어느날 자신은 정보소통의 라인에서 배제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상처받은 자들이 한나라당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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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인문학의 궁극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미학과 통한다. 미학은 조형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와 여러 공동체운동을 통하여 현실과의 접촉을 유지한다. 그런데 그 어느 지점이 끊어졌다.

그래서 철학은 허공에 떠버렸다. 한의학처럼 입지가 불안하다. 그 모든 것의 기반이 깨달음인데, 그 깨달음이 지금 주류에 속해 있는 누구에 의해서도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이다. 끈 떨어진 연이다.

그러므로 칼릴 지브란은, 파울로 코엘료는, 이외수는 충분히 기여하고도, 독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도 대접받지 못하고 저리 겉돌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구조론 역시, 달마실 역시 그런 아웃사이더 중에 하나다.

중심을 치지 못하는 비주류는 가치가 없다. 곧 죽어도 중심을 쳐야 한다. 그래서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도 파울로 코엘료도 이외수도 품어안는 거대한 동그라미를 그리려 하는 것이다.

왜 명품을 이야기하고, 지성을 이야기하고, 클래식을 이야기 하는가? 전부 얽어서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만들려는 것이다. 깨달음은 깨달음대로, 미학은 미학대로, 철학은 철학대로, 예술은 예술대로 따로논다면 실패다.

중심에 강단의 학계가 있고 변방에 종교계가 있다. 달마실의 대안모색이 그 변방에 구색맞추기로 꼽살이 끼면 실패다.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전부 복구해야 한다. 원형을 찾아야 한다.

깨달음의 완전성과  미학의 지성성과, 사랑의 대중성을 포용하고, 구조론의 도구를 활용하는, 바우하우스가 그랬듯이 철학에서 종교까지, 예술과 문화와 공동체운동까지 전부 통일하는 큰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바우하우스는 현대인의 철학도 삶도 문화도 건축도 인테리어도 디자인도 다 바꾸었다. 그렇게 세상과의 다각적인 접촉점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야 진짜다.

어떻게 예수와 석가가 한 뿌리인지 증명하고, 한국의 선비스타일과 일본의 젠스타일 서구의 현대적 스타일이 같은지를 증명한다. 접점을 규명한다. 끊어진 선을 잇는다. 그래야만 주류가 전복된다. 진짜가 시작된다.

www.drkim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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