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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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15 vote 0 2020.05.31 (18:19:51)

    철학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


      하버드 철학수업


 
    왜 인류는 이 모양 이 꼴이란 말인가? 왜 미국은 이렇게 찌질대고 있는가? 소련이 붕괴하자 독주하기는 커녕 도리어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라니. 철학의 죽음 때문이다. '하버드 철학수업'이라는 책이 있다. 실용주의는 철학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방법이라고 써놓았다. 그런데 하버드는 철학이 아닌 것을 왜 철학수업에서 가르칠까? 저자 윌리엄 제임스는 심리학자다. 심리학자면 심리학이나 할 것이지 왜 주제넘게 철학자인척 하는 가? 나사가 빠졌다. 반철학을 철학이라고 우기면 곤란하다. 


    안티가 있다. 반철학, 반이념, 반문화, 반문명, 반사회 세력이 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앞이 있으면 뒤가 있듯이 진보가 있으면 보수가 있다. 철학이 있으면 반철학도 있다. 그러나 다른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진리와 소피스트의 궤변은 다르다. 소크라테스는 진리체계 내부의 논리를 찾으려 했고 소피스트는 재판의 논리에 충실했다. 논리가 다르다는 말이다. 애초에 목적이 다른 것이다. 사건이 다르다.


    철학과 반철학, 이념과 반이념, 문화와 반문화, 문명과 반문명, 사회와 반사회는 목적이 다르고 사건이 다르다. 반철학을 철학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 보수를 진보라고 우기면 안 된다. 궤변을 진리라고 우기면 안 된다. 군자의 대의와 소인배의 이익은 목적이 다르고 사건이 다르다. 군자의 대의는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목적이고 소인배의 이익은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목적이다. 방향이 정반대다. 


    정답은 있다. 그것은 인류가 힘을 합쳐서 장기전을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기준을 세우고 원칙을 정해서 일제히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철학이다. 혼자 아는 것은 개똥철학이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지식이 철학이다. 공유하려면 공유할 수 있는 구조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실용과 경험은 공유되지 않는다. 그것은 팀원들 사이에 공유되는 포메이션 전술이 아니라 공유되지 않는 개인기에 불과하다. 


    무당의 굿은 과학이 아니고, 이발소 그림은 그림이 아니고, 뽕짝은 음악이 아니고, 중의학은 의학이 아니다. 물론 굿도 환자에게 위안을 주고, 좋교도 암환자의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된다. 가짜약도 위약효과가 있다. 도움이 되면 일단 써먹고 보자는 것이 실용주의다. 그렇다고 병원에서 푸닥거리 하랴? 철학의 핵심은 타인과 협력할 수 있는가다. 환자가 주술이나 종교에 빠져 있으면 의사와 협력할 수 없다. 개인의 영역이면 종교를 믿든 주술을 쓰든 상관이 없지만 타인과 협력하려면 환빠짓과 창조과학회 행동은 곤란하다. 음모론을 떠는 사람과는 지식을 공유할 수 없다. 그들을 적극 배척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실용주의가 도움을 주지만 장기적으로 일관성을 해친다. 개인의 문제는 실용주의로 풀 수 있지만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개똥철학이지 철학이 아니다. 철학은 인류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가면서 손발을 맞추는 것이다. 왜 이 시대에 다시 철학이 중요해졌는가? 과학의 진보 때문이다. 옛날이라면 적당히 분위기 맞춰주며 살면 된다. 교회를 다니고 중의학에 의존하고 무당에게 돈을 바치고 환빠짓을 해도 문제가 없다. 그런데 말이다. 요즘은 인터넷 때문에 환빠짓 하다가 외국 네티즌에게 비웃음을 사니 국가망신이다. 70년대는 유리 겔라가 초능력을 써도 받아들여졌다. 지금은 랜디 아저씨에게 바로 털리는 판이다.


    모든 사람에게 스마트폰이 보급되면 UFO 촬영이 급증할 것이라고 예견되었지만 실제로 스마트폰이 보급되자 UFO 목격담이 거의 사라졌다. 사진조작이 싱거워졌기 때문이다. 옛날에 사진조작을 하려면 자기집 지하실에 암실을 갖추고 있어야 했는데 지금은 누구나 3분만에 뽀샵을 할 수 있다. 누구나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자 거짓말의 수요가 감소했다. 시장이 붕괴되었다. 그렇다. 70억이 참여하는 단일시장이 열렸다.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이다. 백화점이 들어서자 지방의 암시장은 무너졌다. 초능력시장, 영매시장, 중의학시장, 기치료시장이 무너지고 있다. 다시 인류가 힘을 합쳐서 한 방향으로 가야 하는 문제가 노정되고 있다. 철학의 수요가 일어나고 있다. 


    코로나19의 교훈이다. 공자의 제자들은 분위기 파악을 하는데 노자의 무리들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히피짓을 일삼고 있다. 왜 70년대에 히피가 등장했는가? 100년 전 그때도 인류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자동차와 기관총과 비행기는 시골 촌놈의 심장을 뛰게 했다. 다들 흥분했던 것이다. 호르몬이 부추기니 전쟁은 필연이다. 새로운 수단을 남보다 앞서 선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인류를 벼랑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민족이 힘을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합리주의가 폭주를 낳았다. 남들이 힘을 합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뭉쳐야 한다. 내 깃발 밑으로 모여봐. 이랬던 거다. 제국주의 일본의 폭주, 히틀러의 폭주, 파시즘의 폭주, 문화혁명의 폭주가 그러한 강박의 산물이다. 우리도 뭉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어. 이런 과시다. 그 결과는 허무다.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의 재앙은 못 말리는 촌놈이 비행기를 처음 보고 흥분해서 난리를 친 것이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힘을 분산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으니 탈근대 사상이다. 그리고 백년이 지났다. 백년 전에 인류가 희미한 그림자를 보고 흥분해서 난리쳤던 그것이 지금은 현실화 되었다. 공포의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이제는 진짜 인류가 힘을 합쳐야 하게 되었다.


    진실을 말하자. 철학은 인류가 힘을 하나로 합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이다. 성급하게 힘을 합치려다가 파시즘이 나타나서 곤욕을 치렀다. 인류가 중앙에서 힘을 합친 것이 아니라 지방에서 할거하며 각자 패거리를 지었다. 두려워 하며 남들이 힘을 합치지 못하도록 방해할 작정이었다.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자는 히피사상의 대두는 당연한 수순이다. 그래서 반철학 운동이 일어난 것이 서구 구조주의 철학의 문화상대주의 사상에 미국식 실용주의와 경험주의다. 


    그때는 자동차와 비행기와 기관총이 민족 중심으로 힘을 합치게 만들었다. 지금은 인터넷과 인공지능이 인류전체가 힘을 합치게 유인한다. 다시 철학이 요구되고 있다. 합리주의로 돌아와야 한다. 단기적 성과에 치중하는 이명박과 트럼프가 실용주의 실험이 만든 괴물이다. 21세기에는 최적화된 의사결정구조를 갖춘 나라가 이긴다. 국민의 잠재력을 최대한 동원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나라가 경쟁에서 이긴다. 


    미국식 민주주의는 최악의 방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미국은 힘이 있고 힘을 쓰면 리스크가 따르므로 최선의 추구보다 최악의 방지가 맞다. 그러나 코로나19와 같은 인류의 위기는 우리에게 최선의 대응을 요구한다. 지금 미국은 과거 중국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 명나라는 북로남왜의 침략에 맞서 변경을 비우고 시간을 끄는 지연전술을 구사했다. 왜구가 상륙하는 바닷가에서 100리 안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다. 왜구는 약탈하러 돌아다니다가 민가를 찾지 못하고 지쳐서 섬으로 돌아갔다. 실용주의 성공이다. 그러다가 청나라에 망했다. 걸어서 오는 왜구와 말 타고 여진족이 같을 리 없다. 최악만 막자는 실용주의가 끝내 최악을 불러들인 것이다. 일회적으로는 실용주의가 먹히지만 적들이 전술을 바꾼다. 이제 최선의 대응이 아니면 안 된다. 요령으로 버티는 트럼프 기술은 중국이 천년을 써먹다가 망한 그 기술이다. 


    중원은 넓으니 백가쟁명 격으로 온갖 사상이 출몰하는 판이다. 어떤 하나에 올인하다가는 리스크 부담을 진다. 그런데 한국은 바닥이 좁다. 무엇이 옳은지 빠르게 실험할 수 있다. 의사결정속도가 빠르고 검증도 빠르다. 확실한 답을 찾아야 한다. 중국은 덩치가 크므로 일단 시간을 끌며 버티면 되지만 작은 나라는 정답이 아니면 바로 망한다. 한국인의 성질이 급해진 이유다.


    중화사상에 빠져 실용만 찾다가 망한 중국이나 미국우선주의에 빠져 삽질하는 미국이나 배가 불러서 오만해진 것이다. 최악만 피해보자는 편리한 사고방식으로 조금씩 밀리다가 최악의 외통수로 몰렸다. 위기 때는 긴장을 잘 하고 의사결정이 빠른 나라가 최선의 대응으로 이기는 법이다.


      

    참 나쁜 존 듀이


    독일 관념론 철학은 뭔 개소리냐 싶어서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게 구조가 빠진 구조론이라는 사실을 근래에 알게 되었다. 구조론의 기반은 수학이다. 구조론은 계 내부에서 에너지의 통제가능성을 추적한다. 에너지는 언제나 빠른 길을 간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선택할 수 없다. 왜? 에너지가 모자라기 때문에. 


    사건은 진행한다. 사건의 진행에는 동력이 필요하다. 그 동력은 어디서든 조달되어야 한다. 어디서 동력을 조달하지? 계 안에서 상대적인 에너지의 효율성에서 나온다. 그것이 엔트로피다.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만큼 효율성이 증대된 것이다. 사건의 엔진은 엔트로피를 뽑아 먹고 달린다. 그러므로 사건은 언제나 지름길을 간다.


    자동차는 연료탱크 용량만큼 갈 수 있다. 왜? 기름이 없어서. 왜 자동차는 지름길을 갈까? 정답. 다른 길을 선택한 자동차는 도착하지 못하므로 그렇게 보여진다. 자동차가 지름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코스를 잡은 자동차는 중간에 퍼져서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므로 지름길을 간 자동차만 파악된 것이다. 왜 인류의 역사는 그 길을 가는 것일까? 다른 길을 선택한 국가들이 모두 망해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선택은 자유지만 잘못된 선택을 하면 사라지게 된다. 


    독일 관념론 철학은 축과 대칭의 의사결정구조가 없다. 왜 자동차가 그리로 가는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정언명령이니 절대정신이니 정반합이니 개소리를 한다. 그런데 말이다. 구조론의 기본 'A면 B다.'이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곧 대칭에 근거하여 전제와 진술의 관계를 추적한다. 독일 관념론 철학도 물적 토대와 분리되어 허공에서 삽질하고 있지만, 나름대로 관계를 추적하여 장황하게 얽어놓았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깔끔하게 정리하지는 못했다. 추상화 하지 못한 것이다. 보편적인 구조를 보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추적하다가 난삽해졌다. 모든 사건이 공유하는 하나의 플랫폼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때마다 이상한 단어를 만들어낸다. 절대정신 같은게 있을게 뭐람. 아주 놀고들 있어. 초딩이냐? 역사는 절대정신의 자기실현과정이 아니라 계 안에서 에너지의 통제가능성이다. 물리학과 수학에 근거를 두지 않은 말장난이다. 절대정신이라고 하니 왠지 쪽팔려서 자유의 확대 운운 개소리로 물타기 한다.


    굳이 말하자면 절대정신이 아니라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른다. 물리학적 용어로 설명되어야 한다. 역사는 자유의 확대가 아니라 권력의 전개다. 권력은 수학이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엔트로피에 따라 앞단계가 뒷단계를 제한하는 원리다. 앞단계가 남겨놓은 에너지 한계 안에서 뒷단계가 작동한다. 그러므로 전제가 진술에 앞서고, 과거가 미래에 앞서고, 후건이 전건을 칠 수 없다는 인과율이 권력의 본질이다. 닫힌계가 작동하는 사건 안에서 먼저 일어난 결정이 다음 결정을 제한하는 것이 권력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된다. 먼저 정해놓은 규칙 안에서 새로운 규칙이 적용된다. 다음 규칙과 먼저 규칙이 충돌할 때는 먼저 정한 규칙을 따른다. 이것이 사회에서 자유의 확대로 나타난다. 이 규칙이 적용되면 물리적으로 무리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가게 되며 그만큼 자유가 넓어지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규칙과 규칙이 충돌하여 자유는 사라진다. 먼저 온 사람은 부동산 업자다. 땅을 팔고 손을 뗀다. 다음 건축주가 오고, 다음 점포가 들어서고, 다음 점장이 들어오고, 다음 알바가 들어오고, 마지막은 고객이 호구가 된다. 이 순서대로 착취당하는 피라미드가 만들어지며 이것이 한 방향으로 정렬하므로 자유가 확대된다. 순서가 거꾸로 되어 서로 충돌하면 자유는 사라진다. 고객이 알바를 털고 알바가 점장을 털면 망한다.


    이건 단순 물리학이다.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독일 관념론은 수학과 물리학이라는 근거를 대지 못한 이상한 구조론이다. 그런데 꽤 구조론적이기는 하다. 나름대로 관계를 열심히 추적하고 있더라. 계 안에서 에너지의 통제가능성이라는 한 방향으로 수렴되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흩어져서 실패했을 뿐이다. 


    절대정신은 없다. 절대가 상대에 앞서는 것이다. 선절대 후상대다. 절대의 닫힌계 안에서 상대의 대칭원리가 작동한다. 합리 안에서 실용이 숨을 쉬고, 진리 안에서 경험이 소용되고, 진보 안에서 보수가 따라붙고, 에너지 안에서 물질이 뛰어놀고, 이성 안에서 본능이 허용된다. 선을 넘어 본능이 이성을 침범하면 후건이 전건을 친 셈이니 에너지의 연결라인이 끊어져서 계는 작동을 중지하게 된다. 사건은 진행을 멈춘다. 시계는 태엽이 풀리고 자동차는 퍼져서 도로 한가운데 멈춰선다. 진보와 보수, 이성과 본능, 절대와 상대, 합리와 실용, 보편과 특수, 일원과 다원, 공자와 노자, 독일관념론과 프래그머티즘은 그런 관계다. 그 관계는 상하관계다. 


    존 듀이는 공자의 발가락 밑에서 때 정도나 할 수 있는 자다. 버려지는 용도로 쓰일 뿐이다. 일단 철학이 아니다. 프래그머티즘은 독일철학에 대한 빠큐에 불과하다. 그의 모든 언어는 한마디로 '조까'다. 실용이 어떻고, 자유가 어떻고, 경험이 어떻고 하지만 파편화된 단어의 투척일 뿐 내밀한 구조가 없다. 수학과 물리학에 근거하지 않은 철학은 불성립이다. 그냥 독일 철학의 한계를 야유하고 조롱한 것이다.


    미국인은 철학이 없다. 그 괴물이 트럼프다. 존 듀이가 제대로 교육했다면 어떻게 부시 괴물에 트럼프 괴물이 등장할 수 있다는 말인가? 특히 구조론에서 반대하는 심리주의 퇴행은 치명적이다. 심리학의 언어는 상당부분 검증되지 않은 것이며 진지한 논의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 말은 미아리 점술사나 하는 것이다. 과학가의 언어가 아니다. 축구시합에 지면 정신력 타령하는 것과 같다. 말장난이다.




    철학은 죽었다 

   

    유명 유튜버 올리버 쌤의 동영상에 의하면 미국인의 50퍼센트는 중 2 수준의 영문을 독해하지 못하는 사실상의 문맹이라고 한다. 글자는 읽는데 책을 못 읽는 사람들이다. 미국인의 25퍼센트가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을 믿고 있는가 하면 11퍼센트는 세계지도에서 미국의 위치를 찾지 못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매우 무식하다고. 그 이유는 학교 예산의 대부분을 지자체가 지원하는데 가난한 지역은 돈이 없어서 학교를 폐쇄하고 교사를 해고하는 중이라고. 교육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미국은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기본적으로 교육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 때문이다. 그들은 똑똑하고 많이 배운 사람들은 적대한다. 지식인은 대중을 이용해 먹는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존 듀이가 미국을 망친 것이다. 실용주의 사상의 폐해다. 미국인이 교육을 등한시하는 이유는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 땅이 넓다. 사람과 마주칠 일이 별로 없다. 꼴보기 싫은 사람은 피하면 된다. 금주법 시대에 미국 남자들은 술 먹고 아내와 자식을 때렸다. 그래서 금주법이 생긴 것이다. 왜 때렸을까?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자. 남편이 구타하면 부인은 이웃집으로 피신한다. 동네사람이 참견하게 되어 평판이 떨어진다. 미국은 땅이 넓어서 이웃집이 50킬로 거리에 있다. 시골에서 왕처럼 행세해도 주변에 말릴 사람이 없다. 평판공격이 불가능하다. 


    텍사스 사람들은 집집마다 지하실이 있는데 그 이유는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기형아를 지하실에 감춰둬야 하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문제는 왜 텍사스냐다. 이웃집이 50킬로나 떨어져 있으면 이성을 사귈 기회가 없어서 근친상간이 일어난다. 한국은 다르다. 한국인들은 그렇게 살 수 없다. 이웃과 적극 왕래해야 한다. 한국인이 교육에 열중하는 이유는 이웃과 왕래하면서 사람대접을 받기 위해서다. 못 배운 사람과는 대화하지 않는다. 못 배우면 괄시받는다. 그래서 한국 특유의 엘리트주의가 있다.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부대끼며 살다 보면 필연 그렇게 된다. 


    철학의 역사는 명목론과 실재론, 유물론과 유심론, 경험론과 합리론이 대결한 역사다. 실용주의는 '에라 모르겠다. 더 이상 따지지 말고 경험적으로 검증된 것만 취하자.'는 태도다. 이건 철학의 포기다. 미국은 기어이 철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망가졌다. 왜?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철학을 포기할 수 없다. 포기하면 죽는다. 땅은 좁고 사람은 많기 때문이다. 서로 부대끼다 보면 한 방향으로 정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2호선 신도림역 지하철을 타보면 누구나 깨닫는다. 철학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1호선에서 갈아타려고 우르르 쏟아져 내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동선이 엉켜서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텍사스 넓은 평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은 땅은 넓고 자원도 많고 돈도 많다. 세계의 두뇌를 뉴욕과  LA에 모아놓고 있다. 철학이 없어도 지장이 없다. 한국은 미국처럼 여유를 부릴 수 없다. 이기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하지 않으면 살아날 수가 없다. 실용주의가 명목론과 실재론, 유물론과 유심론, 경험론과 합리론의 이원론적 대결구조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양쪽의 견해 중에서 경험적으로 검증된 것만 취하겠다며 사실상 철학을 버리고 철학을 부정하는 반철학적 태도라면 구조론은 일원론이며 이 모든 것의 위에 존재하며 적절히 교통정리 하는 것이다. 수학의 자궁이니 그 모든 것에 선행하는 상부구조다. 


    구조는 어떤 하나를 지목하지 않는다. 왜? 하나는 존재가 불성립이기 때문이다. 명목과 실재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해당한다. 세상은 하드웨어인가 소프트웨어인가? 둘 다 아니다. 둘은 하나다. 하드와 소프트는 구분되지 않는다. 숫자 1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호두 한 알일까 아니면 그것을 지목하는 손가락 하나일까? 둘 다 아니다. 맹기를 두는 바둑기사는 바둑판과 바둑알 곧 하드웨어 없이 소프트웨어만으로 바둑을 둔다. 바둑판과 바둑알이 하드웨어라면 기보는 소프트웨어다. 어느 쪽이 진짜 바둑일까? 둘 다 아니다. 바둑은 머릿속에 있다? 아니다. 합의된 룰이 바둑이다. 바둑판은 바둑이 아니고 두고 난 다음의 기보도 바둑이 아니다. 바둑은 바둑판에 없고 바둑알에 없고 기사의 마음에 없고 두고난 다음의 기보에도 없고 합의된 룰에 있다.


    하드웨어도 진짜가 아니고 소프트웨어도 진짜가 아니다. 양쪽은 이원론적인 대칭구조를 보인다. 명목론과 유물론과 경험론이 한 편이고 그 반대쪽에서 실재론과 유심론과 합리론이 한 동아리를 이룬다. 둘 다 아니다. 어떤 가리켜 지목될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짜다. 명목과 유물과 경험은 돌멩이나 나무토막과 같은 작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 가족이나 국가나 인류나 신과 같은 큰 것은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유물론자는 작은 것에 집착하여 원자를 쪼갠다. 그러다가 소립자에서 막혔다. 그런데 큰 것을 설명하지 못하고 작은 것으로 도망친다는 사실이 웃기지 않는가? 웬 원자타령? 한 명은 딱 지목할 수 있지만 가족은 여럿이라서 손가락으로 지목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사건 안에서 의사결정단위가 있으면 존재가 있는 것이다. 유심론은 대상을 지목하지 않는다. 존재는 곧 의사결정의 단위다. 의사결정은 어떤 지목되는 대상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 안에 1은 절대로 없다. 1은 변화를 반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지해 있는 것은 계속 정지해 있고 움직이는 것은 계속 움직인다는 관성의 법칙 때문이다. 1은 계속 정지해 있으므로 반응하지 못한다. 반응하지 못하므로 1은 없는 것이다. 2는 움직이므로 1이 아니다. 진실을 이야기하자. 유물론은 관측자와 대칭된 관측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서 맞은 편에 관측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함정이다. 관측대상은 수동적 존재인 것이다. 유물론은 존재를 수동적으로 보는게 실패다. 거기서 곤란해진다. 그렇다면 에너지는? 공간은? 시간은? 정보는? 유물론은 추가로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한다. 이건 아니잖아. 직관적으로 아닌건 아닌 거다. 존재 따로, 물질 따로 에너지 따로, 공간 따로, 시간 따로, 정보 따로 각각 셈한다면 이 많은 것들을 누가 통합해주지? 그러므로 유물론은 존재론을 구성할 수 없다.


    유물론은 하나의 관점이다. 그런데 관측자와 관측대상을 나누어서 보는 이상한 관점이다. 유심론은 존재를 능동적으로 본다는 점이 각별하다. 유심의 심은 관측자 자신을 복제한 것이다. 유심론의 장점은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문제는 유심의 심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직관적으로 딱 봐도 유물론이 틀렸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반대로 1초 만에 유심론이 틀렸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둘 다 틀렸다. 존재는 의사결정의 단위다. 그러므로 의사결정의 주체인 심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유심론은 얼버무린다. 그런데 그 심의 정체가 뭐냐고? 있다는 것은 주체가 있는 것이다. 유물론으로 보면 주체는 작은 것이고 계속 쪼개야 하는데 양자역학까지 쪼개다가 막혀 있다. 유심론의 장점은 가족이나 국가와 같은 큰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얼버무리고 있다. 가족의 중심은 가장인가? 국가의 중심은 대통령인가?


    구조론은 존재가 어떤 둘의 사이에 있다고 본다. 존재는 유물론이 말하는 관측대상도 아니고 유심론이 말하는 관측주체도 아니고 둘 사이에서 상호작용으로 있다. 가족은 어디에 있는가? 유물론은 가족을 부정한다. 모든 추상적 존재를 부정한다. 원자처럼 작은 것을 긍정하고 국가처럼 큰 것을 부정한다. 유심론으로 보면 가장이 곧 가족이다. 이러다가 짐이 곧 국가로 된다. 구조론으로 보면 가족관계가 가족이고 국가시스템이 국가다. 의사결정주체가 곧 존재다. 유물론은 쪼개다가 망하고 유심론은 주체를 선언할 뿐 제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주체는 어떤 둘의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바둑은 바둑판에도 없고 바둑알에도 없고 기사의 마음에도 없고 바둑 기보에도 없다. 바둑은 두 사람 사이에 합의된 룰에 존재한다. 축구는 공격과 수비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존재한다. 모든 존재가 그러하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다. 20세기에 와서 철학은 죽었다. 유심론도 죽고 유물론도 죽었다. 명목론도 죽고 실재론도 죽었다. 합리론도 죽고 경험론도 죽었다. 변증법적 유심론도 죽고 변증법적 유물론도 죽었다. 철학이 죽고 반철학이 득세하니 상대주의, 경험주의, 실용주의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라 반지성주의다. 출학의 죽음 그 자체다. 그것은 지식에 대한 모독이다. 21세기에 죽었던 철학은 다시 살아난다. 정답은 구조다. 관계다. 사건이다. 동적균형이다. 에너지다. 존재는 둘의 관계이며 어떤 가리켜서 지목되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 양파껍질을 계속 까면 무엇이 나오는가? 순서와 방향이 나온다. 그것은 둘 사이에 있다. 존재는 그러한 사이다. 존재는 관계다. 의사결정단위가 존재다. 존재는 사건이다. 사건은 공간만이 아닌 시간 상에도 존재한다.




    유물론 유심론 구조론

   

    하버드에서 철학을 강의한다는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에 의하면 실용주의는 철학이 아니고 하나의 문제해결 방법이며 철학사의 양대산맥인 명목론과 실재론, 유물론과 유심론, 경험론과 합리론의 이원론적 대칭구조에서 결론을 내리지 읺고 철학 없이 그냥 쓸만한 것을 가져다 쓰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 20세기에 철학은 파산했다. 그리고 지금 재건되어야 한다. 구조론의 계획이 그것이다.


    크게 보면 유물론과 유심론이다. 유물론은 관측자가 있다. 관측대상은 물질이다. 그런데 존재는 의사결정 단위이므로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 찾으려고 물질을 쪼갠다. 거기에 찾는 사람이 있는 거다. 존재는 점차 수동적이 된다. 존재가 해야할 의사결정을 그 존재를 찾는 관측자가 하고 있다. 관측대상은 숨어서 자신이 발견되기만 기다린다. 의사결정하지 않는다. 의사결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존재일 수가 있지? 존재는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의 다섯가지 성질을 가진다. 이 다섯이 작은 원자 속에 숨어 있다는 말인가? 근데 그것들이 왜 그 비좁은 곳에 다 기어들어 갔지? 존재를 파헤칠수록 존재는 수동적이 되고 작아진다는 모순이다. 존재가 존재답지 않은 것이다. 존재는 의사결정할 수 있어야 하므로 에너지를 틀어쥐고 공간을 차지하며 시간에 올라타고 정보를 전시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지? 맹랑하다. 설사 유물론이 궁극의 입자를 찾았다 한들 그 궁극의 입자가 어떻게 에너지를 가지고 물질의 형태를 취하며 공간으로 연결되고 시간으로 이행하며 정보로 나타나는지는 첩첩산중이다. 문을 하나 열었더니 또다른 문이 나온다. 계속 노가다를 해야 한다. 이건 아니다. 


    유물론이 관측대상에 매몰된다면 유심론은 관측자 자신을 반영한다. 그런데 관측자가 반드시 사람을 의미하는건 아니다. 존재는 반응해야 하고 의사결정해야 하며 그러려면 상호작용 대상이 있어야 한다. 1은 존재가 불성립이다. 그래서 추가되는 것이 관측자다. 인간이 인격을 가지듯이 존재도 어떤 격을 가져야 한다. 그 격은 앞에서 말한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를 아우르는 성질이다. 존재가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심이다. 유심론은 결국 관측자가 자신을 투사한 것이다. 


    구조는 관측자와 관측대상의 관계다. 인간이 물질을 관측하면 셋이 존재한다. 일단 인간이 있고 물질이 있고 관측행위가 있다. 둘이면 상대성이 성립하고 셋이면 절대성이 성립한다. 관측자의 작용과 관측대상의 반작용이 있다. 둘이 합쳐서 하나의 상호작용이 있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을 아우르는 상호작용의 관측행위가 하나의 사건이고 사건은 곧 존재다. 의사결정이 존재다. 그러므로 구조로 보면 가족도 있고 국가도 있고 인류도 있고 신도 있다. 어떤 의사결정이 있다면 존재가 있다. 


      

    이념은 가짜, 에너지가 진짜다


    근대에 복지제도를 처음 실시한 사람은 보수의 우상 비스마르크다. 그는 일관되게 전쟁을 반대하고 외교적 수단에 의한 평화를 주장했다. 다만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하고 보불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치밀한 협상으로 외교문제를 풀어간 수완가였다. 비스마르크를 보수로 보는 근거는 그가 체제의 안정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권력자라면 누구나 그렇게 한다. 그것이 권력의 생리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권력이 붕괴되니까. 빌헬름 2세가 권력을 쥐자 비스마르크와 결별하고 노동자와 자유주의자를 우대하다 망했다. 그렇다면 빌헬름 2세는 진보주의자인가? 천만에. 무능하면서 주제를 모르고 대중들에게 아부한 무개념에 불과하다. 황제를 보필하는 신하 입장에서는 누구든 비스마르크처럼 된다. 비스마르크는 그냥 공무원이 공무원 짓을 한 것이다. 유능한 공무원이긴 했다. 


    박정희는 원래 진보주의자였다. 그러나 권력을 쥐자 권력의 생리에 굴복했다. 대개 그렇게 된다. 권력을 내려놓으면 일시적으로 혼란이 일어나지만 그래도 국민을 믿고 전진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노무현이 제 손으로 권력을 내려놓았다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똑똑히 봤지 않은가? 


    보수가 그들의 우상인 비스마르크와 결별하고 복지제도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보수이념이기 때문이 아니다. 복지를 하면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가진다. 이번에는 또 뭐 해줄 거지? 이렇게 되어 다들 청와대를 주목한다. 이거 곤란하다. 막아야 한다. 국민이 똑똑해지고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 그들의 실력없음이 들통나기 때문이다. 보수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있자는 주의다. 가만있기로 룰을 정하면 무능해도 면피가 된다. 대통령은 원래 가만 있는 직업이야. 세월호가 침몰해도 청와대에서 가만 있는게 대통령이지. 이렇게 되어야 무능을 감출 수 있다. 보수는 그냥 실력이 없는 거다. 


    다른 이유도 있다. 보수꼴통은 자수성가한 사람이 많고 그들은 잘난 척하고 싶어한다. 국민이 자기를 쳐다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대통령보다 더 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질투하는 것이다. 내가 재벌회장인데 대통령이 나보다 인기가 있네. 배가 아프네. 이런 거다. 이문열부터 김동길까지 유명인사들이 대거 보수로 가는 이유가 그것이다. 심지어 연예인도 좀 떴다 싶으면 보수의 품에 달려가 안긴다. 


    박근혜는 왜 복지를 한다고 했다가 집어치웠을까? 통일대박을 떠들다가 왜 개성공단을 철수했을까? 그러면서 미국이 반대하는데도 뜬금없는 친중행보는 왜 했을까? 박근혜가 복지공약을 철회한 것은 귀찮아서다. 일을 하려면 수요일에도 출근해야 한다. 게을러서 하지 않은 것이다.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포기한 것이다. 중국에 간 것은 시진핑 옆에 서 있으면 TV에 그림이 잘 나올 것 같아서다. 일은 하기 싫어도 가만히 미소 짓고 사열대에 서 있는 것은 또 에너지가 나오지. 이건 할 수 있어. 


    지금 우리가 보수이념으로 알고 있는 것은 레이건 시대 몇몇 미국넘이 만들고 조갑제와 뉴라이트 일당이 수입한 족보에 없는 것이다. 무뇌진보가 개소리를 하는 이유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 분야를 잘 모르기 때문에 마음껏 떠드는 것이다. 이공계 일베가 그러한 진보 일각의 행태를 혐오한다. 실무를 하는 사람은 승진이 안 되고 인맥을 가진 사람이 출세하는 현실에 배알이 꼴려서다. 질투는 보수의 힘이다. 신자유주의가 유물론에 기초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건 나무위키에 나온다. 유물론자들은 정신적 요소를 부정한다. 기계를 다루는 실무능력만이 진실하다. 인문학이 제공하는 도덕성이나 설득력, 교감능력은 부정한다. 그런게 어딨어?  인문계 출신이 뒷구멍으로 호박씨나 까는 주제에 도덕적인 척하기는? 우리처럼 장비를 다루는 사람은 부패하려고 해도 불능이지만 인맥으로 먹고사는 인문계는 싸그리 다 부패했잖아. 내 말이 틀려? 이런 식이다. 그들은 기계와 장비를 다루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마찰을 빚는다. 지도부가 죄다 이공계 출신인 중국이 그렇다. 국제무대에서 중국은 신사적이지 못하다. 힘을 숭배하는 유물론자들이 정치를 만지고 있으니 망하는 것이다. 보수주의는 그냥 편하게 가자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며 그게 근래에 유행한 이유는 소련이 몰락했기 때문이다. 소련이 노동자를 우대하므로 소련에 맞서려면 노동자를 우대해서 노동계급이 공산주의를 추종하지 못 하도록 사전에 막아야 했던 것이다. 소련이 망하자 방해자가 없어져서 그냥 하고 싶은 짓을 한 것이 신자유주의다. 일단 만만한 일본부터 밟아주고 한국의 IMF를 방조하고. 거침없다. 그냥 강자가 폭력을 쓴 것이다. 왜? 그래도 되니까. 힘이 있으니까. 그것은 이념이 아니다. 그 결과는 퇴행이다. 미국은 이류국가로 되고 있다.


    그렇다. 세계는 반지성, 반문화, 반철학, 반이념으로 달음박질하고 있다. 구조론의 마이너스 원리다. 점차 사회의 낮은 그룹이 주도권을 잡게 되고 그들은 반지성, 반문화, 반철학, 반이념으로 달려가며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사회가 발전해서 그래도 될 정도로 풍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류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는 모두가 평판에 신경 쓰며 점잔 빼고 눈치를 보며 예의를 지키는 긴장된 사회가 아니라 마음껏 사고치고 마음껏 개판 쳐도 되는 그런 사회일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 발가벗고 대로를 걸어 다녀도 제지받지 않는 사회가 이상적인 에덴동산이 아닌가? 선진국은 누드비치를 만들었다는데. 우리도 성진국 일본을 본받아서 성인비디오 연기자가 공중파에 당당하게 출연해야 하는거 아닌가? 


    착하게 산다는 것은 긴장된 상태에서 눈치를 보고 조심하다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며 이상적이지 않은 것이다. 하층계급은 그래도 된다. 뒷골목 양아치와 날라리는 그래도 된다. 그러나 엘리트는 긴장해야 한다. 20세기는 하층계급 위주의 반지성, 반문화, 반철학, 반이념, 반중앙의 시대였다. 변방의 시대가 오래가지 못한다. 보수는 그냥 반이념이다. 실용주의는 반철학이다. 히피는 반문화다. 트럼프는 반지성이다. 탱자탱자 잘 놀았다. 엘리트와 하층계급의 대결은 영원하다. 21세기는 국가간, 인종간, 성별간, 문명간 장벽이 무너지고 70억이 하나의 의사결정구조로 통합되면서 다시 엘리트가 주도권을 잡고 하층민이 엘리트를 모방하는 시대로 간다. 왜? 경쟁이 국가 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내부지향이냐 외부지향이냐다. 미국 안에서 엘리트와 비엘리트가 대결하면 반문화가 이기고, 반철학이 이기고, 반이념이 이기고, 반지성이 이기고, 반연방이 이긴다. 그러나 대결이 국가 간에 벌어지면 반대로 된다. 


    스위스인은 전 국민이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다. 독일인도 비슷하다. 교약있는 척하는 문화다. 코로나19에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가 잘 대응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교양이 없어도 교양이 있는 사람에게 맞춰가는 문화가 있다. 개판을 치지 않는다. 영국은 5G가 코로나바이러스를 전파한다며 50곳에 불을 질렀을 정도로 멍청하다. 영국인은 왜 그렇게 바보일까? 아이큐는 똑같다. 하층민이 사회에 발언하는 방법은 뭔가 사고를 쳐서 상대방의 대응을 알아보고 자기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일단 집적거려 보는 것이 하층민 특유의 반문화 행동이다. 영국인과 미국인이 특별히 더 멍청한게 아니고 특별히 반지성주의 습관에 익숙한 것이다. 


    존 듀이가 미국교육을 망친 결과로 미국은 군사분야와 몇몇 첨단분야를 제외하고 후진국이 되어 있다. 국민의 50퍼센트가 중학교 2학년 수준의 책을 읽지 못하는 반쯤 문맹국가로 되었다. 미국은 실패했다. 너무 잘 나가면 이렇게 된다. 


      

    반철학 반이념 반문화 반사회 반지성 


    갓갓은 건축학과다. 조주빈 인하공전이다. 부따 강훈은 과학기술대학교다. 우연의일치일까? 천만에. 인문학을 경시하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공감능력, 소통능력을 가르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이들은 장비를 다루는 자들이고 범죄는 장비가 저질렀지 자기들이 저지르지 않았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텔레그램이 잘못했지 내가 잘못했나?’ 이런다. 사람을 직접 대면하지 않으면 느낌이 전달되지 않는다. 25년 전 PC통신 시절부터 이런 식의 오해와 마찰은 온라인에 흔했다. 상대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내가 성의있는 말을 해도 모니터는 무표정이다. 본능적으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분노가 증폭되는 구조다.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의 교육이 잘못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대중들에게 아부하는 비겁한 교육은 퇴출되어야 한다. 루소 이래 만연한 가르치지 않는게 교육이라는 식의 자연주의 개소리는 집어치워야 한다. 교육의 근본에 대해서는 엄격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지식의 주입은 당연히 교육이 아니다. 공감하고 소통해야 교육이다. 그것은 저절로 되는게 아니다. 단체생활을 경험해봐야 한다. 집단에 소속감을 가져야 한다. 한 명이 잘못해도 모두에게 피해가 간다는 사실을 겪어봐야 한다. 땅이 넓은 텍사스 평원에서는 그런 일을 경험할 일이 없다. 골치아픈 것은 피해 가면 된다. 총을 들고 내 근처에 못 오게 하면 된다.


    “존 듀이 교육에 대해서 4가지의 관점이 존재한다. 첫째. 교육은 생활이다. 둘째, 교육은 성장이다. 셋째, 교육은 계속적인 경험의 재구성이다. 넷째, 교육은 사회적 과정이다.[웹 검색]”


    이런 개소리를 태연하게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충격적이다. 위 문장에 의미있는 단어가 하나라도 있나? 그냥 교육은 교육이다 하는 동어반복이다. 하나마나 한 소리다. 아무런 관점이 없다. 존 듀이는 뇌가 없는 사람이다. 교육이 생활이라는 말은 생활은 누구나 하는 거니까 내버려 두라는 말이다. 교육은 성장이다? 그럼 성장이지 쪼그라드는 거냐? 경험의 재구성? 단순 노가다라는 뜻이다. 하긴 선생님이 쓸데없는 잡무로 노가다를 많이 하지. 교육은 사회적 과정이다? 그럼 사회화가 교육하지 고립이 교육이냐? 이는 단순히 교사에게 아부하는 발언에 불과하다. 존 듀이는 그럴듯한 표정만 짓고 있는 자다. 그가 미국을 망쳤다.


    “비판점은 첫째, 과정중심과 교육방법의 변화를 강조하지만 구체적인 교육목표, 내용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둘째, 아동의 적극적인 자유를 옹호하지만 어느 정도의 자유가 허용되는지에 대해 의문점을 남긴다. 셋째, 교육목적이 계속적 성장이나 인간의 성장은 개별인간마다 방향과 수준이 다르기에 개별적 경험에 의해 설명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성장의 방향에 대한 논의가 제기될 수 있다.”[웹 검색]


    존 듀이의 교육론에는 무엇을 가르칠지에 대한 방향이 없다. 인간은 원래 부족민으로 태어난다. 부족원은 50명을 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가르치면 50명 정도가 사는 부족민으로 자란다. 그러나 지구촌 인류는 70억이다. 야만과 문명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문명에의 진입은 교회에서 세례받는 것과 같다.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마사이족은 절대 시체에 손을 대지 않는다. 길거리에 있는 시체를 운반하라고 하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다. 다른 부족사람을 데려오지 않으면 마을에서 시체를 치울 수 없다. 그러나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면 1초만에 바뀐다. 당장 마을의 시체를 옮긴다. 그것이 교육이다. 교육은 그룹을 갈아타는 것이다.


    부족민의 관습과 문명사회의 규칙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기다. 내가 어떻게 천한 대중들과 섞일 수 있느냐며 평생 버스나 지하철을 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많더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오바마는 계단을 뛰어오르는데 황교안은 복도를 거들먹거리며 걷는다. 교육을 하지 않으면 이렇게 야만해지는 것이다. BCG 불주사는 강제로 맞게 해야 한다. 놔두면 안아키 된다. 2층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개가 있다. 강제로라도 내려오게 해야 한다. 개통령 강형욱은 그냥 개를 안고 계단을 내려왔다. 10초에 해결될 문제를 견주가 몇 년 동안 끙끙댄 것이다. 교육은 커다란 선택이다. 인생을 함께 할 그룹을 갈아타는 거다. 철학이냐 반철학이냐, 문명이냐 반문명이냐, 문화냐 반문화냐, 지성이냐 반지성이냐, 사회화냐 반사회적이냐다. 여기서 자신의 부족을 선택해야 한다. 놔두면 인간은 당연히 고립되어 반사회적으로 된다. 자동진행이다. 인간은 원래 혼자이므로 특별히 교육되지 않으면 당연히 고립을 선택하는 것이다. 


    뇌과학이 답을 제시한다. 인간은 원래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할 때는 반사회적 행동을 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것은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한다. 다른 사람을 타격하여 상대의 반응을 보고 자기 행동을 정한다. 응수타진 들어간다. 사회를 공격하고 사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한다. 북한을 집적거려서 김정은이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 한다. 정기적으로 반공궐기대회 열어조야 한다. 교육된 사람만이 이러한 원시의 생존본능에서 탈출할 수 있다. 보수꼴통은 본능을 따른다. 이념으로 포장하지만 거짓말이고 인간은 원래 그렇게 태어난다. 젊은이가 진보인 것은 선배와 동료에게 배우려는 태도다. 늙은이가 보수로 가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기 때문이다. 보수가 정상이고 진보는 특별히 훈련된 사람에만 해당되는 귀한 것이다. 한국에서 진보가 득세한 이유는 80년대부터 고등교육이 강화되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교육의 목적은 집단의 의사결정그룹에 드는 것이다. 엘리트가 되고 리더가 되는 것이다. 누구나 일생에 한번쯤 가장이 되든, 병장이 되든, 주방장이 되든 다수를 대표하여 의사결정해야 하는 장이 된다. 훈련해야 한다. 철학과 반철학, 사회와 반사회, 이념과 반이념, 지성과 반지성, 문명과 반문명, 중앙과 반중앙 사이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서 집단의 의사결정그룹에 들어야 한다.


    배워서 그룹 내부에서 통하는 올바른 언어를 얻어야 올바른 만남이 가능하며 올바른 만남이 올바른 호르몬을 나오게 하고 모든 것은 호르몬에 달렸다. 교육이 호르몬을 바꾼다. 보통은 자신의 결정이라고 착각하지만 인간은 그냥 호르몬이 시키는대로 한다. 호르몬은 50명 정도가 정글에서 사는 부족민의 삶에 맞추어졌다. 인간은 원래 잘못 만들어진 미완성의 존재다. 그렇다고 원시의 정글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고 산업사회에 적응해야 한다. 


    집단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과 수평적인 대화가 되게 하는게 교육의 목적이다. 인터넷에 최신 농업기술이 공개되어 있지만 한국 농부는 영어를 모른다. 이런 소통의 장벽을 깨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교육의 근본은 지식을 주입하는 플러스가 아니라 만남의 방해자를 제거하는 마이너스다. 때로는 물리적인 방법으로 장벽을 돌파해야 한다. 개인의 행복이나 안전에 매몰된 존 듀이의 무뇌교육이 코로나19 앞에서 미국의 우왕좌왕하는 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엘리트의식이 없는 트럼프와 그의 주변인들이 미국을 망치고 있다. 존 듀이가 반지성주의 원흉이다. 지성과 문명과 진보와 사회와 철학과 문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부족이다. 교육은 부족을 갈아타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 마사이족이 다른 종족으로 소속을 바꾸는 것이다. 다른 의사결정구조로 진입한다.


    지성족, 문명족, 진보족, 사회족, 철학족, 이념족, 문화족에 들어야 한다. 반지성족, 반문명족, 반진보족, 반사회족, 반철학족, 반이념족, 반문화족에 들면 교육의 실패다. 그런데 놔두면 당연히 반족에 소속된다. 안티그룹에 들어간다. 에너지 고갈 때문이다. 이는 엔트로피의 법칙이라서 어김이 없다. 미끄럼틀에서 미끄러진다. 관성의 법칙이다. 버스가 시동을 걸면 뒤로 쏠리고 멈추면 앞으로 쏠린다. 사회가 진보하므로 가만있으면 모두 버스 뒷좌석에 가서 앉아있다. 고교생 일진이 아니라도 다들 뒷자리로 모인다. 고립된 개인은 언제나 나쁜 선택을 한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야 하고 그 손을 잡아야 한다. 해본 사람이 할 수 있다.


      
    철학은 잔인하다


   '천지불인'이라고 했다. 철학은 잔인하다. 진리는 잔인하다. 사정 봐주는 것이 없고 융통성이라곤 없다. 노자든 장자든 마르크스든 플라톤이든 존 듀이든 누구든 살면서 많은 말을 했을 터이니 더러는 맞는 말도 있고 틀리는 말도 있을 것이다. 아니다. 다 틀렸다. 일단 언어가 아니다. 언어가 아니므로 논외다. 그것이 철학의 세계다. 철학은 처음 와서 언어를 세우는 작업이다. 언어가 틀렸으면 말하지 못한다. 말하지 못하니 논할 것도 없다. 원칙을 세우고 기준을 정하는 것이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거든 전부 버리고 새로 작업해야 한다. 노자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르겠다는 말이다. 모르면 닥쳐! 노자에게는 발언권이 없다. 언어가 없으니 말할 수 없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 했다.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므로 노자는 닥쳐야 한다.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을 때는 언어를 건설해야 한다. 언어는 둘이 공유하는 프로토콜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무엇을 공유할 수 있는가? 공자의 의와 예는 처음 만난 사람이 공유해야 하는 프로토콜이다. 인, 지, 의, 신, 예를 공유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서로 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


    진리 앞에서 정직하게 맞선 사람은 오직 공자와 니체가 있을 뿐이며 니체의 초인사상은 개인의 관점이니 소승의 부류이고 퇴계의 부류라 하겠다. 개인의 관점에 언어는 소용없다. 혼잣말은 말이 아니다. 혼자 도를 닦든 초인이 되든 삽질을 하든 누가 물어봤냐고? 초인이든 슈퍼맨이든 외계인이든 그게 지 사정이지 왜 내 앞에서 얼쩡거린다는 말인가? 두 사람 사이에서 공유되는 프로토콜이 없다면 당최 말을 꺼낼 이유가 없다. 행복과 불행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아무 차이도 없다. 성공과 실패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아무 차이도 없다. 그러므로 말하지 말라. 행복이든 불행이든 성공이든 실패든 차이가 없으므로 말하지 말라. 두 사람이 프로토콜을 공유하면서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 지, 의, 신, 예라는 프로토콜을 공유하면서 나의 행복은 너의 불행이라거나 나의 성공은 너의 실패라거나 이렇게 사건으로 엮어지면 비로소 말할 수 있다. 사건 안에서 관계를 통해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공유하는 그것이 없다면 만날 수 없다. 만나지 못하므로 말이 필요없다. 


    사랑과 사랑하지 않음은 똑같다. 어떤 사람이 수석을 사랑한다. 혹은 분재를 사랑한다. 또는 도자기를 사랑한다. 등산을 사랑하고 낚시를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한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아무 차이가 없다. 오직 내가 네게 사랑이라는 형태로 개입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의 사랑이 너의 사랑으로 복제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공유하는 사건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혼자 사랑하든 삽질하든 행복하든 성공하든 그러다가 뒈지든 말든 말하지 말라. 너와 내가 그것을 공유할 때 비로소 언어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초인이든 슈퍼맨이든 외계인이든 그것은 내 사정이 아니다. 닥쳐! 


    사건에 의해 두 사람 사이에 공유되고 대칭되고 복제되므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므로 소승은 발언권이 없다. 퇴계는 발언권이 없다. 니체는 발언권이 없다. 닥쳐야 한다. 자기소개는 필요 없다. 나의 사랑이 너의 사랑으로 복제되는가? 나의 성공이 너의 실패로 침범되는가? 여기서 언어가 출발한다. 철학은 언어를 일으키는 작업이다. 이 세계는 치열하다. 중의학 같은 것을 떠들면 안 된다. 물론 치료는 된다. 그런데 말이다. 중의학이든 한의학이든 언어가 없다. 말이 안 통한다. 서구인들은 비웃는다. 치료가 된다는 것은 플러스 관점이다. 과학은 마이너스에 의해 작동한다. 하나가 틀리면 다 틀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헛점이 노출되면 통째로 폐기된다. 아예 상대해주지 않는다. 의사소통은 불성립이다. 중의학 언어는 양의학 관점에서 언어가 아니다. 뭐가 허하고 뭐가 습하고 그런 단어 안 쓴다. 사람 취급도 안 한다. 아주 원숭이 보듯 한다. 그런 개수작을 지속하는 한 서구인들은 동양인을 멸시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동등한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사람으로 안 본다. 말이 통해야 사람이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말을 잘라버린다. 그것이 철학의 세계다. 철학이 다르면 언어가 공유되지 않는 것이다.


    존 듀이 말 중에 맞는 말도 더러 있겠지만 애초에 그건 철학이 아니다. 방향이 틀렸다. 하나가 틀리면 전부 틀린 것이다. 그것이 사건의 작동원리다. 부품 하나가 빠져도 차는 가지 못한다. 코드 하나가 잘못되어도 프로그램은 작동을 멈춘다. 그러므로 진지한 사람의 대화상대가 될 수 없다. 경험이나 실용 같은 것은 철학의 포기다. 양의학으로 못 고치니 한방으로 해보겠다는 말과 같다. 그것도 때로는 먹힌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의 한계요 인류의 실패다. 그렇다. 인류의 도전은 더러 실패하기도 한다. 실패한다고 포기하면 그게 야만이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것이다. 철학은 양보가 없다. 타협이 없다. 사생결단이다. 진리는 하나이며 일원이며 이원은 없다. 2면 버금이니 차다. 2차론이라고 해야 한다. 다원론이라는 단어도 불성립이다. 다양이면 이미 원을 포기한 것이다. 일원론만 성립되고 나머지는 언어가 아니다. 개소리다.


    합리와 실용, 진보와 보수, 진리와 경험, 일원론과 다원론, 진화론과 창조론, 과학과 종교는 애초에 언어가 다르다. 과학자와 종교인의 대화는 불성립이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화는 불성립이다. 철학과 처세술은 대화가 불성립이다. 공자가 철학이면 노자는 철학이 아니라 처세술이다. 원론과 응용은 다른 것이다. 형이상과 형이하는 다르다. 모르겠는가? 지혜를 합치려면 프로토콜을 맞추어야 하므로 문명의 기준은 하나뿐이다. 개인이 각자 구석에 짱박혀서 요령껏 해 먹는 것도 좋으나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1+2=3이 수학이지 '얼마까지 보고 오셨어요?' '얼마까지 맞춰드릴까요?' 이런건 수학이 아니다. 프래그머티즘은 철학의 죽음을 선포한 반철학이지 철학 아니다.


      
    철학의 실패      


    나는 철학에 흥미가 있었지만 정작 철학서적을 많이 읽지 못했는데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번역이 잘못되었는지 뭔가 문법에 맞지 않아서 맥락을 따라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둘은 너무 개똥 같은 소리를 써놔서 읽어줄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준 이하의 멍청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다니. 바보냐? 오래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바보가 맞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모국어가 안 되는 자들이었다. 바보가 아닌 사람을 한 명 발견했는데 그가 공자다. 


    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지능이 떨어진다. 특히 어휘력이 나쁘다. 어떤 철학자의 주장이든 철학서적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든 구절을 낱낱이 밑줄 그어 반박해줄 수 있다. 도무지 책을 읽을 수가 없다. 한 구절을 읽기도 전에 반박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기 때문이다. 책장을 덮고 생각에 잠기게 된다. 구조론은 그 결실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상대가 반박할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는 애초에 입에 담지도 말아야 한다. 컵에 든 물을 앞에 두고, 반이나 있잖아. 아냐! 반밖에 없잖아. 이런 식으로 논쟁하면 안 된다. 그것은 초딩들의 유치한 반사놀이다. 반드시 상대가 반박할 수 없는 말을 해야 한다. 간단하다. 동사를 쓰면 반박되고 명사를 쓰면 반박할 수 없다. 명사로 말해야 지식인이다. 문장이 동사 위주로 가면 책을 던져버려야 한다. 


    예컨대 흄의 멍청한 이야기를 보자. 사과가 땅에 떨어졌다면 중력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음에도 반드시 사과가 땅에 떨어진다고 볼 수 있을까? 인과관계를 긍정할 수 있을까? 이런 머저리같은 이야기를 흄은 진지하게 하고 있다. 문제는 윌리엄 제임스다. 이 멍청한 이야기를 두고 반박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바보 인증이다. 당연히 반박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과냐다. 떨어지든 날아가든 상관없다. 누가 실로 동여매 놓는다면 사과는 계속 붙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동시성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시간차는 없다. 사과가 붙어 있을 때도 중력은 작용한다. 사과는 중력에 포함된다. 이런 거다. 사과는 사과나무의 일부인가? 그렇다. 포함된다. 그런데 사과는 어디에 있지? 유전자 속에 있다. 지금은 봄이고 아직 사과는 열리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사과를 먹으려면 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다. 여기서 봄의 사과꽃과 가을의 사과열매 사이에 성립하는 인과관계는 시간적 선후가 있지만, 그 시간은 사람이 과수원에 방문하는 시간이고 본질은 사과의 유전자다. 사과는 유전자 속에 숨어 있는 것이며 사람의 눈에 띄는게 가을이다. 즉 사과는 결과를 확인하기 전에 원인 속에 이미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과가 떨어지지 않아도 즉 본드로 사과를 붙여놓았어도 인과관계는 성립한다. 


    데이비드 흄은 아주 머리가 나쁜 것이다. 이런 밥통들과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자들의 글은 문장의 첫 구절부터 하나하나 다 반박해줄 수 있다. 시험을 치기 전에 당신이 빵점을 맞을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 공부를 안 했으니까. 컨닝을 하면 되잖아. 이건 논외다. 규칙위반이므로 배제한다. 실력이 평가된다고 가정하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원인 다음에 결과가 온다는 망상을 버려라. 원인과 결과는 동시에 발생하지만 인간이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사건 안에서 결과는 원인에 포함된다.


    철학자들의 99퍼센트는 이런 개소리를 하고 있다. 옳고 그르고 간에 논의가치가 없다. 귀신은 없다. 천국은 없다. 내세는 없다. 영혼은 없다. 그것은 논의할 가치가 없다. 그런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 어휘가 가리키는 구체적 대상이 없다. 언어가 가짜인데 무엇을 논한다는 말인가? 한의사의 괴상한 용어와 같다. 어디를 보하고, 습열이 있고, 음허가 있고, 양기가 어떻고, 사열이 있고, 조열이 있고, 기가 상역하고 어쩌고 하는데 아무런 뜻도 없는 단어다. 그런 가짜 말을 쓰면 안 된다. 가짜는 대개 동사로 쓰인다. 동사는 변화를 반영하고 관측자가 움직이면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동사를 명사로 쓰는 사람들이다. 빛이 움직이면 그림자인데 명사로 표현하므로 헷갈리는 것이다. 그림자가 있는 게 아니고 빛의 변화가 있다. 가짜 언어들은 모두 동사를 명사로 틀어서 사람을 속이는 같은 수법을 쓴다.


    철학의 역사 2천5백 년간 허다한 견해가 있었지만 대개 이쪽의 헛소리로 상대의 헛소리를 반박하는 것이었다. 둘 다 헛소리다. 읽어줄 가치가 없다. 대부분 국어가 안 되는 사람들이 언어에 대한 이해부족을 드러낸다. 어떤 사실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게 아니라 그냥 모국어를 잘못 사용한 것이다. 유아가 말을 떼지도 못했다. 100명의 철학자가 있다면 그중에 말을 배워서 능히 쓰는 사람은 없다. 말을 배우지 못했는데 무슨 철학을 하겠는가? 하긴 말을 누가 가르쳐 주겠는가? 대개 언어의 모순을 사실의 모순으로 착각한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색깔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뇌가 없는 사람이 지식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바보는 말한다. 진리는 없고, 있어도 알 수 없고, 알아도 전달할 수 없다고. 머리가 나쁜 사람은 당연히 그러하다. 언어를 익히지 못했는데 어찌 진리를 알고 타인에게 전달한다는 말인가? 숫자가 없는 부족민이 수학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부족민에게 수학은 없고, 있어도 알 수 없고, 알아도 전달할 수 없다. 당연하다. 그런데 그게 자기소개다. 자신의 한계를 진리의 문제로 치환한다. 우주 안에 진리는 하나뿐이며 나머지는 그것을 다양한 분야에 적용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어다. 구조론은 그래서 나온 새로운 언어다.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벽은 낡은 언어다. 인간이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게 문제다. 말도 못 하면서 견해를 내세운다면 황당하다. 


      
    철학의 탄생


    인간이 지식을 구하는 방법은 추론 하나뿐이다. 추론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연결하는 것이다. 무에서 유가 생겨날 수 없듯이 무지에서 지가 발생할 수 없다. 인간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복제하여 지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신체감관을 통하여 단서를 수집한다. 그 감각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호흡할 줄 알고, 목청 높여 울 줄도 알고, 젖을 먹을 줄도 안다. 이미 많은 것을 알고 태어나는 것이다. 컴퓨터를 사더라도 OS는 기본으로 깔아준다. 많은 프로그램을 공짜로 제공한다. 그 안에 게임도 들어 있다. 추론은 한마디로 추리는 것이다. 추리면 단순해진다. 단순해지면 같아진다. 같아질 때까지 추려내야 한다. 같으면 연결되고 연결되면 그것이 지식이다. 


    귀납추론과 연역추론이 알려져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연역추론이 있을 뿐이다. 연역은 빈칸에 채워 넣는 것이다. 1+X=3이라고 하면 우리는 1과 3을 알고 있다. 그사이의 2가 숫자라는 사실도 안다. 1을 알고 3도 아는데 2는 모르겠다는 말은 불성립이다. 2를 알아야 3을 알게 되어 있다. 2를 모르면서 3을 안다면 사실은 3을 아는 게 아니다. 1도 알고, 2도 알고, 3도 알고, +도 알고, =도 알고, 계산법도 아는데 X를 모른다. 그런데 이미 2를 알고 있으므로 X가 2라는 사실도 저절로 도출된다. 순서만 틀어놨다.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연산하는 순서가 헷갈려서 그런 거다. 문제를 복잡하게 꼬아놔서 집중을 못 하는 사람은 포기하게 된다. 집중할 수 있다면 누구든 이 문제의 답을 알 수 있다. 모르는 사람은 뇌의 어느 부분이 고장 나서 집중이 안 되는 것이다. 귀납추론은 2를 아는 상태에서 나머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실패다. 뇌구조로 보면 연역만 가능하고 귀납이란 것은 원리적으로 없다. 우리가 보통 귀납이라고 말하는 것은 귀납추론이 아니라 귀납적 접근태도인 것이다. 연역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귀납은 부분에서 전체로 간다. 그런데 그 전체가 되는 플랫폼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 자신이 연역한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다. 보통 말하는 귀납은 논리회로의 귀납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사건에서의 귀납적 진행방향이다. 귀납추론이 아니고 귀납처럼 사건의 한 부분을 먼저 알게 되는 것이다.


    경찰이 범인을 잡는다면 범인의 담배꽁초부터 확보한다. 부분을 먼저 알고 사건의 전모는 나중에 알게 된다. 당연하다. 인간이 사건을 인지했을 때는 대개 사건이 종결된 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은 이미 뇌 안에 1+X=3이라는 회로를 깔아놓고 있다. 거기에 X라는 담배꽁초를 집어넣은 것이다. 실제로 추론의 내용은 연역추론이다. 단, 그 사건에 대해서 귀납적 접근이다. 뇌 안에서 지식이 만들어지는 절차는 플랫폼을 깔아놓고 빈칸을 채우는 연역구조로 되어 있다. 사건에 대해서는 귀납이지만 담배꽁초를 단서로 추리해야 한다는 수사기법은 이미 아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수사기법의 빈칸에 담배꽁초라는 단서를 채워 넣은 연역추론을 실행한 것이다.


    연역추론 - 플랫폼을 깔아놓고 단서를 하나씩 채워가는 수사기법을 안다.
    귀납적 접근 - 사건의 일부를 먼저 알고 전체를 나중 아는게 귀납처럼 보인다.


    뇌 안에서의 추론은 연역이지만 사건에 대해서는 귀납적이다. 귀납 뒤에 적이 붙었다. 귀납추론은 없고 귀납적 접근이 있다. 여기서 딜레마다. 모든 지식은 결국 연역뿐이며 연역하려면 답을 알고 있어야 하며 연역의 플랫폼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면 그 플랫폼이 없거나 부실하면 어떻게 하지? 그 경우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지렁이나 거미나 바퀴벌레가 지금부터 맹렬히 학습한다고 해도 인간만큼 될 수 없다. 뇌의 근본적 한계다. 연역추론은 처음부터 플랫폼을 가지고 시작하므로 플랫폼이 부실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공부를 포기하는 것이다. 안 되는 사람은 무슨 수를 써도 안 된다. 당신은 절대로 메시처럼 될 수 없다.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다. 음치라면 어쩔 수 없다. 필자가 음악을 논하지 않는 이유다. 길치라면 노력하지 말고 내비게이션을 써야 한다. 구조치는 구조론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플랫폼이 있는데도 사용에 능숙하지 못하다면 깨달아야 한다. 두 번째 선택은 깨닫는 것이다. 


    여기서 연역의 딜레마는 인간은 원래 되는 것만 된다는 점이다. 지식은 한계가 있다. 누구는 어렵게 되고 이정후는 그냥 된다.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된다. 한국이 된다고 해서 아프리카 국가들도 한국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안 되는 나라는 민주주의를 해도 안 되고 자본주의를 해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인간사회 역시 그러한 한계가 있지 않을까? 되는 것만 되게 되어 있다. 자연 역시 그러한 원리로 되어 있지 않을까? 어떤 근본적인 벽이 있지 않을까? 여기가 철학의 출발점이다. 철학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였으나 여기서는 형이상학을 말한다. 인간은 귀납적 지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그것은 언어의 한계다. 부족민은 하나, 둘밖에 세지 못한다. 셋부터는 많다이다. 셋은 많고, 넷은 많고많고, 다섯은 많많많다. 부족민에게 진리는 없고, 있어도 알 수 없고, 알아도 전달할 수 없다. 숫자가 없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 첫머리의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은 이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안되니까 포기하자는 거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 인간은 언어의 한계에 부딪혀 있으므로 언어를 새로 건설해야 한다. 숫자가 없으면 숫자를 만들면 된다. 세상은 구조로 되어 있으므로 구조어를 익혀야 한다. 축과 대칭의 방향과 순서를 익혀야 한다.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2500년간 좌절해 왔다. 솔직히 그동안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노자는 어차피 안 되는 철학이란 것은 포기하자고 떠들었다. 그 말을 도가도 비상도로 표현한다. 유명론이니 실재론이니, 유물론이니 유심론이니, 합리론이니 경험론이니 하는 것은 '혹시 모르잖아. 도전해보자.' '아냐. 그래봤자 별수 없어. 성공한 사람이 없잖아. '이러한 좌절과 자조와 탄식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 철학은 2500년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터넷도 2500년간 없던 것이다. 2500년간 실패했으니 이제는 성공할 때도 되지 않았나? 원래 되는 사람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구조론적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지구에 최소 한 명 이상 있다면 인류는 첫 발걸음을 뗀 셈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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