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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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94 vote 0 2020.05.31 (18:19:33)

     공자의 길

      
    역사의 강자와 약자


   강자가 강해지는 데는 이유가 있고 약자가 약해지는 데도 이유가 있다. 강자의 철학을 가지면 강해지고 약자의 철학을 가지면 약해진다. 우월주의를 가지면 우월해지고 패배주의를 가지면 패배한다. 이는 에너지의 법칙에 지배된다. 두 개의 이슬방울을 근접시키면 작은 물방울이 큰 물방울에 흡수된다. 


    멕시코는 미국에 씹혔고, 아일랜드는 영국에 씹혔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씹혔고, 조선은 청나라에 씹혔다. 작은 물방울이 큰 물방울 옆에 있다가 봉변을 당한 셈이다. 아프리카는 유럽에 씹혔고 동유럽은 서유럽에 씹혔고 남미는 북미에 씹혔다.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면 흥하고 변방에 자리잡으면 망한다. 그러나 너무 가운데 끼어 있어도 운신이 어려워서 좋지 않다. 프랑스는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사이의 노른 자위를 차지하고 흥했지만 진출할 배후지가 없어서 점차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스페인은 아메리카를 식민하고 이탈리아는 아프리카를 식민하고 독일은 동부지역을 식민하여 성장했는데 말이다. 영국은 아메리카와 인도로 진출했고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손에 넣었지만 가운데 낀 프랑스는 영국의 집요한 방해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다. 중국 역시 중원에 자리잡고 있어서 주변의 정세에 어두웠다. 변방의 외진 곳에 있으면 당연히 망한다. 몽골이나 중앙아시아의 아무개스탄 나라들은 아예 항구가 없다. 교통로의 요지를 차지하면 흥한다. 이탈리아는 북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에서 흥했고 그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끼어서 흥했다. 터키의 이스탄불도 보석처럼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은 해양세력과 대륙 사이에 끼어서 기회를 잡았다. 영국은 유럽 어느 나라든 연결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다. 독일은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의 교통로를 장악했고, 아랍도 한 때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여 흥했다. 미국도 지금은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고 있지만 중국의 성장에 따라 아메리카 패싱이 일어날 조짐에 분노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전략이다. 지리가 유리해도 북한처럼 전략이 잘못되면 망한다. 우월주의를 가지고 강자의 전략을 쓰면 흥하고 패배주의에 물들어 약자의 전략을 쓰면 망한다. 공자의 사상이 강자의 철학이라면 노자의 사상은 약자의 생존술이다. 중국은 노자를 따르다가 망했고 한국은 근래에 와서 공자의 덕을 보고 있다. 국민이 강자를 모방하면 흥하고 강자를 적대하면 망한다. 외부로 뻗어가면 흥하고 내부에 고립되면 망한다.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외부로 뻗어갈 배후지를 상실하면 강자를 적대해 내전을 일으킨다. 강자의 존재가 내부 밸런스를 무너뜨려 모두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린 세계에서는 강자가 외부로 진출할 때 약자가 묻어가며 모두 흥한다.


    유대인은 우월주의로 흥했고, 파리는 문화의 수도라는 자부심으로 흥했고, 영국은 기사도니 신사도니 하며 우월주의로 흥했고, 독일은 융커와 기사단의 우월주의로 흥했고, 미국 역시 노예주로 군림하며 우월주의로 흥했다. 혹은 청교도 정신 운운하며 근면함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은 그냥 지갑을 대륙째로 주웠으면서 말이다. 일본도 뒤늦게 무사도를 꾸며내고 있다. 한국이 흥하면 선비정신이라고 이름붙일만 하다. 어떻게든 우월한 세력에 속하면 쉽게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방향이 분명하여 의사결정이 쉽기 때문이다. 양반이 상놈 되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귀족의 친구는 귀족이고 하인의 친구는 하인이다. 가난한 사람은 돈을 벌어도 가난한 친구 때문에 가난해지기 쉽고, 부자는 사업이 망해도 부자 친구 때문에 다시 부유해진다. 신분 개념의 의미다.


    선진국이 몰락하는 일은 잘 없고 후진국이 선진국으로 올라서는 일도 드물다. 근 100년 동안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선 나라는 한국 뿐이고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몰락한 나라도 없다. 아르헨티나가 망했다는 말은 직업 거짓말 업자 조중동이 꾸며낸 거짓말이다. 아르헨티나가 근대 공업국이었던 적은 없다. 유럽이 연이은 전쟁으로 인한 식량난에 빠져 있을 때 냉동선의 출현으로 잠시 흥했지만 쇠고기나 팔았을 뿐이다. 전후복구로 유럽의 농업이 되살아나자 그들은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교육에 힘을 쏟은 나라는 흥하고 엘리트주의가 있는 나라는 흥한다. 지성주의는 흥하고 반지성주의는 망한다. 유럽은 종교개혁으로 누구나 알파벳을 알지만 중국은 한자를 익힌 사람이 열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한자의 폐해로 인해 교육을 강조했을 뿐 실제로는 교육하지 않았던 것이 중국의 몰락 원인이다. 최근 중국이 흥하는 것도 교육 덕분이다. 교육이 되는 나라는 한번 흥하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운이 좋으면 흥하고 운이 나쁘면 망한다. 사우디와 나이지리아와 가나는 석유가 터져서 흥하고 중앙아시아의 스탄나라는 항구가 없어 망한다. 운이 좋은데도 흥하지 못했다면 전략이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전략은 교육의 부재와 철학의 실패 때문이다. 철학은 어떤 그룹에 들 것인지를 결정한다. 높은 그룹에 들면 흥하고 낮은 그룹으로 밀려나면 망한다. 너무 일찍 높은 그룹에 들어도 좋지 않다. 유나바머로 알려진 시어도어 카친스키는 15살에 하버드에 입학하고 24살에 UC버클리 수학교수가 되었다가 망했다. 김대중은 목포에서 자랐고 노무현은 김해에서 자라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시골의 좁은 바닥에서 일찌감치 리더가 되어본 자가 국가의 리더로 성장한다. 재능을 믿고 너무 일찍 중앙으로 진출하면 리더가 되어볼 기회가 없으니 송유근 꼴 난다. 서울대 턱걸이로 들어가기 보다 연고대 상위권이 낫다. 이기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자연히 강자의 철학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공자가 옳았다


    코로나19에 충격을 먹은 미국이나 유럽은 지금 공자를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당연히 코웃음을 친다. 문재인은 잘했을 뿐이고 아베는 잘못했다는 식이다. 사실이지 한국만 코로나에 잘 대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중일과 대만, 베트남, 몽골이 모두 잘 대처하고 있다. 공통점은 유교권이라는 점이다. 어제 일본의 신규 확진자 26명으로 우리와 1명 차이다. 일본도 나름 잘하고 있다. 인정할건 인정하자. 


    공자가 이긴게 맞다. 이런 문제는 외부인이 객관적으로 보는 법이다. 공자를 긍정하면 ‘그럼 오늘부터 갓 쓰고 상투 틀고 제사지내야 하나?’ 하는 엉뚱한 말이 나올까봐 한국인들은 객관적으로 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유교가 옳으냐, 기독교가 옳으냐, 불교가 옳으냐 하는 말 나오면 곤란하다. 본질을 보자.  유럽에서도 스위스가 특별히 잘 대처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스위스는 다른 나라에 비해 엘리트주의가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직접 민주주의를 하는 스위스는 1년에 네 번 투표를 하는데 거의 일년 내내 투표 속에서 사는 셈이다. 매번 누군가를 만나서 설득하고 찬반 의견을 내야 한다면? 엘리트주의로 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독일도 주변의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에 비해 비교적 잘 대처하고 있다. 융커와 기사단의 전통 때문이라고 본다. 프로이센은 10세기 이후로 기독교를 믿지 않은 동부지역에 대한 식민운동과 독일 기사단의 활동과정에 건설되었는데 이들은 전통신앙을 믿는 슬라브계 원주민들에 대해 우월주의를 가지고 있었던 점이 다르다. 유대인의 우월주의나 융커의 우월주의나 같다. 독일이 강해진 것이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엘리트주의가 있는 나라가 이긴다. 공자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엘리트주의다. 우리가 이러한 본질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자신이 엘리트라고 믿는 사람이 많은 국가는 유리하다. 이것이 공자가 우리에게 물려준 자산이다. 히피족과 펑크족으로 대변되는 미국과 유럽의 반지성주의가 문제다. 특히 미국인들은 주류 엘리트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다. 지구평면설과 달착륙 음모론, 51구역소동이 그러하다. 


    패배주의에 빠지면 패배하고 우월주의에 빠지면 우월해진다. 왜 조선이 망했는지를 생각하라. 청나라에 패배하고 일본과의 통신사 외교가 중단되어 청의 외교속국이 되면서 독자적인 의사결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골치아픈 문제가 생기면 청나라에 떠넘겨 버렸다. 청나라가 중앙이고 우리는 변방이라는 의식이 스며들었다. 이렇게 되면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 중세에 잘 나가던 아랍이 망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첫째는 징기스칸의 정복을 두고 신에게 기도를 하지 않아서 징벌을 받은 결과라고 믿은 패배주의 때문이다. 둘째는 투르크족의 정복 때문이다. 중국이 망한 이유가 청나라 여진족의 식민지배 때문이듯이 투르크인에 시달리면서 아랍이 무너진 것이다. 반대로 유럽이 강해진 이유는 아프리카를 식민하면서 얻은 우월주의 때문이다.


    미국은 교통범칙금이 천문학적으로 높다. 한국인들은 민식이법으로 상해를 입히면 벌금 최소 500만원을 물게 된 것을 가지고 난리를 치는데 미국의 일부 지역은 신호위반만으로 100만원 가까이 벌금을 때린다. 왜 미국인들은 과도한 벌금을 용인할까? 주로 흑인들이 교통위반을 하기 때문이다. 우월주의를 위해서라면 많은 벌금도 용납하겠다는 것이다. 다 내막이 있다.


    아프리카 일부 국가의 대통령들이 코로나19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에이즈라는 질병이 없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무당의 주술로 에볼라를 퇴치한다고 떠드는 것이 반지성주의다. 어그로를 끄는 거다. 반지성주의는 인간의 원시적 본능이다. 에너지가 없는 인간은 상대를 자극하여 반응을 보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인간이 원래 그렇다.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은 주변에 경쟁자가 있을 때다. 소련이 망하자 미국이 신자유주의를 떠들었듯이 주변에 경쟁자가 없으면 오만해져서 폭주하는게 인간이다. 엘리트주의로 가면 항상 주변에 자기보다 나은 경쟁자가 있다.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도 더 잘난 인간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반지성주의와 싸워야 한다


    반지성주의는 소인배의 권력행동이다. 자체 에너지가 없으면 다른 것에 대립각을 세우는 방법으로만 에너지를 조달할 수 있다. 기생충처럼 남의 에너지를 빼먹는 수법을 써야 한다. 그것이 각종 음모론이나 히피행동, 반달리즘으로 나타난다. 공자가 말리는 괴력난신 행동이다.


    구조론으로 보면 사건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내려가면서 에너지를 소진한다. 그 과정에 하위문화가 주류문화로 올라선다. 재즈나 펑크, 헤비메탈이다. 그리고 망한다. 새로운 미디어와 함께 새로운 흐름이 일어나며 주변부로의 확산과 변형을 거쳐 사멸하는 패턴의 반복이다. 새로운 조류가 주변부로 확산되고 융합되는 다양화의 흐름은 진보처럼 보인다. 사실은 망조인데도 말이다. 점차 주변화되고 일베화되다가 결국 할배화되어 망한다. 히피가 그런 것이다. 처음에는 대학교수가 히피를 이끌었는데 라즈니쉬가 초를 치더니 나중에는 연쇄살인마가 주도하고 있었으니 찰슨 맨슨 사건이다. 


    문제는 지식인의 반지성주의 행동이다. 진중권 부류다. 양차 세계대전의 재앙 그리고 나치와 공산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난 것이 서구 구조주의, 탈근대 담론이다. 문화 상대주의니 내재적 접근이니 하는 것들이다. 이들은 비주류에 관심을 가진다.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규정한다. 대중들에게 아부하는 수법이다. 진중권, 홍세화, 김규항, 박노자 등 주류 엘리트들이 아웃사이더라는 모임을 만들고 책을 낸다. 변두리 문화에 관심을 보인다. 김어준의 '똥꼬깊숙히'를 흉내낸다. 그리고 망한다. 


    문제는 3류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전개는 미디어의 발달에 의한 것인데 그들은 그냥 '우리는 아웃사이더야. 이제는 아웃사이더의 세상라구!' 하고 떠드는 것이다. 진중권은 독일에서 왔고, 홍세화는 프랑스에서 왔고, 박노자는 소련에서 왔으니 아웃사이더라는 식이다. 웃기고 자빠졌다. 본질을 보자. 진시황은 왜 분서갱유를 저질렀을까? 히틀러는 왜 지식인을 탄압했을까? 박정희는 왜 동베를린 사건을 일으켰을까? 모택동은 왜 지식인을 하방했을까? 모든 나쁜 흐름에는 주류에 맞대응하여 상대의 반응을 끌어내려는 약자의 전략이 숨어 있다. 자체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손에 쥔 무기가 없으므로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반지성주의 정점에는 노자가 있다. 공자가 자체 엔진을 쓴다면 노자는 외부의 동력에 기생한다. 남의 동력에 묻어가려면 각을 세워야 한다. 종교의 반지성주의가 그러하다.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계의 반지성주의는 심각하다. 그들의 영향권에 있는 한국 개신교계의 반지성주의도 마찬가지다.


    "학문의 영역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반지성주의 요소가 있다고 비판받는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근간이 되는 상대주의나 다원주의 또는 회의주의나 해체주의가 반지성주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서도 주로 프랑스 철학자들의 글을 읽으면 반복적으로 이성주의 전반에 대한 비판 혹은 적개심이 드러남을 쉽게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가 있다."[나무위키]


    중요한 것은 반지성주의가 인종차별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왜 차별하는가? 원래 차별한다. 개가 낯선 사람을 보면 짖어대듯이 인간의 차별은 부족민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인간은 원래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방해자가 나타날 때까지 직진한다. 물리적인 차단선을 만나야 행동을 바꾼다. 당연하다. 늑대에게 쫓기는 사슴은 중간에 방향을 틀 수 없다. 자체 에너지가 없으므로 방향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틀 수 없다. 물리적인 장벽만이 사슴의 폭주를 멈추게 할 수 있다. 


    일부 인간이 현명하게도 차별을 극복하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그런 집단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인간 집단이 100이면 그 중에 100은 차별한다. 사실 모두가 차별한다. 차별하면 내부가 깨지고 동원력이 감소한다. 상대적으로 덜 차별하는 집단이 심하게 차별하는 집단을 이긴다. 승리하기 위해서 차별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원래 차별하는데 어쩌다 차별하지 않은 집단이 결과적으로 이겨서 승리자의 문화가 전파되는 것이다. 반지성주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인간은 대부분 약자다. 에너지의 조달방법이 없으므로 자연히 주류에 대립각을 세우고 행패를 부린다. 자연스러운 행동이므로 자신이 틀렸을 경우는 생각하지 않는다.


    노자의 무위자연이 위험하다. 자연을 추구하면 자연스럽게 망한다. 오늘날의 13억 중국은 춘추시대에 있었던 4천여개의 소국이 망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가만 두면 자연히 망한다. 무위가 아닌 작위로만 인류는 전진할 수 있다. 인류문명은 엔트로피의 법칙에 어긋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은 엔트로피 증가이고 인류의 문명은 엔트로피 감소다. 뒤로 태양에너지를 빼먹기 때문에 가능하다. 석탄과 석유를 비롯하여 인류가 쓰는 매장자원은 고대에 저장된 햇볕을 빼먹는 것이다. 이건 자연스럽지 않은 특이한 현상이다. 그러므로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고대 햇볕은 조만간 고갈된다.


    반지성주의가 엔트로피 증가 곧 무질서도 증가와 맞다. 인류는 자연스럽게 무질서해져서 망한다. 차별주의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과 맞다. 차별하다가 엔트로피가 증가해서 망한다. 사람이 늙으면 죽듯이 자연은 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지구도 어차피 50억 년 후에는 망하도록 되어 있다.


    히틀러는 유태인과 공산주의에 대립각을 세운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계급과 자유주의 사상에 각을 세운다. 쓰레기 이덕일 부류는 노론에 각을 세운다. 인위적으로 특정한 대상에 대립각을 세우면 가짜다. 상대방의 에너지를 빼먹으려고 각을 세우는 것이며 이는 자체 에너지가 없다는 증거다. 왜 지식인들은 진중권스러운 반지성주의에 빠질까? 김어준에게는 팟캐스트가 있다. 미디어가 있다. 총이 있다. SNS가 있다. 도구가 있다. 무기가 있다. 권력은 도구에서 나온다. 진중권들은 도구가 없다. 어딘가에 각을 세워 남의 에너지를 빼먹어야 하다. 자신이 박해 받는 아웃사이더라는 허위의식에 빠지게 된다. 가공의 괴물을 창조하는 것이 허위의식이다. '노빠는 나치다. 문빠는 홍위병이다.' 진중권 소리치고 이문열 고함지른다. 총이 없고, 미디어가 없고, 창의가 없고, 역량이 없으면 오바마이 연설문을 베낀 안철수처럼 남의 것을 해먹게 된다. 남의 것을 허락없이 쓰려면 각을 세워야 한다. '너의 논리로 너에게 되돌려주마.' 하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 논리가 없으니까 파렴치하게 남의 논리를 훔치는 것이다. 히틀러의 여러 아이디어는 대개 소련의 것을 베낀 것이다. 소련의 거창한 대중집회를 베껴서 베를린 올림픽에 써먹었음은 물론이다. 


    구조론으로 보면 창의하는 자 한 명에 베껴 먹는 자 넷이 따라붙는게 세상의 법칙이다. 남의 것을 베껴먹을 요량으로 다양성을 강조하고 해체와 분산을 강조한다. 무질서를 강조한다.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구조론은 복제에 의한 대량생산을 긍정한다. 문제는 도둑 주제에 큰소리를 치는 것이다. 보다 주변화되고, 퓨전화되고, 융복합화되고, 다양화되면 풍성해진다. 진보는 그런 과정을 거친다. 문제는 허위의식이다. 베껴먹는 짓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류에 각을 세우면 곤란하다. 애플이 IBM에 각을 세운 것이 그러하다. 물론 그것이 하나의 상술은 된다. 그러나 삼성이 애플폰을 베껴놓고 애플이라는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의 이미지로 포장하며 표절을 정당화한다면? 


    세상의 변화는 새로운 창의, 새로운 미디어, 새로운 도구, 새로운 무기로만 가능하며 그것이 없는 주제에 입으로 떠드는 자들은 모두 가짜다. 지식도 엔트로피화 된다. 지식이 점차 무질서해진다. 지식인이 다들 바보가 되어가는게 이유가 있다. 이문열도 퇴행하고 김훈도 퇴행하고 모두 퇴행한다. 용기있게 신대륙으로 건너간 자만이 위대하다. 새로운 미디어로 갈아탄 자만이 위대하다. 새로운 무기를 발명한 자만이 위대하다. 물리적 도구를 손에 쥔 자만이 위대하다. 그것을 뒤에서 궁시렁대며 비판하고, 풍자하고, 야유하고, 조롱하는 자들은 묻어가는 3류에 불과하다. 복제본이 원본 위에 군림하려고 하면 안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이삭줍기에 불과하다. 




    실용과 경험의 위험


    실용주의자는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 기준이 되는 나라는 것은 도대체 누구지? 나의 감각? 나의 감정? 나의 가족? 나의 국가? 나의 세계? 순간적인 나도 있고 일관된 나도 있다. 둘은 충돌한다. 10년 후의 성공을 위하여 이 순간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과연 합리적인가? 왜 10년 후의 나를 위해 지금의 내가 희생해야 하는 거지?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것보다 정승처럼 놀다가 개처럼 죽는게 낫지 않을까? 단기적으로 실용적인 것은 장기적으로 실용적이지 않을 수 있다. 논을 팔아 자식을 대학 보냈더니 대졸 실업자가 되었고 그냥 두었더니 부동산이 폭등해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어느 쪽이 합리적인 선택인지 판단할 수 없다. 지금 실용적인 것이 나중에는 비실용적으로 되기가 다반사다. 이명박의 실용주의가 2007년 대통령 당선에는 합리적이었지만 2018년 감옥행에는 비합리적이었다. 이런 것은 개인 기준으로는 판단할 수 없고 집단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부동산 졸부가 되느니 대졸 실업자가 되는게 나을 수도 있다. 돈은 혼자 벌지만 대졸은 친구도 대졸이므로 세력이 만들어진다. 실용은 지금 이 순간의 한 개인을 기준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어 일관된 삶을 살 수 있는지 또 동료와 함께 할 수 있는지로 판단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것이 합리주의다. 


    실용을 긴 호흡으로 보고 개인이 아닌 인류의 차원으로 넓혀서 판단하면 그것이 합리주의다. 실용이냐 합리냐는 단기적, 국소적으로 범위를 좁혀서 볼 것인가 아니면 장기적, 전체적으로 범위를 넓혀서 볼 것인가다. 그런데 철학이란 것은 개인의 단기적인 적응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즉 실용주의는 반철학인 것이다. 경험주의도 마찬가지다. 경험에는 착각이 많다. 경험을 엄격하게 검증하면 바로 그것이 합리주의다. 개인의 경험을 인정하기로 하면 미아리 점쟁이가 잘 맞춘다. 내가 경험했는데 용하더라고. 이명박의 내가 해봤는데 시리즈와 같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은 귀신을 직접 봤다고 대답한다. 심지어 꿈을 믿는 황당한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과는 진지한 대화가 불가능하다. 운 좋게 음모론을 몇 번 맞추면 확신을 가지고 개소리를 하게 된다. 개인의 경험을 인정하기로 하면 다들 특정 지역 출신에게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다. 일본인들은 조센찡이 어떻고 부라쿠민이 어떻고 피해 경험을 내세운다. 혐한 논리가 그러하다. 여성이 어떻고 성소수자가 어떻고 하며 게시판에서 떠드는 개소리는 모두 당사자가 직접 경험한 것이다. 중의학이 대박을 친다. 침을 맞고 뜸을 떴는데 참 용하더라고.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이런 쪽으로 가면 아주 비뚤어진다.


    중요한 것은 협력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반칙을 일삼는 자와 어느 의사가 협력하겠는가? 중의학이냐 양의학이냐는 병을 치료하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다자가 협력할 수 있느냐가 기준이다. 시스템이 우선이다. 한쪽은 엄격하게 검증하는데 다른 쪽은 주먹구구로 한다면 손발을 맞출 수 없다. 시스템이 깨지고 만다. 까놓고 말하자. 다들 귀신 봤잖아. 꿈이 맞았잖아. 점쟁이가 참 용하잖아. 음모론이 진짜잖아. 괴력난신을 추종하게 된다. 환빠들이 확신을 가진다. 창조과학회를 제지할 수단이 없다. 왜 개인의 경험은 모두 거짓인가? 그것은 두뇌의 판단이 아니라 호르몬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다들 호르몬의 작용을 경험으로 착각한다. 원시의 생존본능과 호르몬의 지배를 받아서 퇴행행동을 하는 것이다. 일제히 바보가 되고 만다. 호르몬은 언제나 이성을 이긴다. 개인이 마구 떠들면 안 되고 가장 똑똑한 사람에게 판단을 맡겨야 한다. 똑똑한  사람은 수학의 도구로 검증한다. 그것이 합리주의다.


    왜 본능이 이성을 이기는가? 인간은 10만 년 전 들판을 뛰어다니던 부족민의 삶에 맞게 진화했기 때문이다. 문명은 1만 5천 년 전에 갑툭튀한 것이며 자연의 본래와 맞지 않다. 인류는 이상한 세계로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문명중독에 걸려서 본 모습을 잊어버렸다. 본래로 되돌아갈 수 없다. 자연스러운 원시인의 삶으로 돌아가기는 불능이다. 개는 늑대에서 왔지만 늑대의 본성을 잊어버렸다. 늑대는 오륙 년밖에 살지 못하는데 개는 15년씩이나 산다. 인간은 원래 40살 정도만 살도록 되어 있다. 80살씩 사는 현대인의 모습은 유전자의 설계에 없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와버렸다.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다.


    당신이 실용으로 믿는 것들은 찰나의 느낌이며 당신이 경험으로 믿는 것들은 호르몬의 작용이다. 합리주의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합리주의란 순간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판단하는 것이며, 개인이 아닌 집단의 일원이 되어 판단하는 것이다. 왜? 바로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남에게 말을 거는 자격을 얻게 한다. 길게 보고 크게 보는 시선을 얻은 자가 타인에게 말을 걸 자격이 있다. 요령이나 꼼수나 실용이나 경험이나 잔재주는 혼자 알고 있어라. 타인에게 말을 걸려면 서로 간에 공유하는 가치를 찾아야 하며 개인적인 것은 개인에서 끝나야 한다. 70억 인류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가려면 70억이 합의할 수 있는 것을 말해야 한다.




   지식은 공유된다


    다들 남의 지식을 공유하려고만 하고 아무도 창의하지 않으면 어쩌냐 하는 말이 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다. 공부는 안 하고 컨닝만 하면 어쩌냐 하는 말과 같다. 공부 못하는 애들이 그런 소리를 한다. 공부 좀 하는 애들은 차원이 다르다. 컨닝 페이퍼 만들 시간에 성적 올린다. 뱁새가 황새 걱정 하면 피곤한 거다. 좀 하는 애들은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원래 높은 레벨로 가면 지식은 백퍼센트 공유된다. 천재가 혼자 골방에서 지식을 만드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동양에는 왜 5천년간 제대로 된 지식이 나오지 않았겠는가? 동양에는 골방이 없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동양에는 서양과 달리 공유할 광장이 없었던 거다.


    논문이란 것은 명성을 얻고 대신 지식을 공개하는 시스템이다. 공산주의는 무조건 지식을 공유해야 하므로 똑똑한 사람은 자기 지식을 서랍에 감춘다. 프로젝트가 실패하도록 유도한 다음 상사가 잘리면 자신이 승진해서 서랍에 감추어둔 지식을 꺼낸다. 모두가 그런 식으로 동료와 상사를 견제하므로 소련이 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식은 공유되어야 하지만 반드시 대가가 있어야 한다. 돈과 명성과 권력을 제공하고 지식집단에 가입시켜 기회를 주는 일이 대가다. 유럽의 문예부흥을 자세히 내막을 들여다보면 거의 표절이다. 그러므로 천재는 한꺼번에 우르르 나타난다. 다빈치의 원근법도 사실은 아랍의 것을 베낀 것이다. 르네상스는 통째로 아랍의 것을 해먹은 도둑질이었다. 원래 그런 식으로 큰다. 특히 힙합의 역사는 표절의 역사다. 표절에 관대했던 것이 흑인음악의 성공요인이었다. 샘플링이라는 말로 물타기 하고 있지만.


    산업은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에서 만들어진 증기기관은 탄광 갱도에 고인 물을 퍼내는 풍차에서 나온 것이며, 풍차는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에 나오듯이 아프리카의 무어인들이 가져온 신기술이며 원래는 이라크에서 티그리스 강의 물을 퍼올려 농사를 짓는데 사용한 것이다. 다 족보가 있다. 남의 것을 베끼다가 개량한 것이다. 동료의 아이디어를 어깨너머로 듣고 거기에 자기 아이디어를 추가해서 성과를 내는게 대부분이다. 자기 지식을 공개하지 않으면 남의 지식을 훔칠 기회도 없다. 한 명의 천재가 열 명의 천재를 복제한다. 노벨상은 한 집단에 우르르 쏟아진다. 대부분 유태인이 가져간다. 공유도 하지만 경쟁도 있어야 한다. 많은 지식이 전쟁 때문에 생겨났다. 비행기를 라이트 형제가 완성했지만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해서 평생을 소송에 시달렸다. 사실 일정부분 훔친게 맞다. 자전거포나 경영하던 라이트 형제가 양력의 원리를 어찌 알겠는가? 원래 그렇게 한다. 어깨너머로 보고 하는 것이다. 


    특허제도는 지식과 돈을 벌 기회를 교환하는 제도다. 서구가 강해진 것은 논문과 특허와 학회와 저작권 때문이다. 기계식 텔레비전을 고안한 발명가는 내부에 폭탄을 설치해서 분해하면 터지게 만들어놨다고 한다. 그만큼 아이디어는 목숨 거는 일이며 다들 훔치려고 혈안이 되었고 그래도 훔칠 놈은 훔쳐서 서구가 발전한 것이다. 근래에는 저작권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오히려 창의가 위축되고 있다. 음악가는 노래 한 곡을 만들면 평생 먹고 살 수 있으니 작곡하지 않는다. 일본 만화가들은 만화 한 편을 30년 동안 연재하곤 한다. 한국 만화가는 그새 700편을 생산하는데 말이다. 배가 부르니 일을 하지 않는다. 동양의 낙후는 지식의 공유제도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은 지식의 공유에 맞추어져야 한다. 인터넷에 미국의 선진 농업기술이 공개되어 있는데도 한국의 농부들은 영어를 몰라서 그냥 옛날 방식으로 한다. 그런 장벽을 깨뜨리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근래에 외국이 한국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한국인들에게서 뭐라도 배우려는 자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식의 공유가 가능한 레벨까지는 국가에서 이끌어야 한다. 음모론 믿고 괴력난신 추종하고 중의학을 떠들고 종교에 의지하는 비뚤어진 자는 지식공유그룹에 끼워주지 말아야 한다.



         

    일본과 경상도의 멸망공식


    에너지는 방향성이 있다. 외부지향이냐 내부지향이냐? 여기서 큰 방향이 결정되면 그쪽으로 계속 진행한다. 외부충격이 없이 자체적으로는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에너지는 효율성을 따르는데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의 편의다. 집단이 스트레스를 덜 받는 쪽으로 결정한다. 인간은 단지 결정하기 쉬운 쪽으로 결정하는 동물이다. 옳으냐 그르냐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합의하기 쉬운 것을 우선적으로 합의한다. 미통당이 그런 결정을 한 것은 그것이 집단 내부에 스트레스를 덜 주는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의사결정비용을 절약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부지향과 내부지향을 결정하는 닫힌계의 설정이다. 소속감을 느끼는 동그라미가 있다. 그것이 집단 바깥에 있느냐 내부에 있느냐다. 일본은 대국주의에 빠져서 일본을 유럽 전체와 맞먹는 하나의 독립적인 문명권이라고 생각한다. 옛날부터 천하는 일본, 중국, 인도 셋이라고 믿어서 천하제일을 삼국제일이라고 써 왔다. 유럽에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가 있듯이 일본에도 다이묘들이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고 있다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과 같은 오만에 빠지게 된다. 일본이 하나의 우주이고 하나의 닫힌공간이라고 여긴다. 일본 열도가 하나의 완전체라는 생각이 들면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이 없어져서 해외여행도 하지 않게 된다. 좋은 것은 일본 안에 다 있는데 뭣하러 외국을 나가지? 일본 안에서 자체적으로 경쟁하면 되는데 뭣하러 외국의 눈치를 보고 사죄를 하지? 그냥 문만 닫아걸면 되잖아. 이런 식이다.


    미국인들도 바깥세계에 관심이 없다.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그쪽으로 계속 달려간다. 미국인들은 해외여행 뿐 아니라 국내여행도 하지 않게 되었다. 에너지의 방향은 외부 아니면 내부다. 자기들의 세계가 독립적인 완전체라고 착각하면 남의 동네를 안 가게 된다. 과거에 제주도는 동쪽 사람이 서쪽으로 가지 않았다고 한다. 4.3학살이 일어난 이유 중의 하나는 군경이 제주도민을 해안가에서 백미터 밖으로 못 나가게 했는데 원래 밭농사 지어먹는 한라산 사람들은 물고기 잡아먹는 해안사람과 말을 안 했다. 교류하지 않았다. 원래 가면 안 되는 곳으로 가라고 하니 누가 군경의 말을 듣겠는가? 주민들은 갈 곳이 없어서 동굴로 숨었다가 학살당했다.


    할머니들께 평생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제주도 일주라고 대답하더라 하는 말이 있다. 이스터섬처럼 작은 곳에 고립되면 그럴수록 옆동네는 가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 구조 안에서 의사결정에 필요한 대칭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 피아구분을 하고 대립각을 세워야만 의사결정이 가능한 동물이다. 내부대칭이 아니면 외부대칭이다. 여기서 방향성이 결정된다. 내부대칭 들어가면 그게 망조가 든 것이다. 그 방향으로 계속 가게 된다. 외부세계는 관심끊고 내전을 벌인다. 그것이 에너지의 법칙이다. 에너지는 효율을 따르는데 한 방향으로 질주해야 의사결정비용을 낮출 수 있다. 그게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는 말이다.


    중국만 해도 죽기 전에 가봐야 할 100곳의 명소가 있다는데 일부 중국인들은 세계 100대 명소보다 중국 안의 백대 명소가 더 낫다고 믿는다. 그런데 어차피 죽기 전에 백곳을 다 못 돌아본다. 그러다가 한 곳도 가지 않게 된다. 포기하는 것이다. 이 안에 다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아까워서 남겨놓고 방문하지 않는다. 아예 건드리지 말자 하는 심리가 생긴다. 외부에서 피아구분의 경계선을 확인하고 스스로를 내부적으로 완전체라고 믿는 순간 퇴행적 사고가 들어선다.


    내가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끝없이 펼쳐져 있어야 낯선 곳을 여행하게 된다. 경계를 찾을 수 없어야 계속 가게 된다. 경계를 찾으려고 말이다. 한국인들은 한국인 중에서는 내가 일빠다 하고 찾아가는 경쟁의식이 있다. 중국인들은 어차피 13억 중에 동작 빠른 어떤 중국인이 먼저 가서 밥 먹고 똥 싸고 인스타그램에 자랑하며 오염시켜 놨을 것이므로 구태여 내가 거기를 가야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중국인들이 세계를 휘젓고 다니지만 청나라 시절에 그랬다. 당시 중국 상인들은 파리와 런던에 지점을 내고 서구와 무역을 했지만 장사만 했을 뿐 여행은 하지 않았다. 하인을 유럽에 보내놓고 주인은 광동성을 떠나지 않았다. 그 시기에 일본인들은 지식인 수천명이 유럽을 방문하거나 유학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개화기에 일본인들은 자기네가 변방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그 시기에 중국인들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내부문제에 골몰했는데 말이다. 지금 중국은 뒤늦게 자기네가 변방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서 세계를 휘젓고 있지만 벌써 오만해진 것을 보니 조만간 예전처럼 퇴행적 사고로 돌아갈 수 있겠다.


    변방에서 중앙으로 진출할 야심이 있을 때 인간은 강해진다. 축소지향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일본은 지금 내부지향이다. 막부시절의 고립주의에서 군국주의 시절의 팽창주의로 갔다가 다시 고립주의로 되돌아갔다. 한국은 외부지향이다. 피아구분의 경계선이 휴전선에도 있고, 압록강에도 있고, 현해탄에도 있고, 유럽에도 있는데 확인이 안 되어 있다. 계속 가봐야 한다. 승부는 여기서 갈린다. 내부로 방향을 정하면 더 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망한다. 이스터섬처럼 되는 것이다.


    인간은 피아의 경계선을 확인해야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닫힌계가 확정되면 스스로 완전체라는 생각이 들어서 외부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고 내부에 경계선을 만드는 퇴행적 사고로 변한다. 유럽과 중국의 차이가 그렇다. 한국은 휴전선과 압록강과 현해탄이라는 다양한 경계가 있어서 애매한데 중국은 만리장성 하나 뿐이다. 유럽은 경계가 다양하다. 국경도 경계고, 아프리카와 단절하는 지중해도 경계고, 동쪽으로는 이스탄불이 경계고, EU가 경계인가 하면 동유럽은 유럽인지 아닌지 애매하다. 터키가 EU에 가입하면 투르크족 문명권인 중앙아시아까지 유럽에 들 판이다. 경계가 애매해야 한다.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쌓아서 경계를 명확히 하면 망한다. 그때부터 안심하고 외부세계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해외여행을 하는 것은 외부에 있는 경계선을 확인하려는 마음 때문이다. ‘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거다. 이때가 좋은 시절이다. 그것을 확인하면 호르몬이 끊기고 에너지가 고갈되어 호기심이 사라진다. 도전하지 않게 된다. 미국인들은 냉전에 승리하면서 스스로가 완전체라는 착각에 빠졌다. 내부에 경계를 긋고 장벽을 쌓는 반지성주의가 미국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완전체라는 판단이 서면 높은 레벨로 올라설 생각이 없다. 공부도 싫고 출세도 싫고 성공도 싫다. 다 귀찮다. 안전하게 공무원을 지망한다. 인간의 상승하려는 의지는 피아구분의 경계선을 확인하려는 마음인데 그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스터섬이 하나의 우주인데 나는 섬의 동쪽에 살고 서쪽은 미지의 영역이다. 서쪽으로 가면 안 된다. 절대 그곳을 확인하면 안 된다. 인간은 대칭을 통해서만 의사결정하는 동물이다. 피아구분의 경계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스터섬 외부에는 바다 뿐이므로 내부에 경계선을 만들어야 한다. 원시 부족민은 마을마다 절대 접근하지 않는 신성한 지역이 반드시 있다. 외부에 갈 마음이 없으니 내부에 가면 안 되는 구역을 설정하는 것이다. 점차 마음이 쪼그라든다. 오타쿠 시절을 거쳐서 마침내 히키코모리가 된다.


    문제는 그런 피아식별이 계급간에 발동되는데 있다. 높은 계급을 남의 동네로 여기고 가지 않으려고 한다. 미국의 문제는 피아구분의 경계가 국가간, 종교권간, 문명권간이 아닌 내부의 계급간에 그어진 데 있다. 지금은 중서부의 농민과 해안지역의 엘리트로 갈라졌다. 저학력자들이 고학력자의 세계를 다른 지역으로 여기고 그쪽 동네로 넘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저학력자 중심으로 대항권력이 만들어진다. 저학력자가 공부를 하면 배신자 소리를 듣는다. 흑인지역이나 히스패닉 지역으로 가면 이런 경향이 심해진다. 성공한 흑인은 백인마을로 이주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내부에 지역적으로, 계급적으로 피아를 가르는 경계선이 들어서면 그게 망할 조짐이다. 한 번 방향이 잘못되면 그 쪽으로 계속 간다. 자력으로 멈출 수 없다. 완전체로 인식되는 닫힌계를 확인하는 즉시 인간은 퇴행하여 내전을 벌인다. 마음에 금이 그어지고 장벽이 세워진다. 비뚤어진 경상도 사람처럼 저쪽동네 사람과 어울리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생겨서 꼴통이 된다. 평생 호남땅을 밟아보지 않은 경상도 사람이 아마 다수일 것이다. 경상도 안에 공장도 있고 직장도 있고 있을건 다 있어. 아쉬울 것이 없어. 따고 배짱이야. 이렇게 되면 스스로 완전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마음에 그어진 경계선을 큰 자산으로 여기고 무기로 여긴다. 그게 무서운 질병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말이다. 유기견이 입양된 후에도 주인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듯이 그렇게 비뚤어진 태도로 평생을 가는 수가 있다.


    하층민은 나는 엘리트가 되면 안돼 하는 마음이 생긴다. 원시 부족민이 절대 접근하지 않는 신성한 구역을 남겨두듯이 고졸은 대졸세계에 접근하면 안 된다는 식이다. 안티를 걸고 반대할 권리를 뺏길까 두렵기 때문이다. 호남사람과 정들까 겁나서 광주에 가지 않겠다는 식이다. 비뚤어진 마음을 대단한 특권으로 착각하고 애지중지 한다. 그것이 죽음으로 가는 질병임을 깨달아야 한다. 피아구분의 경계선은 반드시 외부에 있어야 한다. 경계는 여럿이고 희미해야 한다. 닫힌계는 확정되지 말아야 한다. 이곳이 완전체라는 생각이 들면 망한다. 서울대생도 그렇다. 서울대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면 망한다. 하버드가 있는데 말이다. 검찰도 그렇다. 자기네 패거리가 완벽하다고 믿는다. 내가 모르는 미지의 외부세계에 대립각을 세워서 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에너지를 끌어올려야 한다. 더 큰 세계로 올라설 마음을 품어야 한다.


    왜 합리론이 옳고, 절대주의가 옳고, 진보주의가 옳고, 일원론이 옳고, 대승의 길이 옳은가? 그것이 외부세계를 지향하게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경험론, 상대주의, 보수주의, 다원론, 소승의 길로 가면 내부에 장벽을 세우고 내전을 벌이게 된다. 북한과 싸우려 들고 호남과 싸우려 들고 여성과 성소수자를 적대하는 경상도 꼴통들처럼 말이다. 한 번 길이 나면 그쪽으로 계속 달려가므로 애초에 방향설정을 잘해야 하는 것이다.


    

      
    공자 길을 말하다


    아쉬움이 있다. 언어의 한계이자 표현의 한계다. 나는 신을 믿는다. 신이 수염 난 할아버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폐가 있지만 달리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내 가슴 속의 진실을 전달하기에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아스퍼거인의 어떤 예민함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막다른 길을 만나거나 오를 수 없는 벽 앞에서 좌절할 때마다 신은 내게 어렴풋한 길을 보여주었고 나는 신의 안내에 의지하여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또다시 벽 앞에서 신의 뜻을 묻는다. 신의 다음 계획은 무엇일까? 어쩌면 내게 주어진 소임을 다 했는지도 모른다. 김동렬 너는 여기까지. 다음 페이지에 대한 구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할 만큼 했고 대한민국도 이 정도면 체면을 세웠고 인류도 그럭저럭 제 발걸음으로 굴러갈 것이다. 다만 진리에 대한 열정 하나만은 안타까움이 있다. 왜 열병처럼 전염되지 않을까? 그들에게 진리란 시시한 것인가? 진리를 두고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 보듯 한다는 말인가? 진리를 알았을 때의 감격은 도무지 없다는 것인가? 아닌 것을 쳐내는 유쾌함을 맛보지 못한다는 말인가? 노자도 쳐내고, 장자도 쳐내고, 마르크스도 쳐내고, 다윈도 쳐내고, 프로이드도 쳐내고, 데모크리토스도 쳐내고, 플라톤도 쳐내고, 헤겔도 쳐내고, 니체도 쳐내고, 칸트도 쳐내고, 마구마구 쳐내고. 아닌 것들의 모가지를 뎅겅뎅겅 잘라주는 기쁨을 누리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오직 쳐낼 수 없는 사람 하나가 있다면 공자다. 공자는 특별히 말한 것이 없으니 쳐낼 것도 없다. 그는 단지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을 뿐이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을 만드는 것은 일관성이다. 일관성을 만드는 것은 에너지다. 에너지를 만드는 것은 호르몬이다. 호르몬을 결정하는 것은 만남이다. 만남에 필요한 것은 언어다. 언어를 획득하게 하는 것은 배움이다. 논어의 첫머리는 배움과 만남의 기쁨에 대한 이야기로 출발하고 있다. 이야기는 만남에서 시작된다. 언어가 일치해야 만날 수 있다. 배우면 언어를 얻고 그 바닥에서 통하는 언어를 익혀야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만났을 때 기쁨을 얻고 거기서 호르몬이 바뀐다. 호르몬이 사람을 한 방향으로 일관되게 밀어붙이니 그 사람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답은 최종적으로 뇌과학에서 찾을 수 있다. 바른 배움, 바른 언어, 바른 만남, 바른 호르몬, 바른 운명이 있을 뿐이다. 그 운명이 당신의 인생을 결정한다. 인간은 별 수 없이 에너지에 지배되는 동물이다. 만남을 통해 쾌감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고 흥분하므로 거기서 에너지를 얻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비뚤어진 길을 가는 사람은 만나야 할 것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며 진정한 만남의 기쁨을 느낀 적이 없는 사람이다. 혹은 만나도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사이코패스다. 공자가 길을 알려주었다. 군자라고 표현하지만 간단히 엘리트주의다. 지성주의다. 더 높은 세계를 바라보고, 더 큰 뜻을 품고, 서로를 만나게 하는 최대공약수는 거기서 발견되는 것이며 서로가 내놓을 수 있는 최소공배수도 거기서 확정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정표가 된다. 두 사람이 만나려면 뭐라도 공통되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큰 것에서 찾아진다. 성별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취향이 달라도 같은 21세기를 공유하는 같은 인류라는 점은 공통되니 서로는 만날 수 있다. 작은 다름을 큰 같음으로 극복한다. 공자의 길은 합리주의, 진보주의, 인문주의, 절대주의, 일원론의 길이다. 작은 길과 큰 길이 있다면 큰 길을 선택하라는 말이다. 왜? 큰 길에서 만나기가 쉽기 때문이다. 작은 골방에서 만날 수 없고 큰 광장에서 만날 수 있다. 주인이 될 것인가, 노예로 만족할 것인가? 집단의 중심으로 쳐들어가서 의사결정권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집단의 한 구석탱이에서 작은 역할의 획득에 만족할 것인가? 앞에서 길을 열고 무리를 이끄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뒤에서 팔짱 끼고 비웃으며 시험하고 조롱하는 자로 남을 것인가? 보통은 뒤에서 킥킥대며 조롱하는 자가 인기를 얻는다. 어차피 진정한 자는 만에 하나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70억의 경쟁무대이고 조금 높은 그룹으로 올라서면 만에 하나가 70만 명이나 우글거린다. 학계든 스포츠계든 예술계든 만의 하나가 7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 뒤에서 이죽거리는 촌놈 짓은 예천이나 문경 같은 촌구석에서 먹히는 거다. 공자가 어려운 말을 한 것은 아니다. 2는 1보다 크다. 그대가 진정으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큰 길에서 만날 확률이 작은 길에서 만날 확률보다 높다. 군자의 길에서 운명을 바꿔놓을 누군가를 만날 확률이 높다. 소인배의 길에서 누군가를 만났다면 방해자일 확률이 높다. 사람이 귀하다. 운명을 걸고 만날 사람은 더욱 귀하다. 큰 길에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진리 앞에서 어찌 전율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뭐 그런 사람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 가슴이 식어버린 자가 있다. 에너지가 없는 자가 있다.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자가 있다. 소리가 나지 않는 북은 칠 수가 없고, 반응하지 않는 존재는 끌어낼 수 없으니 더욱 만날 수 없다. 만나지 못하게 하는 방해자의 길은 다수고 만나는 길은 하나다. 일관되게 그 하나를 선택한다면 정상에서 전모를 보게 된다. 나는 더 오르고 싶은 욕망이 없다. 대인관계가 서툴러 사람 만나기가 무섭다. 그러므로 더욱 사람이 절실하다. 나는 다만 하나의 작은 불씨를 던져서 세상이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신은 내게 불씨 하나를 주었고 나는 등불 하나를 켜고자 했다. 내가 죽고 난 다음에 이루어져도 상관없다.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 평판공격을 가하려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용기 있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미 인류의 높은 의사결정그룹에 들었거든 주변에서 시시덕거리는 낮은 자의 시선을 의식할 이유가 없다. 여러분은 구조론의 제자인가, 지나가는 뜨내기 눈팅인가? 여러분이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자부심뿐이다. 언젠가는 모두가 알게될 진리를 남보다 조금 먼저 안다는 것 뿐이다. 수학자는 타협하지 않는다. 수학의 세계에 중도는 없고 물타기는 허용되지 않는다. 정답은 하나이고 나머지는 모두 오답이다. 그러므로 얼떨리우스를 쳐내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하나가 그대가 만나야 할 사람이다. 진리의 길을 가는 자가 될 것인가, 대중에 아부하는 거렁뱅이가 될 것인가? 당신이 길에서 우연히 진짜를 만날 확률은 만분의 일이지만 70억이 사는 세상에는 만의 하나가 70만 명 있다. 그 세계로 뛰어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말인가? 노자나 장자 따위에게 쫄아서 함부로 감탄사를 바치고 라즈니쉬 따위 머저리에게 속아서 책을 백 권이나 사서 쟁여놓고, 환빠짓에 창조과학회에 달착륙음모론이나 믿고 그런 너절함이 창피하지 않다는 말인가? 태연하게 교회에 다니고 절에 가서 절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는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다. 만나지 못한다. 더 높은 세계가 있다. 진리는 가까운 곳에 있고 1+1=2가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세계를 방문할 수 있다. 다만 배움이 있어야 언어를 얻고, 언어를 얻어야 만남을 이루고, 만남을 이루어야호르몬이 나와준다. 호르몬이 나오지 않으니 좋은 것을 배워도 기쁨이 없다. 너절한 잔꾀나 꼼수나 요령이나 실용이나 경험이나 이런 짓에 함부로 감탄사를 던진다. 천하인의 길을 가지 않고 뒷골목을 숨어다니는 그 모습이 부끄럽지 않다는 말인가? 진리 앞에서 전율하게 하는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무미한 사람과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 전율하라. 그리고 운명을 바꿔라. 그 다음은 신이 길을 안내할 것이다. 당신이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라면 이미 신의 표지를 찾았을 것이다.



    사람의 도리


    공자는 사람의 도리를 가르쳤다. 인의라고 한다. 인의가 무엇인가? 사람이 아니면 짐승이다. 공자의 인의가 짐승의 도리는 아닌 것이다. 짐승은 사회가 없고 인간은 그 사회가 있다. 사회를 이루게 하는 것은 언어다. 대화할 수 있으면 사람이다.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는 자라면 사람 대접을 할 수 없다. 수평적으로 대화가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의 도리다. 대화가 된다는 것은 지식을 공유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자의 길이 진보의 길, 합리주의 길, 일원론의 길, 민주의 길, 대승의 길, 문명의 길인 이유는 그래야 만나서 대화하고 지식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자의 대의를 저버리고 소인배의 이익을 찾는 실용주의자나, 괴력난신을 추구하는 경험주의자나, 혼자 고고한척 하는 도덕가의 소승이나, 이랬다 저랬다 하며 변덕을 부리는 다원론자들과는 대화할 수 없고 더욱 지식을 공유할 수 없다. 만날 수 없다. 


    짐승의 도리는 어떤 것인가? 공자가 활동했던 이천오백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국인과 야인이 있다. 성 안에 살면 국인이고 성 밖에 살면 야인이다. 야인은 부족민이다. 야인이 국인을 만나면 반드시 죽이고 옷가지를 빼앗으므로 도적이라고 한다. 부족민은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응수한다'는 일대일 맞대응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 응수타진 들어가준다. '내가 이렇게 하면 네가 어떻게 할 건데?' 이러고 상대의 반응을 떠본다. 그러므로 외부인을 만나면 일단 겁을 주고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인이 만인에게 맞대응하면 사회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 맞대응이 가능하면서도 통제가 가능한 숫자는 50명이다. 부족은 50명 단위로 해체된다. 사회는 깨지고 만다. 그것이 야만이고 미개한 것이다.  


    실용주의, 경험주의니, 다원주의니, 상대주의니, 보수주의니 하는 것들은 이러한 맞대응 논리의 정당화에 불과하다. 적과 대결할 때는 당연히 이런 수단을 쓸 수 있다. 적과 지식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배움이 아니다. 교육이 아니다. 적과 만나서 대화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현실을 보자. 진보든 보수든 서로 ‘네가 먼저 이랬잖아.’ 하며 맞대응에 분주하다. 꼬맹이들이 코피를 터뜨리고 와서 ‘쟤가 먼저 때렸어요.’ 하고 고자질하는 수준이다. 왜 진보는 분열하는가? 정의당, 녹색당, 민중당 ,여성의당이 분열하는 이유는 각자 맞대응을 하다 보니 쪼개져서 그런 것이다. 부족민이 50명 정도의 소그룹을 이루게 되는 것과 같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각자 맞대응을 하다보니 유태인이 12지파로 분열되고 마침내 디아스포라를 일으켜 흩어지는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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