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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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7450 vote 0 2018.05.28 (17:12:18)

      
    깨달음이라야 한다       


    깨달음은 어떤 특정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존재가, 자연이, 언어가, 인간의 뇌구조가 모두 깨달음의 복제구조, 연쇄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다. 그러므로 하나를 바꾸면 전체를 다 바꾸어야 한다. 전체를 다 바꾸는 그 하나를 바꾸는 것이 깨달음이다. 플랫폼을 바꾸어야 한다. 삶의 에너지원을 바꾸어야 한다. 

    세상은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연결이다. 사건은 플랫폼에 에너지가 입력되면 동일한 패턴을 대량으로 복제한다. 하나의 자궁에서 무수히 쏟아진다. 복제본은 원본에 에너지를 의존한다. 원본이 복제본을 주변에 거느리고 세력을 이루면 방향성이 성립하여 무리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우주의 팽창이고, 생물의 진화이고, 문명의 발달이고, 자본의 번영이고, 삶의 풍성함이다. 사물이냐 사건이냐다. 방향이 다르다. 사물의 세계는 다르다에 주목하고 사건의 세계는 같다에 주목한다. 깨달음은 같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무엇이 같은가? 자궁이 같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자궁이 있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있다. 플랫폼이 있다. 결과가 다르면 원인이 같고, 끝단이 다르면 시작이 같고, 꼬리가 다르면 머리가 같고, 부분이 다르면 전체가 같고, 출력이 다르면 입력이 같다.

    사물의 결과가 다르면 이름을 붙여 구분한다. 사건의 플랫폼이 같으면 이름이 없다. 존재의 자궁은 이름이 없다. 경계를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로 가리켜 지목될 수 없으므로 깨달음이다. 에너지나 플랫폼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깨달아야 한다.

    형식과 내용의 이중구조다. 랑그 속에 빠롤이 있다. 전제 속에 진술이 있다. 맥락 속에 의미가 있다. 관점 속에 팩트가 있다. 연결 속에 사물이 있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절차가 있다. 에너지의 유도 속에 일의 처리가 있다. 

    당신이 어떤 말을 했다면 그 말은 틀린 말이다. 입을 떼기도 전에 허튼소리다. 언어의 그릇에 담아낼 수 없다. 진술을 말하는 자는 전제를 속이려는 자다. 의미를 말하는 자는 맥락을 속이려는 자다. 팩트를 말하는 자는 관점을 속이려는 자다. 내용을 말하는 자는 형식을 속이려는 자다. 오류를 피해갈 수 없다.

      세상은 마이너스다. 어떤 말을 하든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미 틀어져 있다. 프로토콜이 다른 사람과는 대화하지 말아야 한다. 주파수가 다를 때 유일한 해결책은 배제하는 것이다. 진보가 보수를 설득하려 하면 실패한다. 진보는 세력을 이룬 다음 보수를 배제하는 방법을 쓸 수 있다. 말은 소용없고 실천으로만 해결된다.

    '내가 무엇을 깨닫는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나'의 개입이 그 연결을 끊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우주의 문제이지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무엇을 깨달았다'는 식으로 진술될 수가 없다. 깨달음은 우주의 작동원리로 그저 있는 것이다.

     당신은 깨달음의 배에 승선을 하든지 말든지를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진보팀에 들지 보수로 남을지 선택할 뿐이다. 대승의 배에 승선할지 소승으로 남을지 선택할 뿐이다. 깨달음은 무리가 세력을 이루고 함께 가는 것이며 인간은 가담하거나 남거나 뿐이다. 

    자기소개 금지다. 개인이 마음의 평정을 찾고 삿된 것에 홀리지 않으며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정도는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구할 일이다. 깨달음은 당신과 상관없는 존재 자체의 전략이다. 동물은 생태계의 전략을 따르고 개인은 집단의 전략을 따르고 병사는 지휘관의 전술을 따라야 한다. 대승의 배에 올라타야 한다. '나'를 배제하고 함께 어우러져 큰 길을 가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  


    깨달음은 라디오가 방송국의 존재를 깨닫는 것이다. 인간이든 사물이든 개별적 존재가 널리 연결되어 통짜덩어리로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고아 소년이 자신을 낳아준 친부모의 존재를 깨닫는 격이다. 

    부분은 전체를 깨닫고, 진술은 전제를 깨닫고, 결과는 원인을 깨닫고, 종결은 시작을 깨닫고, 꼬리는 머리를 깨닫고, 마음은 무의식을 깨닫고, 팩트는 관점을 깨닫고, 의미는 맥락을 깨닫고, 사물은 사건을 깨닫고, 내용은 형식을 깨닫고, 물질은 에너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사건에 가담하기다. 

    인간은 본능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가담하지만 실패한다. 의도와 다른 결과가 얻어진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  개인을 희생시키고 대신 집단의 이익에 기여한다. 개인은 명성과 지위와 평판을 탐하지만 실패한다. 명성이 이득이라는 관념은 집단의 무의식이 조종한 결과다. 

    이름을 떨치다 죽느니 안전하게 사는게 이득이다. 인간은 권력을 탐하고 미인을 탐하고 돈을 탐하나 실패한다. 위험에 빠져 죽는다. 무의식에 조종된 탐욕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증가시켜 집단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자연의 이러한 방법은 확률적인 것이며 합리적이지 않고 문명적이지 않다. 1만 년 전 부족민의 삶에 맞는 것이다. 문명을 진보시킬 확률을 올리지만 현대문명에 댄다면 위험하다.

    당신이 무대에 등장하기 전에 사건은 일어나 있다. 발견해야 한다. 개는 본능적으로 집을 지킨다. 무의식적으로 인간에게 봉사한다.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널리 연결되어 하나의 통짜덩어리로 있다. 하나가 바뀌면 전체가 다 바뀌게 된다. 전기를 100볼트에서 220볼트로 바꾸면 모든 가전제품을 다 바꾸어야 한다.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야 한다. 에너지원을 바꾸어야 한다.

    명성을 탐하는 연예인은 우쭐해서 주변에 인심 쓴다. 작가들이 원고료가 나오기 무섭게 술값으로 탕진한다. 동료들 사이에서 좋은 선배로 대접받으려 망한다. 집단이 당신을 부려먹는 방법이다. 좋은 동료, 좋은 친구, 좋은 사람, 좋은 아내나 남편으로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인간을 바보로 만든다. 재벌은 자기 가족만 챙기다가 감옥에 간다. 가족을 지배하려는 권력의지 때문에 망한다.

    하나를 바꾸면 다 바꾸어야 한다. 명성도 끊고 평판도 끊고 위세도 끊고 칭찬도 끊고 고독도 끊고 미인도 끊고 권력도 끊고 대신 모두 연결되어 있음의 중심과 정면대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사건의 중심이 있다. 인간은 그 일과 함께 나아갈 수 있다. 

    인간은 집단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할 때 안정감을 느낀다. 그러한 본능을 따라 변희재짓 하고 윤서인짓 한다. 자신이 할 바를 다하되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만족하는 선비는 참으로 적다.

    설계도 없이 본능에 끌려가므로 인간은 망한다. 리스크를 증대시켜 망한다. 세상은 인간을 확률로 조진다. 로또 사다가 망한다. 의사결정중심으로 쳐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대승의 큰 배에 올라타고 함께 가는 것이다. 인간은 단지 바른 길에 가담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를 바꾸면 모두 바꾸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귀신을 믿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귀신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되어야 할 전제들이 적어도 일백 개 있다. 좀비영화를 만든다고 치자. 좀비는 왜 먹지 않는데도 힘이 넘치지? 엔트로피의 법칙에 어긋난다. 설정오류다. 좀비영화만 해도 수십 가지 설정오류가 있다. 귀신이라면 눙치고 넘어간 전제가 무수히 있다. 인간의 접근이 귀납적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방향을 연역으로 바꾼다. 하나를 바꾼다. 다 바꾸어야 한다. 의사결정 중심으로부터 퍼즐을 맞추어 온다. 귀신이라면 일백 가지 설정오류를 해결하고 와야 한다. 이렇게 규칙을 바꾸면 많은 단어를 쓸 수 없다. 국어사전의 반을 지워야 한다. 이 상황을 당신은 견뎌낼 수 있는가? 어린이는 가능하나 어른은 어렵다.



    깨달음은 에너지다


    깨달음의 근본은 인간을 움직이는 에너지의 출처다. 하나는 동료와의 비교다. 둘은 개인의 본능이다. 둘 다 틀렸다. 동료와 비교하여 남보다 앞서려고 한다. 집단 무의식의 작용이다. 보이지 않는 숫자의 압박이 있다. 집단 구성원 숫자가 많다는 사실에서 의사결정 스트레스를 느낀다. 그러므로 자신을 도드라지게 만들려고 한다. 

    부족민은 그 반대다. 부족민은 남보다 잘난 것을 경계한다. 잘난척 하다가 살해되기 다반사다. 질투는 부족민의 힘이다. 한국에도 부족민이 있다. 연예인이나 스포츠맨에게 겸손을 요구하고 노력을 강요한다.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암적 존재다. 그들은 세계를 보지 못하므로 한국이라는 좁은 바닥이 부족처럼 작다고 느낀다.

    노력을 경쟁하면 스포츠는 본질에서 붕괴된다. 스포츠의 의미는 챔피언 보디를 전시하여 관객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답을 알아채게 된다. 박항서가 해냈다. 베트남은 이기는 법을 알아챘다. 내부에서 결핍된 것을 외부에서 조달하여 해결했다. 노력하는 자가 이기면 망한다. 밖으로 나가서 한 번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해결할 것을 안에서 맴돌다가 자멸한다. 내부에는 답이 없다. 히딩크는 내부에 없다. 노력파는 안에서 맴돌며 내부를 쥐어짜다가 망한다. 

    월드컵에서 우승을 노리려면 모든 초중등 학교에 축구팀을 만들어야 한다. 소수정예를 미는 엘리트 체육을 하면서 노력을 강요하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이 집단을 패배로 이끈다. 중간은 가도 우승은 무리다. 전쟁에 이기려면 신무기를 장착해야 한다. 노력하면 전쟁을 이기나? 무기가 없는데도? 노력해봤자 칼이 총을 이길 수는 없다. 노력강요 겸손강요는 집단적 오판을 저지른다. 감투정신으로 이기려다가 망한 이차대전 때의 독일과 일본이다. 집단적 오판을 막으려면 겸손강요 노력강요를 벗어나 밖으로 길을 열고 운명적 만남을 꾀해야 한다. 

    연예인은 오만해야 한다. 예술은 인간에게 위험한 극한의 영역을 탐색한다. 겸손하게 양보하면 예술은 바로 사망한다. 단체로 바보된다. 예술은 깨달음을 주는 장치다. 예술의 붕괴는 집단의 붕괴로 간다. 중국인들이 비행기에서 답답하니까 창문 열어라는 식의 세련되지 못한 행동을 하면 세계무대에서 왕따된다. 이미 일어나고 있다. 부족민이 발전을 못하고 1만년 전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겸손 때문이다. 동료보다 우월한 자는 바로 죽이는 것이 고립생활을 하는 부족민의 철학이다. 

    유럽이라면 유능한 장수에게 미래를 맡기겠지만 한국은 쳐들어올 외부의 적이 없다. 설화 속의 아기장수는 살해된다. 적군의 침략을 막기보다는 내부의 반란 가능성 차단이 중요하다는 관점이다. 일본과 중국은 300년에 한번쯤 쳐들어온다. 내부의 불안요소만 막으면 된다는 퇴행적인 사고가 미래를 망친다. 

    두번째는 개인의 욕망에서 나오는 에너지다. 식욕과 성욕들이다. 동료와의 비교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상쇄효과로 망하고 개인의 본능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중독으로 망한다. 좋은 사람이 되려는 행동이 나쁜건 아니다. 개인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도 나쁜 것은 당연히 아니다. 문제는 망한다는 거다. 지속가능성의 문제다. 

    친구와의 우정도 중독성이 있고 개인의 쾌락도 중독성이 있다. 우정이나 쾌락이 나쁜게 아니라 밸런스를 지키지 못하는 거다. 친구도 적당히 찾고 사랑도 적당히 하고 동료도 적당히 챙기고 쾌락도 적당히 하면 상관없다. 젊은 시절이라면 갈데까지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쩌다 한 번 쯤이면 거금을 들여서 미식을 탐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젊은이의 모험이 되고 탐구가 된다. 운명적인 사랑도 스토리가 된다. 그러다 중독되어 망한다.

    지나친 음식타령은 소인배 행동이다. 옷은 이렇게 입어야 해. 청소는 이렇게 해야 해. 미세먼지는 막아야 해. 라면과 햄버거는 해로워. 이런 짓을 거듭하다가 중독된다. 나중에는 사람을 위해 옷을 입는 것이 아니고 옷을 위해 사람이 봉사하는 격으로 주객전도가 되고 마는 거다. 밸런스 감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에너지는 족보에서 찾아야 한다. 상승효과가 있고 상생효과가 있다. 하는 일의 일관성과 연속성, 계속성에서 에너지를 찾아야 한다. 관성의 법칙에서 찾아야 한다. 결따라가야 한다. 엔트로피에 충실해야 한다. 자연스러워야 한다. 역사와 전통과 합리성에서 에너지가 나와야 한다. 그것은 하던 일을 계속하기다.

    그 일을 알아내야 한다. 내게 주어진 미션을 찾아내야 한다. 대표성이면 더욱 좋다. 대표성은 자신이 족보의 시조가 되는 거다. 언제라도 나의 마음을 앞세우지 말고 팀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 나는 너에 막힌다. 내 생각은 이래. 내 느낌은 이래. 내가 원하는건 이거야. 그 나를 버리고 천하를 찾아야 한다.


    나쁜 에너지원


    ● 비교우위 – 우월의식, 열등의식, 돈, 명성, 지위, 신분, 평판, 좋은 사람이 되어 주변의 칭찬을 듣고 인정받으려는 행동.


    ● 동물본능 - 쾌락주의, 이기주의, 욕망, 술, 담배, 오락, 도박, 건강집착, 모든 중독성 있는 육체적 대상.


    ● 권력의지 – 질투, 분노, 시기, 겸손강요, 노력요구, 소수자 차별, 인종주의, 타인을 통제하려는 소인배의 권력의지.


    ● 괴력난신 – 사이비종교, 음모론, 외계인, 초능력, 미세먼지 노이로제, 라돈 노이로제, 건강염려증, 각종 강박장애.


    ● 계몽주의 – 교양, 예의, 매너, 에티켓, 미식, 음악, 그림 기타 개인의 수준을 평가하려는 사회적 잣대들.


    좋은 에너지원


    ● 족보연결 – 관성의 법칙에 따라 계통을 만들어 가려는 행동, 정통성, 계보, 역사, 선대를 잇고 후대를 생산하기.


    ● 대승의 팀 – 소승이 아닌 대승, 보수가 아닌 진보, 야만이 아닌 문명, 약자가 아닌 강자의 길.


    ● 대표성의 획득 – 계통의 시조, 발견과 발명, 학문적 성과, 예술이나 스포츠나 전문분야의 개척자.


    ● 신과의 일대일 – 괴력난신의 극복, 리더, 대표자의 마음, 족장, 구심살 없는 왕자의 마음, 팀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기.


    ● 엘리트 의식 – 교양이나 예의에 얽매이지 않고 가르치려는 마음을 버리고 자유로운 선비정신으로 나아가기.


    우파는 차별에서 에너지를 얻고 좌파는 교양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본질은 같다. 지나친 환경보호 동물보호 집착이나 인종주의나 같다. 부족한 에너지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선한 의도로 채식을 강요하거나 나쁜 의도로 흑인을 모욕하거나 같다.

    다른 사람과 다투는 데서 에너지를 얻으려고 하면 안 된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무방하다. 채식주의를 하든 미세먼지를 막든 생태운동을 하든 나쁘지 않다. 밸런스를 맞추기가 힘들 뿐이다. 

    근본 인간의 에너지는 관성의 법칙에서, 인류의 진보에서 나와야 한다. 인류의 대표자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면 안 되고 인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 천하와 보조를 맞추어 함께 가는 데서 나와야 한다. 한 가지 일을 다른 일과 연결시키는 데서 얻어지는 효율성에서 나와야 한다. 

    에너지원은 다양해야 한다. 상대와의 비교나 동물적 본능도 굳이 막을 필요는 없지만 밸런스를 지키기 힘들다. 성욕이 뭐 어때? 마광수처럼 오버하니까 문제다. 예술가라면 의도적으로 오버할 때도 있어야 하나 알고 오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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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정보를 처리하는 뇌와 외부정보를 받아들이는 눈코귀입몸 신체감관과 타인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언어를 쓴다. 언어는 원시인이 얼떨결에 발명한 것이니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 눈코귀입몸의 감각신호는 호르몬에 의해 감정으로 증폭되는 과정에서 왜곡된다. 인간의 뇌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 인간의 뇌와 감각과 언어가 잘못되어 있음을 알아채고 그것을 바르게 고치는 것이 깨달음이다.


    인간의 뇌는 야생에서의 생존환경에 맞추어져 있다. 초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의 정보처리 능력이면 충분하다. 맹수와 다투는 야생환경에서는 즉각적인 대응능력이 필요할 뿐 고도의 추론능력은 필요하지 않다. 영리한 사람보다는 용맹한 사람이 살아남는다. 자신의 지혜로 생각하기보다 경험이 많은 동료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능은 의사소통 위주로 발달했다.


    간단히 말하면 깨달음은 귀납에서 연역으로 사유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귀납이 개별적인 정보들을 다룬다면 연역은 이미 획득한 확실한 정보를 개별적 사실에 대입하여 복제한다. 귀납은 자신의 지식을 동료들에게 전달하는데 쓰고 연역은 새로운 지식을 창발하는데 쓴다. 인간은 대개 귀납에 의지하지만 착각이다. 뇌기능적으로는 연역만 있고 귀납은 없다. 정확하게는 '귀납적' 태도라 하겠다.


    귀납은 부분에서 전체로 간다. 개별적 사실에서 보편적 원리를 구한다. 그냥 보편적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바람이 분다. 비가 올 조짐인가? 할아버지는 알고 있다.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자. 인간은 대개 이러한 귀납적 학습방법으로 지식을 획득한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알려준 것이다. 즉 귀납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보급하는 것이다.


    개별적 사실에서 전체의 원리를 추측할 수 있으나 그 자체로는 지식이 될 수 없고 반드시 검증과정을 거쳐야 한다. 검증원리는 연역이다. 연역적 검증의 수단은 대개 수학이다. 진정한 지식은 모두 수학에 의지하며 수학이 연역을 쓰므로 연역이 유일한 지식의 획득수단이다. 귀납은 현장에서 자료를 모으고 학습하고 전달하는데 쓰인다. 지식의 획득수단은 연역이며 귀납은 보조적 수단으로 쓰인다.


    그렇다면 그 수학의 근거는? 가장 확실한 것은 인간에 의해 가리켜지는 개별적인 지식내용이 아니라 이를 처리하는 인간의 뇌구조 그 자체다. 왜냐하면 뇌구조가 틀렸다면 연산을 할 수 없을테니까. 만약 언어가 틀렸다면 서로 간에 말이 안 통할테니까. 수학 위의 것은 뇌구조와 언어구조다. 뇌구조와 언어구조는 의사소통하는 과정에서 확실히 검증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연역되어 수학이 일어난다.


    문제는 인간이 뇌기능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천재가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는 그냥 생각이 떠오르는 거지 논리적으로 사유해서 답을 찾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연산작용은 무의식 영역에서 일어난다. 아인슈타인도 자신이 어떻게 생각해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머리에 쥐가 나도록 힘을 주다 보면 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스티브 잡스는 CPU에 모니터를 달았다. 


    컴퓨터가 일하는 과정을 모니터로 보여준다. 인간에게는 그런게 없다. 뇌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면밀히 살핀다면 뇌 안의 컴퓨터 메모리 역할을 하는 영역에서 적확하게 연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뇌 속에 가상의 테이블을 펼치고 거기에 여러 카드들을 배치해 보면 대칭과 호응에 의해서 적합한 짝이 찾아진다. 바둑고수라면 바둑알의 배치를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다. 


    훈련된 사람이라면 무의식 영역에서 일어나는 직관적인 사유를 논리적으로 재현해 보일 수 있다. 그것은 근원의 완전성이다. 그 완전성을 복제하는 것이다. 수학으로 치면 덧셈과 뺄셈은 자의 눈금을 옮기는 것이다. 낮은 수준이다. 눈금을 입체적으로 쌓으면 자에서 콤파스로 도약한다. 콤파스를 다시 입체적으로 쌓으면 됫박이 되고 됫박을 입체적으로 쌓으면 저울이 된다. 바둑판은 평면구조다. 


    바둑 고수는 머리 속에 평면으로 된 테이블을 펼친다. 직관은 그것을 평면에서 입체로 도약시킨다. 콤파스가 평면이면 됫박은 입체다. 다시 저울로 도약시킨다. 입체에서 한 단계 더 집적한다. 최대한 입체적으로 쌓아올린 상태 곧 밀도를 끌어올린 상태에서 작동하는 대칭과 호응의 구조를 떠올릴 수 있다. 머리 속에 입체 혹은 저울 형태의 고도화된 테이블을 펼쳐놓고 사유를 하는 사람이 천재다.


    동물은 서로 간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 혹은 일부 통한다 해도 낮은 수준이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그 안에 어떤 완전성이 있다는 의미다. 그것을 포착하고 복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시스템 그 자체를 지식의 궁극적인 근거로 삼아야 한다. 컴퓨터와 같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것이 뇌의 정보처리 시스템이다. 뇌가 하나의 지식을 열 개의 지식으로 복제하고 있다.


    컴퓨터는 복제의 도구다. 컴퓨터는 주산을 고도화 시킨 것이다. 주판알은 손가락 끝부분을 복제한 것이다. 주먹구구는 자연의 사실을 손가락으로 복제한다. 주산은 다시 손가락을 주판알로 복제한다. 컴퓨터는 0과 1의 기호로 주판알을 복제한다. 복제의 원리는 모두 같다. 자연이 스스로를 나타내는 방법이나 인간의 뇌가 직관하는 원리나 언어를 복제하여 전달하는 원리나 모두 복제의 원리를 쓴다.


    정보의 대량복제 시스템을 쓰는 것이 연역이다. 개별 단어에는 의미가 있고 문장에는 맥락이 있고 언어에는 관측자가 있다. 이러한 언어구조 그 자체로 지식을 낚는 것이 연역이다. 이러한 구조는 뇌에 갖추어져 있다. 단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인간에게는 깨달음이 있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깨달아 있다. 컴퓨터라면 반도체가 이미 완전성을 갖추고 있다. 이를 집적하여 고도화 시키면 된다.


    점에서 선으로 각으로 입체로 밀도로 고도화 시키면 된다. 소립자가 만들어지는 원리도 같다. 우주는 작은 입자가 모여들어 크게 이룩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에너지가 복제되어 망라된 것이다. 우주가 복제를 쓰고 생물이 복제를 쓰고 뇌가 복제를 쓰므로 인간 역시 복제를 써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복제를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인간에게는 원래 그러한 능력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쓰지 못한다. 인간의 언어는 기본 모드가 대화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핑퐁과 같다. 머리 안에 테이블을 펼쳐놓고 카드들을 놓아보면 답을 알 수 있는데 상대방에게 말을 떠넘긴다. 묻고 답하는 대화를 통해 지식을 구하므로 실패한다. 대화는 자기를 개입시킨다. 관측자가 사건에 개입하므로 실패다. 호랑이와 마주친 아기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울어서 어른을 부르는게 가장 빠르다.


    인간은 상황을 당하여 생각하기보다 그냥 아는 사람을 부르는게 빠르다. 거기에 뇌구조가 맞춰져 있으므로 실패한다. 천재가 있다. 머리가 좋다고 해서 천재는 아니다. 천재는 뇌를 다르게 사용한다. 천재들은 관측자인 자기를 배제하고 그 자리에 체계와 구조와 패턴을 놓는다. 머리 속에 테이블을 펼친다. 사과가 있다. 나는 사과가 좋더라. 나는 사과가 싫더라 하고 자기를 개입시키므로 실패한다.


    중력을 발견하려면 뇌 속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 둥근 지구의 위와 아래와 오른쪽과 왼쪽에서 지구 중심을 향해 사과들이 일제히 떨어지는 그림이다. 사과들은 모두 지구중심이라는 한 방향을 바라본다. 어떤 사실을 알아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깨달음은 도구를 쓴다. 뇌구조와 언어구조 자체가 도구다. 천문학자는 망원경이 있어야 성과를 낸다. 무사는 칼이 있어야 힘을 쓴다.


    작가는 펜이 있어야 하고 의사는 청진기가 있어야 한다. 깨달음은 체계와 구조와 패턴을 쓴다. 그리고 연역한다. 어떤 대상을 보는게 아니라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본다. 사물이 아니라 사건을 본다. 에너지가 드나드는 입구와 출구를 본다. 그 사이의 의사결정구조를 본다.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본다. 에너지가 들어오는 입구와 나가는 출구는 형식에 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직관하면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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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6 (19: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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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이 필요한 이유는 어떤 개별적 사실을 입수하려고 할 뿐 근본적인 사유의 태도를 바꾸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유에는 방향성이 있다. 한 번 그 방향으로 길이 나면 그 쪽으로 계속 간다.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귀납으로는 진짜 지식을 획득하지 못한다. 위 러닝 피라미드에서 학습정착률이 낮은 강의 독서 시청각 학습이 귀납에 해당된다. 


  구조론을 귀납으로 배운다면 곤란하다. 가장 효과가 높은 것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방법을 소년시절에 필자는 써 왔다. 그것은 복제하는 것이며 재현하는 것이고 연역하는 것이다. 실제 재현해보면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을 하려면 반드시 전제가 되는 무언가가 하나 더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연역의 딜레마가 있다.


  연역하려면 하나가 더 필요한데 그 추가되어야 하는 하나가 없기 때문에 연역을 못하는 것이다. A를 해야 하는데 A가 준비되었다면 전혀 준비가 안 된 것이다. 글을 쓰려면 아이디어 뿐만 아니라 펜과 노트가 있어야 한다. 요리를 하려면 밀가루만 있으면 되는게 아니고 조리도구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항상 예기치 못한 하나가 더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아는 것은 아직 모르는 것이다. 반드시 하나가 더 있다. 내용을 알았다면 이제부터 형식을 알아와야 한다. 칼을 받아올 때는 칼집까지 가져와야 한다.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면허증까지 따와야 한다. 항상 하나가 더 있다. 그 추가되는 하나는 그 단계에 없고 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 1층을 접수하려면 사전에 2층을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방해자에 의해 곤란을 겪는다. 이게 다 방해자 때문이다 하고 핑계대면 안 된다. 그 방해자의 등장을 사전에 예견하고 미리 조치해 두어야 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깨닫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데 별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일까? 도와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펜이 없으면 빌리면 된다. 형식은 항상 빌려주는 이가 있다.


  내용만 채우면 된다. 결혼식장은 임대하면 되고 신부감만 찾으면 된다. 그런데 말이다. 처음 가는 길은 그렇지 않다. 과학자가 처음 어떤 발견을 할 때는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신부감만 찾으면 되는게 아니고 결혼식장을 직접 지어야 한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들은 그런 험난한 길을 걸어온 것이다. 깨달음은 새로운 분야에 대입하여 재현한다.


  재현하려면 머리 속에 모형이 펼쳐져 있어야 하고 그 이전에 머리 속에 테이블을 펼치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보통은 그게 안 된다. 머리 속에는 아무 것도 없고 대상과 나의 대칭관계가 테이블이 된다. 대상과의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지식을 구한다. 건드려서 반응을 보는 것이다. 자기 안의 지식을 수학공식처럼 대입해서 풀어내야 바른 지식이다. 


 어떤 것이든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절차가 있다. 상부구조가 있다. 동사 이전에 명사가 있고 술어 이전에 주어가 있고 진술 이전에 전제가 있다. 에너지를 유도하는 절차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생략한다. 남이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기름을 넣을 때마다 주유소를 건설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초로 차를 발명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기차를 만들기 전에 정거장을 만들어야 하고 수소차를 제작하기 전에 충전소를 지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에너지 유도절차를 생략한다. 깨달음은 그러한 근본을 찾는 것이다. 그 근본의 근본은 뇌 안에 이미 세팅되어 있다. 그것을 복제해야 한다. 연역은 있는 것을 가져다가 쓴다. 최초의 것은 원래부터 주어져 있다. 그것을 찾아내면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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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5 (19: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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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의 의미 http://gujoron.com/xe/997655

간화선 필요없다 http://gujoron.com/xe/1007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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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6 (11: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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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어떤 사실을 깨닫는게 아니다. 언어로 가리켜 지목될 수 있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거나 '오온이 공함을 깨달았다'거나 '인생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거나 하는건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말이다. 그것은 답을 찾은 것이 아니라 의혹을 얻은 것이며 이제 한 가지 의심을 일으킨 것이니 초발심이라 하겠다.


    옛날에는 그 정도만으로도 깨달음으로 쳐줬다. 석구의 제자 500 비구가 모두 깨달았다는 말은 '세상만사 마음 먹기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귀신에 홀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 시대에는 자연환경이 무서웠다. 천재지변과 전쟁과 질병의 두려움을 이겨냈다면 그 정도로 충분했다. 죽음의 두려움만 극복한다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요즘은 과학의 발달 덕분에 다들 두려움을 극복하고 있다. 하긴 요즘도 음모론이나 가짜뉴스 따위에 홀리는 자들이 있다. MSG니 사카린이니 안아키니 하는 것들에게 홀리는 바보들이 많다. 그게 왕년의 언어로 말하면 귀신에 홀리는 것이다. 음모론에 가짜뉴스만 극복해도 좀 아는 사람이라 하겠지만 이 정도는 똑똑한 애들은 초딩 3학년만 돼도 해낸다.


    과학이라는 강적이 등장해서 만사휴의가 되었다. 아직도 점 보러 다니는 바보들이 간혹 있지만 말이다. 전통적인 깨달음은 용도폐기 되었다. 문제는 일부 상태가 안 좋은 형님들과 언니들이다. 이 분들은 하나씩 자기 문제를 안고 있다. 성소수자거나 아스퍼거 장애로 대인관계가 어렵거나 성격문제로 겁이 많거나 사회생활이 안 되는 형님들이 주변에 있다.


    이 분들은 자기네가 사회의 평균 이하이므로 평균으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취가 된다. 반도사라 불리는 무리들이 있는데 지리산 주변에 잔뜩 포진해 있다고 한다. 수백 명이나 된다고. 버글버글 하다고. 깨닫는다는 것은 엘리트의 영역이며 평균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인데 이 양반들은 평균 이하로 내려가 있으면서 평균을 회복하는게 목표다.


    그러므로 작은 성취에도 감격해 한다. 평소에 위축되어 있다가 갑자기 한 소식을 들었다면서 오만해져서 반말투로 덤빈다. 며칠 전에도 그런 부류에 속하는 한 사람을 강퇴시켰다. 그런게 위축되어 있는 본인에게는 의미가 있을 지 모르나 그걸 과시하면 안 된다. 술이나 쳐먹고 폐인처럼 살면서 뻔뻔해져서 민폐를 끼치면서 다 내려놓았노라고 주장한다.


    유치찬란한 거다. 누가 물어봤냐고? 내려놓았든 들고 있든 그건 당신 사정이다.

왜 떠들어? 대인관계나 성격문제 따위 개인 사정을 가지고 깨달음이니 어떻다니 하고 떠들어대면 안 된다. 깨달음은 우주의 소식이어야 한다. 애초에 당신과는 관계 없는 이야기다. 21세기에 천하를 고민하고 우주를 고민하지 않는 사사로운 소승적 깨달음은 안 쳐주는 거다.


    마음의 평정을 찾고 삿된 것에 홀리지 않으며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정도는 정신과 의사의 상담만 받아도 해결된다. 진짜는 무엇인가? 깨달음은 어떤 사실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존재가, 자연이, 언어가, 인간의 뇌구조가 모두 깨달음 구조로 되어 있다는 거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가리켜 지목될 수 없으므로 깨달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형식과 내용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랑그 속에 빠롤이 있다. 전제 속에 진술이 있다. 맥락 속에 의미가 있다. 관점 속에 팩트가 있다. 사슬 속에 사물이 있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절차가 있다. 에너지의 유도 속에 에너지의 처리가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어떤 말을 하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당신이 입을 떼기도 전에 이미 허튼소리다. 언어에 담을 수 없다.


    게시판에서 발톱을 숨긴 엉터리 질문하다 짤린 사람 있다. 진술을 말하는 자는 전제를 속이려는 자다. 짤린다. 의미를 말하는 자는 맥락을 속이려는 자다. 짤린다. 팩트를 말하는 자는 관점을 속이려는 자다. 짤린다. 내용을 말하는 자는 형식을 속이려는 자다. 짤린다. 이 사슬구조를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세치 혀를 놀려 수작부리지는 말라는 거다.


    세상은 마이너스다. 어떤 말을 하든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미 틀어져 있다. 그러므로 담론은 조건문과 반복문이 이중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이 허무하다느니 색즉시공이라느니 마음을 어떻게 한다느니 하는건 모두 진술이다. 진술이므로 모두 개소리다. 무엇을 깨닫는다고 하면 전제되는 무엇이 앞에 붙었으므로 그건 이미 개소리다.


    이미 한정되었고 틀에 가두어졌고 형식이 박혔고 전제의 제한이 걸렸는데 무슨 깨달음이겠느냐 말이다. 결론은 '내가 깨닫는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깨달음은 우주의 문제이지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깨달았다'는 식으로 진술될 수 없다. 깨달음이 우주의 작동원리로 존재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배에 승선을 하든지 말든지 선택할 수 있다.


    개인의 문제는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거나 선배의 조언을 듣거나 부인이 시키는대로 하면 된다. 거창하게 깨달음타령 필요없다. 하여간 말을 안 듣는 놈들은 깨달을 자격이 없다. 깨달음은 존재 그 자체의 전략이다. 집단의 전략을 따르고 지휘관의 전술을 따라야 한다. 대승의 큰 배에 올라타야 한다. 큰 길을 함께 가는 것이 깨달음이다. 자기소개 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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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3 (15: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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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이 있다


    라디오도 안테나가 없으면 고물이다. 스마트폰도 안테나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통화가 연결되지 않는다. 연결되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인간에게도 그러한 안테나가 있다. 영혼이 있다. 영혼은 대표성이다. 대표성은 사건에 있다. 사건은 다음 단계로 연결되어 간다. 그 연결의 접점은 언제나 약하다.


    그곳에는 단 하나만 위치할 수 있다. 스위치의 단락과 같은 작은 점이기 때문이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연결되면서 단계적으로 에너지를 증폭시킨다. 인간은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에너지를 증폭시킬 수 있다. 그 에너지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에너지를 켜고 끄는 스위치가 될 수 있다. 의사결정할 수 있다.


    사건 속에서 운명적으로 자신이 그 접점의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 홀을 손을 치켜들고 이의있습니다를 외친 노무현처럼 대표자의 행동을 해야 한다. 5천만 한국인의 대표자가 되어 5천만 배로 에너지를 증폭시켰다. 에너지를 켜고 끄기를 마음대로 하였다. 5천만의 운명을 두고 의사결정에 나섰던 것이다.


    노무현은 인간에게 영혼이 있고 안테나가 있고 에너지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보였다. 홀로 고립된 개체에는 영혼이 없다. 집단 속에 섞여버린 희미한 존재도 영혼은 없다. 사물은 영혼이 없다. 사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지 않는다. 사물은 그저 에너지를 통과시킬 뿐 격발하지 않는다. 동물도 영혼이 없다.


    그들은 고립되어 있거나 아니면 집단에 얽매여 있다. 에너지를 증폭시키지 않는다. 대표하지 않는다. 스위치를 켜지도 않고 끄지도 않는다. 의사결정에 나서지 않는다. 우주 안에 진정한 사건은 하나 뿐이다. 그것은 생물의 진화와 문명의 진보와 우주의 팽창이다. 그 커다란 사건의 주최측이 되어야 한다.


     주최측의 역할을 하는 존재는 오직 인간 뿐이다. 그 사건의 가는 방향을 정하는 존재는 인간 뿐이다. 인간들 중에서도 실제로는 적은 숫자다. 대부분은 영혼이 없다. 그들은 영혼이 있는 극소수의 노무현들에 묻어가는 것이다. 그들은 대표성을 위임할 수 있다. 간접적으로 대표성의 조직에 기여할 수는 있다.


    깨달음은 영혼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의 고유한 의사결정권을 깨닫는 것이다. 안테나를 깨닫는 것이다. 사건의 연결방법을 깨닫는 것이다. 죽은 물질이 영혼을 얻어 생명으로 살아나듯이 인간은 깨달음을 얻어 대표성을 행사할 수 있다. 영혼의 존재를 말할 수 있다. 그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개미도 살아있고 굼벵이도 살아있다. 영혼은 없다. 사건이 없다. 인류의 진보에 기여해야 영혼의 존재를 말할 수 있다. 보수는 영혼이 없다. 그들은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자기 운명을 개척하지 않는다. 의사결정하지 않는다. 진보에 속한다고 영혼을 얻는 것은 아니다. 에너지를 얻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의사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패배한 진보는 진보가 아니다. 이기는 진보만 에너지를 가지고 에너지의 고유한 활동성과 생명성을 행사한 진보만 영혼이 있다. 종교의 신도들은 영혼이 없다. 그들은 영혼을 교주에게 빼앗겨버렸기 때문이다. 영혼을 타인에게 위탁해버린 자들이다. 


    그들은 영혼을 팔아먹은 자들이다. 링 위에서 선수로 뛰는 자에게도 영혼이 없다. 그들은 주최측의 설계에 놀아날 뿐 독립적으로 의사결정하지 않는다. 언제라도 중립에 서서 사건의 주최측이 되어야 한다. 판을 짜고 판돈을 올리는 진보가 진짜다. 사건의 주최측은 진보나 보수 어느 편에 가담하지 않는다. 


    선과 악 중에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개인의 편도 집단의 편도 강자의 편도 약자의 편도 들지 않는다. 단지 판을 관리할 뿐이다. 진보가 이겨야 판이 관리된다. 주최측은 진보나 보수 어느 편에도 들지 않으면서 실제로는 진보가 약간 앞서도록 판을 관리한다. 진보가 에너지의 자궁이기 때문이다. 


    보수가 이기면 사건이 거기서 종결된다. 사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시키려면 에너지 잉여가 필요하다. 기관차가 객차를 이겨야 기차가 전진한다. 기관차가 객차를 이기고 에너지를 조금 남겨야 다음 역에서 기름을 채울 수 있다. 진보가 이겨야 게임이 지속가능하다. 주최측은 둘의 상호작용을 관리할 뿐이다.


    어린이와 어른 중에서는 어린이가 이기고 약자와 강자 중에서는 약자가 이기고 개인과 집단 중에서는 개인이 이겨야 사건이 다음 단계로 연결된다. 사자가 사슴을 이기면 생태계는 파괴된다. 소비자가 생산자를 이기면 시장은 파괴된다. 포식자가 피식자를 이기면 안 된다. 거기에 관리해야할 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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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0 (12: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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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다른 사건과 연동되므로 미리 규칙을 정해놔야 한다. 시합 중에 룰을 바꿀 수 없고 인생 중에 규칙을 바꿀 수 없다. 깨달음은 큰 틀에서 미리 규칙을 정해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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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11:5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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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의 본질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타고난 음치도 있다. 원래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노력하면 더 잘 된다. 반면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도 있다. 안 되는 사람에게 본인의 노력부족을 탓한다면 잔인한 거다. 호날두와 메시는 타고난 천재성에 노력을 더한 사람이다. 반면 호나우두와 호나우딩요는 천재성을 타고났지만 노력하지 않아서 조로했다. 


    그들은 특별하다. 인정할건 인정해야 한다. 원래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천재다. 그러나 천재도 적절한 환경을 만나지 못하면 꽃을 피우지 못하는 법이다. 시대와 환경과 천재의 3자가 맞아떨어졌을 때 재능을 발휘한다. 원시 부족민 마을에 태어났다면 무슨 수를 써도 안 된다. 아인슈타인 할아버지라도 소용없다. 시대가 천재를 불러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다. 환경의 부름에 응답하면 천재고 천재의 부름에 응답하면 수재다. 어디에 가도 잘 하는 타고난 천재가 있는가 하면 국대만 가면 죽을 쑤다가 리그에 돌아가면 잘 하는 선수도 있다. 그런 선수는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무리뉴를 만나서 망한 맨유의 포그바 솔샤르를 만나자 순식간에 살아났다. 


    2퍼센트 부족한 사람이 있다. 런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되는 사람의 행동을 따라 하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따라 해봤자 안 되는 사람도 있다. 보통은 고수의 행동을 따라 하다 보면 실력이 늘게 된다. 바둑이라 치자. 한국기원 등단시험을 앞둔 아마 고수 두 사람의 실력이 엇비슷하다. 한 사람은 당일 컨디션이 떨어져 승단에 실패한다. 


    한 사람은 운 좋게 초단이 된다. 이후 두 사람의 기력은 크게 벌어진다. 30년 쯤 전에 어디서 읽은 이야기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한국기원에 기사로 등단하면 대국상대가 달라진다. 노는 물이 달라지면 사람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혼자 놀면 안 되고 비슷한 사람과 어울려야 한다. 한국에서 별 볼일 없다가 런던이나 뉴욕으로 진출하면 실력이 는다.


    고수들과 섞이다 보면 감각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런 사람도 한국에 돌아오면 퇴행한다. 천재들에게는 특별한 분위기가 있고 아우라가 있고 시너지가 있다. 서로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것이며 서로 연동되는 것이다. 한때 네이버 웹툰 작가들이 서로 친했는데 그들의 만화는 우수했다. 지금은 패거리가 깨진 모양인지 상당히 재미가 없어지고 있는 중이다.


    광고천재 이제석은 한국에서 그다지 크지 못한다. 광고시장이 작은 한국에서는 무조건 유명인 얼굴을 크게 잡으면 뜬다. 얼굴이 알려진 몇몇 유명인이 광고시장을 독점한다. 일본만 해도 시장이 크고 연예인 숫자가 많아서 코믹한 광고를 해야 뜬다. 세계적인 브랜드의 광고를 하려면 이제석 특유의 감각이 먹힌다. 이제석은 대칭을 조직하는 수법을 쓴다.


    갈림길을 제시하고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묻는다. 거기에 긴장감이 있다.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소비자가 갑이기 때문이다. 유명인이 얼굴을 내밀어야 인사를 받아먹었다고 여긴다. 포지셔닝 문제다. 자신이 행렬의 선두에 서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이제석의 광고가 먹히고 자신이 후미에 쳐져서 따라간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그런 갈림길에서의 판단을 회피할 뿐 아니라 도리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결국 안철수나 따라다니게 되는게 한국의 바닥이 좁기 때문이다. 환경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천시와 지리와 인화가 맞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겠다는 사람과 분위기만 맞춰주면 먹어보겠다는 사람과 늘 먹는 익숙한 음식만 먹겠다는 사람은 태도가 다른 거다. 


   아마와 프로는 큰 차이가 있다. 작은 차이로 시작하지만 점점 벌어진다. 프로도 아마와 놀면 아마가 되고, 아마도 프로와 놀면 프로가 된다. 되도록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 그런다고 다 되는건 아니고 그래봤자 안 되는 사람은 안 된다. 그러므로 확률이다. 호날두는 어느 팀으로 가도 성공한다. 손흥민이나 박지성은 맞는 팀을 골라가야 성공하는 선수다. 


    깨달음은 그런 것이다. 원래 되는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을 만나야 되는 사람이 있고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절대적으로 되는 사람이 있고 상대적으로 되는 사람이 있고 운이 좋으면 되는 사람이 있고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자체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사람이다. 힘이 없는 대신 감각이 섬세한 사람이 있다. 


    물리력이 없어도 정신의 예리함이 있는 것이다. 성격이 까칠한 사람에게 에너지가 있다. 콤플렉스에서 에너지가 나오는 사람도 있다. 그 에너지는 상대적이다. 재벌의 돈이나 효도르의 힘은 절대적 에너지다. 작가의 셈세함은 상대적 에너지다. 그도 저도 아니지만 교착된 상황에서 탑 포지션을 잡은 사람이 있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요짐보가 그렇다. 


    적대적인 관계의 두 가문을 대결시켜 놓고 가지고 논다. 적절히 상황을 설계하면 작은 힘으로도 큰 지렛대를 만들어낸다. 셋 다 에너지가 있다. 원래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과 그 사람과 어울리다가 시너지 효과로 에너지를 얻는 사람과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 한국의 절대적인 힘은 일본에 미치지 못하지만 위치선정이 좋다.


    일본이 북한, 중국이 틀어진 상황에서 한국은 상대적으로 약한 북한, 중국, 베트남에 비교우위를 달성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이 치고받는 중에 어부지리를 취할 수도 있다. 힘은 환경과의 관계에서 나온다. 관계를 적절히 세팅하는 방법으로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어쨌든 힘이 있고 볼 일이다. 답을 찾아놓고 노력을 강조하든 정신력을 강조하든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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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6]

깨달음이라야 한다 깨달음은 어떤 특정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존재가, 자연이, 언어가, 인간의 뇌구조가 모두 깨달음의 복제구조, 연쇄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다. 그러므로 하나를 바꾸면 전체를 다 바꾸어...

구조론의 기원 [6]

구조론의 기원 구조론은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구조론은 쉽다. 그런데도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반대쪽을 보고 있으므로 어려운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

언어의 이해 [3]

언어에는 문법이 있다. 언어에는 방향이 있다. 언어에는 대칭이 있다. 언어에는 담론이 있다. 담론은 조건문과 반복문으로 구성된다. 언어에는 명제가 있다. 명제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된다. 언어에는 문장이 있다. 문장은 주어와 ...

역사의 오류 [1]

역사를 구조로 봐야 한다. 합리적인 의사결정구조를 만들었는지가 중요하다. 조금씩 잘살게 되기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다지 의미가 없고 초반에는 역효과가 일어난다. 크게 잘살게 되려면 자동차가 있어야 한다. 이동수단 ...

진화의 구조 [3]

진화에는 방향성이 있다 모든 것은 진화한다. 진화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도 진화하고 우주도 진화하고 물질도 진화한다. 그냥 제 자리에 멈추어 있는 것은 없다. 환경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외력이 작용한다. ...

사건철학 [7]

강자의 철학으로 갈아타라 세상을 물질적 존재가 아닌 에너지적 사건으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물질은 고유한 속성이 있고 인간은 그 물질들 중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이때 인간은 선택하는 자가 ...

인간의 이해 [13]

대중의 권력의지에 해답이 있다. 인간은 에너지가 고양될 때 권력의지를 발동하며 그럴 때 인간은 공부를 한다. 남자는 운동하고 여자는 화장한다. 에너지가 약해질 때 편한 길을 가려고 한다. 가던 길을 계속 가려고 한다. ...

신의 입장 [5]

행복이니 쾌락이니 자유니 사랑이니 성공이니 하지만 다 개떡같은 소리다. 시시하기 짝이 없다. 그걸로 어린아이를 유혹할 수 있을지 모르나 내 가슴을 뛰게 할 수는 없다. 눈이 번쩍 뜨이는 진짜는 하나 뿐이다. 생각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