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다섯째 꼭지도 앞과 같다. 연애경험 없는 스물두살 여자라고. 마음에 드는 이성 앞에 서면 얼굴이 빨개지고 부끄러워서 말도 제대로 못하게 된다고. 이에 대한 강신주의 답은 많은, 남자를 만나봐. 사랑이 별거냐? 이성이 별거냐? 환상을 깨라구. 육체가 별거나? 자기 감정에 충실하면 돼! 이런 건데 하나마나한 소리다. 이런건 친구와 나누는 말이다.


    옛날에는 신랑 얼굴도 못 보고 시집 가고, 신부 얼굴도 못 보고 장가들었다. 그래도 알콩달콩 잘 살았다. 사랑은 현대사회의 개인주의와 결부되어 있다. 개인이 운명의 주체로 등장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개인이 각자 재산권과 경제권을 가지고 심리적으로 독립해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 얼굴이 빨개지고 고백 못하는건 남자도 마찬가지다.


    강신주가 말하는 그런 심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성이 별거냐, 남자가 별거냐, 섹스가 별거냐.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본질은 권력관계다. 사랑은 이성에 대한 태도이기 앞서 신에 대한 태도, 사회에 대한 태도, 세상에 대한 태도이다. 세상과의 관계맺기다. 인간은 누구나 별 수 없는 부족민이다. 부족민은 원래 사랑이라는 것을 안 한다.


    스파르타인은 깜깜한 방에 여성들을 앉혀놓고 남자가 들어가서 손에 닿는 여자와 강제결혼을 한다고. 결혼 당일까지 군사훈련을 받다가 밤에 합방하고 다음날 다시 부대에 잡혀 간다. 그러고도 30살이 되어야 가정을 가질 수 있다. 대개 이런 식이다. 아기는 부족 공동의 재산이며 사유재산은 없다. 목숨도 부족의 것이다. 사랑은 근대의 산물이다.


    스물두살이면 사랑하기에는 이른 나이다. 만약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면 그 남자에 반한 것이 아니라 그 세상에 대한 태도이다. 춘향과 몽룡이면 열여섯이다. 열여섯이면 아래로 동생이 줄줄이 딸려 있다. 동생들 키우다 보면 이미 족장이 되어 있다. 지긋지긋한 동생의 압박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열여섯이면 탈출하기 적당한 나이가 된다.


    지금 한국은? 동생이 없다. 동생의 압박이 없으니 독립이 안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현재의 환경으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하는 것이다. 낡은 세상에 등돌린 거다. 반역이다. 부족주의에 대한 도발이다. 선전포고하고 개인주의로 전진하여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남자 앞에서 얼굴이 빨개진다면 그것은 미처 세상에 대한 태도가 정립되지 않은 것이다.


    여전히 부족주의에 잡혀 있는 것이다. 귀찮은 동생들을 줄줄이 거느리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가부장제도의 가문이나 혹은 학교라는 부족집단에 소속된 존재로 자기규정한 것이다. 10대의 나이에 연애한다면 부족주의와 틀어졌을 확률이 높다. 가정에 불만이 있거나 학교와 틀어져 있을 가능성이 많다. 빈민가의 가난한 흑인 소년이라면 어떨까?


    10대의 나이에 벌써 연애를 여러번 했을 것이다. 60년대에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여공으로 끌려갔다. 졸업식날 공장에서 온 버스가 교문 앞에 도열해 있다. 그러므로 일찍 사랑하게 된다. 러시아인은 19살에 결혼했다가 3년도 못 가서 이혼하고 이십대 후반에 재혼한다고. 대학진학을 하지 않고 일찍 사회에 뛰어들면 당연히 더 일찍 사랑하게 된다.


    사회 앞에서 강자가 되어야 한다. 권력자가 되어야 한다. 의사결정권자가 되어야 한다. 상대가 만만하게 보여야 한다.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거 다 안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철학을 공부하거나 사회생활 경험을 쌓거나 일찍 취업을 하거나 어떻게든 현실과 부닥쳐야 한다. 세상의 뒤쪽 비밀을 죄다 알아야 한다.


    세상이 만만한 호구로 보여야 한다. 그러므로 철학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본질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세상과의 관계설정없이 인생이 별거냐 섹스가 별거냐 몸뚱이가 별거냐 몸에 충실해봐 이 따위 똥같은 소리 지껄이면 안 된다. 그런건 술집에서 노가리 까는 소리에 불과하다. 점잖은 사람이 똥같은 소리 하면 안 된다. 강신주는 수준을 들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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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에 대한 태도는 한 우주에 대한 태도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한 세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태도가 결정되지 않으면 사람에 대한 태도가 어색해집니다. 세상 앞에서 제자 포지션에 서 있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부족에서 독립하여 별도로 부족을 건설하고 족장이 되는 것입니다. 족장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입니다. 옛날이라면 동생 일곱 업어키우다가 이미 족장이 되어버렸을텐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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