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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3880 vote 0 2017.04.14 (11:41:47)

    

    인간에 대한 환멸과 구토


    어제 팟캐스트에서 나온 이야기다. ‘배신자의 나라를 보았다.’는 제목의 칼럼을 올렸더니 놀란 독자들이 있는 모양이다. 환멸이니 구토니 하는건 샤르트르나 카뮈의 언어다. 그때 그시절 이런 표현들이 유행했다. 2차대전 전후의 절망적인 상황 말이다. 제법 철학자인양 이런 분위기를 팔고다니는 그런거 있다. 필자가 일곱 살 때 본 풍경도 다르지 않았다.


    인간존재에 대한 회의. 얼떨결에 이 별에 눌러앉았더니 맞지 않는 대본, 어색한 포즈, 황량한 무대. 어쩌라고? 어떤 덩치 큰 아저씨가 남의 집에 무단으로 난입하여 고추장, 된장을 다 퍼먹고 담장 위에 올라앉아 농성하고 있다. 동네 장정 십여 명이 몰려왔지만 어쩌지 못한다. 불안한 대치가 계속된다. 장정들도 어색하고 나도 어색하고 우주도 어색하다.


    루쉰의 아큐정전이다. 아Q와 소Don이 서로 변발을 움켜잡고 씩씩거리며 30분간이나 교착되어 있다. 한족과 만족이 그렇게 서로의 변발을 움켜쥔 채로 옴쭉달싹 못하고 교착되어 있다. 친일파 손문과 봉건귀족 위안스카이가 그렇게 교착되어 있다. 그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낭패狼狽다. 인간 존재의 비극이 거기에 있다. 원초적인 자기부정 말이다.


    타개하는 방법은 없는가? 고담소설은 일정한 패턴이 있다. 주인공은 보통 여자다. 왜냐하면 소설의 독자들이 주로 서울에 거주하는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로 변장하고 중국으로 가서 장군이 된다. 중국에를 가도 꼭 송나라에 간다. 북송은 아니고 남송이다. 심청도 청국상인에게 팔려서 인당수 타임머신을 이용 남송황제를 만났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조선왕조 시대에 여자 주인공이 어떻게 만리타향 남송까지 가서 황제를 만나고 장군이 되어 오랑캐를 토벌하는가? 뮬란의 파목란도 아니고 말이다. 장치가 있다. 인연이 중하여 특별한 스승이나 도사를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주인공을 안내하는 인도자가 된다. 직접 주인공을 데려가지는 않는다. 미리 가서 모종의 장치를 해둔다. 예컨대 편지가 오는 거다.


    편지를 받고 괴산으로 가니 어떤 사람이 평양으로 가라며 무언가를 준다. 평양으로 가니 어떤 사건이 발생하여 이번에는 신의주로 가라고 한다. 신의주를 가니 요동으로 가라고 한다. 요동으로 가니 또 어떤 사건에 휘말려서 결국 남송까지 간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모든 사건이 우연이 아니라 스승이나 도사가 미리 설계를 해서 다 안배해놓은 것이었다.


    결국 주인공은 중국으로 가서 오랑캐를 다수 발라주고 황제를 만나고 신랑을 만나고 하여간 잘 먹고 잘살게 된다. 외출이 자유롭지 않았던 조선후기 서울여성들은 그렇게 소설 속에서 세계일주 대리여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별에 정식으로 초대받지 못하고 뜻하지 않게 난입하여 불청객이 되어버린 필자의 입장에서 참고할만한 사정이다.


    매우 어색하고 불안하고 부자연스럽고 그래서 절망적인 중이병 중증환자였던 필자의 입장에서 발견해야 할 신의 안배는 어떤 것이었던가? 나는 어떻게 고담소설의 주인공처럼 여기까지 인도되어 왔는가? 직감은 좋지 않은 것이다. 눈치를 잘 보고 분위기파악 주제파악을 잘하고 남들 가는 데로 잘 가게 하는게 직감이다. 불청객처럼 어색해져야 창의한다.


    나는 세상과 친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배역은 사절일세. 이런 대본이라면 연기할 수 없네. 홍상수 영화 대본처럼 한심하다. 홍상수라면 이런 식이다. 여자가 말한다. '섭섭했어요.' 남자가 말한다. '섭섭했구나. 그래! 섭섭할 만하지.' 여자가 말한다. '그렇다니까요. 섭섭했다니까요.' 남자가 받는다. '그래 섭섭할 만했어. 음 그랬구나.' 동어반복의 무한궤도.


    대사를 한 단어 써놓곤 남자와 여자가 그것을 계속 폭탄돌리기 한다. 나라면 이렇게 대사를 쪽팔리게 쓰느니 자살한다. 하긴 대본도 없이 즉석에서 무대뽀 영화를 찍는데 우디 알렌 대본이 나와줄 리 없다. 어색할 때는 깨버려야 한다. 판을 깨야 한다. 소설을 깨고 그림을 깨고 음악을 깨야 한다. 정면대결이다. 그건 문학 아냐. 그건 영화가 아냐. 충돌이다.


    김기덕은 그렇게 박치기를 한 것이다. 조선일보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을 보면 소설을 어떻게 써야 당선되는지 알 수 있다. 그걸 깨야 한다. 조선일보가 길들여놓은 한국문학은 문학이 아냐. 그건 자학이냐. 대가리가 터지도록 받아버려야 한다. 직감이 발달하면 어떨까? 금방 눈치를 챈다. 직감을 따라 조선일보가 원하는 대로 소설을 써주니 김훈 상받는다.


    그래서 한국문학은 죽는다. 내가 살면 문학이 죽고 문학이 살면 내가 죽는다. 서태지가 뽕짝을 죽였다. 충무로가 김기덕을 죽였다.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죽는다. 인상주의 그림이 그림이면 그 이전의 그림은 그림이 아닌 것이다. 둘 중 하나는 깨져야 한다. 우주가 깨지든 내가 깨지든 하나는 깨진다. 창의는 거기서 일어난다. 그것이 아인슈타인 방법이다.


    우주를 깨버렸다. 시간을 깨고 공간을 깬다. 나는 세상과 헤어졌다. 전두환과는 한반도 안에서 공존할 수 없다. 둘 중 하나는 이 별에서 나가야 한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나갔을 때 나는 사회로 돌아왔다. 운명의 갈림길을 만났을 때 신의 안배가 거기에 있었다. 뒷동산 올라 남산신성비 제 9비를 파서 컴퓨터를 샀다. 그리고 또 나는 신의 다음 단서를 찾는다.


    고담소설에서는 항상 도술을 부리는 도사가 미리 가서 장치를 해 둔다. 주인공 소녀는 몇 개월 후에 그곳에 도착한다. 그것이 도사가 장치해둔 덫인줄 모르고 걸려든다. 결국 남송까지 간다. 현실에서는 사건이 그렇게 한다. 사건은 기승전결이 있다. 구조론으로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질의 덫에 걸리면 입자까지 밀린다. 입자에는 또 안배가 되어 있다.


    입자의 덫에 걸려 힘까지 간다. 힘의 덫에 걸려 운동까지 간다. 운동의 덫에 걸려 남송까지 가서 오랑캐를 쳐죽이고 장군이 된다. 량으로 끝난다. 우리는 사건이라는 덫에 걸려든다. 사건은 계속 간다. 민주화는 일회성의 이벤트가 아니다. 우리가 세계를 다 잡아먹어야 한국의 민주주의 완성된다.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는다고 민주주의가 되어줄 리 없잖아.


    내 손으로 뽑는건 도사의 첫 번째 안배다. 다음 단계가 이어진다. 3월 다음에는 4월이 안배되어 있고, 4월 다음에는 5월이 안배되고, 5월 다음에는 6월이, 6월 다음에는 촛불이 안배되어 있다. 그러므로 계속 가는 것이다. 세헤라자데의 이야기처럼 끝나지 않고 계속 간다. 그것이 서로의 변발을 움켜쥐고 뻗대는 아Q와 소Don의 교착을 타개하는 방법이다.


    카뮈의 환멸과 샤르트르의 구토에서 헤어나기다. 인류는 고작 이정도지만 신의 안배가 있으므로 이야기는 결코 거기서 끝나지 않아 13인의 아해는 막다른 골목을 향한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다음 아이가 바톤을 이어받아 계속 간다. 알제리인도 프랑스인도 아닌 이방인의 환멸을 담고 시지프스의 신화는 계속 간다. 인간은 시지프스의 덫에 걸린 생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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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을 보고 출발점을 보면 마음이 정화됩니다. 더 이상은 내려갈 수 없는 나락의 심연. 운명과 엉켜버린 부조리의 지점. 그럴 때 일어설 수 있는 에너지를 얻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신의 안배입니다. 나는 지금 여기쯤 와 있고 다음으로 얻어야 할 게임의 단서와 아이템은 저기쯤 숨어 있으리라 하는 그런 그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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