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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833 vote 0 2020.04.12 (09:54:52)

      
    신과 나


    라부아지에가 산소와의 결합으로 연소반응을 설명하기 전에는 플로지스톤이라는 개념이 쓰였다. 물질이 불에 타는 것은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그런데 금속이 탈 때는 질량이 되레 늘어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플로지스톤이 음의 질량을 가진다는 궤변을 늘어놓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극소수였다.


    플로지스톤 개념에 결함이 있었지만 과학자들은 플로지스톤이 사실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원리라는 식의 변명으로 빠져나갔다. 잘 모를 때는 잠정적으로 도입하여 쓸 수 있는 개념이라는 말이다. 플로지스톤을 부정하고 질량보존의 법칙을 규명한 라부아지에도 열을 설명하려고 칼로릭 개념을 제안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온도가 올라가면 칼로릭이 달라붙고 온도가 내려가면 칼로릭이 떨어져 나간다고. 현대과학에서 열은 분자의 운동으로 설명되며 에너지 개념으로 대체된다. 칼로릭이 나가고 에너지가 들어왔다. 라부아지에가 플로지스톤을 버리고 산소결합으로 대체하듯 항상 하나가 부정되면 하나가 들어간다. 학계는 둘 중에서 갈등한다. 


    오컴의 면도날로 밀어서 복잡한 설명을 간결한 설명으로 대체하는 것이 과학의 진보다. 이런 식으로 과도기에 잠정적으로 쓰이는 개념이 암흑물질이다. 암흑이라는 말은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확실히 모르지만 그것은 있다. 그리고 그 개념은 유용하다. 조선 시대라면 중력이든 전기현상이든 질병이든 모두 기로 설명했다. 


    전기도 기고, 중력도 기고, 칼로리도 기고, 세균도 기다. 잘 모르면 일단 기다. 어쨌든 그것은 있다. 전기는 있고 세균도 있고 중력도 있다. 기 하나로 뭉뚱그려 설명하던 것이 각자 제 위치를 찾아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암흑물질이니 암흑에너지니 하며 뭉뚱그려서 설명하는 것도 언젠가는 각자 자기 위치를 찾아가게 된다. 


    신은 있다. 단, 신은 수염 난 할아버지가 아니며 인격체가 아니다. 칼로릭은 물질이 아니고 사실은 분자의 운동이었다. 어쨌든 그것은 있다. 분자의 운동이 있고 그것이 에너지다. 에너지가 없다고 하면 안 된다. 에너지는 계 내부의 질서다. 계는 의사결정 단위로 존재한다. 뇌는 있다. 그냥 세포의 집합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뇌기능이 있으므로 뇌가 있는 것이다. 유엔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는 척 연기하는가? 존재감이 없잖아. 반기문 이후로 다들 유엔사무총장 이름도 모르게 되었잖아. 그 전에 코피 아난 총장은 존재감이 쩔었는데 말이다. 월드컵이 있으면 피파가 있듯이 국제사회가 있으면 유엔은 있다. 기능이 있으므로 존재가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이 신의 그림자인지 신의 몸통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있다. 희미하지만 명확하다. 무지개처럼 손으로 잡으려고 하면 희미하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보면 명확하다. 무엇을 얻으려고 하면 희미하지만 따라가려고 하면 명확하게 길을 안내한다. 더 좋은 설명이 나오기 전에는 잠정적으로 쓰일 수 있다. 


    단, 잘 모르는 것은 죄다 기에 떠넘기듯이 너무 일을 키우면 안 된다. 에너지는 사건의 단위다. 사건의 시작점과 종결점을 알려준다. 둘 사이를 연결하면 방향이 보인다. 그 정도다. 바둑을 져놓고 네 귀에서는 이겼는데 중앙에서 졌으니 4 대 1로 이긴 셈이야. 이따위 개소리를 하면 안 된다. 그래서 에너지 개념이 쓰인다.


    사건의 여러 국면 중에서 부분이 아닌 전체의 판단을 하는게 에너지다. 인생의 여러 국면 중에서 부분이 아닌 전체의 판단을 하는데 신 개념이 요구된다. 모든 도덕과 윤리와 가치와 이념의 판단을 정당화하는 궁극적인 근거는 신이며 그것은 사건의 시작점과 종결점을 일직선으로 연결하여 얻어지는 하나의 화살표다. 


    지도와 나침반으로 길을 찾는다. 가지 않으려면 모르되 가려면 길이 필요하다. 신을 부정하면 이성이 빈자리를 메운다. 하나가 나가면 하나가 들어온다. 그런데 말이다. 이성은 또 하나의 우상이 아닌 것일까? 이성은 합리성이고 합리성은 효율성이고 효율성은 이기는 것이며 결국 이성은 최종적으로 힘의 논리로 환원된다. 


    이기는 결정이 이성적인 결정이며 그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단기적으로 이기는 결정이 장기적으로는 지는 결과로 반전된다는게 이성의 딜레마다. 단기적으로 이기는 것은 나다. 장기적으로 이기는 것은 집단이다. 내가 죽어야 집단이 살고 개인이 희생해야 팀이 이기는 구조다. 누구도 풀 수 없는 이성의 딜레마다. 


    이성의 기준이 개인이냐 집단이냐다. 어차피 질 바둑이면 상대방의 사석 몇 점을 잡아놓고 잠시 기세를 올리는 것도 방법이다. 전체를 포기하고 부분의 승리를 즐기면 된다. 개인적 이성과 집단적 이성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 집단을 선택하면 전체주의로 가고 개인을 선택하면 허무주의로 가게 된다. 


    무신론의 이성주의는 전체주의와 허무주의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근대주의는 전체주의로 기울고 탈근대는 허무주의로 기울어진다. 노이만은 상호확증파괴로 공산당을 섬멸한다며 선제핵공격을 불사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말한다. 이것이 나의 냉철한 이성적 판단이라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인류는 멸망해 있다. 


    허무주의에 빠져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진보진영과 보수진영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자들이 있다. 배신과 변절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누가 그 결정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이들의 문제는 계를 잘못 지정한 것이다. 전모를 보지 못하고 바둑판의 네 귀와 중앙 사이에서 헷갈린 것이다. 판단기준은 개인도 집단도 아니다. 


    사건에서 나를 배제해야 한다. 나, 내 생각, 내 소유, 내 가족, 내 나라가 판단에 개입하면 안 된다. 에고를 버리는 의식의 표백이 필요하다. 에너지는 인간의 희망사항과 상관없이 에너지 자신의 내재한 질서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개념이다. 신은 어떤 경우에도 타자화되지 않는다. 내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신은 나를 극복해야 얻어지는 개념이지만 동시에 나 바깥의 어떤 존재가 아니다. 사건 속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배를 바다와 분리할 수 없고 비행기를 하늘과 분리할 수 없듯이. 큰 바둑 안에 작은 국면이 있고 큰 문명 안에 작은 인생이 있다.

신은 신다움을 따라가며 나는 나다움을 따라가며 그것은 나란히 가는 것이다. 


    신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종교와 연결하여 받아들이는 사람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로는 이보다 나은 표현이 없다. 존재가 개별적으로 자빠져 있는 부스러기 물질이 아니라 전부 연결된 하나의 사건이며 사건에는 프로토콜이 있고 그러므로 계는 일원화되어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본질을 받아들이려면.


    인간에게 이성이 있으면 우주에도 이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사건을 완성해 간다.




[레벨:15]오세

2020.04.12 (11:09:11)

완전성!

프로필 이미지 [레벨:8]아제

2020.04.13 (00:10:33)

내용은  둘째 치더라도..제목이 정말 멋있다.

신과 나..머찌자나..찌릿하자나.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이금재.

2020.04.13 (02:14:46)

레옹은 마틸다를 구원한게 아니며

나도 너도 스탠필드(게리 올드만)도 아니고 신을 긍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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