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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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775 vote 0 2018.06.25 (11:35:30)

      
    노자와 디오게네스


    일체의 희망과 야심을 버렸을 때 최후에 남는 것은 게임의 법칙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떤 일의 결과다. 행복이든 성공이든 명성이든 출세든 쾌락이든 그것은 사업의 결과다. 무언가를 해야 행복해지고 무언가를 해야 성공하고 무언가를 해야 명성을 얻고 무언가를 해야 쾌락을 얻는다. 철학하자. 결과로 주어지는 것은 모두 가짜다. 유전자와 호르몬의 트릭에 불과하다.


   솔직해지자.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왕자로 태어나는 것이다. 노력해서 자기 힘으로 왕이 된다면 그것은 사업의 결과다. 결과로 주어지는 것은 가짜다. 왕자라면 사건의 원인에 설 수 있다. 사업을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인간은 결과가 아니라 원인에 서기를 원하는 것이며 다만 그것을 설명할 언어가 없어서 말하지 않는다.


    행복 성공 쾌락 출세 명성 평판 지위 등등 결과를 나타내는 말은 많아도 원인을 나타내는 말은 잘 없다. 구조론의 답은 에너지다. 에너지가 물리학 용어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것을 나타내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물리학 용어를 차용하여 쓰는 것이다. 사건의 원인은 존엄이고 권력이고 만남이고 긴밀함이고 운명이다.


   운명적 만남을 이뤄낼 수 있는 긴밀하고 권력있고 존엄한 무언가를 인간은 원한다. 그것은 에너지의 가능성이다. 인간은 그러한 가능성을 손에 넣고 싶어 한다.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 그래서 돈을 좋아한다. 정확하게는 돈이 안내하는 가능성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서? 게임의 법칙이다. 그것을 설명할 적절한 언어가 없으므로 필자가 만들어낸 말이다. 행복이나 성공이나 명성이나 출세나 쾌락 따위가 어떤 끝난 일의 결과라면 게임은 지금 현재진행형이다. 게임의 의미는 선택되는게 아니라 대응한다는 데 있다. 도박을 해도 그렇다. 한 판을 잃어도 그 과정에 상대방이 어떤 패를 쥐고 어떤 식으로 레이스를 운영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


   바둑을 두어도 그렇다. 상대가 내 바둑알 한 알을 포위하여 잡아먹었다 해도 그 과정에 상대방의 전략을 알아내고 대응할 수 있게 된다. 게임은 다음 단계로 계속 연결시켜 가는 것이며 지속적인 에너지의 우위를 이루고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면서 대응하면 된다.


   어린이가 엄마에게 원하는 것은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다. 에너지가 업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아이가 엄마한테 칭찬이나 선물이나 뭔가 보상을 바란다면 이미 꾀가 난 것이며 그만큼 타락한 것이다. 순수함을 잃었다. 인간은 천하와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원할 뿐이다. 그럴 때 설레임이 있고 전율함이 있다. 그럴 때 가슴은 뛰고 호르몬이 쏟아져 나온다.


    진실을 말하자. 여러분은 큰돈을 딴 도박사가 술집에서 돈을 뿌려대며 얻는 쾌락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패를 손에 쥔 사람의 므흣한 미소를 원한다. 도박이 끝나면 긴밀함을 잃는다. 만남을 잃는다. 공허해진다. 미녀를 찾아 쾌락을 탐하며 공허함을 달래려고 하지만 이미 망가져 있다. 이미 에너지는 고갈되어 있다. 도박꾼은 좋은 패가 손에 들어왔을 때가 가장 좋은 것이다. 밤거리에서 돈을 펑펑 써댈 때가 아니라.


    노자와 디오게네스가 내심 말하고자 한 것은 그러한 게임이다. 알렉산더가 물었다. ‘디오게네스여! 나는 뭐든지 그대의 소망을 이루어줄 수 있다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디오게네스는 말했다. ‘아 춥잖아! 비켜줘. 당신이 지금 망토자락으로 나의 햇볕을 가리고 있다고.’ 디오게네스는 적어도 말의 게임에서 이겼다. 게임에서 이겨봤자 허무하지 않느냐고? 아니다.


    게임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인류의 등장 이래로 게임은 한 번도 끝나지 않았다. 문명의 불은 계속 번져가고 있다. 인류의 게임은 계속 판을 키워간다. 허무한 것은 일이 끝났기 때문이다. 인류 진보의 게임은 결코 끝나지 않기 때문에 그 허무를 극복한다. 노자가 이에 주목했다.


   노자는 공자의 무리를 조롱했다. ‘니들이 그렇게 패거리 이루고 몰려다니며 일을 벌여봤자 결국 일은 언제고 끝나고 만다네.’ 아니다. 개인의 일은 끝나도 인류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노자는 이겼으나 졌고 공자는 졌는데 이겼다. 공자가 추구하던 이상정치는 당대에 달성되지 않았다.


   노무현의 이상주의도 마찬가지다. 공자는 죽었지만 그가 벌여놓은 사업은 계속 간다. 노무현은 떠났지만 그가 질러놓은 불은 계속 번져간다. 디오게네스는 돈을, 성공을, 영광을, 명성을, 체면을 모두 버렸지만 한 뼘의 햇볕 앞에서 졌다. 그것은 햇볕의 결정이지 디오게네스의 결정이 아니다.


   노자와 디오게네스가 중요한 것을 포착했지만 그것을 옳게 설명하지 못했다. 물질보다 에너지가 낫다는 말을 그들은 하고 싶었다. 성공과 보상보다 게임의 연결이 낫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다. 그들은 어휘력이 딸려서 물질도 쓸모없고 성공도 쓸모없고 보상도 쓸모없다고 말했을 뿐 에너지가 낫고 운명적 만남이 낫고 긴밀한 대응이 낫고 게임의 지속가능성이 더 낫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들은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NO를 말했을 뿐 YES를 말하지 못했다. YES를 얻으려면 게임체인지가 필요하다. 개인단위로는 안 되고 천하단위로 올라서야 한다. 개인의 쾌락, 개인의 성공, 개인의 보상, 개인의 명성은 모두 부질없지만 천하의 성공, 천하의 진보, 천하의 아름다움은 계속 가는 것이다. 공자는 그것을 알았다. 공자의 제자들이 옳게 계승하지 못했을 뿐 아우라는 전해졌다.


    인간은 모래시계에서 떨어지는 모래알 같은 존재다. 떠밀려 느닷없이 떨어지지 말고 자신이 뛰어내릴 시점을 느닷있게 정해야 한다. 지구의 중력부터 파악해야 한다. 다른 모래알이 나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중력이 나를 잡아당기는 것이다. 중력은 지구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사건은 언제라도 중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이 찾아야 할 당신의 이데아다.


    플라톤은 개별적인 사물들에서 이데아를 찾았지만 이데아는 거기에 없다. 컵에는 컵의 이데아가 있고 숟가락에게는 숟가락의 이데아가 있다는 식이라면 곤란하다. 디오네게스는 그런 플라톤을 조롱했다. 그러나 진실로 말하면 비웃는 디오게네스가 더 쓸쓸하다. 플라톤에게는 더 많은 제자가 붙어주기 때문이다.


    노자의 무리가 노상 유가를 조롱하지만 그들의 모습이 더 쓸쓸하다. 왜? 역사가 공자의 무리를 돕기 때문이다. 개인의 입심대결로 가면 노자가 이긴다. 디오게네스가 이긴다. 소크라테스를 조롱하던 희극의 아리스토파네스가 이겼다. 그러나 시스템 대결로 가면 공자가 이기고 플라톤이 이기고 소크라테스가 이긴다. 제자들이 사건을 이어받기 때문이다.


   풍성하기 때문이다. NO는 거기서 끝나지만, YES는 가지를 치며 계속 가기 때문이다. 선택하지 말고 대응하라. 고스톱이라면 고를 불러서 대응하라. 포커를 친다면 레이즈를 외쳐서 대응하라. 더 큰 게임으로 갈아타라.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긴밀하게 붙어주며 집요하게 맞대응하라.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라. 이길 필요도 없고 보상받을 필요도 없고 쾌락을 얻을 필요도 없다. 계속 달고 가면서 판을 키워가면 언젠가는 적들이 제풀에 나가떨어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상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리를 주지 말고 타이트하게 붙어주면 적들은 결국 정나미가 떨어져서 항복하게 되어 있다. 그때 큰 판을 이겨주면 된다.


    사람을 이기려 하므로 이기지 못한다. 사건을 일으켜야 이긴다. 사람은 결국 죽는다. 그러므로 누구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사건은 외부 환경이 개입한다. 외부에서 거들어주므로 반드시 이긴다. 이겨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거기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게 핵심이다.


   왜? 동적환경이기 때문이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니 결코 멈추지 않아서 쏜 화살이 중도에서 멈추지 않듯이 우리는 달리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수 없으니 운명의 게임판에서 누구도 이탈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 근원의 완전성이다.


    이기고 진다면 나와 타자가 있고 대결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적환경에서는 나와 타자의 구분이 없다.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고 대결도 없다. 나무가 크게 자라듯이 에너지는 서로 보태져서 사건은 계속 자란다. 멈출 수 없으며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그러므로 허무할 수 없고 조롱할 수 없고 야유할 수 없다.


   3류 지식인은 노자나 디오게네스의 포즈로 삐딱하게 서서 조롱하고 야유하고 냉소하기를 좋아하지만 그래 봤자 운명의 수렁에서 탈출할 수 없다. 우리는 계속 붙어주면 된다. 그것이 완전성의 의미이며 신을 만난다는 것의 의미다. 서로 연결되어 크게 묶여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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