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라도 의미를 추구한다. 촛불을 켜 들고 의미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정작 그 의미가 무언지는 모른다. 인생의 의미를 찾으면서 의미의 의미를 모른다. 도대체 뭘 보고 의미라고 하는 거야? 보통 자유의지 운운한다. 자유의지가 어째서 의미야? 자유의지라는 건 내 맘대로 하겠다는 건데 그게 어째서 의미야? 똥개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똥을 먹을 텐데 그게 의미야? 의미란 똥을 먹는 것인가? 자기가 선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면 의미인가? 그 이전에 자기라는 게 뭔데? 자기가 아니면 남이다. 왜 남과 나의 구분선을 긋는 거지? 남이 네 빵이라도 한 조각 뺏아 먹을 거 같아서? 왜 남과 다투지? 나라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은 없다. 관념론의 함정이다. 의미라는 건 막연한 관념이다. 보통 의미라는 건 어떤 보상을 말하는 거다. 내가 열심히 살면 어떤 보상을 받게 되는 거지? 그런데 말이다. 왜 보상받으려고 하지? 노예는 언제라도 주인에게 보상받을 생각이 있다. 왜 자신을 노예취급하는 거지? 아이는 커서 소년이 되고, 소년은 커서 청년이 되고, 청년은 커서 어른이 된다. 점점 커진다. 커지는 게 의미인가? 그렇게 커져서 뭣 하려고? 다 부질없다. 그것은 소년의 콤플렉스다. 소년은 키가 작다. 키가 좀 컸으면 좋겠다. 점점 커져서 대통령도 되고 좋잖아. 철부지 생각이다. 커지면? 매우 커지면 신이 된다. 당신은 신이 되겠다는 건가? 그렇다. 인간이 의미를 추구한다면 결국 신이 되고 싶다는 것이며 당신은 절대 신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생은 결국 허무한 것이다. 또는 승리하려고 한다. 미인과 결혼하면 그게 의미인가? 그것은 열등감의 표출에 불과하다. 자손을 남기면 의미인가? 그건 생존본능에 불과하다. 당신이 무얼 추구하든 간에 그건 참된 의미가 아니다. 당신이 개입해 있으므로 진짜가 아니다. 먼저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거기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를 개입시킨 관념론의 허구를 버리고 실재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리얼리즘이 아니면 안 된다. 미녀와 결혼하는 것은 의미가 아니지만, 미녀가 지구에 있는 것은 의미다. 하나의 사건이 또 다른 사건으로 연결되어 가는 게 의미다. 내가 신이 되는 것은 의미가 아니지만, 신이 존재하는 것은 의미다. 복제본은 의미가 아니지만, 원본은 또 다른 복제본을 만들므로 의미다. 신을 발견하면 그만이지 신에게 귀여움을 받아서 뭣하려고? 내가 진리를 얻는 것은 의미가 아니지만, 진리가 있는 것은 의미다. 이것이 리얼리즘이다.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리얼리즘을 버리고 관념을 따르기 때문이다. 사실의 세계는 언제나 마이너스다. 인간은 죽는다. 그것이 진실이다. 당신은 영생을 바라는가? 영생해야 의미인가? 당신은 단명하지만 지구의 생명은 영생한다. 의미는 사건의 연결에 있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이어진다. 다음 단계로 연결하는 것이 의미다. 자신을 개입시키면 연결이 끊어진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므로 의미가 있다. 무언가 되는 것은 그 연결을 끊는 것이다. 내가 챔피언이 되면 다른 사람은 챔피언이 못 된다. 반면 내가 시합을 주최하면 당연히 누군가는 챔피언이 되는 거다. 시합의 주최자가 되려는 것은 주인의 태도이며 낚여서 챔피언이 되려고 하는 것은 노예의 태도이다. 노예에게는 의미가 없고 주인에게는 의미가 있다. 내가 무언가 되려고 할 때 어떤 연결을 끊는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할 때 어떤 연결을 잇는다. 무언가 하는 것은 사건의 기승전결 흐름 안에서 대칭과 호응으로 호흡하므로 의미가 있다. 무언가 되는 것은 보상받고 이득을 챙기며 흐름을 끊는다. 끊으면 죽는다. 그래서 허무하다. 인간이 인생의 허무를 깨닫는 것은 의미의 허무를 깨닫는 것이며 관념론의 허무를 깨닫는 것이다. 관념론이 허무하면 당연히 실재론의 세계로 돌아와야만 한다. 그런데 인간들 하는 짓 좀 보라지. 인생이 허무하다며 좌판을 벌이고 허무장사를 한다. 관념론이 허무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며 만족해하고 계속 관념의 허무 속으로 들어간다. 허무놀이를 즐긴다. 그 관념의 세계를 떠나야 한다. 실재의 세계로 들어오면 인생의 의미는 분명히 있다. 내가 부자가 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아니지만, 자본이 스스로 증식하여 세계를 접수해 가는 것은 큰 의미가 된다. 내가 미녀와 사는 것은 의미가 아니지만, 지구에 미녀가 있는 것은 의미다. 그렇다. 관념은 언제나 나를 개입시킨다. 나를 배제하면 모든 것이 의미가 되고 나를 개입시키면 모든 것이 돌아앉는다. 황금을 발견하면 그뿐 내가 금을 가질 이유는 없다. 내가 황금을 가지려고 하므로 죽는다. 죽음이라는 심판자가 곤란한 존재가 된 당신을 처단해 버리는 것이다. 죽는데 황금을 가져봤자 의미없다. 관념을 버리고 실재로 돌아와서 객관적 진실을 받아들이고 커다란 사건의 연결에 나서면 인생은 의미있다. 반면 관념의 세계에서 허우적대며 자기를 개입시켜 뭔가 보상을 받으려 한다면 허무다. 당신은 그저 죽는다. 나를 개입시키므로 모든 의미가 단절되고 나를 배제하므로 모든 의미가 연결된다. 인생에는 의미가 있다. 단지 나의 의미가 없을 뿐이다. 나를 키워서 세상과 동등해져야 한다. 그럴 때 세상은 의미로 가득 차 있다. 남을 끊고 나만, 오직 내게만 보상과 혜택이 주어지길 바라므로 의미가 없다. 나의 영생을 바라므로 의미가 없다.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하려 하므로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다는 건 내 바램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거다. 어차피 죽으니까. 나와 남을 나누는 경계를 극복하면 바램도 없고, 죽음도 없고, 허무도 없고, 사건은 들불처럼 계속 연결되어 다음 단계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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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근혜는 대통령이 되려고 했고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은 대통령일을 하려고 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현대를 잘 설명한 사람.. 못했다.\
인간학이다.
심리학이고..
되다..는 허무하고
하다..는 의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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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다는 거기서 끝난다는 것이고.
하다는 아직 갈 길이 멀어 계속 이어진다는 것.
그걸 내 안에 우겨넣으려니 안들어가는 컷
일관성의 압박.
감명입니다... 유와 무를 잇고 신의 존재와 신의 부재를 연결하고 모든 의미와 모든 무의미를 이어주는 글입니다.
일요일에 들을만한 좋은 글이오.
의미없는 일요일이란 나를 개입한 관점이다.
그 나를 빼버리면 리얼리즘.
리얼리즘으로 하품나는 일요일을 살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