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이냐 행복이냐 행복이라는 단어는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행복하다’의 동사 느낌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형용사지만 형용사는 동사와 같은 패거리다. 문법에서 주어 다음에 따라오는 동사 의미다. 구조론으로 보면 정靜 아니면 동動인데 happy는 동이다. 존엄은 명사다. 동사로 쓰일 수 있지만 여기서는 인권에 근거한 인간의 존엄성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 질의 존엄성에서 입자의 인권이 유도된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인간을 함부로 대하면 큰일난다는 거다. 조현아가 사람을 함부로 건드렸다가 큰일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왜?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기곰이 귀여워서 만졌는데 뒤에서 엄마곰이 째려보고 있다면? 목숨걸고 튀어야 한다. 인간은 이와같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존엄성이 있다. 닭이나 돼지는 건드려도 뒷탈이 없다. 왜 인권이 중요한가? 기어코 뒷탈이 나기 때문이다. 난징학살을 은폐하려다가 시진핑에게 되치기를 당하는 일본 꼴만 봐도 알 수 있다. 아기곰 뒤에 엄마곰이 있다는게 인간의 존엄성이고, 그러므로 아기곰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은 인권이다. 대한항공 사무장 뒤에 국민이 있다는게 존엄성이고 그러므로 승무원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게 인권이다. 질은 결합한다고 했다. 결합하므로 연결되어 있다. 인류는 개인으로 있는게 아니라 70억이 연결되어 하나의 큰 집단으로 있다. 누구든 70억 인류에게 SOS를 칠 수 있다. 또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즉 인간의 존엄은 70억이 연결되어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은 명확하게 구축되어 있지 않지만 때로 이렇게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조심해야 한다. 행복은 동사, 존엄은 명사다. 행복은 동動, 존엄은 정靜이다. 정은 비대칭, 동은 대칭이다. 동은 대칭이므로 짝이 있다. 짝이 있으므로 누군가 행복해지면 누군가는 불행해진다. 모두가 행복해지기는 쉽지가 않다. 엄마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자식이 100점을 맞아오게 하는 것이다. 자식은 엄마 때문에 불행해진다. 조현아가 행복하면 승무원은 괴롭다.
◎ 명사는 비대칭, 동사는 대칭이다.
존엄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이며 그것이 시스템이다. system은 쌍sys-으로 선다stand의 의미다. 존엄은 언제나 쌍으로 움직인다. 하나가 존엄하면 다른 것도 존엄하다. 대통령이 존엄하면 영부인은 자동으로 존엄먹는다. 정승이 존엄하면 정승집 개도 함부로 못 건드린다. 홈런타자 박병호가 홈런왕을 차지하면 박병호 부인 이지윤도 카메라를 받는다. 행복은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 사촌이 논 사면 배가 아프다. 존엄≫자유≫사랑≫성취≫행복에서 존엄쪽으로 갈수록 토대가 공유되고 행복쪽으로 갈수록 토대는 공유되지 않는다. system은 토대의 공유에 의해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구조론의 다른 단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비우기≫모으기≫몰아주기≫풀어내기≫알리기는 동사 표현이다. 동사이므로 오해될 수 있다. 동사는 대칭성 곧 상대성이 성립하므로 반대로 해석될 수 있다. 비우기는 사실은 결합하기다. 결합이 한자어이므로 비우기라 하는 것이다. 한쪽을 비우면 반대쪽으로 결합된다. 그러므로 비우는 것이 결합하는 것이다. 이렇듯 동사는 매우 위험한 언어다. ‘받기≫쌓기≫틀기≫풀기≫주기’도 그렇다. 존엄은 받기, 자유는 쌓기다. 사랑은 틀기다. 사랑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관심을 사랑하는 대상으로 틀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받아들여서 사랑을 틀어버리려고 하면 곤란하다. 행복은 주기다. 남에게 행복을 주어야 한다. 주는 것이 반대쪽에서 보면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을 받으려고만 한다. 세상 모든 것을 명사로 이해하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 정확하게는 문법을 이루는 ‘주어≫동사’에서 동사가 아닌 주어로 인식하는 것이다. 같은 것이 주어로 보면 존엄이고 동사로 보면 행복이다. 세상을 동사로 인식하므로 잘못되고 만다. 왜 동사로 보는가? 동사는 움직이고 움직이는 것만 인간의 눈에 포착되기 때문이다. 주어는 정靜이므로 어리석은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 존엄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자유도 마찬가지다. free는 자유를 동사로 보는 것이다. 들판에 양떼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풍경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만들어둔 목장에 갇힌 양떼이며 사바나의 사슴들은 사자와 하이에나 때문에 자유롭지 않다. 존엄에서 인권이 나온다. 존엄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인권은 그러므로 개개인이 보호받는 것이다. 자유가 명사라면 동사는 사랑이다. 자유는 그냥 자유가 아니라 사랑할 자유다. 그 사랑을 결정할 자유다. 양아치들이 불량한 폼으로 골목을 쏘다니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사랑을 부모가 결정하는 정략결혼은 자유가 아니다. 왜 부모가 결정하지 못하나? 존엄에 의해 모두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모두가 부모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부모이므로 특정한 부모가 마음대로 간섭하지 못한다. 사랑이 명사이면 동사는 성취다. 그냥 사랑하는게 아니라 무언가를 성취하는게 사랑이다. 성범죄자가 핑계로 ‘사랑하기 때문에’라고 하는건 사랑이 아니다. 주어인 인류가 성취하는 방향으로 가는게 사랑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죽인다는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주어는 인류의 존엄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명사는 성취다. 마약 먹고 행복한 것은 행복이 아니다. 전부 연결되어 있다. 존엄에 의한 자유, 자유에 의한 사랑, 사랑에 의한 성취, 성취에 의한 행복만이 진짜이며 누군가를 불행하게 하는 행복, 사랑하지 않는 성공은 가짜다. 표절범 전여옥의 성취는 수십억이나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짜다. 전여옥은 일본에 대한 지식이 없이 책을 썼다. 전여옥의 행복은 유재순의 불행으로 결과하였다. 가짜다. 누군가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가져오기 쉽지만 누군가의 존엄은 모두의 존엄으로 연결되기 쉽다. 싸이가 유명해졌는데 싸이 옆집에 사는 사람이 외국여행을 갔다가 싸이를 안다는 이유로 대접을 받았다면 그게 존엄의 가치다. 사실 언어의 의미는 고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복이라고 표현해도 존엄을 가리킬 때가 많다. 그것이 진짜 행복이다.
큰 나무와 같다. 존엄은 나뭇가지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이며, 자유는 가지의 갈림길에서 내가 결정함이며, 사랑은 갈림길에서 어느 한쪽에 몰아줌이며, 성취는 그리하여 기세좋게 가지가 뻗어나감이며, 행복은 그 결실의 수확이다. 일은 이 순서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대개 오류는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모르고 함부로 나대다가 되치기 당한 조현아 신세다.
◎ 존엄 – 모두 연결되어 있다. 왕자는 많은 사람을 연결한다.
행복은 욕구에 대한 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생리적 욕구는 설명할 수 있지만, 자아실현의 욕구나 애정의 욕구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노상 행복을 말하는 것은 배가 부르다거나 화장실에서의 쾌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해치는 불안요소가 없어졌을 때다. 그러한 불안은 실체가 불명확하다. ◎ 틀린 생각 – 욕구≫행복, : 인식론 - 종류가 많아서 실패. ◎ 바른 생각 – 존엄≫행복, : 존재론 - 하나 뿐이므로 성공. 행복은 안녕安寧한 것이며 안녕은 불안이 없는 것인데, 그 불안의 실체가 모호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불안을 지어낸다. 과거에는 유령이나 마녀가 인기있는 불안의 정체였다. 요즘에는 환경재앙부터 나쁜 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사카린 유해설, MSG 유해설과 같이 많은 불안요소들이 날조된다. 왜 가짜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존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의사결정 중심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엄은 모두 연결된 것이며 연결이 끊어지면 반응하지 않고 반응하지 않으면 자극한다. 자극의 수단은 ‘몸에 해롭다’는 거다. 과거에는 혜성이 지구를 침범한다는 공포가 인기가 있었고, 지금은 밀양의 고압송전탑에 대한 공포가 인기메뉴다. 공포는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이고 불안한 이유는 꽉 끼지 않기 때문이고, 꽉 끼지 않는 이유는 단절되었기 때문이고, 단절되면 인간은 존엄을 잃는다. 왕자가 존엄한 이유는 만인이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 시선들에 꽉 끼어있을 때 인간은 안정감을 얻는다. 아기는 엄마가 주목하고 있을 때 안정감을 얻는다. 불안하면 자해한다. 상대가 반응하지 않으면 자기 피부를 찢어서 스스로 자극한다. 유행하는 ‘뭐뭐가 몸에 해롭다’설은 그러한 자해공격의 예다. 한때는 5백이 해롭다고 해서 흰 쌀밥, 흰 밀가루, 흰 소금, 흰 설탕, 흰 조미료가 지목되기도 했다. 그러나 진짜 공포는 분리불안이다. 아기는 엄마로부터 떼어놓으면 무섭다. 구조론의 최종결론은 인류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거다. 과연 연결되어 있는가? 인류를 연결하는 끈은 진리와 자연과 역사와 문명과 진보다. 진보하지 않을 때 끈은 끊어진다. 대부분의 정신적 불안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나를 해치므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변희재나 전여옥이라면 어찌 사랑하겠는가? 나를 괴롭히는 시어머니를 어찌 사랑하겠는가? 사람을 사랑하려면 끈을 이어야 한다. 인류를 이어야 한다. 진리로 잇고 역사로 잇고 자연으로 잇고 문명으로 잇고 진보로 이어야 한다. 음악과 영화와 문학과 디자인과 패션과 건축과 예술은 그 잇는 끈이다. 우리는 거기서 이야기를 조달하고 그 이야기로 사건을 일으켜 서로를 잇는다. 변희재와 전여옥과 일베로 끊겼어도 김구와 김대중과 노무현으로 잇는다. 우리는 커다란 한 팀에 들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떠올려도 좋다. 소유는 행복을 주고 존재는 존엄을 준다. 내가 소유할 때 남은 상실하므로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쪽을 연결할 때 저쪽이 끊기게 된다. 남자는 결혼하여 부인과 아기를 얻을 때 평균적으로 친구 2명과 헤어진다. 강가에 정자를 지으면 선비들이 모인다. 연결된다. 끊어진 회로가 다시 복구되면 존엄이다.
정답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인간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변희재거나 전여옥이거나 못된 시어머니라서 곤란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이어야 합니다. 어떤 개인을 사랑하기 어렵다면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잇는 끈은 진리와 자연과 역사와 문명과 진보입니다. 사람을 이으려면 사람을 모아야 합니다. 사람을 모으는 수단은 이야기의 완전성입니다. 영화와 음악과 스포츠와 게임과 패션으로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존엄은 사람을 잇는 것이며, 그 방법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
또 한가지 답을 주셨네요.
아래 글 '사람을 사랑하는게 정답' 을 읽고 충격을 받고 저도 댓글에 사람을 사랑하는게 정답 이라는 말씀에 공감을 표했는데 막상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담 어떻게 사랑해야 하지?' 라는 의문이 좀 남았습니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사람을 사랑해야 되겠기에 마음을 열고 사람에게 다가가려해도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오는 어떤 상처, 좌절감 같은 감정이 번번히 사람들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세상과 긴밀한 관계를 맺지못하는 그런게 저에게는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이런것들이 저에게 불안요소로 작용해 결국 강박증같은 증상까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건 비교적 최근에 안 것이고, 그전에는 저에게 왜 이런 증상이 오는지 잘 몰랐었죠.
어쨌든 사람을 사랑하는게 정답인데 어떻게 사랑해야 하나 라는 의문에
이번글에서 동렬님이 여기에 답을 주신것 같습니다..
정답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할 때 인간은 행복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변희재거나 전여옥이거나 못된 시어머니라면 곤란하다.
그렇다면 사람을 이어야 하고 어떤 개인을 사랑하기 어렵다면 인류 전체를 사랑해야하고
잇는 끈은 진리와 자연과 역사와 문명과 진보라는것.
사람을 이으려면 사람을 모아야 하고, 사람을 모으는 수단은 이야기의 완전성이라는것.
영화와 음악과 스포츠와 게임과 패션으로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존엄은 사람을 잇는 것이며, 그 방법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라는것.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젠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예술을 사랑하고 진보를 사랑하고 역사를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면 사람에 대한 사랑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가치를 사랑하면 의미는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존엄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유일한 지향점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깊이 새깁니다.
그것이 예수 선생이 말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삶과 통하는 것이며
노무현님이 꿈꾼 사람사는 세상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 쿠바에 여행갔을 때 제가 한국인임을 알자마자
만난 쿠바인들이 하나같이 저를 환대해주었습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몸소 보여주며..
예술. Art 의 어원은 Arm 이라고 하더군요 팔은 몸에 붙어 있고 서로를 이어주는 것,
예술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을 이어주는 것이니 선생님의 말씀대로 이를 통하여
우리의 존엄한 가치가 높아지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존엄론은 제 삶을 받치는 든든한 정신입니다.
선생님의 존엄과 자유와 사랑과 성취, 행복의 가르침을 제 두 딸아이들에게 링크해주었습니다.
전 인류와 세상을 품는 위대한 꿈을 가지고 살라고 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