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사관의 뿌리는 참으로 깊다. 배웠다는 사람들이 아직도 식민사관에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화가 나는 일이다. 지난번 글과 관련하여 모르는 분이 있을 것이기에 이야기해본다. 식민사관은 간단히 ‘망한 나라들은 망할만 해서 망했다’는 것이다. 거짓말이다. 망할만한 나라는 우주 안에 없다. 조선이 망한 것이나 백제가 망한 것이나 압도적인 물리적 힘에 의해 망한 것이다. 당시 중국의 인구는 5천만이고 한반도 인구는 300만이다. 당나라는 뿌리가 선비족의 후예인데 소수 이민족이 절대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려면 선제적인 조치로 먼저 북방세력을 통합해야만 했다. 북방 유목민을 결집하여 그 힘으로 한족을 누르려고 한 것이다. 한족이 한반도 안쪽으로 깊숙히 침략해온 적은 없다. 당나라는 서역과의 교역에 의해 국가체제가 유지된 중국사의 특수한 왕조였다. 이에 당나라는 동쪽끝에서 서쪽끝까지 정복하려 한 것이며, 이는 세계사 차원의 격동이다. 백제는 중국의 남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그러한 세계사적 흐름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다. 백제를 망한 왕조로 단정하고 망한 이유를 내부에서 찾으려 하는게 식민사관이다. 이는 19세기의 인종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신라는 관민이 뭉쳐있고 백제는 왕이 방탕했다는 식의 구실을 들이댄다. 이걸 믿는다면 초딩이다. 조선은 당파싸움 때문에 망했다는 식의 거짓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당쟁이 없어지고 세도정치를 할 때 망했다. 박정희식 독재정치가 조선을 망쳐먹은 것이다. 국가의 통치기술은 이동기술과 관련이 있다. 도보로 이동하면 부족국가다. 말을 타고 이동하면 민족국가다. 도보로는 하루에 백리를 갈 수 있고, 말을 타고 이동하면 하루에 천리길도 갈 수 있다. 말이 등장하면서 국가의 경계가 단숨에 천리까지 확대된다. 백제든 고구려든 신라든 천리까지 통치한다. 반면 가야는 국가규모가 백리 정도여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기병시대에 맞지 않은 것이다. 어떤 정신나간 오마이뉴스 기자가 백제가 충청권을 지배했으며, 호남의 지방토호들이 왕명을 따르지 않아서 백제가 멸망했다는 초딩수준의 가설을 발표했는데 이걸 믿는 수준이하가 꽤 있나 보다. 고대국가는 무조건 말이 하루 혹은 이틀 안에 도달하는 거리까지 통치한다. 호남이니 호서니 하는 지역명은 중국의 관습을 모방한 것으로 제천 의림지 서쪽이 호서라는 식은 적당히 둘러댄 거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훈고학 하느라 만들어낸 이야기다. 지리를 기준으로 본다면 왕이 살고 있는 고려시대 개성 남쪽이 호서이며, 차령이남이 호남이고 혹은 금강 남쪽이 호남이라 봐도 무방하다. 조선시대에 팔도를 나누면서 충청도와 전라도가 구분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현지에 가서 보면 구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지금 경기도 절반은 당시에 충청도였다. 충남 연산은 전라도였다. 호남이 전라도로 한정된 것은 조선 중기부터다. 중요한 것은 생활권이다. 금강 남쪽은 말을 달려 하루 안에 남해까지 닿으므로 같은 생활권이다. 차령이남은 가옥구조와 경작하는 작물이 같다. 동백나무의 수목한계선은 서천 춘장대 지나 홍원항 마량포구다. 백제 말기의 80퍼센트가 호남이므로 백제=호남으로 인식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가야가 망하자 낙동강 서쪽은 백제에 붙었다. 의자왕이 적극적인 군사행동으로 백제는 합천 대가야까지 진출한다. 그 병사들은 전라도 지역에서 왔다. 합천에서 경주까지는 말로 달리면 반나절 거리다. 신라의 목줄에 칼날이 들어온 거다. 백제가 충청권이라면? 신라가 당진-아산-옥천 라인을 가져가서 전선이 형성되어 있는데, 어떻게 국경의 병사를 남쪽으로 빼겠는가? 의자왕이 신라의 40성을 빼앗았는데 그들은 전라도병사였다. 차령이남은 하나의 생활권이므로 충청, 전라의 구분은 의미없다. 백제는 수도를 전라도 익산으로 옮기려고 했다. 말을 달려서 하루이틀 안에 닿는 지역은 모두 직접적으로 통치와 지배가 가능하다. 백제의 22담로는 모두 왕의 친족으로 보아야 한다. 고대국가는 왕의 친척만이 지방 성주가 될 수 있었다. 한나라때 중국의 제후들은 모두 유씨 성을 가졌다. 봉건국가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 거다. 백제가 5천의 적은 군사로 황산벌에서 패한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군사나 전쟁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공격과 수비로 나누어 보자. 공격측은 사전에 오래 준비한다. 공격측은 적지에서 약탈하여 전리품을 얻는다. 확실한 목표가 있다. 도망갈 수 없다. 도망가봤자 적지이므로 잡혀서 죽는다. 수비측은 가족을 지키려 한다. 그러므로 자기 고향에서는 결사항전한다. 수비군은 자기지역을 떠나면 전부 탈영해버린다. 그러므로 수비군은 병력이동을 할 수 없다. 무조건 자기 지역을 지켜야 한다. 수비할 때 성주들은 농민을 병사로 동원하므로 단번에 병력을 얻는다. 그러나 지역을 이동하면 일단 군대가 소집이 안 된다. 소집령이 내리면 어린이와 할아버지만 오는데 대개 아빠가 아파서 자식이 대신 왔다거나, 자식이 아파서 아버지가 대신 왔다고 둘러댄다. 나이가 어리거나 너무 많으면 전력에 보탬이 안 된다고 해서 빼주기 때문이다. 소집하는데 3개월 걸린다. 전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소집이다. 공격측은 미리 소집해 놓으므로 그런 문제가 없다. 수비측은 병력소집이 안 되어서 가족이 인질로 잡혀있는 자기 담당지역만을 수비할 뿐 병력이동은 절대 못한다. 공격측도 탈영에 대비하여 군인의 가족을 인질로 수도에 잡아놓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 보통 백만대군을 일컫는데 실제로는 1/3이다. 30만을 보내고 나머지는 30만의 가족을 감시하며 황제를 지키는 것이다. 혹은 짐꾼으로 동원되어 국경까지 등짐을 운반하는 역할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전력이 약한 남군이 먼저 북군을 공격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북군이 선제공격하면 남군은 병력소집이 안 되어 바로 붕괴된다. 각자 자기 가족을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병력수에서 절대 불리했던 남군이 먼저 공격했다. 리장군은 남군 10만을 이끌고 북진하여 적지에서 싸웠는데 그 덕에 탈영병을 막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리장군이 연전연승했음은 물론이다. 반면 남군이 자기 위치를 지키려고 했던 중서부전선과 미시시피강 유역은 모두 북군이 승리했다. 남군은 가족 걱정 때문에 전투에 집중할 수 없었다. 병력이 적은 쪽이 오히려 공격해야 한다. 리장군은 초반에 이겼지만 예비병력 충원이 안 되어 압도적인 병력열세 때문에 조금 후퇴했는데 그때부터 졌다. 조금이라도 고향으로 물러나면 탈영병이 겉잡을 수 없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미시시피강 유역에서 가는곳마다 항복을 받아낸 그랜트 장군도 리장군 앞에서는 연패를 거듭했다. 왜 그랬을까? 링컨은 그랜트장군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을줄 알았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전쟁의 승패는 상당부분 지정학적 구조에서 비롯된다. 적지에 뛰어든 군대는 언제나 배수진을 치고 싸우는 셈이므로 강한 것이다. 왜 계백은 5천 밖에 동원할 수 없었을까? 5천은 많은 숫자다. 신라는 영토가 백제의 두 배인데도 전군을 끌고온 것이 겨우 5만이다. 당시 백제 인구가 많지 않았다. 백제는 아무리 모아도 3만이다. 그런데 당진-진천-옥천의 병력은 후방으로 빼지 못한다. 원래 지방성주는 군대를 못 옮기게 되어 있다. 지역을 이탈하면 바로 반역으로 몰린다. 그 때문에 제승방략이니 뭐니 하는 기형적인 군사제도가 생긴 것이다. 진관체제는 자기지역만 지킨다. 군대가 지역을 옮기면 첫째 반란군이 되고, 둘째 대규모 탈영병이 생기고, 셋째 민가를 약탈하게 된다. 그 때문에 임진왜란때의 많은 의병장들이 반역자로 몰려 억울하게 희생되었던 것이다. 의자왕은 전라도 군사로 신라를 쳐서 낙동강 서쪽을 차지했다. 그 때문에 신라군사가 남쪽으로는 넘어오지 못한다. 그 때문에 백제도 전라도 지역에서는 당장 급하게 동원가능한 병력이 없다. 함양이나 산청에 있는 백제군대가 지리산을 넘어 부여로 오겠는가? 전부 탈영해버린다. 당진-진천-옥천 라인은 최전선이라 군대를 후방으로 뺄 수 없다. 군대를 움직이려면 오랫동안 준비해야 한다. 무리하게 군대를 이동시키면 대규모의 탈영과 약탈이 일어나고 보급이 안 된다. 게다가 원래 전쟁은 가장 최근에 항복한 변방의 군대나 용병부대, 동맹군 부대를 맨 앞에 세우게 되어 있다. 자기 직속군대는 그들을 감시하다가 도망치면 죽이는 역할이다. 만약 백제가 충청만 직할했다면 전라도 군사를 앞세우고 충청도 군사는 뒤를 지킨다. 신라도 가야계인 김유신에게 선봉을 맡겼다. 당시 백제가 3만을 모았다면 매우 많이 모은 것이다. 병력을 7 대 3으로 쪼개서 6은 왕을 지키고 4를 전선에 보낸다. 이 또한 절대적인 공식이다. 최영은 20만을 동원해 5만을 이성계 줬다. 윤관은 16만을 동원해서 여진족을 쳤지만 실제로 작전은 3천명 단위가 고작이었다. 역사에 기록된 숫자의 7할은 병사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 가둬놓고 지키거나 짐꾼으로 국경까지 갈 뿐이다. 백제는 급하게 모아서 3만인데 반은 왕을 지키고 나머지 반을 둘로 쪼개서 1만으로 금강하구의 당을 막고 5천으로 신라를 막았다. 이러한 전개는 교범적인 대응이다.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없다. 오히려 신라군대가 옥천지역 돌파를 못해서 약속한 날자를 못맞춘 이유로 소정방이 날뛰게 하는 빌미가 되었다. 당시 신라왕이 황간 백화산까지 와 있었는데 집결지가 옥천일대임을 알 수 있다. 옥천에서 황산벌까지는 딱 30킬로다. 기병이 말을 달리면 한 시간 거리다. 부여까지는 50킬로다. 기습을 한다면 날랜 기병으로 부여까지 두 시간에 갈 수 있다. 그런데 신라군은 가지 못했다. 무엇인가? 신립장군이 왜 문경새재에서 막지 못했나 하는 바보같은 소리 하는 사람이 간혹 있는데 멍청한 이야기다. 그게 다 결과론이고 당시 백제군은 신라군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던 것이다. 이게 기록되지 않았다. 옥천을 점령한 신라가 말 타고 한 시간에 돌파할 거리를 못 가서 빌어먹을 소정방에게 꾸지람 들은 것은 백제군사가 실제로는 탄현에서 신라군을 잘 막아냈기 때문이다. 백제는 신라군사가 많아도 1만 정도로 보았을 것이다. 현지의 성주가 3천이면 막을 수 있다. 그 사이에 예비병력을 보내면 신라군을 물리칠 수 있다. 그런데 무려 5만이나 쳐들어온 것이다. 5만은 신라가 동원할 수 있었던 최대한인데 그런 대규모 전쟁은 당시로는 상상을 못한 것이다. 원래 인간은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일은 대비하지 못한다. 백제의 실패를 나무랄 수 없다. 임진왜란같은 대규모 침략은 역사에 없던 일이라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왜구가 와도 기껏해야 5만이 오겠지 했던 거. 풍신수길이 당시 오사카에 100만을 모아서 50만을 주둔시켰다. 15만이 바다를 건넜고 나머지는 짐꾼으로 혹은 배 젓는 노꾼으로 왔다갔다 했다. 오사카의 50만은 소서행장이나 가등청정이 배신하여 조선에 붙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가족을 인질로 잡는다.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은 모두 최근까지 풍신수길에 저항한 남쪽 변방세력이며 소모품이고 조선에서 죽어 없어져버려도 괜찮은 애들이며 여차하면 조선에서 녹아 없어져 버리라고 보낸 것이다. 신라 역시 가야계인 김유신 패거리는 백제에서 죽어 없어져 버려도 괜찮은 애들이니 보낸 것이다. 당시 조선의 상상력으로는 풍신수길의 100만 동원을 상상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거다. 백제의 몰락은 대륙이 5호 16국이니 남북조시대니 하는 끝없는 혼란을 끝내고 북방민족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유지한다는 전개를 상상하지 못한데 따른 것이며 그것은 전례에 없던 일이었다. 일찍이 없었던 일을 상상하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백제는 가야를 아우르고 왜와 연결하여 대제국을 이루었고 호남지역을 완벽하게 통제했으며 신라의 침공을 탄현에서 효과적으로 막았다. 제발 두 발로 직접 걸어서 한반도를 남쪽을 돌아보시기 바란다. 직접 현장에 가보시라. 옥천에서 부여는 말 타고 두시간 거리다. 저녁에 대전에서 술 한잔 하고 취해서 비틀하면 몸은 서천에 있다. 논산에서 낮잠 자다가 누워서 기지개 한 번 켜면 팔은 압해도에 닿고 발은 탄금대에 닿는다. 옥천에서 밤중에 길 잃은 신라병사가 다음날 아침 춘장대 백사장에서 발견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자전거 여행 한다는 사람 있는데 한반도는 너무 작아서 자전거로 여행할 수가 없다. 서울에서 페달 밟으면 대전에서 점심 먹고 대구에서 저녁 먹는다. 이 작은 나라에 충청이니 호남이니 가당한가?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때 백제군사가 건천 여근곡까지 잠입했다고 한다. 여근곡에서 왕이 사는 월성까지는 13킬로다. 자객들이 밤중에 말타고 달리면 20분거리다. 신라와 백제는 아주 작은 나라다. 중국이 만리영토를 통치하는데 백제는 천리를 통치하지 못한다? 중국은 근대국가고 백제는 무슨 아마존 조에족인가? 제발 정신차리자. 백제는 일본사에서 이상할 정도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일본사인지 백제사인지 헷갈릴 정도로 말이다. 대제국 백제가 건국이후 600년간 통치하면서 호남을 직할못한다고? 일본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도? 호남도 손못대면서 경남 합천을 먹어치워? P.S. 신라가 동남으로 오고, 당이 금강으로 왔기 때문에 백제가 남쪽으로 퇴각할 수 없었던 것도 전술적 실패의 이유가 됩니다. 당시 백제인구를 최대 백이십만(전성기 근초고왕때 80만이나 한강유역 상실로 감소)으로 보면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는 전쟁에 가지 않으므로 빼고(보통 노예가 평민의 두배) 나머지 많게 쳐서 80만인데, 섬지역이나 지리산 너머나 무주구천동 등 격오지 동원불가능지역 빼면 60만, 접경지역은 가족이 신라군에게 인질로 잡힌거나 마찬가지라 이동불가능(떠나는 즉시 가족은 신라인들에게 노예로 잡혀감)하므로 자기지역만 수비 빼면 50만, 미성년자 빼면 25만(평균수명이 짧아 당시는 미성년자가 많음), 여자 빼면 12만, 장애인, 환자 노인, 빼면 10만, 남아있는 노예를 감시할 인원 빼면 7만, 탈영병과 도주자, 행불자, 노숙자, 일베충, 유량민, 거지, 떠돌이, 천민, 도둑, 강도, 해적, 강남기득권병역기피자 빼면 5만, 그 중에서 신라군의 진격속도보다 빠르게 부여성으로 달려올 인원은? 당장 동원가능한 병력은 언제나 적은 숫자이고 그 때문에 임진왜란때 왜군이 북상하는데 서울을 지킬 병사가 없었습니다. 조선시대라도 1만을 못 모읍니다. 원래 갑작스런 군대소집은 어려운 일이라는 거. 게다가 부여성은 신라와의 국경에서 너무 가깝습니다. 지금 당장 전쟁난다 해도 여론조사하면 대한민국 남자 중 반은 도망친다고 대답합니다. 가족을 지켜야죠. 전쟁은 굉장히 장기간 준비해야 합니다. P.S.2 수수께끼 중 하나는 의자왕이 대야성을 빼앗아 서부경남의 40성을 가져간 이후 김유신이 분전하여 신라가 일부 지역을 회복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대야성을 탈환했다는 내용은 없다는 점이다. 어떤 기록은 백제멸망 이후에야 신라가 대야성을 접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의 백제인구 24만호는 서부경남인구를 포함시킨 것일 수 있다. 교과서에 나오는 삼국의 영토선은 전부 잘못 그어져 있다. |
백제는 망한게 아니라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했다고 하네요.
일본에서는 자기 땅을 일본이라고 이름 붙일수 없다고 합니다.
한반도에서 볼때 일본땅을 향해서 일본이라고 부를수 있다고합니다.
태앙이 떠오르는 근본이 되는 땅이라는 뜻을 가진 일본의 국호는
백제가 국호를 변경한거라고 합니다.
그 이전에는 일본이 아니라 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진지하게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
왜는 중국 남쪽 오나라에서 왔으므로 왜라고 했는데
수나라때 중국에 사신을 보내면서
나라이름이 필요해서 일본이라고 지은 겁니다.
일본인은 한국인보다 얼굴이 검고 키가 작으므로
선주민은 중국 남부에서 왔다고 보는게 타당합니다.
일본이 스스로 일본이라고 못한다면
중국도 스스로 중국이라 못하고 한국도 스스로 동국이라 부르면 안 되죠.
게다가 왜넘들이 한자를 잘 알리도 없고
또 사신을 보낼 목적으로 국명을 급조한건데 그거 따질 일도 없고.
사학 공부하는 분 중 여기 구조론 눈팅하는 분들 맛보기, 라도 글 써주셨으면 좋겠소.
애초에 식민사학은 그것 자체가 자신의 먹고사는 문제기 때문에
바뀐다는것은 기대할수 없습니다.
고대사는 커녕 조선사도 식민사학 입장에서는 ..
역사를 바로 세우려면 일단 SKY가 없어져야하는 전제조건이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