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십일조를 받아서 먹고 살고, 학자들은 지식을 팔아서 밥을 먹는데, 구조론은 무엇으로 사는가? 구조론은 전쟁으로 산다. 인생은 게임이고, 게임에는 이겨야 하고, 이기려면 세력화 되어야 하고, 구조론은 세력화를 추구한다. 세력에 가담할 제자가 필요하다. 그냥 무리는 아니다. 구조론의 제자는 전쟁에 동원된 사람이다. 사건 안에서 역할을 가지고 임무를 받아서 전장에 소집된 특별한 무리다. 구조론의 제자는 전쟁을 지휘할 간부가 되고 장교가 되어야 한다. 전쟁에 이길 수 있는 기동을 해야 한다. 그것이 의리다. 공자의 의리와 예수의 사랑은 다르다. 십일조를 바치라거나, 기도를 하라거나, 세례를 받으라거나, 원수를 사랑하라거나 하는 플러스가 없다. 대신 배신자는 죽인다. 각자 자기 위치는 지켜야 한다. 폭탄이 하필 내 앞에서 터지면 몸으로 덮쳐서 동료를 구해야 한다. 자기 편이 어려울 때는 도와야 한다. 무엇을 하라는게 아니고 동료와의 긴밀한 연결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라는 것이다. 연결을 깨는 행동을 제지할 뿐이다.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다. 부하들은 뭘 하려고 의욕을 보이지만 간부들은 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 주목한다. 우리는 간부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전쟁이 결정한다. 우리가 빠져 있는 상황이 결정한다. 물에 빠지면 헤엄을 쳐야 하고 철봉에 매달리면 턱걸이를 해야 한다. 그것은 내가 정하는게 아니다. 게임에 휘말리면 임무는 저절로 드러난다. 나는 이래라저래라 시키지 않는다. 플러스는 없다. 마이너스는 있다. 단, 경거망동 하지 마라. 뻘짓은 하지 마라. 이런 말은 한다. 나는 스승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구조론을 가르쳐 준 사람은 없다. 초중고 거치며 12년간 봐온 교사들 하나같이 찌질했다. 너희들 공부 안 하면 나처럼 선생질이나 해야 된다. 인생은 요령이다. 이런 너절한 말이나 들었다. 스승은 위로 올라가는 플러스다. 제자는 아래로 내려가는 마이너스다. 구조론은 마이너스다. 스승은 없고 제자는 있다. 사건을 전달하며 일방향으로 계속 가는 것이다. 스승의 어원은 '사승'이니 불교용어다. 선생은 공자 선생, 맹자 선생처럼 옛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고려시대에 와서 과거 급제자에게 붙여주는 존칭이 되었다. 지금은 교사를 선생이라고 부른다. 나는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저 꼴통들을 어떻게 가르쳐. 어휴! 말이 통해야 가르쳐 먹지. 대신 적들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사건을 일으킨다. 물에 빠뜨려 놓으면 알아서 수영을 배운다. 전쟁에 빠뜨려 놓으면 알아서 생존을 배운다. 구조론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이유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지만 전시상태는 유지해야지. 전쟁은 원래부터 있었다. 지금이 전시라는 사실을 내가 먼저 알아챘을 뿐이다. 그 전쟁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다. 이성과 우상의 전쟁이다. 진리와 무명의 전쟁이다. 말잔등에서 태어난 사람은 말잔등에서 죽는 법. 태어나보니 전쟁터였고 여기서 탈출할 길은 없다. 제자들을 소집하여 전쟁을 독려할 뿐이다. 나의 싸움을 이어받아 계속 싸우는 사람이 구조론의 제자다. 무지를 죽이고, 괴력난신을 죽이고, UFO를 죽이고, 텔레파시를 죽이고, 각종 음모론을 죽이고, 온갖 이념놀음에 프레임 장난, 노선타령, 주의타령, 관념타령, 보수꼴통, 좌파꼴통, 광신도, 주술사, 사기꾼들을 때려죽여야 한다. 사람들은 자유, 평등, 평화, 행복, 사랑, 정의, 공정, 도덕 따위를 떠들지만 대개 개소리다. 달달한 언어를 조심해야 한다. 언어는 쉽게 왜곡된다. 억압을 자유라 하고, 차별을 평등이라 하고, 불의를 정의라 하고, 불공정을 공정이라 한다. 전쟁에 이기는 자유가 진짜다. 이기는 평등, 이기는 평화, 이기는 행복, 이기는 사랑, 이기는 정의, 이기는 공정이 진짜다. 기계적인 정의, 기계적인 공정은 과외 많이 뛰고 스펙 많이 쌓은 하버드 유학생에게 유리한 거짓이다. 이준석은 기득권에게 주어진 특혜를 챙겨 먹는 것을 공정이라고 한다. 단어를 붙잡고 늘어져서 세밀하게 따질수록 말장난의 수렁에 빠진다. 입으로 씨부려지는 언어는 가짜고 빠뜨려진 전쟁이 진짜다. 위대한 전쟁의 승리에 의해서만 모든 것은 정당화 되는 것이다. 보다 자유롭고 평등하고 공정한 집단이 역사적으로 이겨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이기지 못하는 억지 자유, 억지 평등, 억지 공정 필요 없다. 고기를 먹는다면 동물에게 불공평해. 식물을 먹는다면 콩과 보리는 억울해. 개소리다. 이기지 못하는 이념은 필요 없다. 개고기 먹으면 진다. 쪽수에서 밀린다. 갈림길에서 우리는 이기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이겨야 환경과의 연결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지면 단절되고 고립되어 말라 죽는다. 게임을 계속할 수 없다. 단, 큰 전쟁이라야 한다. 대장정의 도중에 주저앉아 모퉁이에서 점방을 열고 내전을 벌이는 자는 죽인다. 우리는 장기전에서, 전면전에서, 총력전에서 우리 편이 이길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연결이 유지되면 이긴다. 의리를 지켜서 불씨를 살려가는 선택을 해야 한다. 스승이 없으므로 스승과 제자의 일대일 인간관계가 없다. 전쟁 안에서 역할이 주어질 뿐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달마를 만나면 달마를 죽이라는 말을 들려줬더니, 김동렬을 만났으니 김동렬을 죽이겠다는 자가 있었다. 사람을 쳐다보지 말고 전쟁에 복무하라. 전쟁에는 전쟁의 결이 있다. 결 따라가면 이긴다. 학계의 지식은 돈 받고 판다. 종교의 예배당은 무리를 비좁은 공간에 모아놓는 방법으로 호르몬을 교환한다. 구조론의 싸움은 자연의 법칙이다. 물이 흐르므로 급류를 타고 바람이 불어올 때는 파도를 탄다. 고인 물에서는 파도를 탈 수 없다. 역사가, 문명이, 자연이 달려가는 기세에 편승할 뿐이다. 물이 들어오면 노를 젓고 물이 잠잠해지면 물러나서 후학을 가르친다. 가르치는 것은 내 주특기가 아니고 여러분은 전장에서 배우고, 현장에서 배워야 한다. 싸움에 뛰어들어야 한다. 풍덩 빠져버려야 한다. 게임에 휘말려야 한다. 석가는 자신에게 배우고 진리에 의지하라고 했다. 부족하다. 소승불교는 계율을 고리로 한 스승과 제자의 인맥놀음이 되었다. 여러분은 실전에서 배워야 한다. 구조론은 이기는 방법이다. 뭐해? 전쟁터로 달려가지 않고. 전쟁이 끝났다고? 그렇다면 또 불을 질러야지. 전쟁이라는 표현이 사납다면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풀면 된다. 상호작용은 피아간에 팽팽하고 긴장된 상태,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상태, 상대방의 호흡이 전달되는 긴밀한 상태, 게임이 진행되는 상태, 반응이 오는 상태, 랠리가 이어지는 상태다. 그것이 구조다. 구조론은 구조에 의지한다. 전쟁은 비유다. 신토불이니, 유기농이니, 생태주의니, 한옥집이니, 개량한복이니, 국뽕이니 하는 것들을 혐오하는 것은 아니다. 신토불이 좋지. 좋고 말고. 다만 나는 그 게으름을 두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뭐해? 전쟁에 달려들지 않고? 그 퇴행이 싫은 것이다. 한곳에 안주하여 머무르는 순간 적군의 화살이 날아온다. 죽는다. 스승에 의지하면 안 된다. 싸움판을 벌여놓으면 무리가 모여든다. 그 기세에 의지해야 한다. |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므로, 벗어날 방법은 애초에 없다.
가담하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