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사건이다. 구조는 사건의 구조다. 구조는 사건 내부의 의사결정구조다. 사건의 관측자는 인간이다. 존재는 사건을 주체인 인간과 대칭시켜 객체로 보는 것이다. 사건의 관측자인 인간의 개입이 혼선을 일으키므로 주체인 인간을 배제하고 객체 자체의 내재적인 질서로 봐야 한다. 그것이 구조다. 구조는 존재의 내부구조다. 구조는 존재 자체의 내재적인 질서다. 구조는 존재 내부의 조절장치다. 구조는 객체 내부의 조절 메커니즘이다. 구조는 축과 대칭의 구조다. 외력을 대칭으로 막고 축으로 조절한다. 구조는 외력의 작용에 따른 계 내부의 에너지적 모순을 해결하여 존재 자신을 유지하고 드러낸다. 만약 모순의 해결에 실패하면 존재가 부정되어 무로 사라지고 없어진다. 구조는 대칭된 둘이 공유하는 하나의 축으로 통일되어 외력의 작용에 대해 1로 행세하는 방법으로 상대적인 에너지 효율성을 달성하여 그렇게 얻은 힘으로 내부의 문제를 해결한다. 각개격파되지 않고 외력을 이겨내는 것이다. 엔트로피의 원리에 따라 외력의 도움 없이 닫힌계 안에서 자체적으로 힘을 쥐어짤 수 있는 기동방향은 하나뿐이다. 그 방향은 에너지의 수렴방향이다. 계는 자체적으로 효율을 달성하여 몸을 가눌 수 있는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므로 우리는 그 에너지의 전달 회로를 통제하는 방법으로 구조를 장악하고 이용할 수 있다. 만약 반대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비효율에 의해 외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깨진다. 에너지는 확산과 수렴 두 방향뿐이며 확산은 자연상태이고 수렴은 외력의 작용에 맞서는 효율적인 형태다. 확산 아니면 수렴인데 확산은 깨지므로 버티고 있다면 공간을 잃어먹는 수렴이고 그것이 엔트로피의 증가다. 외부의 개입 없이 한정된 자원 안에서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면 쓸 수 있는 카드는 제한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내막을 알 수 있다. 내부에서 에너지를 쥐어짤 수 있는 유일한 카드가 구조다. 구조는 축이 대칭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방법으로 의사결정하여 닫힌계 내부의 에너지적 모순을 처리한다. 그 과정에서의 움직임이 관성력에 의해 또 다른 모순을 야기하므로 사건은 시스템, 메커니즘, 스트럭쳐, 액션, 코드의 다섯 가지 연속적 의사결정으로 진행된다. 구조는 하나의 사건 안에서 5회에 걸쳐 계 내부의 모순을 처리하여 사건을 종결시킨다. 자연계의 모든 사건은 이 하나의 방법을 쓴다. 구조는 우주 전체가 공유하는 하나의 플랫폼이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하나의 사건 안에는 다섯 가지 구조가 있다. 시스템 안에 메커니즘이 있고, 메커니즘 안에 스트럭쳐가, 스트럭쳐 안에 액션이, 액션 안에 코드가 있다. 이들이 사건의 머리와 꼬리가 되어 인과율을 조직하니 각각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된다. 시스템이 원인일 때는 메커니즘이 결과다. 메커니즘이 원인일 때는 스트럭쳐가 결과다. 같은 패턴으로 코드까지 간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마지막의 코드다. 구조는 대칭의 구조다. 우리는 표면에 드러난 코드를 보고 공간적 방향의 대칭을 확보하고 시간적 순서의 대칭을 추적하여 사건의 흐름을 알아낼 수 있다. 부분의 단서로 추론하여 전모를 알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의 관점이다. 어떤 것을 설명하려면 객체 내부의 사정을 위주로 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객체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대상을 지목하며 겉도는 오류를 저지른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다’ 하고 화를 낸다. 객체 내부로 진입하지 못하므로 답답해서 화가 나는 것이다. 인간은 대칭을 중심으로 사유한다. 외부의 관측자인 인간 자신과 대칭시키는 오류를 저지르곤 한다. 주체와 객체의 대칭을 끊고 사건 내부로 진입하여 객체 안에서 자체적으로 돌아가는 대칭을 찾아야 한다. 겉과 속의 공간적 대칭을 알면 객체 내부로 진입할 수 있고, 과거와 미래의 시간적 대칭을 알면 단서를 잡고 인과의 고리로 추적하여 사건을 해명할 수 있다. 병사가 화살을 쏜다. 병사를 노려보고 있으면 날아오는 화살을 보지 못한다. 나와 적군 병사의 대칭을 끊어야 병사와 화살의 대칭을 포착할 수 있다. 비로소 날아오는 화살의 궤적이 파악된다. 투수와 타자의 대칭을 끊어야 투수와 공의 대칭이 보인다. 날아오는 공의 궤적이 보인다. 안타와 홈런은 그다음이다. 나를 잊어버리는 무아의 경지가 그것이다. 문제는 언어다. 인간의 언어는 타인과의 주고받기 대화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주체와 객체의 대칭에 집착하는 것이 오류의 원인이다. 그 경우 사건 내부로 진입하지 못하고 밖에서 겉돌게 된다. 인간이 말하기 편한 대로 사유하면 안 된다. 자극하고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는 핑퐁식 떠넘기기 사유는 좋지 않다. 언어에 사유를 맞추지 말고 자연의 사실에 사유를 맞추어야 한다. 객체 내부로 들어가서 자체적으로 돌아가는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추적해야 한다. 우리가 밖에서 보는 것은 액션과 코드다. 실제로는 코드만 볼 수 있지만, 시각과 청각은 뇌가 액션까지 해석한다. 눈으로는 2D를 보지만 머리로는 3D로 인식한다. 구조는 액션의 원인이다. 인간은 액션까지 보고 구조를 보지 못한다. 구조는 객체 내부에 갇혀있으므로 객체를 깨뜨리지 않고 겉에서 파악할 수 없다. 만약 깨뜨리면 왜곡된다.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팽이를 쪼개서는 팽이의 내부사정을 알아낼 수 없다. 팽이가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주어지는 단서는 코드와 액션이고 그 이상은 추론의 영역이다. 액션을 촉발하는 것은 구조다. 건물이 무너지는 것은 구조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뭐든 사건의 원인은 객체 내부의 구조에 있다. 구조는 자체의 밸런스를 가지며 내부 밸런스의 붕괴가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다. 밸런스를 조절하는 것은 대칭의 축이다. 그것이 존재의 조절장치가 되어 메커니즘을 이룬다. 메커니즘이 환경을 장악하여 스스로 에너지를 조달하면 시스템으로 발전한다. 그것이 모든 것의 궁극적 원인이다. 시스템은 어떻게 환경을 장악하고 에너지의 입력을 조달하는가? 메커니즘은 어떻게 작용과 반작용을 대칭시켜 에너지의 출력을 조절하는가? 스트럭쳐는 어떻게 축을 움직여 공간을 특정하는 방법으로 의사결정했는가? 우리는 이것을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것이다. 답은 정해져 있다. 그것은 확산을 수렴으로 바꾸어 공간을 좁히는 방법으로 효율을 달성하여 상대적인 우위에 서는 것이다. 뭐든 좁힌다. 어떤 결정을 해도 그것은 좁히는 것이다. 마이너스 원리다. 상사는 부하를 좁힌다. 넓은 데서 좁히는 자는 현명하고 이미 좁은데 억지로 좁히려 하는 자는 어리석다. 먼저 넓은 곳을 확보한 다음 점차 좁혀가는 것이 열린 정치다. 한사코 좁은데로 몰아가면서 억지로 좁히려는 것이 독재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외력의 작용에 맞서 자신을 유지하는 조절장치를 갖추고 있다. 조절장치가 없으면 구조가 깨져서 존재가 부정되므로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없을 수는 없다. 어떤 존재가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는 내부의 조절장치가 그렇게 작동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막연히 외부에서 서성거리며 대상을 지목하고 남탓하며 화를 내는 오류를 저지른다. ‘이게 다 저것 때문이다’ 하고 호통치며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소극적으로 상대의 반응을 기다린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렇게 한다. 객체 내부로 진입하지 못하므로 상대가 제 발로 기어나올 때까지 밖에서 괴롭히는 것이다. 공성전을 벌이며 농성하는 적군을 향해 욕설을 한다. 적군이 욕설을 듣고 머리꼭지까지 화가 나서 제 손으로 성문을 열고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는 과학적인 접근이 아니다. 능동적으로 객체 내부로 진입하여 실제로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하고 내부의 조절장치가 되는 축과 대칭을 적절히 제어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바람이 분다. 우리는 동사인 '분다'를 무시하고 주어가 되는 '바람'에 주목한다. 주체와 객체의 대칭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는 초원을 뛰어다니며 사냥감을 쫓는 원시인의 본능이다. 관측자인 나를 배제해야 한다. 주어를 버리면 남는 것은 동사다. 바람이 부는게 아니라 '부는 그것'이 바람이다. 그것은 액션이다. 액션의 원인은 구조다. 저기압과 고기압의 균형이 바람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이다. 태양광의 복사에 의해 내부의 균형이 깨지고 새로운 균형을 찾아 이동하는 형태로 바람이 분다. 그렇게 자연은 조절되는 것이다. 구조는 만유에 내재한 조절장치다. 우리는 그것을 적절히 조절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고양이는 놀이개를 보고 달려든다. 인간은 맹목적으로 주체인 자신과 객체인 상대방을 대칭시킨다. 언어가 핑퐁식 주고받기 구조이기 때문이다. 말하기 편한 대로 사유하므로 놀이개를 향해 달려드는 고양이처럼 낚이고 만다. 상대를 자극하고 수동적으로 반응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봐야 한다. 상대를 보지말고 둘이 공유하는 토대를 봐야 한다. 둘은 한배를 탔다. 상대가 움직인게 내가 고통받는 원인이 아니라 파도가 움직인게 원인이다. 야당이 움직인게 원인이 아니라 국민이 변한게 원인이다. 국민은 언제라도 변한다. 파도는 언제라도 일어난다. 조절해야 하는 대칭의 축은 그곳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