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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732 vote 0 2021.01.11 (18:32:46)

    세 편의 글을 다시 정리했습니다.


    주인의 자유와 선수의 자유와 노예의 자유가 있다. 주인은 자기가 이기도록 구조를 만들어 놓는다. 선수는 열심히 싸워서 자기가 이룬 만큼 가져간다. 노예는 허락된 범위 안에서만 자유를 누린다. 유기견은 자유롭지만 자유가 없다. 입양되어도 주인의 눈치를 살핀다. 


    아기는 지켜보는 엄마의 시선 안에서 자유롭다.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서 뛰어놀지 못한다. 자유로운 것이 자유는 아니다. 히피의 자유는 유기견의 자유와 같다. 뛰어놀지 못하고 좁은 공간을 맴돈다. 집시처럼 돌아다니지만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 


    톱니가 맞물리지 않고 겉돌고 있다. 진정한 자유는 의사결정의 머리에 서는 것이다.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며 세상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의 피드백을 사회에 되돌려주는 것이다. 사건은 머리와 몸통과 꼬리가 있다. 사건의 머리가 되는 것이 진짜다. 


    그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천하에 요원의 들불을 일으킨다. 그것이 주인의 자유다. 선수들은 세상을 향해 싸움을 건다. 이기면 다음 게임에 초대되고 지면 퇴장한다. 그들은 표현하고 집회하고 결사한다. 능동적으로 타인에게 말을 걸어간다. 이는 선수의 자유다. 


    마지막은 손발의 자유다. 그들은 허락받은 구역 안에서만 자유롭다. 선을 넘지만 않으면 타인에게 간섭받지 않고 억압받지 않는다. 그것은 무언가를 하는 자유가 아니라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다. 만약 선을 넘게 되면 책임이 추궁된다. 그것은 노예의 자유다. 


    문명의 진보는 하나의 사건 안에서 머리의 자유로 출발하여, 몸통의 자유로, 손발의 자유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완성되면 다음 게임으로 옮겨간다. 이 패턴을 반복하며 양의 피드백을 도출한다. 문명은 그 방법으로 인간을 선별한다. 똑똑한 사람이 끝까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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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왠지 불쾌하다. 나는 왜 이 말에 불쾌감을 느꼈을까? 40년간 생각한 끝에 이유를 알아냈다. 이 말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꼰대질이다. 확실히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 자유가 내 것이 아닐 때 책임이 따른다. 많은 경우 자유는 위임된 것이다. 회사원의 권력은 회사로부터 위임된다. 암행어사는 임금을 대리한다. 어사를 만난 관리는 임금을 만난듯이 행동해야 한다. 호가호위와 같다. 호랑이를 수행하는 여우의 권력은 호랑이의 것이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은 고유한 자기 권리가 없이 어른들로부터 자유가 위임된 어린이에게 해당된다. 어린이의 자유는 어른의 보호 아래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엄마가 지켜보지 않으면 아기는 불안해진다. 부모를 잃고 너무 일찍 철이 든 아이는 자유롭지 않다.


    유기견을 입양하면 주인의 눈치를 심하게 본다.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어린이가 쓰는 용돈은 부모로부터 주어진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롭지 않다. 막 쓰면 안 되고 학용품을 사야 한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책임이 따른다. 법인 카드를 쓸 때는 신경을 써야 한다.


    회사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에 책임이 따른다는 말은 조건부로 맞는 말이다. 남의 것을 빌렸을 때 해당되는 말이다. 온전히 내 것이면 어떨까? 신은 자유롭다. 인간 눈치를 보지 않는다. 제왕은 무치라고 했다. 임금은 눈치를 보지 않는다. 화장실에서는 누구나 자유롭다.


    문 앞에 사람이 줄 서 있는 공중화장실이 아니라면 말이다. 소아마비 백신을 발명한 조너스 소크는 특허를 공개해 버렸다. 본인의 자유로운 의사로 결정한 것이다.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 그의 고유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책임이 없다.


    정치인은 책임이 있다. 정치인이 받은 표는 유권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권력은 유권자로부터 위탁된 것이다. 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책임이 따른다. 책임Responsibility을 라틴어 어원으로 보면 '응답'이라는 뜻이다. 부름에는 응답이 있다. 우리말 책임과 다르다.


    우리말 '책임'은 나빠진 결과를 복원하는 부담을 지우는 것이다. 자유는 나쁜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야외에서 음식을 먹었다면 쓰레기를 치워야 한다. 자유는 행위를 수반하고 행위는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따라 무질서도가 증가한다.


    아랫사람에게 자유를 주었다가 뭔가 힘들어진 경험을 누구나 갖고 있다. 그런데 시선이 비뚤어져 있다. 그것은 어린이를 보살피는 어른의 시선이다. 학생을 관리하는 교사의 입장이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권력관계가 반영된 말이다. 애초에 시선이 비뚤어져 있다.


    진실을 말하자. 원인에는 결과가 있다. 행위에는 상대방의 맞대응이 따른다. 자유는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이다. 권력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자유는 행위를 낳는다. 행위에는 맞대응이 따른다. 상대의 맞대응을 이겨야 한다. 지면 추궁당한다.


    도박을 하는건 자유다. 이기면 좋고 지면 거덜난다. 이기려면 전략을 써야 한다. 자유에 책임이 따르는게 아니고 게임이 따르는 것이며 우리는 게임에서 이겨야 한다. 자유는 게임의 참여다. 무대에 오르는 것이다.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자유는 에너지다. 에너지는 방향이 있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적용된다. 자유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미 게임에 참여해 있는 상태다. 어린이는 가정이라는 게임에 속해 있고, 국민은 국가라는 게임에 속해 있고, 직원은 회사라는 게임에 속해 에너지를 조달한다.


    게임 속에 있으므로 제약이 따른다. 에너지를 외부에서 조달하기 때문이다. 축구 선수는 어느 방향이든 패스를 날릴 수 있다. 어린이는 밖에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다. 회사원은 업무 시간에 사우나에서 땡땡이를 칠 수도 있다. 정치인은 멋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지만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축구선수의 에너지는 팀에서 조달하고, 어린이의 에너지는 부모에서 조달하고, 회사원의 에너지는 월급에서 조달하고, 정치인의 에너지는 유권자에게서 조달하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위탁받아 대리하므로 책임이 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런데 권리를 위탁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감독하는 말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이 빌려 간 사람에게 다짐받는 말이다. 감독이 선수에게 하는 말이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이다. 사장이 직원들에게 하는 말이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게임에 속해 있기 때문에 게임의 규칙을 따른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권력을 준 다음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처분한다. 처분의 기준은 생산력이다. 집단의 목적은 생산성력 제고이므로 기대치에 미달하면 처분한다. 그것이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는 이유는 사회가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솔로보다 커플이 낫다. 커플이 되었는데 이득이 작고 손실이 크면 깨진다. 빵점을 맞아오면 용돈을 깎는다. 공을 차는 것은 자유지만 골을 못 넣으면 벤치 신세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말하는 사회적 자유는 다르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는 다른 개념이다. 그것은 게임에 참여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아직 게임에 들어가지 않았다. 게임을 하면 이겨야 한다. 술을 마시면 술을 이기고 담배를 피우면 담배를 이겨야 한다. 술에 지면 알코올중독이다.


    게임의 목적은 생산성이므로 지는 게임은 필요가 없다. 자유는 본인이 의사결정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결정권을 빼앗긴다. 카지노가 나를 결정한다. 술이 나를 통제한다. 거꾸로 결정 당한다. 권력을 상대방에게 빼앗긴다. 길들여진다. 이기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다.


    이기면 다음 게임에 초대되고 지면 퇴장당한다. 자유를 빼앗긴다. 상대방에게 당한다. 무조건 내가 이기는 구조를 만들어놓고 게임을 해야 한다. 그것은 게임의 주최측이 되는 것이다. 경마장과 같다. 결국 돈은 마사회가 가져간다. 일부는 세금으로 국가에 뜯기지만 말이다.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 언론의 자유는 상대방의 맞대응이 있다. 내가 표현하면 상대방도 표현한다. 내가 집회하면 상대방도 집회를 한다. 누가 이기는가? 머리가 좋은 놈이 이긴다. 젊은 놈이 이기고 강자가 이긴다. 자유는 공평하지가 않다. 자유는 강자에게 유리하다.


    자유는 젊은이에게 유리하다. 노동자 계급이 자유주의에 회의적인 이유다. 결국은 주최측이 이익을 가져간다. 주최측은 누구인가? 인류문명이다.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진 것은 문명이라는 게임의 주최측이 옥석구분에 인간을 이용하는 것이다. 경쟁시켜 놓고 똑똑한 자를 선별한다.


    자유는 똑똑하고, 부지런하고, 재주 있고, 강한 자를 감별하는 기술이다. 우리가 자유를 추구하는 이유는 자유국가가 독재국가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똑똑한 사람을 잘 골라내기 때문이다. 게임은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에 하나다. 51 대 49다. 양의 피드백을 이룬다.


    음의 피드백이면 시스템이 붕괴한다.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진 것은 시스템이 지속적으로 양의 피드백을 도출했다는 증거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 후진국에 자유가 없는 이유는 자유를 찾다가 멸망하기 때문이다. 구소련처럼 자유를 찾다가 망한다.


    중국이 개방을 두려워하는 이유다. 자유는 좋은 집단에 좋은 것이다. 뉴욕이나 LA는 좋은 집단이므로 리버럴하다. 뉴욕의 평균 아이큐는 120이고 텍사스는 85라는 설이 있다. 미국 남부의 기독교 벨트는 상대적으로 질이 좋지 않은 집단이므로 분위기가 억압적이다.


    자유를 결정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집단의 생산성이다. 전시에는 자유가 제한된다. 배급제 때문이다. 전시는 생산성이 낮으므로 자유가 없다. 리버럴한 자유는 생산성이 높은 젊고 똑똑하고 강한 집단 특히 선진국 중에서도 뉴욕이나 LA와 같은 대도시 주민의 특권인 것이다.


    촌놈들은 자유가 없다. 어른들이 꼰대짓을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억압하고 부녀회가 억압한다. 군대를 가면 고참과 간부가 억압한다. 회사로 가면 재벌이 중소기업을 억압한다. 생산성이 낮은 지역은 자유를 줘도 교회에 결박된다. 놀아라 해도 어디 안 가고 교회에 모여 있다.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다. 우리는 세 가지 자유를 구분할 수 있다. 주최측이 게임을 설계하는 진정한 자유가 진정한 자유다. 선수가 게임에 참가하는 사회적 자유는 두 번째 자유다. 마지막은 게임에 참가한 선수의 개인적 자유다. 이들의 공통점은 생산성의 제고라는 전제다.


    생산성이 비용을 초과하면 자유롭고 비용이 생산성을 초과하면 저절로 교회에 결박되고, 가부장에 결박되고, 재벌에 억압되고, 기득권에 결박되고, 전시체제에 결박된다. 계엄령이 발동된다. 생산성이 낮으면 인간은 제 발로 찾아가서 국힘당의 노예가 된다. 독재자에 굴종한다.


    북한이 그러하다. 자유는 권력과 동의어다. 창의한 자에게 권력이 있다. 소유권, 선점권, 특허권, 저작권 따위다. 자녀를 낳은 부모에게도 권력이 있다. 회사를 창업한 사장도 권력이 있다. 부하를 거느린 보스에게도 권력이 있다. 주최측의 자유다. 이때 권력은 고유하다.


    발명가의 특허는 고유한 권리다. 그런데 국가를 발명한 국민도 고유한 권리를 가진다. 그것이 시민의 인권이다. 국민이 국가를 만들었기 때문에 절대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정치인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주어진 상대적인 것이다. 국민은 책임이 없고 정치인은 책임이 있다.


    주최측이 진짜 자유를 누린다. 그들은 도박장을 열고, 타짜를 고용하고, 선수를 모은 다음 수수료를 뜯는다. 마사회나 카지노나 은행이나 보험회사나 후진국의 독점재벌이 쓰는 기술이다. 그들은 자신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 구조를 만든다. 그러다가 권력측에 밉보여 털리곤 한다.


    마윈의 앤트그룹이 최근에 당했다. 독립적인 금융 생태계를 만들려다가 시진핑에 찍혀서 한 방에 갔다. 국가도 일종의 그런 것이다. 최종보스가 쓰는 기술이다. 자신은 시합에 나서지 않고 부하를 대신 내보낸다. 상대가 부하를 꺾으면 돈으로 회유해서 부하로 고용해 버린다.


    박정희가 차지철과 김재규를 경쟁시키는 기술이다. 어느 쪽이 이기든 이득은 박정희가 가져간다. 국민이 여야를 경쟁시키는 것도 같다. 어느 당이 이기든 이득은 최종적으로 국민에게로 돌아가는 구조를 우리는 만들어야 한다.


    두 번째 자유는 게임에 참가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사회적 자유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들이다. 진보진영의 리버벌한 자유다. 이들은 도시에 거주하며 민주당을 지지한다. 젊고 똑똑하고 힘이 넘친다. 이들은 주최측이 아니다. 단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한 번은 게임에 져도 반복하면 결국 게임에 이긴다. 양의 피드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고생하지만 경험치가 쌓여 베테랑이 되면서 자유를 얻는다. 초반에는 에너지가 있으므로 고생을 감수하고, 중반에는 베테랑이 되어 항상 승리하므로 자유를 즐기게 된다.


    늘그막에는 에너지가 고갈되어 게임에 지므로 말로는 자유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타인을 억압한다. 실력으로 이기지 않고 구조를 비틀어서 반칙을 한다. 기득권의 텃세행동이다. 자신의 실력을 플러스하기보다 상대의 기회를 마이너스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고 거저먹는다.


    게임을 기피한다. 이들은 자유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자유의 파괴자다. 이들은 되도록 게임의 총량을 줄이려고 한다. 인생을 서울대 입시와 강남입성 두 가지로 결판내려고 한다. 옛날에는 탄생할 때 양반이냐 상놈이냐 신분제도 한 번 경쟁으로 게임을 끝내려고 했다.


    혹은 피부색으로 결정하자. 남녀 성별로 결정해 보자. 경상도냐 전라도냐 지역으로 결판내자. 등등 싸우지 않고 거저먹을 궁리만 하고 있다. 이들의 당명은 자유당인데 실제로는 자유의 적이다. 세 번째 자유는 이미 게임에 참여한 상태에서 주어지는 개인적인 자유다.


    자유에 책임이 따른다는 말은 세 번째 자유에 해당한다. 책임을 강조하는 하는 사람은 시스템을 장악하고 게임에 진입한 선수들을 길들이기 하려는 것이다. 겁을 줘서 고분고분하게 만들려는 속셈이다. 자유는 에너지고 에너지는 방향이 있다. 방향은 생산성의 증대 방향이다.


    효용이 비용을 초과하면 자유가 있다. 비용이 효용을 초과하면 계엄이 발동되고 전시체제가 가동되고 독재자가 등장한다. 자유는 세 가지가 있다. 주최측의 고유한 자유와 선수의 이기는 자유와 위탁받은 자의 책임지는 자유다. 주최측은 대개 국가와 같은 집단을 이루고 있다.


    국민이 여당과 야당을 마구 굴리며 지지율 갈아타기로 갖고 노는 것은 주최측의 자유다. 정당은 국민의 지지율 낚시에 낚여 허둥대며 전전긍긍한다. 이기는 자유는 선수의 것이다. 주최측은 누가 이길지를 정해야 한다. 51 대 49로 진보가 이기도록 판을 관리하는 것이 요령이다.


    양의 피드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음의 피드백이 되면 판이 깨진다. 국가는 파탄난다. 회사는 파산한다. 가정은 해체된다. 교회는 신도가 없다. 마지막 위임받은 자유는 개인적인 것이다. 상대가 없다. 감옥 안에도 자유는 있다. 방귀 뀔 자유와 하품할 자유가 있다. 의미는 없다.


    자유는 에너지다. 에너지는 방향성이 있다. 에너지는 효율적인 방향으로 기동한다. 비효율로 가면 에너지 손실로 죽는다. 연비가 나쁜 차는 시장에서 퇴출된다. 자유를 원하거든 이기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에너지는 운동의 원인이다. 에너지가 운동을 끌어내는 방향이 정해져 있다.


    에너지는 외부의 개입이 없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이다. 저절로 움직일 수 있는 코스는 제한되어 있다. 우주공간에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은 하나뿐이다. 우주공간에서 진행하는 방향을 바꾸려면 먼저 에너지가 중심의 코어를 향하도록 구조를 세팅해 놓아야 한다.


    -><- 의 형태로 작용과 반작용을 조직해야 한다. 이 상태에서 다시 하나를 꺾어야 한다. 처음부터 어떤 -> 방향으로 힘을 작용할 수 없다. 지구에서는 중력 덕에 가능하다. 우주에는 중력이 없다. 지렛대의 받침점이 없다. 우주공간에서 힘을 특정한 방향으로 보낼 수 없다.


    모든 힘은 받침점을 거쳐 가게 되어 있다. 코어를 거치게 된다. 코어를 장악한 자가 게임의 주최측이 되는 것이다. 누가 이길지를 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종 축구장은 주최측의 의도대로 기울어진다. 일본은 항상 자민당이 승리하는 구조를 만들어놓고 있다. 어리석은 짓이다.


    만약 우주 공간에서 특정한 방향으로 힘을 가하고자 한다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니라 먼저 중심으로 힘을 보냈다가 반작용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형태를 만들어야 한다. 코어를 거치는 절차를 거쳐야 하므로 제한이 따른다. 코어를 쥐지 못하면 자유가 없다.


    세 가지 자유는 코어를 장악한 자와, 코어를 장악할 에너지가 있는 자와, 코어로부터 지원받아 의사결정을 위탁받은 자다. 왕은 코어를 장악하고 있고 신하들은 임금의 신임을 받아 언제든 위탁받을 수 있으며 암행어사는 권력을 위임받아 마음대로 변학도를 혼낼 수 있다.


    주최측의 자유(주인의 자유) – 고유한 권리

    생존권, 인권, 행복추구권, 소유권, 선점권, 저작권,


    진정한 자유, 깨달음의 자유, 창의하는 자유, 부모의 자식에 대한 권리, 창업의 자유, 보스의 자유, 절대적인 권력적 우위, 부하를 경쟁시킨 다음 어느 쪽이 이기든 이득은 자신을 향하도록 구조를 설계한다. 이는 자연법칙에 근거한다. 닫힌계에서 에너지의 방향을 정할 때 에너지는 반드시 중심의 코어를 거쳐 가므로 코어를 지배하는 자는 에너지를 컨트롤 한다.


    사회적 자유(선수의 자유) – 능동적인 실천이 따르는 리버럴한 자유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리버럴한 자유


    상대가 있는 게임에 참여할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이 자유는 젊고 똑똑하고 강한 사람에게만 열려 있다. 생산력이 높은 도시민이 리버럴한 자유를 누린다. 게임에 이기면 자유를 얻고 지면 퇴출된다. 한번은 져도 반복하면 경험치가 쌓여 결국은 이긴다. 51 대 49로 양의 피드백이 일어나도록 승률을 관리하는 것이 요령이다.


    개인적 자유(노예의 자유) – 억압에서 풀려난 상태

    사생활의 자유, 방해받지 않는 수동적 자유, 집단으로부터 위임받은 자유


    가정이든 국가든 회사든 어느 집단에 소속된 사람이 집단을 대리하여 의사결정하는 자유가 있다. 마음대로 할 수는 있지만 결과가 나쁘면 혼난다. 개인은 집단의 일원이며 언제든 집단을 대리하고 대표할 수 있다. 단 의사결정을 잘해야 한다. 자유를 누리고 백 점을 맞으면 된다. 빵점을 맞으면 다음날 용돈이 없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은 이 경우에 해당된다.


    주최측의 자유는 인간의 고유한 권력이며 직접 경쟁하지 않고 타인이 경쟁하게 하며 이득은 자신에게 향하도록 구조를 만든다. 사회적 자유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며 능동적인 실천의 자유다. 방해받지 않는 수동적 자유와 다르다. 집회와 결사와 언론과 표현의 자유다.


    개인적 자유는 사생활을 방해받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하는 자유가 아니고 하라는 강요와 압박을 받지 않는 수동적인 자유다. 그런데 위임된 것이다. 어떤 그룹에 들어야만 자유가 주어진다. 유기견은 그룹에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므로 자유를 잃고 불안해한다.


    자유는 생산성의 증대라는 일방향으로 작동한다. 자유의 시스템은 똑똑한 집단을 발굴하여 인류의 진보에 기여한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은 자유를 싫어한다. 자유는 무작정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단이 양의 피드백을 얻어내는 기술이다. 언제나 똑똑한 사람이 자유롭다.


    에너지가 없는 사람은 게임을 해봤자 이기지 못하므로 자유를 거부한다. 당명은 자유당인데 자유를 독재자와 가부장과 교회와 엘리트와 재벌에게 반납하고 기득권의 노예가 되기를 소망한다. 자유당이 아니라 자유위탁당이다. 자유는 에너지를 컨트롤하는 시스템이다.


    에너지가 있는 사람에게 자유가 있다. 죄수나 환자는 자유가 없다. 막연히 자유를 외칠게 아니라 시스템을 굴려 효율을 증명하면 된다. 그런데 애초에 그럴 기회를 주지 않으므로 문제가 된다. 유럽처럼 나라가 잘게 쪼개져야 자유가 흥하는 이유다. 실험이 많기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권위주의보다 경제성장률이 높다는 사실을 증명하면 된다. 흥할 자유만 흥한다. 후진국은 어설픈 자유놀음 때문에 끝없는 내전을 벌이고 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유는 일정한 방향이 있는 것이다. 자신이 설계한 게임의 주최측이 되어야 진정한 자유가 주어진다.



    구조론과 자유론


    모든 정당은 궁극적으로 자유당이다. 다양한 이념은 자유에 대한 해석의 차이다. 이는 생산력의 변화 때문이다. 새로운 생산수단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묵은 자유와 새로운 자유의 싸움이다. 누가 이길까? 새 신발이 낡은 신발을 이긴다. 그런데 새 신발은 발이 아프다.


    적응기간이 필요한 것이다. 적응되지 않은 새것과 익숙한 낡은 것의 싸움이다. 일차전은 무조건 새것이 이긴다. 새것은 신무기를 쓰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낡은 것이 이긴다. 새것이 약점을 간파당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새것이 이긴다. 새것이 적응했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결국 진보의 승리로 정리된다. 역사는 진보와 보수의 2 대 1 승부를 반복한다. 보수는 진보를 단련시키는 장치다. 조연은 주연을 빛나게 하고 빌런은 히어로를 위해 봉사한다. 보수는 진보를 위해 존재한다. 묵은 것의 버티기가 새것의 정착을 돕는다.


    자유는 세 가지가 있다. 주최측의 자유, 사회적 자유, 개인적 자유다. 진보는 순서대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의 자유를 긍정하면서 다른 자유를 부정하면 안 된다. 새로운 문명의 이기가 등장하면 주최측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와 개인적 자유가 차례대로 나타난다.


    인터넷이 등장하면 인터넷의 주최측인 네티즌의 자유와 토론사이트 안에서 일어나는 표현의 자유와 보다 개인화된 블로거의 자유가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점차 개인화된다. 유명 논객이 장악하는 토론사이트가 망하고 개인의 페북과 블로그로 대체되는 경향이다.


    논객시장이 죽고 페북과 블로그와 트위터로 흩어진다. 보수는 교묘한 말장난을 한다. 자유를 방해할 의도로 자유라는 표현을 쓴다. 기득권은 진입장벽을 만들어 놓고 신규진입을 봉쇄하는 반자유 행동을 자유라고 표현한다. 이는 경제에서 보통 지대의 상승으로 나타난다.


    지대가 오르고 기득권의 텃세가 강해지면 위그노들은 북쪽으로 옮겨간다. 유럽이 북쪽이 잘 살고 남쪽이 가난한 이유다. 기득권 세력이 자유의 이름으로 지대를 올려서 신규로 진입하는 부르주아의 자유를 방해한다. 새로 생성된 자유는 영국으로 튀려고 칼레에 모여 있다.


    도버해협을 못 건너고 결국 만만한 네덜란드로 도망친다. 낡은 생산성이 새로운 생산성과의 경쟁에 밀리면 텃세를 부리는 지대인상 수법을 쓴다. 그것을 자유로 미화하면 안 된다. 장사로 경쟁에 밀리면 땅을 선점하는 수법을 쓴다. 구도심 지대가 오르면 벤처는 판교로 튄다.


    우리는 열린 정치로 닫힌 정치에 대항한다. 기득권의 억압을 반대하고 주최측의 자유에서 사회적 자유로 개인적 자유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절대적 자유와 상대적 자유와 책임을 추궁당하는 자유가 있다. 기득권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고 일단계에 머무르려고 한다.


    토지를 장악한 건국공신들이 다 해먹는다. 조선 초의 훈구공신이다. 귀족은 사대부를 억압하고 양반은 농민을 억압한다. 선점하고 진입장벽을 만들어 신규진입을 봉쇄하는 것이 닫힌정치다. 노무현의 열린우리당과 열린민주당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대중의 정치 참여다.


    새로운 권력을 조직하여 시장에 공급하려는 것이다. 본질은 SNS로 의사결정이 쉬워진 데 따른 정치시장과 담론시장의 생산력 증대다. 미디어 권력과 지식권력이 이에 대항하여 반동을 저지른다. 우리는 신규권력으로 기득권력에 대항한다. 교회권력, 가부장권력에 맞선다.


    재벌권력, 엘리트권력, 지식권력과 싸워야 한다. 적들은 공통적으로 지대인상, 텃세부리기, 진입장벽 높이기 기술을 쓴다. 우리는 IT의 정보권력으로 굴뚝시대 산업권력에 맞선다. SNS 권력으로 조중동한경오 미디어 권력에 대항한다. 우리는 링 위의 선수가 아니어야 한다.


    우리는 우파가 아니고 좌파가 아니며 중도파가 아니고 제 3의 길이 아니며 게임의 주최측이다. 주최측은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판을 관리한다. 파이를 키우는 것이다. 단 진보가 이겨야 판이 유지된다. 보수가 이기면 정치혐오와 무관심이 판을 치게 된다.


    51 대 49로 진보가 이겨야 양의 피드백이 유지되고 보수가 이기면 음의 피드백이 일어나서 점차 열화되고 퇴행한 끝에 문명은 멸망한다. 우리는 국가라는 대상을 개혁하는게 아니라 국민이라는 주체를 건설한다. 개혁은 주체의 건설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가 강해지는게 답이다.


    더 판을 잘 관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 많은 선수를 링 위에 올리는 것이다. 더 많은 리그전과 토너먼트를 개최하는 것이다. 더 많은 흥행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길 말이 이겨야 마사회가 돈을 번다. 한국 마사회는 협잡해서 똥말이 이기므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권력은 인간과 환경과의 게임에서 인간이 환경을 부단히 이겨가는 것이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인간이 변해야 한다. 인간이 환경보다 더 똑똑해져야 한다. 인간이 똑똑해지려면 공부를 해야 하고 인간을 공부하게 만들려면 긴장을 조성해야 한다. 팽팽한 승부라야 한다.


    한쪽이 압도하면 긴장이 풀린다. 인간이 망가지고 주체가 무너진다. 인간을 깨어있게 하고 결집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차가 좋아지면 운전실력도 함께 늘어야 한다. 문재인은 좋은 자동차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들은 좋은 운전자가 아니다. 그들은 운전실력이 없다.


    우리는 자유를 추구하며 그 자유는 이기는 자유다. 번영하는 자유다. 흥하는 자유다. 일을 우는 자유다. 이기는 게임을 선택하고 지는 게임을 회피해야 한다. 장기전을 추구하고 전면전을 추구해야 한다. 에너지가 있는 머리 좋은 사람과 젊은 사람이 장기전을 잘한다.


    머리가 나쁘거나 나이가 많다면 단기전을 하는 것이 맞다. 장기전을 하면 양의 되먹임이 발생해서 무조건 진보가 이기도록 축구장이 그쪽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미국은 무조건 민주당이 이기도록 판이 짜여져서 백인들이 대선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화가 난 것이다.


    흑인과 히스패닉이 아기를 많이 낳으면 방법이 없다. 남북전쟁 때도 같았다. 공화당을 이길 방법이 없게 되자 전쟁을 선택했다. 누구도 예측이 불가능한 도박을 해야 머리가 나쁜 사람에게 기회가 있다. 다음 단계가 예측되면 당연히 머리 좋은 사람이 무조건 먹는 판이 된다.


    도박을 한 번 이기면 거기서 멈춰야 하는데 두 번 하다가 망하는게 이명박 현상이다. 단기전에 매몰되므로 리스크를 관리하지 않는다. 구조론의 열린사상은 51 대 49로 아슬아슬하게 진보가 이기도록 판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계속 신인선수를 등판시켜야 한다.


    신인은 한 번씩은 지기 때문이다. 첫판을 이기고, 두 번째 판을 지고, 세 번째 판을 이긴다. 첫판은 신무기로 이기고, 두 번째는 전술이 간파되어 지고, 세 번째는 대비책을 세워서 이긴다. 두 번째 판을 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세 번째 판이 자신 있기 때문에 계속 싸우는 것이다.


    더 많은 게임판을 벌여야 한다. 정치권력 외에, 지식권력 외에, 재벌권력 외에 다양한 권력을 지속적으로 데뷔시켜야 한다. 낡은 권력에는 패널티를 주고 젊은 권력에는 가산점을 줘야 한다. 우리는 공정한 관리자가 아니어야 한다. 공정한 관리를 하면 기득권이 반칙을 한다.


    기득권은 환경을 이용할 수 있지만 신인은 환경을 이용할 수 없다. 공정한 것은 불공정하다. 진보가 51 대 49로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관리만이 진정으로 공정한 관리다. 단기적인 패배를 감수하고 장기적인 승리를 끌어내는 전략적인 판의 관리가 올바른 관리다.


    왜냐하면 이 자유주의라는 게임의 목적은 머리가 좋고 에너지가 있고 젊은 사람을 선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노인이 계속 이기면 샅바씨름 하다가 망한 민속씨름이 된다. 씨름협회가 판을 잘못 관리했다. 룰을 잘못 정해서 거구의 씨름꾼이 밀어치기로 일관해서 씨름이 망했다.


    열린사상은 승리보다 흥행이 중요하다. 승리하면 그 승리에 의해 패배하게 되고 패배하면 그 패배에 의해 승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규칙은 진보만 적용된다. 보수는 패배에서 배우지 않는다. 보수가 지면 용병을 고용한다. 안철수를 꼬셔서 보수후보로 출마시킨다.


    정리하자. 자유는 세 가지가 있다. 최종보스의 자유와 중간층의 자유와 막내의 자유다. 보수는 보스의 기득권만 인정하고 다른 자유를 방해한다. 진보는 중간계급의 리버럴한 자유를 주장한다. 최근의 성소수자, 페미니즘, 장애인 보호 등의 담론은 막내의 자유에 해당한다.


    이러한 전개는 생산성의 증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부장만 취업하느냐 부부가 맞벌이를 하느냐다. 진보는 자유의 저변을 넓혀가는 것이다. 자유의 독점이 아니라 역동적인 균형이라야 한다. 그래야 생산성이 증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선진국일수록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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