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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159 vote 0 2020.10.12 (19:06:21)



    노무현주의 요점정리


    인간은 빵보다 권력을 원한다.


    국가는 권력을 생산하고 공급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빵과 권력의 생산력 변화다.


    산업의 생산력과 지식의 생산력이 다 같이 중요하다.


    권력은 상하 간의 수직권력과 동료와의 수평권력이 있다.


    수직권력을 생산하는 방법은 내부에 많은 칸막이를 치는 것이다.


    수평권력을 생산하는 방법은 외부에 큰 싸움판을 벌이고 대중을 집단적 의사결정에 동원하는 것이다.


    내부를 쥐어짜는 수직권력이냐 외부에 대항하는 수평권력이냐로 집단의 이념적 방향성이 결정된다.  


    움직이는 물체가 외력의 작용을 받을 때 부분이 전체를 결정하므로 내부가 평등해지는 원리가 집단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진보이념의 작동원리다. 집단을 동적상태에 두고 외력의 작용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진보는 집단을 통제할 수 있다. 


    봉건사회는 내부에 다양한 칸막이를 쳐놓고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정한 다음 칸막이마다 장을 임명하여 각자 자기 구역에서 마음껏 털어먹게 하는 방법으로 권력을 생산한다.


    내부에 다양한 칸막이를 만들어 두면 외력의 작용이 칸막이에서 멈추므로 집단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지배집단은 차별을 유지할 수 있다.


    칸막이마다 존재하는 장들이 수평적으로 연결하여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하고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방해한다. 칸막이들 중의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칸막이도 연쇄적으로 무너지기 때문이다.


    봉건 기득권 카르텔에는 지식권력, 노조권력, 문화권력, 시민단체 권력을 누리는 좌파와 한경오도 포함된다.


    칸막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개입하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 야꾸자도 일반인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전제로 묵인한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타협하거나 중재로 얼버무리며 이를 다양성의 존중이라고 변명한다.


    탈근대 사상은 문화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봉건악습을 옹호한다. 아랍의 명예살인, 인도의 불가촉천민, 한국의 개고기 문제도 국경이라는 칸막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정당화된다. 외국에 가서 그 나라의 개를 잡아먹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이다.


    중국이 내정간섭 운운하며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범죄를 정당화하는 것이 대표적인 봉건사상이다. 인권에는 국경이 없다.


    봉건 지배세력은 사회에 더 많은 칸막이를 만들고 더 많은 장을 임명하고 더 많은 지배자를 생산하며 그 지배자들이 수평적으로 연결하여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하는 방법으로 개혁에 저항한다.


    가정의 가부장부터 초등학교의 반장과 부반장, 동창회장, 해병전우회장, 군대 내무반의 병장, 지역의 향우회장, 가문의 종친회장, 마을의 부녀회장, 청년회장, 노인회장과 각종 단체와 위원회를 설치하여 장의 숫자를 늘리고 그들에게 특권을 주는 방법으로 국가를 지배하는 기술이 척결되어야 할 봉건주의다.


    초등학교 반장부터 내무반의 병장까지 다 없애야 한다. 장에게 특권을 주고 내부를 줄 세우며 구성원들을 경쟁시키는 악습을 없애야 한다. 군대라면 다른 소대나 중대와 경쟁시키고 지방이라면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식이다.


    진중권, 서민 부류의 비뚤어진 우월주의 엘리트들은 도처에 칸막이를 쳐서 닫힌사회를 만들고 지식계급이 의사결정권을 독점하려는 권력중독자들이다.


    지식인이든 권력자든 자기네가 의사결정권을 독잠하며 대중에게 베풀고 시혜하려는 자가 국민의 적이다.


    독재자의 실용주의적 결정보다는 대중이 참여하는 명분 있는 결정이어야 한다. 하나의 결정이 다른 결정에 여파가 미치기 때문이다. 대중이 참여하는 과정에서 훈련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평등한 집단 내부에서 팀원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수평권력이다.


    움직이는 집단이 외력과 마주칠 때 극도로 민감해진다. 그 상황에서 부분에서의 작은 변화가 곧바로 집단 전체에 파급되므로 내부는 평등해진다. 전쟁에 죽는 것은 귀족이나 농노나 마찬가지고 전염병에 죽는 것은 양반이나 상놈이나 마찬가지다.


    대중의 참여구조를 만드는 것이 의리다.


    권력자의 선의에 의한 결정보다 대중과의 의리에 의한 결정이 중요하다.


    대중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는 비뚤어진 시선을 들키는 자가 민중의 적이다.


    주는 것이 권력이다.


    무언가 베풀어 주려고 하는 태도는 대중을 자신과 분리된 타자로 보고 대중을 자기편이 아닌 남으로 보는 시선을 들키는 짓이다.


    닫힌사회는 종적구조의 권력서열을 통해 사회를 이끌어 가고 열린사회는 수직권력을 수평권력으로 대체한다.


    외력의 작용에 맞서 커다란 전쟁을 벌이고 커다란 세력을 이루면 그 전쟁에 동원된 각자에게 임무가 부여되어 내부에서 상호작용이 활발해지고 거기서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것이 수평권력이다.


    수직권력은 지도자 개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며 수평권력은 구성원들 간의 상호작용에 따른 공론을 통해 결정된다.


    공론을 해치는 독선적인 행동을 하는 자는 설사 바른 판단을 한다고 해도 대중의 의사결정능력 발전을 해치는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게 된다.


    대중은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이라는 검증과정을 거치며 단련된다. 바른 판단보다 이러한 검증단계를 밟으면서 대중이 경험치를 쌓게 하는 명분 있는 결정이 중요하다.


    대중이 지식인에게 의존하면 의사결정능력을 상실하므로 뒤로 리스크가 쌓인다. 중국인이 청나라의 강희제와 같은 선한 황제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시진핑에 기대하며 스스로는 의사결정에 나서지 않으려는 태도가 그러하다.


    노무현의 열린사회는 전통적인 좌파와 우파의 구분을 넘어선 것이다.


    노무현은 전통적인 관점의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고 중도파도 아니고 신무기를 장착하고 새로운 전쟁을 벌이는 점에서 과격한 혁신파다.


    노무현은 정답을 찍어주는게 아니라 대중을 격동시켜 대중의 잠재한 에너지를 끌어내는 방법으로 대중으로 하여금 의사결정의 주체로 나서게 했다.


    노무현주의는 ‘열린’사상과 ‘참여’사상이다. 


    노무현의 열린사상은 좌파와 우파의 이념적 배타성을 극복하고 남북한과 한중일의 국경을 허물고 세계의 의사결정 중심을 지향하는 보편주의다. 


    노무현의 참여사상은 지배자가 온정주의적 태도로 약자나 소수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격동시켜 대중이 스스로 개혁의 주체로 나서게 하는 것이다.


    노무현주의는 약자나 소수자나 여성의 편에 서서 강자나 다수자나 남성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 단위의 큰 싸움판을 열고 SNS라는 신무기를 보급하여 함께 싸울 전사를 양성하는 것이다. 그 전사그룹에는 약자든 소수자든 여성이든 부자든 강자든 모두 참여할 수 있다.


    지식을 가진 자가 의사결정권을 독점하면서 약자에게 시혜를 베풀겠다는 전통적인 좌파와 약자를 인류문명 단위의 전쟁에 전사로 동원하는 방법으로 스스로 강해지게 하겠다는 노무현주의가 충돌하고 있다.


    노무현주의가 전통적인 좌파와 우파를 모두 포괄하는 성격 때문에 퇴행적인 좌파와 보수꼴통이 양쪽에서 노무현세력을 협공하고 있다.


    노무현주의는 의사결정 속도가 빠른 한국인이 SNS를 선점하여 새로운 의사결정 모델을 선보이는 방법으로 세계사를 주도하겠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해외파병을 찬성하고 산업화에 적극적인 점에서 개방적인 태도를 보인다.


    섬처럼 고립된 곳에서는 수평권력이 작동할 수 없으므로 노무현주의는 세계를 바라보고 열린사회를 지향한다. 반대로 한반도가 북한에 막혀 섬처럼 고립된 현실을 악용하여 가둬놓고 조지려는 속셈으로 비뚤어진 우월주의 지식인들이 맹목적인 반일, 반미, 반세계화를 외치며 고립주의 퇴행을 저지르고 있다.


    대통령 위에 의회가 있고, 집정관 위에 원로원이 있고, 임금 외에도 조정이 있듯이 회사든 가정이든 동아리든 집단에는 여러 사람이 공론을 이루는 수평적 구조의 회의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열린사회의 작동원리다.


    역사의 진정한 변화는 어떤 구체적인 정책이 아니라 의사결정 주체의 변화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소수자와 다수자, 약자와 강자, 여성과 남성, 노동자와 사용자가 개별적으로 일대일 관계를 이루어서는 정의가 없고 소수자와 약자와 여성과 노동자가 힘을 합쳐 커다란 세력을 이루어야만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사상이 노무현의 보편주의다.


    내가 약자니까 혜택을 받아야겠다는 소승적 태도의 특수주의를 버리고 내가 약자니까 큰 세력에 가담해야겠다는 대승적 태도의 보편주의로 갈아타야 한다. 


    약자가 혜택에 집착하면 길들어서 계속 그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노숙자가 밥을 얻어먹으면 계속 노숙하게 된다. 


    진정한 정의는 집단이 부단히 움직이는 동적상태, 팽팽한 긴장상태, 매일 새로워지는 변화상태, 적과의 대결상태, 극도로 예민한 상태, 내부적으로 긴밀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만 달성되며 평화가 오고 군대가 흩어지면 차별이 일어난다.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천칭의 평형상태가 정의다. 그러나 정지한 것은 외력의 작용에 취약하므로 진정한 평형을 이룰 수 없고 팽이가 빠르게 회전할 때 외력의 작용을 흡수하여 균형을 유지하듯이 부단한 진보와 혁신과 새로움을 통해 집단 내부의 모든 자원이 동원된 상태에서만 진정한 평형과 정의가 달성된다.


    장애자와 소수자와 여성과 노인과 모든 약자를 동원할 수 있는 인류문명 단위의 큰 싸움판을 일으켜야만 진정한 정의는 이루어진다.


    기계적인 정의, 산술적인 평형은 절대로 없으며 아와 피아의 대결에 의한 게임 속에서의 부단한 맞대응에 의해 상대적인 정의에 도달할 뿐이다. 강자의 횡포에 전방위적으로 맞대응을 할 수 있는 유연한 사회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전쟁에서 예비대를 신속하게 투입하여 방어하듯이 적들의 도발에 전략 예비를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실시간 동원구조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좌절하는 것은 저울의 평형이 한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가 수작을 부리는고 있는데 이쪽에서 맞대응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속수무책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인간은 절망한다. 어떻게든 맞대응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회의 칸막이를 허물어야 한다. 


    약자를 공격하는 자의 본심은 집단 내부에 권력서열을 정하는데 있기 때문에 약자를 차별하지 말라는 지식인의 계몽은 먹히지 않는다.


    흑인을 공격하는 백인은 의외로 흑인과 개인적으로 친하거나 본심에서는 흑인을 미워하지 않으며 단지 집단 내부에 권력질서를 만드는 수단으로 피부색을 이용하는 것이므로 지식인의 계몽은 무시하거나 혹은 다른 차별대상을 찾아내고야 만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집단 내부에 어떤 형태로든 권력질서가 작동해야 마음이 편안해지므로 수직적 권력질서를 따르거나 혹은 수평적 권력질서를 만들어내고 만다.


    수직적 권력질서는 선배와 후배를 나누는 식으로 미리 매뉴얼을 정해놓는 것이며 수평적 권력질서는 즉시 예비대를 투입하는 것이다.


    적들이 노빠타령, 문빠타령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실시간 투입이 가능한 전략 예비를 여유 있게 확보해놓고 있어서 기득권 카르텔의 협잡이 여론전에 먹히지 않으므로 화가 났기 때문이다. 


    강자가 약자를 이기는게 맞는데 약자가 전략 예비를 신속하게 동원하여 맞대응하므로 뭔가 불공평해졌다고 여긴다. 적들이 화가 난 이유다.


    집단 내부에 차별대상이 있으면 수직적 권력질서이고 집단 외부에 투쟁대상이 있으면 수평적 권력질서다.


    사회에 많은 칸막이를 만들고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규칙을 정하는 봉건주의적 태도가 특수주의라면 칸막이를 허물고 모두가 평등한 하나가 되어 함께 외부의 적에 맞서는 것이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노무현의 보편주의다.


    차별은 목적이 아니라 집단 내부에 권력질서를 만드는 수단이므로 인간은 차별하지 말라는 지식인의 계몽을 무시한다. 다른 형태의 권력질서를 대체재로 제시하는 방법으로만 차별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인간은 밥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권력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권력은 사건의 현재진행이라는 동적상태에 의해 집단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실 그 자체다.


    사건이 없고 임무가 없고 역할이 없어서 집단과 겉돌게 될 때 인간은 죽는다.


    권력의지는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집단과 부단히 상호작용하는 동적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집단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소인배는 어그로 행동을 한다. 집단의 어떤 약점을 포착하면 그 지점을 공격하여 그 반향이 집단 전체에 전달하게 한다. 그럴 때 인간은 쾌감을 느낀다. 일베가 어그로를 끄는 심리다.


    설사 사형수가 되어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집단이 자신을 주목하게 하는데 성공하기만 하면 영웅이 된듯한 기분이 든다. 어떻게든 TV에 나오고 뉴스에 이름이 오르기만 하면 소인배들은 만족한다.


    소인배들은 집단의 잠복한 리스크를 발견하면 자신을 희생시켜서라도 집단의 약점을 보고하고야 만다. 범죄자의 심리다. 자신은 감옥에 가지만 사회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으므로 사회발전에 기여한 것이다.


    사회는 소인배가 영웅심리에 의해 저지르는 범죄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발전한다.  


    권력은 인간을 행동하게 하며 인간은 행동에 맞추어 인식을 정립한다. 이것이 인지부조화 행동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권력을 장악하거나 혹은 권력구조 안에서 호흡하려고 하며 이러한 행동을 전제로 인식을 조달한다.


    권력이 먼저고 행동이 다음이며 인식은 그다음이다. 먼저 행동한 후에 그 행동을 설명할 목적으로 인식을 적당히 가져다 붙이는 것이다.


    권력은 집단에서 유도되고 행동은 개인에게서 행해지며 인식은 그 집단적 권력과 개인적 행동의 관계를 주변에 전파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를 촉발하는 집단적 권력은 사회의 유행, 트렌드, 흐름, 분위기, 평판, 명성, 유명세, 기세, 인기 등의 형태로 존재한다. 인간은 권력을 공기처럼 호흡한다.


    일진들이 쓰는 ‘잘 나간다’는 표현은 인간의 행동을 조종하는 집단 내부의 암묵적인 권력질서를 의미한다. 이는 동물의 서열경쟁과 같다.


    인간은 집단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노인들은 이런저런 말을 하지만 사실은 정보와 권력의 흐름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것이다. 


    노인들이 태극기와 성조기, 일장기에 이스라엘 깃발까지 흔들어대는 이유는 가부장적 권력서열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겉으로 말하는 것과 실제로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노인들은 북한이나 박근혜에 관심 없다. 단지 그것을 이용할 뿐이다. 그들의 본심은 매일 내게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최신뉴스를 브리핑하라는 것이다. 위원회 따위를 만들어 감투를 하나씩 씌워주고 헛벼슬 주면 좋아한다.


    인종차별 하는 사람은 피부색에 관심 없고 성소수자 공격하는 사람은 성적 지향에 관심 없다. 단지 눈에 띄는 차별의 표지를 이용하여 집단과 겉돌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에 다가서려는 것이다.


    사회의 진보는 산업 생산력과 지식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집단 내부에 상호작용이 증대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더 많은 인원을 의사결정에 동원하는 구조를 만들어낸 집단이 게임에서 승리한다. 패배한 집단이 소멸되는 형태로 진보는 일어난다.


    추력을 잃은 배는 작은 파도에 뒤집히고, 날지 못하는 비행기는 지상으로 추락한다. 집단과 팽팽한 관계가 유지될 때만 사회는 안정된다. 사회는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관계를 조여야 한다. 건수가 없으면 억지유행이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아프리카가 가난한 이유는 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권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생산성이 낮다. 권력이 부족하면 집단적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 독재자의 명목권력은 있어도 문제해결의 실질권력은 없다.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유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 굴렁쇠 물통 따위를 줘봤자 도움이 안 된다. 아프리카에는 권력이 필요하다. 독재자의 명목권력 말고 실제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부족주의라는 칸막이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사회는 혈연, 지연, 학연과 의사, 검사, 목사의 기득권 카르텔이 봉건사회의 부족주의를 대체한다. 인간은 외부에 대칭을 이루고 누군가를 배척하는 형태로만 의사결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구조를 피할 수 없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대칭을 만들기 때문에 큰 대칭을 이루어 작은 대칭을 용해하는 수밖에 없다. 문명의 진보로 내부의 칸막이를 타격하는 게임의 진행과정에서만 문제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싸움을 멈추면 즉시 질병은 재발된다.


    동양문명이 서구문명을 이기는 큰 싸움판을 벌이는 방법으로만 남북중일은 화해할 수 있다. 문명차원의 도전과 응전이 없으면 한일간, 남북한 갈등은 유지된다. 혐한이든 반일이든 반북이든 그게 진짜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부를 적대하지 않으면 집단 내부에서 의사결정이 불가능하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고유한 에너지를 가진 존재다. 동원하고 임무를 주어 에너지를 외부로 분출하도록 내부의 의사결정구조를 정교하게 디자인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용해시킬 수 있을 뿐 지식인의 계몽으로는 어림없다.


    인간이 나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지에 따른 틀린 생각이나 혹은 부도덕에 의한 나쁜 의도 때문이 아니라 고유한 에너지를 가진 인간은 언제나 행동을 앞세우는 동적상태에 머물러야 하며 집단과의 연결이 끊어져서 미션을 받지 못할 때 나쁜 행동이 유일하게 자신을 동적상태에 머무르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선악이라는 것은 없으며 자신을 동적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집단적으로 합의된 방법과 합의되지 않은 방법이 있을 뿐이다. 집단과 합의하지 않고 자신을 동적 상태에 두려는 행동이 범죄로 나타난다.


    인간은 에너지를 가진 행동하는 동물이며 일단 행동을 저지르고 보면 이미 나쁜 흐름에 빠져 있고 거기서는 자력으로 탈출할 수 없다. 반드시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좋은 미션을 주는 방법으로만 나쁜 흐름에서 인간을 구조할 수 있다.


    늑대에 쫓기는 사슴은 빠른 속도 때문에 방향전환을 할 수 없다. 늑대무리는 이를 이용하여 한 마리가 지름길로 가서 잠복하고 몰이사냥을 한다. 인간은 움직이는 상태로는 의사결정이 불가능하다. 반드시 멈춰 세워야 하며 그러려면 외부에서 맞대응의 형태로 개입해야 한다.


    노무현은 전통적인 좌파, 우파 개념으로 재단할 수 없는 초월자다. 그는 열린사상과 참여사상으로 대중을 전쟁에 동원한다. 적은 바깥에 있다. 노무현의 가상적은 인류의 야만성 그 자체다. 열린주의로 고립주의를 치고, 참여주의로 엘리트 우월주의를 치고, 문명으로 야만을 치고, 보편으로 특수를 치고, 대승으로 소승을 치고, 민중의 힘으로 기득권을 친다. 싸움이 계속 연결되는 동안은 부분에서의 고통이 용해된다.


    노무현주의는 엘리트주의다. 소수 엘리트의 지배가 아니라 반대로 다수 대중을 의사결정의 주체로 양성하는 것이다. 대중은 전쟁에의 참여를 통해 심리적인 신분상승을 이루어낸다. 결국 대한민국이 인류 전체의 엘리트가 된다.


    서구가 기사도를 강조하거나, 영국이 신사도를 강조하거나, 프랑스가 문화대국을 선언하거나, 유태인이 선민사상을 내세우거나, 일본이 짝퉁으로 무사도를 만들어내는 것은 자국민을 인류집단의 엘리트로 조직하려는 의도에서다. 거대한 집단적 신분상승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내부에서의 산발적인 갈등이 용해된다. 신분상승 운동이 멈추면 즉시 내부갈등이 폭발한다. 오바마가 집권하며 백인우월주의가 무너지자 중서부의 백인 빈민들이 궐기하여 트럼프를 옹립한 사건이 그 예다.


    인류를 부단히 움직이는 상태, 동이라는 에너지의 연결상태에 가두지 않으면 외부를 향하고 있던 에너지의 방향이 내부로 바뀌어 도처에서 자기파괴적인 퇴행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인간은 남을 공격하지 못하면 자기를 공격하게 된다.


    인간은 고유한 에너지를 품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운명적으로 모순된 존재이며 문제의 완전해결은 절대 없고 오로지 사회의 의사결정 구조를 정밀하게 디자인하여 그 폐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내적 모순이야말로 진보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내부갈등을 외부로 돌리는 수법을 쓴다.


    팽이는 돌아야 안정되고, 비행기는 날아야 안정되고, 인간은 행동해야 안정된다. 무모한 행동이 자기파괴를 일으키므로 지도자가 사회를 크게 한 방향으로 이끌어 모순을 외부로 배출해야 한다. 외부의 가상적을 상대로 큰 싸움판을 일으켜야 한다. 그것은 문명과 야만의 부단한 전쟁이다.


    복지, 취업, 성장률, 환경, 집값 따위 잡다한 분야에서 작은 실적을 얻어 명성을 얻고 생색을 내려는 진보 일각의 소아병적인 실적주의가 집단 내부에 혼선을 일으켜 문명단위의 커다란 항해에 나서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다.


    열린사회의 적들은 노무현을 깎아내릴 목적으로 소아병적인 실적주의에 매몰되어 노무현이 실적이 없다고 주장하다가 박정희와 김영삼의 실적을 찬양하는 오류를 저지르곤 한다. 글자 아는 지식인이라면 방향의 제시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물가안정 따위는 실무자의 것이다. 지도자의 역할은 집단의 방향제시다. 노무현은 촛불시민을 무장시켜 한국의 깨시민을 인류사에 데뷔시켰다. 서구의 역사에 없는 다른 형태의 민주주의를 선보였다. 아시아의 인류문명 선도 가능성을 증명한 셈이다.


[레벨:4]고향은

2020.10.13 (18:55:08)

"국가는 권력을 생산하고 공급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빵과 권력의 생산력 변화다.

산업의 생산력과 지식의 생산력이 다 같이 중요하다."


정신의 주권은 온전한 인권의 회복에서 비롯되고,

몸뚱이의 주권은 빵의 원활한 공급에 의한
자발성으로부터 나온다
[레벨:8]펄잼

2020.10.18 (03:47:49)

베이스 그라운드의 정확한 인식이 fair play이고
상식이죠.

노무현주의는 엘리트주의다. 소수 엘리트의 지배가 아니라 반대로 다수 대중을 의사결정의 주체로 양성하는 것이다. 대중은 전쟁에의 참여를 통해 심리적인 신분상승을 이루어낸다. 결국 대한민국이 인류 전체의 엘리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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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8 분노의 방시혁, 꼰대질 진중권서민 3 김동렬 2020-10-19 4655
4997 인간은 원래 보수다 김동렬 2020-10-18 3798
4996 노무현의 혁명 3 김동렬 2020-10-18 4033
4995 박진성 황병승의 슬픔 image 1 김동렬 2020-10-15 4480
4994 백래시와 구조손실 1 김동렬 2020-10-15 5312
4993 평등권력과 차별권력 김동렬 2020-10-14 2983
4992 수평권력과 수직권력 1 김동렬 2020-10-14 5260
» 노무현주의 요점정리 2 김동렬 2020-10-12 4159
4990 낙태죄의 문제 김동렬 2020-10-12 5670
4989 빵인가 권력인가? 1 김동렬 2020-10-11 3957
4988 갈대일까 억새일까? 김동렬 2020-10-10 37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