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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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26 vote 1 2020.08.07 (13:45:02)



    노무현주의 요점정리


    인간은 빵보다 권력을 원한다.


    국가는 권력을 생산하고 공급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빵과 권력의 생산력 변화다.


    산업의 생산력과 지식의 생산력이 다 같이 중요하다.


    권력은 상하간의 수직권력과 동료와의 수평권력이 있다.


    수직권력을 생산하는 방법은 내부에 많은 칸막이를 치는 것이다.


    수평권력을 생산하는 방법은 외부에 큰 싸움판을 벌이고 대중을 집단적 의사결정에 동원하는 것이다.


    내부를 쥐어짜는 수직권력이냐 외부에 대항하는 수평권력이냐로 집단의 이념적 방향성이 결정된다.  


    움직이는 물체가 외력의 작용을 받을 때 부분이 전체를 결정하므로 내부가 평등해지는 원리가 집단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진보이념의 작동원리다. 집단을 동적상태에 두고 외력의 작용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진보는 집단을 통제할 수 있다. 


    봉건사회는 내부에 다양한 칸막이를 쳐놓고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정한 다음 칸막이마다 장을 임명하여 각자 자기 구역에서 마음껏 털어먹게 하는 방법으로 권력을 생산한다.


    내부에 다양한 칸막이를 만들어 두면 외력의 작용이 칸막이에서 멈추므로 집단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지배집단은 차별을 유지할 수 있다.


    칸막이마다 존재하는 장들이 수평적으로 연결하여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하고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방해한다. 칸막이들 중에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칸막이도 연쇄적으로 무너지기 때문이다.


    봉건 기득권 카르텔에는 지식권력, 노조권력, 문화권력, 시민단체 권력을 누리는 좌파와 한경오도 포함된다.


    칸막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개입하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 야꾸자도 일반인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전제로 묵인한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타협하거나 중재로 얼버무리며 이를 다양성의 존중이라고 변명한다.


    탈근대 사상은 문화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봉건악습을 옹호한다. 아랍의 명예살인, 인도의 불가촉천민, 한국의 개고기 문제도 국경이라는 칸막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정당화된다. 외국에 가서 그 나라의 개를 잡아먹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이다.


    중국이 내정간섭 운운하며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범죄를 정당화 하는 것이 대표적인 봉건사상이다. 인권에는 국경이 없다.


    봉건 지배세력은 사회에 더 많은 칸막이를 만들고 더 많은 장을 임명하고 더 많은 지배자를 생산하며 그 지배자들이 수평적으로 연결하여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하는 방법으로 개혁에 저항한다.


    가정의 가부장부터 초등학교의 반장과 부반장, 동창회장, 해병전우회장, 군대 내무반의 병장, 지역의 향우회장, 가문의 종친회장, 마을의 부녀회장, 청년회장, 노인회장과 각종 단체와 위원회를 설치하여 장의 숫자를 늘리고 그들에게 특권을 주는 방법으로 국가를 지배하는 기술이 척결되어야 할 봉건주의다.


    초등학교 반장부터 내무반의 병장까지 다 없애야 한다. 장에게 특권을 주고 내부를 줄 세우며 구성원들을 경쟁시키는 악습을 없애야 한다. 군대라면 다른 소대나 중대와 경쟁시키고 지방이라면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식이다.


    진중권, 서민부류의 비뚤어진 우월주의 엘리트들은 도처에 칸막이를 쳐서 닫힌사회를 만들고 지식계급이 의사결정권을 독점하려는 권력중독자들이다.


    지식인이든 권력자든 자기네가 의사결정권을 독잠하며 대중에게 베풀고 시혜하려는 자가 국민의 적이다.


    독재자의 실용주의적 결정보다는 대중이 참여하는 명분있는 결정이어야 한다. 하나의 결정이 다른 결정에 여파가 미치기 때문이다. 대중이 참여하는 과정에서 훈련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평등한 집단 내부에서 팀원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수평권력이다.


    움직이는 집단이 외력과 마주칠 때 극도로 민감해진다. 그 상황에서 부분에서의 작은 변화가 곧바로 집단 전체에 파급되므로 내부는 평등해진다. 전쟁에 죽는 것은 귀족이나 농노나 마찬가지고 전염병에 죽는 것은 양반이나 상놈이나 마찬가지다.


    대중의 참여구조를 만드는 것이 의리다.


    권력자의 선의에 의한 결정보다 대중과의 의리에 의한 결정이 중요하다.


    대중을 타자화 하고 대상화 하는 비뚤어진 시선을 들키는 자가 민중의 적이다.


    주는 것이 권력이다.


    무언가 베풀어 주려고 하는 태도는 대중을 자신과 분리된 타자로 보고 대중을 자기편이 아닌 남으로 보는 시선을 들키는 짓이다.


    닫힌사회는 종적구조의 권력서열을 통해 사회를 이끌어 가고 열린사회는 수직권력을 수평권력으로 대체한다.


    외력의 작용에 맞서 커다란 전쟁을 벌이고 커다란 세력을 이루면 그 전쟁에 동원된 각자에게 임무가 부여되어 내부에서 상호작용이 활발해지고 거기서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것이 수평권력이다.


    수직권력은 지도자 개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며 수평권력은 구성원들 간의 상호작용에 따른 공론을 통해 결정된다.


    공론을 해치는 독선적인 행동을 하는 자는 설사 바른 판단을 한다고 해도 대중의 의사결정능력 발전을 해치는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게 된다.


    대중은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이라는 검증과정을 거치며 단련된다. 바른 판단보다 이러한 검증단계를 밟으면서 대중이 경험치를 쌓게 하는 명분있는 결정이 중요하다.


    대중이 지식인에게 의존하면 의사결정능력을 상실하므로 뒤로 리스크가 쌓인다. 중국인이 청나라의 강희제와 같은 선한 황제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시진핑에 기대하며 스스로는 의사결정에 나서지 않으려는 태도가 그러하다.


    노무현의 열린사회는 전통적인 좌파와 우파의 구분을 넘어선 것이다.


    노무현은 전통적인 관점의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고 중도파도 아니고 신무기를 장착하고 새로운 전쟁을 벌이는 점에서 과격한 혁신파다.


    노무현은 정답을 찍어주는게 아니라 대중을 격동시켜 대중의 잠재한 에너지를 끌어내는 방법으로 대중으로 하여금 의사결정의 주체로 나서게 했다.


    노무현주의는 ‘열린’사상과 ‘참여’사상이다. 


    노무현의 열린사상은 좌파와 우파의 이념적 배타성을 극복하고 남북한과 한중일의 국경을 허물고 세계의 의사결정 중심을 지향하는 보편주의다. 


    노무현의 참여사상은 지배자가 온정주의적 태도로 약자나 소수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격동시켜 대중이 스스로 개혁의 주체로 나서게 하는 것이다.


    노무현주의는 약자나 소수자나 여성의 편에 서서 강자나 다수자나 남성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 단위의 큰 싸움판을 열고 SNS라는 신무기를 보급하여 함께 싸울 전사를 양성하는 것이다. 그 전사그룹에는 약자든 소수자든 여성이든 부자든 강자든 모두 참여할 수 있다.


    지식을 가진 자가 의사결정권을 독점하면서 약자에게 시혜를 베풀겠다는 전통적인 좌파와 약자를 인류문명 단위의 전쟁에 전사로 동원하는 방법으로 스스로 강해지게 하겠다는 노무현주의가 충돌하고 있다.


    노무현주의가 전통적인 좌파와 우파를 모두 포괄하는 성격 때문에 퇴행적인 좌파와 보수꼴통이 양쪽에서 노무현세력을 협공하고 있다.


    노무현주의는 의사결정 속도가 빠른 한국인이 SNS를 선점하여 새로운 의사결정 모델을 선보이는 방법으로 세계사를 주도하겠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해외파병을 찬성하고 산업화에 적극적인 점에서 개방적인 태도를 보인다.


    섬처럼 고립된 곳에서는 수평권력이 작동할 수 없으므로 노무현주의는 세계를 바라보고 열린사회를 지향한다. 반대로 한반도가 북한에 막혀 섬처럼 고립된 현실을 악용하여 가둬놓고 조지려는 속셈으로 비뚤어진 우월주의 지식인들이 맹목적인 반일, 반미, 반세계화를 외치며 고립주의 퇴행을 저지르고 있다.


    대통령 위에 의회가 있고, 집정관 위에 원로원이 있고, 임금 외에도 조정이 있듯이 회사든 가정이든 동아리든 집단에는 여러 사람이 공론을 이루는 수평적 구조의 회의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열린사회의 작동원리다.


    역사의 진정한 변화는 어떤 구체적인 정책이 아니라 의사결정 주체의 변화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소수자와 다수자, 약자와 강자, 여성과 남성, 노동자와 사용자가 개별적으로 일대일 관계를 이루어서는 정의가 없고 소수자와 약자와 여성과 노동자가 힘을 합쳐 커다란 세력을 이루어야만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사상이 노무현의 보편주의다.


    내가 약자니까 혜택을 받아야겠다는 소승적 태도의 특수주의를 버리고 내가 약자니가 큰 세력에 가담해야겠다는 대승적 태도의 보편주의로 갈아타야 한다. 


    약자가 혜택에 집착하면 길들여져서 계속 그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노숙자가 밥을 얻어먹으면 계속 노숙하게 된다. 


    진정한 정의는 집단이 부단히 움직이는 동적상태, 팽팽한 긴장상태, 매일 새로워지는 변화상태, 적과의 대결상태, 극도로 예민한 상태, 내부적으로 긴밀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만 달성되며 평화가 오고 군대가 흩어지면 차별이 일어난다.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천칭의 평형상태가 정의다. 그러나 정지한 것은 외력의 작용에 취약하므로 진정한 평형을 이룰 수 없고 팽이가 빠르게 회전할 때 외력의 작용을 흡수하여 균형을 유지하듯이 부단한 진보와 혁신과 새로움을 통해 집단 내부의 모든 자원이 동원된 상태에서만 진정한 평형과 정의가 달성된다.


    장애자와 소수자와 여성과 노인과 모든 약자를 동원할 수 있는 인류문명 단위의 큰 싸움판을 일으켜야만 진정한 정의는 이루어진다.


    기계적인 정의, 산술적인 평형은 절대로 없으며 아와 피아의 대결에 의한 게임 속에서의 부단한 맞대응에 의해 상대적인 정의에 도달할 뿐이다. 강자의 횡포에 전방위적으로 맞대응을 할 수 있는 유연한 사회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전쟁에서 예비대를 신속하게 투입하여 방어하듯이 적들의 도발에 전략 예비를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실시간 동원구조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좌절하는 것은 저울의 평형이 한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가 수작을 부리는고 있는데 이쪽에서 맞대응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강 건너 불 구경 하듯이 속수무책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인간은 절망한다. 어떻게든 맞대응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회의 칸막이를 허물어야 한다. 


    약자를 공격하는 자의 본심은 집단 내부에 권력서열을 정하는데 있기 때문에 약자를 차별하지 말라는 지식인의 계몽은 먹히지 않는다.


    흑인을 공격하는 백인은 의외로 흑인과 개인적으로 친하거나 본심에서는 흑인을 미워하지 않으며 단지 집단 내부에 권력질서를 만드는 수단으로 피부색을 이용하는 것이므로 지식인의 계몽은 무시하거나 혹은 다른 차별대상을 찾아내고야 만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집단 내부에 어떤 형태로든 권력질서가 작동해야 마음이 편안해지므로 수직적 권력질서를 따르거나 혹은 수평적 권력질서를 만들어내고 만다.


    수직적 권력질서는 선배와 후배를 나누는 식으로 미리 매뉴얼을 정해놓는 것이며 수평적 권력질서는 즉시 예비대를 투입하는 것이다.


    적들이 노빠타령, 문빠타령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실시간 투입이 가능한 전략 예비를 여유있게 확보해놓고 있어서 기득권 카르텔의 협잡이 여론전에 먹히지 않으므로 화가 났기 때문이다. 


    강자가 약자를 이기는게 맞는데 약자가 전략 예비를 신속하게 동원하여 맞대응하므로 뭔가 불공평해졌다고 여긴다. 적들이 화가 난 이유다.


    집단 내부에 차별대상이 있으면 수직적 권력질서이고 집단 외부에 투쟁대상이 있으면 수평적 권력질서다.


    사회에 많은 칸막이를 만들고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규칙을 정하는 봉건주의적 태도가 특수주의라면 칸막이를 허물고 모두가 평등한 하나가 되어 함께 외부의 적에 맞서는 것이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노무현의 보편주의다.


    차별은 목적이 아니라 집단 내부에 권력질서를 만드는 수단이므로 인간은 차별하지 말라는 지식인의 계몽을 무시한다. 다른 형태의 권력질서를 대체재로 제시하는 방법으로만 차별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인간은 밥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권력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권력은 사건의 현재진행이라는 동적상태에 의해 집단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실 그 자체다.


    사건이 없고 임무가 없고 역할이 없어서 집단과 겉돌게 될 때 인간은 죽는다.


    권력의지는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집단과 부단히 상호작용하는 동적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집단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소인배는 어그로 행동을 한다. 집단의 어떤 약점을 포착하면 그 지점을 공격하여 그 반향이 집단 전체에 전달하게 한다. 그럴 때 인간은 쾌감을 느낀다. 일베가 어그로를 끄는 심리다.


    설사 사형수가 되어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집단이 자신을 주목하게 하는데 성공하기만 하면 영웅이 된듯한 기분이 든다. 어떻게든 TV에 나오고 뉴스에 이름이 오르기만 하면 소인배들은 만족한다.


    소인배들은 집단의 잠복한 리스크를 발견하면 자신을 희생시켜서라도 집단의 약점을 보고하고야 만다. 범죄자의 심리다. 자신은 감옥에 가지만 사회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으므로 사회발전에 기여한 것이다.


    사회는 소인배가 영웅심리에 의해 저지르는 범죄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발전한다.  


    권력은 인간을 행동하게 하며 인간은 행동에 맞추어 인식을 정립한다. 이것이 인지부조화 행동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권력을 장악하거나 혹은 권력구조 안에서 호흡하려고 하며 이러한 행동을 전제로 인식을 조달한다.


    권력이 먼저고 행동이 다음이며 인식은 그 다음이다. 먼저 행동한 후에 그 행동을 설명할 목적으로 인식을 적당히 가져다 붙이는 것이다.


    권력은 집단에서 유도되고 행동은 개인에게서 행해지며 인식은 그 집단적 권력과 개인적 행동의 관계를 주변에 전파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를 촉발하는 집단적 권력은 사회의 유행, 트렌드, 흐름, 분위기, 평판, 명성, 유명세, 기세, 인기 등의 형태로 존재한다. 인간은 권력을 공기처럼 호흡한다.


    일진들이 쓰는 ‘잘 나간다’는 표현은 인간의 행동을 조종하는 집단 내부의 암묵적인 권력질서를 의미한다. 이는 동물의 서열경쟁과 같다.


    인간은 집단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노인들은 이런 저런 말을 하지만 사실은 정보와 권력의 흐름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것이다. 


    노인들이 태극기와 성조기, 일장기에 이스라엘 깃발까지 흔들어대는 이유는 가부장적 권력서열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겉으로 말하는 것과 실제로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노인들은 북한이나 박근혜에 관심없다. 단지 그것을 이용할 뿐이다. 그들의 본심은 매일 내게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최신뉴스를 브리핑하라는 것이다. 위원회 따위를 만들어 감투를 하나씩 씌워주고 헛벼슬 주면 좋아한다.


    인종차별 하는 사람은 피부색에 관심없고 성소수자 공격하는 사람은 성적 지향에 관심없다. 단지 눈에 띄는 차별의 표지를 이용하여 집단과 겉돌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에 다가서려는 것이다.


    사회의 진보는 산업 생산력과 지식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집단 내부에 상호작용이 증대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더 많은 인원을 의사결정에 동원하는 구조를 만들어낸 집단이 게임에서 승리한다. 패배한 집단이 소멸되는 형태로 진보는 일어난다.


    추력을 잃은 배는 작은 파도에 뒤집히고, 날지 못하는 비행기는 지상으로 추락한다. 집단과의 팽팽한 관계가 유지될 때만 사회는 안정된다. 사회는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관계를 조여야 한다. 건수가 없으면 억지유행이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아프리카가 가난한 이유는 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권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생산성이 낮다. 권력이 부족하면 집단적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 독재자의 명목권력은 있어도 문제해결의 실질권력은 없다. 


    그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이유는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 굴렁쇠 물통 따위를 줘봤자 도움이 안 된다. 아프리카에는 권력이 필요하다. 독재자의 명목권력 말고 실제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부족주의라는 칸막이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사회는 혈연, 지연, 학연과 의사, 검사, 목사의 기득권 카르텔이 봉건사회의 부족주의를 대체한다. 인간은 외부에 대칭을 이루고 누군가를 배척하는 형태로만 의사결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구조를 피할 수 없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대칭을 만들기 때문에 큰 대칭을 이루어 작은 대칭을 용해하는 수 밖에 없다. 문명의 진보로 내부의 칸막이를 타격하는 게임의 진행과정에서만 문제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싸움을 멈추면 즉시 질병은 재발된다.


    동양문명이 서구문명을 이기는 큰 싸움판을 벌이는 방법으로만 남북중일은 화해할 수 있다. 문명차원의 도전과 응전이 없으면 한일간, 남북한 갈등은 유지된다. 혐한이든 반일이든 반북이든 그게 진짜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부를 적대하지 않으면 집단 내부에서 의사결정이 불가능하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고유한 에너지를 가진 존재다. 동원하고 임무를 주어 에너지를 외부로 분출하도록 내부의 의사결정구조를 정교하게 디자인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용해시킬 수 있을 뿐 지식인의 계몽으로는 어림없다.


    인간이 나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지에 따른 틀린 생각이나 혹은 부도덕에 의한 나쁜 의도 때문이 아니라 고유한 에너지를 가진 인간은 언제나 행동을 앞세우는 동적상태에 머물러야 하며 집단과의 연결이 끊어져서 미션을 받지 못할 때 나쁜 행동이 유일하게 자신을 동적상태에 머무르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선악이라는 것은 없으며 자신을 동적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집단적으로 합의된 방법과 합의되지 않은 방법이 있을 뿐이다. 집단과 합의하지 않고 자신을 동적 상태에 두려는 행동이 범죄로 나타난다.


    인간은 에너지를 가진 행동하는 동물이며 일단 행동을 저지르고 보면 이미 나쁜 흐름에 빠져 있고 거기서는 자력으로 탈출할 수 없다. 반드시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좋은 미션을 주는 방법으로만 나쁜 흐름에서 인간을 구조할 수 있다.


    늑대에 쫓기는 사슴은 빠른 속도 때문에 방향전환을 할 수 없다. 늑대무리는 이를 이용하여 한 마리가 지름길로 가서 잠복하고 몰이사냥을 한다. 인간은 움직이는 상태로는 의사결정이 불가능하다. 반드시 멈춰세워야 하며 그러려면 외부에서 맞대응의 형태로 개입해야 한다.


    노무현은 전통적인 좌파, 우파 개념으로 재단할 수 없는 초월자다. 그는 열린사상과 참여사상으로 대중을 전쟁에 동원한다. 적은 바깥에 있다. 노무현의 가상적은 인류의 야만성 그 자체다. 열린주의로 고립주의를 치고, 참여주의로 엘리트 우월주의를 치고, 문명으로 야만을 치고, 보편으로 특수를 치고, 대승으로 소승을 치고, 민중의 힘으로 기득권을 친다. 싸움이 계속 연결되는 동안은 부분에서의 고통이 용해된다.


    노무현주의는 엘리트주의다. 소수 엘리트의 지배가 아니라 반대로 다수 대중을 의사결정의 주체로 양성하는 것이다. 대중은 전쟁에의 참여를 통해 심리적인 신분상승을 이루어낸다. 결국 대한민국이 인류 전체의 엘리트가 된다.


    서구가 기사도를 강조하거나, 영국이 신사도를 강조하거나, 프랑스가 문화대국을 선언하거나, 유태인이 선민사상을 내세우거나, 일본이 짝퉁으로 무사도를 만들어내는 것은 자국민을 인류집단의 엘리트로 조직하려는 의도에서다. 거대한 집단적 신분상승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내부에서의 산발적인 갈등이 용해된다. 신분상승 운동이 멈추면 즉시 내부갈등이 폭발한다. 오바마가 집권하며 백인우월주의가 무너지자 중서부의 백인빈민들이 궐기하여 트럼프를 옹립한 사건이 그 예다.


    인류를 부단히 움직이는 상태, 동이라는 에너지의 연결상태에 가두지 않으면 외부를 향하고 있던 에너지의 방향이 내부로 바뀌어 도처에서 자기파괴적인 퇴행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인간은 남을 공격하지 못하면 자기를 공격하게 된다.


    인간은 고유한 에너지를 품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운명적으로 모순된 존재이며 문제의 완전해결은 절대 없고 오로지 사회의 의사결정 구조를 정밀하게 디자인하여 그 폐해를 최소화 하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내적 모순이야말로 진보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내부갈등을 외부로 돌리는 수법을 쓴다.


    팽이는 돌아야 안정되고, 비행기는 날아야 안정되고, 인간은 행동해야 안정된다. 무모한 행동이 자기파괴를 일으키므로 지도자가 사회를 크게 한 방향으로 이끌어 모순을 외부로 배출해야 한다. 외부의 가상적을 상대로 큰 싸움판을 일으켜야 한다. 그것은 문명과 야만의 부단한 전쟁이다.


    복지, 취업, 성장률, 환경, 집값 따위 잡다한 분야에서 작은 실적을 얻어 명성을 얻고 생색을 내려는 진보 일각의 소아병적인 실적주의가 집단 내부에 혼선을 일으켜 문명단위의 커다란 항해에 나서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다.


    열린사회의 적들은 노무현을 깎아내릴 목적으로 소아병적인 실적주의에 매몰되어 노무현이 실적이 없다고 주장하다가 박정희와 김영삼의 실적을 찬양하는 오류를 저지르곤 한다. 글자 아는 지식인이라면 방향의 제시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물가안정 따위는 실무자의 것이다. 지도자의 역할은 집단의 방향제시다. 노무현은 촛불시민을 무장시켜 한국의 깨시민을 인류사에 데뷔시켰다. 서구의 역사에 없는 다른 형태의 민주주의를 선보였다. 아시아의 인류문명 선도 가능성을 증명한 셈이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20.08.10 (17:5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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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자유주의 제언


    신은 하나다. 현장에서는 셋으로 나뉜다. 창조의 신 브라흐마와 유지의 신 비슈누와 파괴의 신 시바가 있다. 각각 일의 시작과 진행과 종결을 담당한다. 추가 설명이 필요하지만 대략 이렇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인류의 이념은 하나다. 70억 인류가 연결하여 하나의 뇌를 이룬다면? 


    그게 이념이다. 가정이든 동호회든 회사든 국가든 인류든 집단의 의사결정에는 반드시 이념이 필요하다. 의사결정에 앞서 집단을 끌어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집단인가? 콩가루 집안인데도? 의붓자식인데도? 나라가 망했는데도? 어떻든 의사결정을 하려면 이념을 부정할 수 없다.


    이념을 부정하는 견해도 이념의 파편이다. 이념부정은 집단부정이고 집단이 없으면 집단적 결정을 못한다. 집단적 결정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각자도생이 그러하다. 그런데 집단적 결정을 한다면 반드시 이념이 도출된다. 외계인이 침략하면 인류가 힘을 하나로 모아 맞서야 한다.


    이미 이념이 만들어졌다. 지구 온난화와 같은 환경재앙은 인류가 힘을 모아 대응해야 한다. 이념이 등장할 수 밖에 없다. 이념의 부정은 집단적 의사결정의 부정이고 이는 집단의 일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집단의 일에 참여하지 않겠다면 발언권도 없다. 그러므로 닥쳐!


    이념이 둘이 될 수는 없다.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반드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은 집단이 방향을 트는 것이며, 방향을 틀면 움직이게 되고, 움직이면 외부와 일대일로 대응된다. 자동차 핸들은 하나다. 둘이면 집단이 깨진다. 모든 움직이는 것은 일대일의 관계를 맺는다.


    움직이는 두 사람이 만나려면 같은 날 같은 장소를 특정해야 한다. 시공간의 좌표 위에 한 점을 찍어야 한다. 움직이는 세상과 나를 잇는 라인은 하나일 수 밖에 없다. 라인이 둘이면 흡수된다. 이념은 하나인데 사람마다 의견이 다른 것은 집단에서 맡은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건은 일어나고 인간은 가담한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진행한다. 사건의 어느 단계에 들어가는 것이 적당할까? 창조가 좋지만 금방 끝난다. 브라흐마 신의 서열이 높아도 인기가 없다. 시바신의 인기가 높은 이유는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새로 시작하고 싶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념은 하나이나 단계별로 공화, 자유, 민주, 자본, 사회가 있다. 공화는 가끔 등장하며 브라흐마처럼 금방 시즌이 끝나버린다. 자유는 앞단계에 개입하여 권력을 얻고 사회는 뒷단계에 개입하여 보상을 얻는다. 여기서 갈등한다. 그 중간의 민주와 자본은 대략 세팅된 대로 굴러간다.


    법과 제도에 맡겨야 한다. 특히 자본주의는 운영의 묘에 달려 있다. 기업가와 금융인이 잘해야 하고 정부의 기술자들이 재정과 환율과 금리로 마술을 부려야 한다. 미국이라면 연준의 파월 의장과 트럼프의 안목에 달려 있다. 전문가들이 즐비한데 개인이 끼어들 여지는 잘 없다.


    개인은 권력의 자유주의와 보상의 사회주의 중에서 자기 입장을 정해야 한다. 엘리트는 권력을 선택하고 하층민은 보상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인간은 기본적으로 권력지향적이다. 권력은 눈앞에 있고 보상은 먼 훗날의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당장의 권력에 굶주려 있다. 


    가난할수록 계급배반투표로 간다. 권력과 보상 중에서 권력을 선택한다. 가난한 이유는 먼 훗날에 대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축도 안 하는 사람이 나중에 보상받는다는 약속을 믿어? 현찰을 나눠주면 몰라도. 권력은 가깝고 보상은 멀다. 그 권력은 상당부분 심리적인 권력이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한다고 믿거나, 경상도가 다른 지역을 지배한다고 믿거나, 강남이 대한민국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다고 믿는다면 망상이다. 검찰이 반역하는 이유도 자기네 패거리가 대한민국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눈앞의 권력에 집착하는게 인간이다. 


    인간은 망상에 가까운 심리적 권력에 집착한다. 돈이라도 마찬가지다. 이건희가 수십 조원을 가졌지만 병실에 누워있으면 심리적인 가치 뿐이다. 부자들은 돈에 묻어오는 권력을 누릴 뿐 돈을 소비하여 얻는 보상에는 관심없다. 보상은 부자의 부인이나 자식들이 챙겨가는 것이다.


    권력이 동기가 되지만 보상이 없어도 인간은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다. 승자든 패자든 마찬가지다. 승자의 이익이 없으면 메시도 시합을 건성으로 뛴다. 패자의 이익이 없으면 승산이 없는 약자들은 외국으로 도망치거나 범죄자가 된다. 자살하거나 노숙자가 되어 게임에 불참한다.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납득할만큼 보상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적절한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 문제는 부족주의다. 부족주의는 권위주의적인 패거리를 이루고 세력에 묻어가는 전략이다. 반칙을 하려는 것이다. 권력이냐 보상 중에 선택하라구? 아냐. 난 반칙할래. 이게 문제다.


    북유럽은 보상을 추구하다 망하고, 미국은 권력을 추구하다 망하고, 후진국은 반칙을 추구하다 망한다. 권력을 선택하면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정선카지노 행이기 다반사다. 의사결정권을 백퍼센트 개인에게 넘기면 대부분 도박을 하고 뒷감당을 못한다.


    보상을 선택하면 기대에 미치지 하는 적은 액수가 배당된다. 다수가 적은 액수를 보상받고 모두가 불만에 찬다. 결정적으로 엘리트가 다른 나라로 빠져나간다. 결국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진다. 선권력 후보상이냐, 선보상 후권력이냐, 게임 참여냐, 게임이탈이냐. 결정해야 한다.


    반칙할 것이냐, 정당하게 승부할 것이냐도 결졍해야 한다. 전략과 전술 중에서도 선택해야 한다. 장기전과 단기전, 전면전과 제한전이 있다. 전략은 진보이고 전술은 보수다. 장기전은 진보이고 단기전은 보수다. 전면전은 진보이고, 제한전은 보수다. 지리적인 구도가 변수가 된다.


    중국처럼 땅이 넓다면 대략 장기전을 선택한다. 국가는 장기전을 하는데 개인은 초단타를 친다. 미국이 압박해도 중국이 버티는 것은 장기전이다. 50년간 토론하고 백년을 밀어붙이는게 중국인이다. 반대로 중국 부자들이 인스그램에서 돈자랑을 하는 것은 초단타에 해당하겠다.


    단기적으로 반응을 끌어내는 데는 쪽수가 넉넉한 중국만큼 좋은 곳이 없다. 감동적인 사진을 투척하면 10억명이 본다. 뻥을 치려면 화끈하게 쳐야 한다. 반면 진지한 주장이라면 어떤 주장을 내놓아도 메아리가 없다. 공자 이후로 공자노선을 걷는 사람은 중국 역사에 한 명도 없다.


    공자의 후예들은 지금은 장사꾼이 되었다. 전 국민이 단타를 치는 셈이다. 상업이 단기전이면 학문은 장기전이다. 공리공론 위주의 관념철학을 버리고 풍수나 따지며 도교사상 특유의 극단적인 실용주의로 가다가 망한 나라가 중국이다. 이념은 공화, 자유, 민주, 자본, 사회가 있다.


    하나의 일이 기획단계, 독립단계, 성장단계, 팽창단계, 수확단계에 따라 필요한 결정이다. 역할의 차이다. 필자의 사회적 자유주의는 책임은 시스템에 묻고 권력은 개인에게 주자는 거다. 뭐든 잘못되면 사람탓을 하지 말고 매뉴얼을 고쳐야 한다. 제도를 바꿔야 한다. 사회주의다.


    공화는 가끔 한 번씩 등장한다. 창조의 신 브라흐마의 인기가 없어진 이유다. 노예제도를 폐지한 이후 토지공개념을 빼고 공화할 일이 별로 없다. 국민이 한 자리에 다 모여서 룰을 다시 정할 일이 거의 없다. 미국은 인종갈등이 심해서 공화할 일이 남아있다. 푸닥거리 해줘야 한다.


    한국은 남북통일이 공화주의를 들고 나올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제도에 의해 안착이 되어 가는 편이고 자본주의는 발달하는 중이며 제도가 뒷받침되면 어떻게든 굴러간다. 주요한 갈등은 개인이 선택하는 자유주의 사회주의다. 


    자유주의는 엘리트 위주이며 개인주의다. 후진국은 묻어가기 전략을 쓴다. 반칙을 한다. 왜 가부장이 존재하는가? 가장 한 명이 출세하면 다른 사람들은 묻어가려는 꼼수 때문에 가장의 입지가 강화되고 차별이 일어난다. 가장이 혼자 벌어서 일곱식구 먹이고 노부모 봉양해야 한다.


    후진국일수록 한 명이 벌어 다수를 먹인다. 장남은 명문대 보내고 차남 이하는 중학교까지만 가르친다. 왜? 돈이 없어서다. 장남 하나에 몰빵하고 낙수효과를 기다리는 것이다. 선진국이 될수록 개인주의로 기울게 된다. 후배가 선배에 의지할 수도 선배가 후배를 챙겨줄 수도 없다. 


    챙겨주면 반드시 갑질하게 된다. 그러다가 미투를 당한다. 백퍼센트다. 게임의 단위가 개인이 아니라 패거리가 되면 필연적으로 갑질, 차별, 비리, 부패로 간다. 그룹원들 중에서 나쁜 한명에 맞추다 보면 그렇게 된다. 후진국은 당연히 그렇게 된다. 개인에게는 경쟁할 자원이 없다.


    지식도 없고 힘도 없고 빽도 없으니 교회라도 가서 빌붙어야 한다. 필자는 이런 패거리 현상을 부족주의라고 부른다. 개인에게 권력을 주고 집단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부족주의가 발호하면 모든 것이 애매해서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 개인에게 권력을 줄수 없다.


    권력을 주면 타인에게 위임해 버린다. 투표권을 줘도 남이 시킨대로 찍는다. 의사결정의 난맥상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선진국은 그래봤자 얻는게 없지만 후진국은 그렇게 하면 이익이 있다. 차별주의는 묻어가기 전략이다. 왜 교회는 소수자를 차별하는가? 묻어가면 차별하게 된다.


    앞단계 권력인가, 뒷단계 보상인가? –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다.
    강자의 공정경쟁인가, 약자의 묻어가기 꼼수인가? – 개인주의와 권위주의다.
    장기적인 전략인가, 단기적인 전술인가? –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다.


    이 외에도 공화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가 있지만 이들은 대개 세팅된 대로 굴러간다. 개인이 게임에 가담할 때 판단해야 하는 것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중에서 미국식으로 권력을 추구할 것인가 북유럽식으로 보상을 추구할 것인가다. 엘리트는 권력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다.


    하층민은 보상을 선택하는게 유리하다. 그러나 권력은 눈앞에 있고 보상은 저 멀리 있다. 결정적으로 강자는 공정경쟁이 유리하고 약자는 권위주의가 유리하다. 약자는 매를 맞더라도 선배를 섬기는게 낫다. 이렇게 되면 복잡해진다. 약자가 물질적 보상보다 심리적 권력을 택한다.


    허다한 이념논쟁은 이러한 세 가지 게임의 모순 때문이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똑똑한 사람에게 유리하다. 그게 맞다. 똑똑한 사람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추구한다. 그러나 띨한 사람은 패거리 짓는 방법으로 즉 반칙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비틀어버린다. 여성인데 남자편 든다.


    남편이 돈을 잘 버니까. 약자인데 강자편 든다. 삼촌이 부자니까. 이런 식이다. 결국 이 문제를 풀어내는 방법은 장기적인 비전을 세우고 집단이 비전을 받아들이도록 신뢰를 닦는 것이다. 장기전을 선택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물론 그 경우에도 반발하는 사람은 있는데 노인이다.


    진보와 보수 - 앞에 가담할 것인가, 뒤에 가담할 것인가?

    개인과 권위 - 개인으로 가담할 것인가, 패거리로 가담할 것인가?

    자유와 사회 - 당장 권력을 얻을 것인가, 나중에 보상받을 것인가?


    공화와 봉건 - 집단에 가담할 것인가, 그냥 혼자 놀 것인가?

    민주와 독재 - 다수가 합의할 것인가, 소수가 폭주할 것인가? 

    자본과 원시 - 발전할 것인가, 퇴행할 것인가?


    공화주의냐 봉건주의냐는 백년 단위로 드물게 한 번씩 집단이 의사결정할 이슈가 터지고 민주주의는 한 번 세팅되면 대략 안정적으로 굴러가며 법과 제도를 정비할 나름이고 자본주의 역시 법과 제도를 세련되게 운영하는 전문기술자의 영역이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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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3 (10: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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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게임론


    세상은 사건이다. 사건은 일어나고 결정하고 종결된다. 주기를 이루므로 단위가 있다. 사건의 관점으로 보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세상은 공간에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타고 흘러가는 존재라는 점이 각별하다. 인간을 몰아붙여 액션을 요구하며 행위에는 결과가 따른다.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사회계약론이나 천부인권설 같은 것이 있지만 솔직히 인간은 계약한 적도 없고 하느님이 도장을 찍어준 일도 없다. 사회계약이니 천부인권이니 하는 관념들은 레토릭이 딸리는 자들의 어설픈 수사에 불과하다. 그런 표현을 쓴 의도를 짐작할 수는 있다.


    존재는 사건이며 인간이 사건에 뛰어들면 게임이 시작된다. 게임은 다수가 룰을 공유한 상태에서 상대의 행동에 적절히 맞대응을 하되 그에 따른 결과를 예측하고 상황에 맞게 의사결정하여 보상을 획득하는 것이다. 다수가 룰을 공유하면서 그에 따른 효율성을 가져가는 것이 게임이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말이 있지만 희망사항일 뿐 인간은 그다지 자유롭지 않고 평등하지 않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뿐이다. 누구든 운명적으로 게임의 출발선에 서게 된다. 자유의사로 서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보니 피부색과 성별과 국적과 가족이 결정되어 있다. 받아들일 수 밖에.


    신체적인 조건도 저마다 다르고 지능도 다르다. 게임을 거부하면 가출, 노숙, 범죄, 은행털이, 산적, 해적, 마적 따위를 선택할 수 있다. 그들은 맞아죽거나 혹은 교도소에서 생활하게 된다. 호주에서 애보리진의 수감율이 백인의 15배인 것을 보면 게임의 탈락자도 적은 숫자는 아니다.


    게임의 참여는 당연한 의무가 아니라 사회가 발달하면서 이루어놓은 고도의 성취다. 사회계약이든 천부인권이든 자유와 평등과 박애든 그것은 문명의 성취이지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미션은 아니다. 당연히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며 서로 사랑한다는 관념은 허상에 불과하다.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다. 가출하면 불행해질 확률이 높다. 노숙하면 골병든다. 범죄를 저지르면 역시 좋지 않다. 게임을 받아들이면 결과는 알 수 없다. 게임을 거부하면 그게 부족민 사회다. 부족민은 많아야 100명이다. 노약자와 어린이를 제하면 50명이다. 성별을 구분하면 25명이다.


    그들은 서로 만만한 사촌간이다. 그 25명 중에 특정한 상황에서 주도적으로 의사결정에 가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아야 다섯 정도다. 보통은 나이로 밀리고, 힘으로 밀리고, 지혜로 밀리거나 혹은 뿔뿔이 흩어져 다른 장소에 나가 있으므로 그 상황의 집단의 의사결정에서는 제외된다.


    특정 상황에서 5명 정도가 경합하면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입장을 지킬 수 있다. 흥정할 수도 있고 순번을 정할 수도 있고 나중을 약속할 수도 있다. 긴밀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한계를 넘으면서 인류의 문명은 촉발된 것이다. 그리고 개인이 대응할 수 없는 딴세계로 가버렸다.


    법 나오고 제도 나오고 조직 나오면서 피곤해졌다. 개인은 시스템이라는 수레바퀴에 이리저리 치인다. 사회계약이든 천부인권이든 자유와 평등과 박애든 100명 정도의 소집단에서 주도적으로 나서는 5명의 경합에서 먹힐 뿐이다. 집단의 숫자가 70억을 찍어버리면 모든게 희미하다.


    여전한 것은 게임 뿐이다. 사회는 토대의 공유에 의해 성립된다. 공유에는 효율이 다른다. 공유에 따른 효율을 편취하려고 하면 상대의 맞대응에 의해 게임이 촉발된다. 게임을 거부하면 맞아죽거나 혹은 산적이나 해적, 마적을 하다 교도소에 수감된다. 어느 경우든 그다지 좋지 않다.


    게임 참가자는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고 맞대응할 수 있다. 능동적인 의사결정을 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기대할 수 있으며 결과에 책임을 지게 된다. 장기전이든 단기전이든 전면전이든 국지전이든 선택할 수 있다. 정기전 전면전을 선택하면 진보가 되고 단기전 국지전은 보수가 된다.


    게임의 참여, 룰의 공유에 따른 효율성, 상대의 예측과 나의 맞대응 그리고 의사결정과 보상에 의해 사회는 작동하는 것이다. 레토릭이 안 될 때 사회계약이니 천부인권이니 자유 평등 박애니 하며 대충 둘러댄다. 인간은 게임에 참여하며 기대이익에 따라 합리적으로 의사결정한다. 


    그러한 합리성들이 쌓여서 결과적으로 사회는 진보 일방향으로 작동한다. 합리성의 근거는 룰의 공유다. 룰은 공유하지만 결정은 사유다. 룰에서 몫을 빼먹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에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잘못된 결정이면 손해를 입는다. 손해가 뻔하면 게임에 불참하게 된다. 


    노숙자가 되거나 교도소에 수감된다. 다수가 노숙하거나 교도소에 수감되었다면 그 사회는 실패다. 공유하는 룰이 잘못 세팅된 것이다. 애보리진이 백인의 15배나 수감되어 있다면 호주는 어느 면에서 실패한 사회다. 미국의 흑인이나 중국의 위구르족도 대거 게임에서 배제되고 있다.


    실패한 사회는 석유대박과 같은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 지는게 보통이다. 혹은 그만큼 리스크가 잠복해 있다. 게임에 참가하여 합리적인 선택으로 이득을 얻는 원리는 국가간에도 적용된다. 중국처럼 반칙을 일삼으면 왕따된다.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아야만 한다. 

    

    사회는 구성원들 간에 상호작용을 높여 최고의 효율을 끌어내는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그 경우 이기는 사회가 된다. 이기는 사회는 국가간 경쟁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국제사회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룰을 정할 수 있다. 미국처럼 그냥 운이 대빵 좋아서 이기는 사회가 될 수도 있다.


    혁신을 하거나 인구로 밀거나 자원빨로 먹거나 전쟁하거나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룰을 만들려고 쟁투한 결과가 인류의 역사다. 세상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도 아니고 사회계약도 아니고 천부인권도 아니고 자유 평등 박애도 아니고 윤리도덕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다.


    다자간 게임에서 합리적인 결정들이 살아남은 것 뿐이다. 혹은 운이 좋아서 살아남기도 한다. 나쁜 짓으로 살아남은 자들도 있다. 세상에 사이코패스가 많지 않은 것을 보면 나쁜 짓으로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건 아니다. 우리는 상대의 대응을 예측하여 합리적인 게임을 설계할 수 있다.


    공유하는 룰을 만들고 자유롭게 게임에 참여하기다. 분야마다 룰은 조금씩 다르다. 정치는 쪽수로 이기고 경제는 효율로 이기고 문화는 상호작용 증대로 이긴다. 이기는 쪽으로 기동하다 보면 보다 좋은 룰이 만들어지며 인류는 그 룰을 공유하는 방법으로 이득을 얻어 여기까지 왔다.


    인류는 게임의 결과로 주어지는 보상을 바라며 행동하지만 보상은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유전자의 명령에 따른 호르몬의 작용에 불과하다. 주도적으로 창의하여 새로운 게임을 설계하고 나란히 출발선에 서야 한다. 나만 혼자 출발선에 서면 돌아오는 결과가 없다. 그 경우 게임 실패다. 


    최대한 다수를 출발선에 세울 수 있는 게임을 제안해야 한다. 류호정이 어떤 옷을 입었다면 대중은 그게 내게 주어지는 어떤 보상인가를 묻는게 보통이다. 류호정이 내게 무슨 보상을 했지? 그 복장과 머리모양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해주었지? 멍청한 질문이다. 왜 보상을 찾고 있지?


    바보냐? 그가 제안한 게임이 얼마나 많은 선수들을 출발선에 나란히 세울 수 있을까를 판단해야 한다. 다수가 게임에 가담하면 권력이 발생한다. 다들 출발선에서의 줄세우기 권력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결승선에서의 트로피가 아니라. 정의당이 집권에 관심없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흥 그 게임 재미없어. 나는 불참일세.' 이러다가 다른 선수들이 모두 류호정 게임에 가담해서 출발선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뜨악한 표정으로 '이게 뭐야? 낭패네.' 이렇게 되기 십상이다. 영리해져야 한다. 과연 이 게임이 먹히는 게임일까? 나의 제안이 다수를 출발선에 세울 수는 있을까? 


    사람들이 솔깃해 할까? 이 게임 얼마나 지속될까? 판단이 섰다면 달려들어야 한다. 어리석게 윤석열 찬양게임에 줄섰다가 피 본 사람도 많다. 며칠 안 가는 게임이었다. '그걸로 내게 어떤 보상이 주어지지?' 이러면 초딩이다. 인간은 결과의 보상이 아니라 원인에서의 권력을 탐한다.


    왜 당신은 멋진 게임을 제안하여 다수를 평등한 출발선에 줄세우는 권력을 누리려고 하지 않는가? 작가는 작품을 내고 독자는 작품 앞에 평등하게 줄을 선다. 다수를 평등하게 만들면 권력이 발생한다. 포드시스템처럼 누구나 평등하게 포드 모델 T를 사게 만들면 권력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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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에는 방향성이 있다 모든 것은 진화한다. 진화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도 진화하고 우주도 진화하고 물질도 진화한다. 그냥 제 자리에 멈추어 있는 것은 없다. 환경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외력이 작용한다. ...

사건철학 [7]

강자의 철학으로 갈아타라 세상을 물질적 존재가 아닌 에너지적 사건으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물질은 고유한 속성이 있고 인간은 그 물질들 중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이때 인간은 선택하는 자가 ...

인간의 이해 [13]

대중의 권력의지에 해답이 있다. 인간은 에너지가 고양될 때 권력의지를 발동하며 그럴 때 인간은 공부를 한다. 남자는 운동하고 여자는 화장한다. 에너지가 약해질 때 편한 길을 가려고 한다. 가던 길을 계속 가려고 한다. ...

신의 입장 [5]

행복이니 쾌락이니 자유니 사랑이니 성공이니 하지만 다 개떡같은 소리다. 시시하기 짝이 없다. 그걸로 어린아이를 유혹할 수 있을지 모르나 내 가슴을 뛰게 할 수는 없다. 눈이 번쩍 뜨이는 진짜는 하나 뿐이다. 생각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