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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275 vote 0 2020.04.06 (19:46:33)

    사람의 도리


    공자는 사람의 도리를 가르쳤다. 사람의 도리라는게 무엇일까? 나는 이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비애를 느끼는 이유다. 오르가즘 느껴줄 만한 진지한 대화를 나눌 사람이 어디에도 없다. '사람의 도리'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쿵!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울림이 없다는 말인가?


    우물에 아기가 빠진 것을 지나가는 사람이 봤다면 누가 구하려 들지 않겠는가? 이는 맹자의 성선설이다. 사회성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 중에 별난 자는 옆에서 누가 죽어도 모른 체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건 아닐 테고 동료의 인정을 받으려면 사람다운 행동을 해야 한다는 말일 터이다. 


    주변과 맞춰가라는 말이다. 눈치 좀 보고 살아라는 말이다. 인간은 무리에 가담하려는 본성이 있으므로 선을 행하여 무리에 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들도 다들 그렇게 하니까 너도 그렇게 하라는 말이다. 별난 자가 있어서 인간다운 행동을 하지 않으면 별종으로 취급하여 왕따시키겠다는 위협이다. 


    별난 사람을 비난하고 평판을 떨어뜨리겠다는 말이다. 아기를 구하는 사람이 다수파고 구하지 않는 사람은 소수파야. 넌 별종이니까 소수파로 몰아서 조져버리겠어. 이런 거였나? 맹자가 이런 조잡한 짓을 연구했다고? 그런데 말이다. 그런 다수파의 위협에 눈이라도 깜짝하는 사람은 별난 사람이 아니지. 


    돈이 왔다갔다 하는 살벌한 현장이면 아기가 우물에 빠져도 모르쇠다. 당장 코로나19로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딴짓하는 인간들이 널려 있다. 특히 교회에 많다. 그들은 인간이 아닌 것일까? 그들은 왕따시켜야 하는 소수파이고 별종인가? 다들 제 앞가림하기도 힘든 판에 맹자의 말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한가한 시골에서나 먹힐 말이다. 선하게 살면 도와주고 나쁜 짓을 하면 징벌한다? 인간은 그 정도 위협에 넘어가지 않는다. 특히 뺀들뺀들한 보수꼴통들은. 살벌한 전쟁터에서 시골 꽁생원의 도덕논리는 비웃음을 살 뿐이다. 진실을 말하자. 사회가 하나의 자동차라면 인의는 그 자동차의 운전기술이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기술을 가르쳤다. 공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사람을 낚는 정도로 부족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챙겨줘야 한다. 기어코 일은 벌어졌다.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예수의 가르침은 사랑하라는 것이다. 원래 부족민은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할 가족이 없기 때문이다. 


    가족의 역사는 인류사 중에 불과 1만 년 남짓이다. 적대부족과 1년에 한 번 축제날에 어울리면서 아기를 만드는데 여럿과 관계하므로 누가 내 자식인지 알 수 없다. 미모를 따지지 않는다. 깜깜한 밤에 보이는 것도 없다. 다윈의 성선택설은 가짜다. 부족민에게 현대의 사랑은 없다. 가족 비슷한 것은 있다. 


    어머니의 남자 형제와 그 자녀들이다. 이들은 친밀한 가족이 아니다. 부족 안에서 남자족과 여자족이 따로 생활하기 때문이다. 오빠와 남동생들은 멀찍이서 누이를 지켜준다. 가끔 오두막에 나타나서 밥이나 얻어먹고 사라지는 정도다. 소년이 열두 살이면 엄마의 오두막에서 쫓겨나 나무 밑에서 자야 한다. 


    오두막은 여자와 아이의 공간이며 남자들은 굉장히 넓은 범위를 정찰하고 다닌다. 이런 실정이니 가족이라고 할 만한 근거가 없다. 정붙이지 못한다. 사랑은 현대의 개념이다. 문명 속에 사랑이 있다. 사랑이 무엇이길래? 왜 부족민에게 없는 사랑이 갑자기 생겼을까? 예수는 왜 사랑하라고 가르쳤을까? 


    사랑은 문명의 위대한 도약이다. 부족민에게 제대로 된 사랑이 없는 이유는 수명이 짧아서 정붙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부족단위로 사는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불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대번에 살인이 나고 만다. 부족사회에서 사랑은 죽음의 질병과 같다. 그 부족은 파멸하고 만다.


    MBC에서 찍은 아마존의 눈물은 가짜고 진짜 부족민을 촬영한 영상이 있었는데 족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나이가 열일곱 정도로 보였다. 다른 영상에서는 50인 정도의 무리를 망원렌즈로 찍었는데 2/3는 미성년자로 보였다. 인류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야노야미족에 40살이 넘은 남자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오래 살아야 서른 살인데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 사랑은 다른 것이다. 정글을 빠져나온 인간이 문명화되면서 수명이 길어진 결과로 완전히 다른 세계로 넘어온 것이다. 엄청난 도약이다. 사랑이 불화를 일으켜 부족이 깨지고 대체재로 가족이 출현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집단의 중심을 장악하여 부족을 결속시켜 거기서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다. 스무 살이면 딱 죽기 좋은 나이인데 사랑을 한다고? 동물의 무리 짓는 본성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자신의 희생을 수반하는 특별한 것이다. 단순히 파트너에게 끌리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인간이 되라는 거다.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점은 사회성이다. 그 결과는 문명의 진보다. 우리는 문명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 문명적인 것은 본능적인 것과 충돌한다. 본능적인 것은 환경과의 일대일 대응이다. 의사결정은 자극과 반응의 대칭이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


    환경의 어떤 자극에 인간의 어떤 행동이 따르는 것이다. 미개하고 야만한 것은 그러한 일대일 맞대응의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그런 철학과 사상과 문화와 관습이다. 계획도 없고 희망도 없고 사랑도 없이 맞대응만 있을 뿐이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찰나의 현실만 있다.


    부족민은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응수한다'는 맞대응 논리로 무장해 있다. 강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는 것은 그런 자극과 반응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 네가 어떻게 할 건데?' 이것이 야만인들의 세계관이다. 상대를 겁주고 폭력을 행사한다. 축출하거나 도망친다. 죽이거나 죽는다. 뺏기거나 뺏는다.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면 내가 어떻게 대응한다는 조건이 항상 있다. 이 논리로 세상을 바라본다. 식인종이 식인하는 이유는 이웃부족이 만만히 보지 못 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웃 부족이 우리 부족을 깔보면 함부로 경계선을 넘어온다. 이웃 부족 남자가 우리 부족 지역을 몰래 돌아다니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결국 전쟁이 발발한다. 그러므로 식인하지 않을 수 없다. 맞대응하는 것이다. 사람을 먹어서 전쟁을 막으니 좋잖아. 이 논리는 파괴력이 있다. 그렇게 만인이 만인에게 맞대응을 하면 사회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 맞대응이 가능한 단위로 집단은 해체된다. 부족민의 인원 200명이 인간의 맞대응 단위다.


    그것이 야만이고 미개한 것이다. 그 사회에 사랑은 없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떤가? 진보든 보수든 서로 ‘네가 먼저 이랬잖아.’ 하며 맞대응에 분주할 뿐이다. 꼬맹이들이 코피를 터뜨리고 와서 ‘쟤가 먼저 때렸어요.’ 하고 고자질하는 수준이다. 인간이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왜 진보는 항상 분열하는가? 


    정의당 녹색당 민중당 여성의당이 분열하는 이유는 각자 맞대응을 하다 보니 쪼개져서 그런 것이다. 부족민이 적으면 50명 정도에 많아야 200명 정도로 쪼개지는 이유는 각자 맞대응을 해서 그런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맞대응을 하니 유태인이 12지파로 분열되고 디아스포라를 일으켜 흩어지게 된다.


    보수꼴통들도 공화당이니 친박당이니 하며 쪼개지는 데는 차이가 없다. 200명 단위로 쪼개지는 부족민과 기십 명 단위로 쪼개지는 무뇌진보의 차이가 없다. 그들은 미개하고 야만하다. 인정해야 한다. 공장가 가르친 인간다움은 사회 안에서 제 역할과 의미를 찾고 사회와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데 있다. 


    그 결과는 의사결정단위를 키우는 것이다. 감각적이고 말초적인 맞대응 논리를 버리고 과거와 미래를 꿰뚫는 긴 호흡으로 문명의 진보라는 궤도에 나를 태우는 것이 인간다움이다. 그것은 집단의 흐름에 맞춰가는 것이다. 예수는 사랑을 가르쳤지만 50인의 무리가 30살 정도 사는 부족민에게 먹히지 않는다. 


    사랑은 불화를 일으켜 부족을 파탄내는 원인이 된다. 무리가 적어도 천 명을 넘어야 하고 수명이 적어도 마흔은 넘겨야 사랑의 논리가 먹힌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 가족은 그 지점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해도 불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왜? 의사결정의 중심이 구심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가족을 보호하고 유지할 마음이 없으면 사랑은 없다. 부족은 평등하므로 의사결정의 중심이 없다. 원래 부족은 족장이 없다. 백인들이 임의로 부족의 유력자를 족장이라고 치는 것이다. 1만 년 ~ 2만 년 전 사이에 사유재산권의 탄생과 함께 의사결정의 중심이 생겨 가족이 등장하고 비로소 사랑이 출현한다.  


   공자의 인의는 집단 안에서 엘리트의 위치를 가지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예수는 가족도 없고 그래서 사랑이 없고 따라서 의미도 없기 때문에 서른 살 이후의 계획이 없는 부족민에게 서른 살 이후의 삶을 가르쳤다. 서른 살 넘으면 '왜 살지?' 하고 묻게 된다. 그냥 멋모르고 산다.


    살아지므로 사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부르면 잔다. 그러다 보니 어? 살아있네! 이렇게 된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몰라서 죽었다. 부족민이 일찍 죽는 이유는 사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살려고 애쓰지 않는다. 어제도 잔뜩 살았는데 오늘도 살아야 하는가? 단조로운 정글에서 서른 살 넘으면 지친다. 


    그래서 죽는다. 우리는 문명중독에 걸려서 이러한 내막을 모르지만 부족민의 삶은 처연한 것이다. 백인들이 서인도 제도의 토착민을 노예로 부려 먹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부족민이 모두 자살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이티 국민들은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흑인들이고 토착민은 소수의 혼혈을 남기고 멸종했다.


    사람이 서른 살을 넘겨 사는 방법은 사회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다. 사회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가족은 바로 거기서 탄생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사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아기를 대신 키우는 역할 때문이다. 동물은 폐경이 없는데 인간은 특별히 폐경이 있다. 


    폐경은 남의 아이를 이모들이 공동으로 육아하는 시스템이다. 아기를 낳은 친엄마가 죽을 확률이 50퍼센트쯤 되므로 자기 아기를 키울 가능성은 그다지 없다. 원래 부족민은 아기를 마을 공동으로 키운다. 일본도 100년 전까지 시골에서는 그렇게 했다고 한다. 꼬마들은 가정이 아니라 마을 공동 소속이다.


    우리 아이가 있을 뿐 내 자식이라는 개념은 없다. 인간이 사회에서 빌붙을 역할을 획득하는 것이 사랑이다. 무리가 천 명이 넘고 수명이 서른 살을 넘고 사유재산이 있어야 가능한 구조다. 9살에 출산하는 피그미가 30살의 삶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20살이면 살 만큼 살았는데 30살을 넘기려면 근거가 필요하다.


    너 왜 사니?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집단 안에서 역할이 필요한 것이며 역할을 찾으면 사랑이다. 인간이 사랑하는 이유는 집단에 기여하려는 본능 때문이다. 예수의 사랑은 밖에서 겉돌지 말고 사회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라는 가르침이다. 사회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되는가? 내가 사회를 이끌어가야 한다. 


    각자에게 나누어줄 역할을 만들어야 한다. 팀을 만들어야 각자 역할을 얻는다. 집단 안에서 역할을 찾는 것이 예수의 사랑이라면 포메이션 전술로 역할을 만드는 것은 공자의 인의다. 예수가 무엇을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게 무리에게 먹힌 점이다. 예수가 무리의 어떤 급소를 건드렸다.


    이에 무리가 크게 반응한 것이다. 예수가 말하기 전에 무리는 그것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던 거다. 예수 말고도 많은 사람이 뭔가 주절대며 떠들었지만 그 시대에 오직 예수의 말에 인간의 본성이 적극 반응한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엘리트의 덕목이며 족장의 덕목이다. 역시 거기에 인류가 반응한 것이다.


    사랑은 예수 이전에도 있었고 인의도 공자가 발명한 것이 아니지만 사회가 발달하여 어떤 수준에 이르자 갑자기 인류가 부르는 목소리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반응할 만큼 문명이 성숙했다는 증거다. 공자의 인의는 환경의 자극과 생물의 반응이라는 동물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맞대응 논리의 극복이다.


    사랑은 사회 안에서 역할을 찾고 인의는 더 나아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부족민 특유의 분열논리를 넘어선다. 다만 사랑은 개인의 자세이고 인의는 집단의 팀플레이다. 개인은 사랑하고 집단은 의리를 지킨다. 사랑으로 사회라는 버스를 타고 인의로 그 버스를 운전한다.


    사랑은 집단의 구성원이 지켜야 할 도리다. 인의는 집단의 우두머리가 지켜야 할 도리다. 그런데 살다 보면 누구나 우두머리가 된다. 가장이 되고 팀장이 되고 부서장이 되고 선배가 되고 웃어른이 된다. 주장은 한 명이지만 누구든 패스를 받으면 의사결정권자가 된다. 누구에게 패스할 것인지 정해야 한다. 


    지도자는 부단히 의사결정의 갈림길에 선다. 갈림길에서 하나를 살리고 하나를 버려야 한다. 의사는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산소호흡기를 어느 환자에게 제공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삶과 죽음의 길이 거기서 갈린다. 예수의 사랑은 팀에 들기만 하면 되지만 공자의 인의는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한다.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는 동물적 맞대응 논리로 의사결정 못한다. 보통 사람은 '네가 이렇게 하면 내가 이렇게 한다.'는 자세로 세상을 살지만 의사는 일방적으로 환자를 살려야 한다. 저 환자는 큰 거 두 장을 불렀는데 당신은 얼마를 내겠습니까? 산소호흡기가 하나뿐이라도 의사가 이러면 안 되는 것이다.


    의사는 부모가 자식에게 베풀듯 무조건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 간단하다. 큰 것을 먼저 하고 작은 것을 나중 하면 된다. 무엇이 크고 작은지 구분할 줄 알면 합리적인 의사결정에 성공할 수 있다. 그럴 때 지도자는 팀을 이끌어갈 수 있다. 신뢰를 먼저 얻을지, 식량부터 모을지, 군비를 증강할지 판단해야 한다.


    서양이 동양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여전히 부족민의 맞대응 논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상대의 패를 보고 자신의 결정을 하려 든다. 기독교 문명의 수준이 그 정도다. 예수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의 맞대응 논리를 극복하라고 가르쳤지만 서구는 여전히 그러한 분열 프레임에 갇혀 있다. 


    물론 맞대응할 때는 해야 한다. 그러나 부족민의 맞대응의 논리로 70억 인류의 21세기를 이끌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100 받고 200 하며 레이즈를 치는 트럼프식 세계관으로는 인류를 구하지 못한다. 소아병적인 맞대응은 또 다른 맞대응을 부를 뿐이다. 중국은 일방적으로 아프리카에 퍼주는 판에 말이다. 


    부족민 특유의 맞대응 논리는 약자의 생존술이다. 팀에 끼지 못하고 겉도는 자의 방법이다. 유태인이 기독교 중심으로 돌아가는 서구세계에 끼지 못하고 2천 년간 겉돌면서 발달시킨 행동요령이다. 그들은 약자였기 때문에 약자의 행동을 한 것이다. 지금 강자의 철학으로 갈아타지 않으면 리더가 되지 못한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1]kilian

2020.04.07 (04:03:22)

"공자의 인의는 환경의 자극과 반응이라는 동물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회 안에서 역할을 찾고 인의는 더 나아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http://gujoron.com/xe/1187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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