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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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974 vote 0 2020.01.12 (20:33:10)

      
    생산력이 본질이다


    초딩 때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반공도서 덕분이다. 그 시절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일단 책이라는 것이 주변에 없었다. 책을 좋아했지만 실제로는 책과 거리가 먼 소년기였다. 방학 때 엿장수들이 갖고 오는 만화책 두어 권을 고물과 바꾸는게 전부였다. 교실 뒤편에 쌓여 있는 반공도서가 그나마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었다.

   
    반공도서는 속 보이는 책이다. 독자를 설득하려고 나름 테크닉을 구사한다. 그냥 공산당은 나쁘다고 쓰지 않는다. 공산당이라고 하면 머리에 뿔 달린 도깨비로 아는 사람은 반공도서조차 읽지 않은 사람이다. 반공도서에는 분명히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씌여 있다. 사회주의는 원칙적으로는 올바른 사상이라고 써놨다. 어라? 


    아슬아슬하다. 혹시 박정희 정권에 침투한 좌파가 쓴게 아닐까 하고 의심한 적도 있다. 허영만의 '오 한강'을 떠올려도 좋다. 이게 국정원 작품이다. 반공만화인데 한때는 운동권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입문서였다. 어차피 머리 나쁜 애들은 반공도서를 읽지 않는다. 일방적인 북한 비난을 똑똑한 애들이 읽겠는가? 머리를 써야 한다. 


    어떻게든 읽게 만들어야 하므로 기교를 부린다. 서두에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우호적인 말을 조금 써놓고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차이가 있으며, 원칙적으로는 올바르지만 현실과 맞지 않는 틀린 이론이라고 써놨다. 말하자면 우악스럽게 고함을 지르며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조곤조곤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독자와 머리싸움 한다. 


    이것들이? 감히 나와 지능대결을 벌이겠다고라고라? 어처구니가 없다. 감히 나를 이겨 먹겠다고 재주를 피워? 묵과할 수 없다. 이런 녀석들은 해치워버려야 한다. 오기발동이다. 당연히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다. 사회주의 이상은 옳은데 방법론이 현실과 맞지 않으면 내가 마르크스의 방법론을 개혁하면 된다. 왜 포기하는가? 


    이상이 옳다면 현실의 난관에 부닥치더라도 오류를 시정하며 계속 가봐야 하는 것이다. 이상은 옳은데 현실과 안 맞다는 식의 언술은 정말이지 비겁한 것이다. 이상이 옳으면 닥치고 가야 한다는게 공자 말씀이다. 마르크스가 틀린 방법론을 내놔서 사회주의를 그르쳤다면 내가 올바른 방법을 고안해보마! 이건 초딩시절 이야기다. 


    중 2가 되어서는 마르크스를 버리고 허무주의자를 자처하게 되었다. 이상이 옳으면 시련을 극복하고 끝까지 가봐야 한다. 그런데 이상이 틀렸다. 인간은 결과의 행복을 추구하는 동물이 아니라 원인의 권력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좋은 제도를 필요로 하는게 아니라 서로 내가 하겠다고 나서서 경쟁하는 바람에 좋은 제도가 찾아진다.

       

    니체를 읽고 권력에 주목한 것은 고딩 때고 중 2 때는 모든 의미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자였다. 당연히 마르크스를 부정했다. 행복 좋아하네. 유치하게시리. 초딩이냐? 행복한 사회는 이상사회가 될 수 없다. 행복감은 화학적 전기신호에 불과하다. 고통도 기쁨도 슬픔도 눈 앞에 펼쳐지는 칼라와 다를 바가 없다. 뇌가 해석하는 것이다.


    인간이 왜 뇌의 기계적인 반응에 복종하지? 뭐 근사한 것 없나? 나를 설득할만한 거 뭐 없어? 하긴 있을 리가 없지. 어차피 인생은 허무하다구. 이러고 놀았는데 아뿔싸! 어차피 의미가 없다며 양파껍질을 계속 까다가 '거 봐 양파껍질을 까도 아무것도 나오는게 없잖아.' 이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어라? 순서와 방향이 숨어 있었네?' 


    그렇다면 의미가 있네. 이렇게 되었다. 의미를 부정하다가 본의 아니게 의미를 찾아버리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어떤 의미가 아니라 의미 그 자체의 의미가 구조론이다. 의미는 사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하는 것이다. 꽃은 피는게 의미고, 사랑은 하는게 의미고, 축구는 골을 넣는게 의미고, 생명은 번성하는게 의미다. 의미가 있다.


    의미는 사건의 연결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사건에 올라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필연의 메커니즘이 있다. 마르크스를 버린 이유는 생산력 문제를 봤기 때문이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마르크스의 플러스와 구조론의 마이너스가 충돌한다. 구조론으로 보면 진보는 퇴행이다. 어떤 것이 좋아진다는 것은 나빠진다는 것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사건이 종결되고 집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0에 이른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갈수록 나빠진다. 진보할수록 살기가 팍팍해진다. 옛날에는 대충 살면 됐는데 요즘은 담배도 함부로 못 피우고, 목요일마다 분리수거도 잘해야 한다. 까다롭다.


    정치적 올바름에도 신경 써야 하고,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되었다고 혼나기 다반사다. 점점 사회가 골때려진다. 그것이 진보다. 에덴동산 시절이 차라리 좋았고 원시사회주의 시절이 좋았다. 그때가 행복했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 아닌데 왜 나는 좋지 않은 좋은 것에 가담해야 하는가? 그것이 중 2 때 나의 허무주의 세계관이었다. 


    예컨대 이런 거다. 한국이 임진왜란 때 망해버렸다면 우리나라가 잘 사는 일본나라인데 좋잖아. 그때는 일본이 대단한 선진국이었다. 이순신이 괜히 헛심 쓰는 바람에 망했네. 지금이면 일베 애들이 할 법한 이야기다. 이완용이 어쩌면 애국자 아냐? 애국주의라니. 진중권이 비웃는다. 세계시민의식을 가져야지 얼어 죽을 애국타령.


    진중권은 정확히 나의 중 2 시절에 머물러 있다. 하여간 그때는 그랬다. 국적이 무슨 의미가 있나? 인류는 다 한 가족인데. 일본이 침략하면 잽싸게 항복해 버리면 사람 안 죽고 좋잖아. 괜히 독립운동은 해 가지고 말이야. 기생충 서민이 이와 유사한 소리를 한다. 중딩논리다. 국적도 피부색도 성별도 그 무엇도 싱거울 뿐 의미 없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무기를 손에 넣을 때다. 애국자가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 손에 총이 쥐어졌기 때문이다. 내 손에 무기가 들어오는 순간 인간의 눈빛이 바뀐다. 이제 싹 죽었어. 이것들이 까불고 있어. 일본이든 중국이든 미국이든 손봐주겠어. 묵과할 수 없어. 세계정복도 가능하지. 못할게 뭐야. 이순신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한국이 일본 되면 나의 세계정복 전략에 차질이 빚어진다구. 섬나라에 갇혀서 말야. 이순신 덕에 국토가 보존되어 나의 세계정복이 가능해졌어. 세종대왕이 한글 만들어줘서 우리에게도 기회가 주어진거야. 구조론이라는 세계정복 수단이 생겼는데 겁날게 뭐람. 패배주의여 안녕. 허무주의여 안녕. 노자가 씨발놈이라는걸 그때 알았다.


    왜 세계를 회쳐먹을 생각을 못 하고 기껏 살아남을 생각을 하지? 바보 아냐? 살아남아서 뭣하게? 백 살까지 살아서 뭣하게? 노자와 장자의 우주적인 시야로 보면 100년 세월도 눈 깜짝할 새다. 노자와 장자는 사람의 스케일을 우주적으로 키워준다. 우주적으로 커져서 보면 노자와 장자는 형편없는 찐따 새끼다. 그게 애들 소꿉장난이다.


    무기가 있는 자와 없는 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노자 패거리는 약자이며 무기가 없는 자이며 상종할 이유도 없는 것들이다. 바보들과 같이 놀면 바보가 옮아서 바보된다. 어차피 세상은 5퍼센트가 이끌어가는 것이며 95퍼센트는 5퍼센트를 따라갈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있다면 아프리카에 있다. 주저앉아 있다.


    무기가 있으면 전진하고 무기가 없으면 찌그러져야 한다. 닥쳐! 무기를 손에 넣은 자에게만 발언권이 있다.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사람이 그까짓 바둑을 두면 쌀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하고 시비할 자격이 없다. 총이 없는 사람이 전쟁을 하면 무슨 이득이 있느냐고 말할 자격이 없다. 애초에 발언권이 없다. 대화의 격이 맞지 않는다. 


    총을 쥐고 상대의 심장을 겨눈 다음 이 총이 어디에 쓸모가 있느냐고 물어야 한다. 하여간 바보들은 대화에 끼워줄 이유가 없다. 각설하고 필자가 경제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 무기가 생산력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총 없는 사람이 총을 내려놓아라 하고 떠든다면 황당하다. 개가 인간에게 목줄을 내려놓아라 하고 말하는 격이다.


    내려놓기 좋아하네. 너는 손에 들어본 적이나 있어? 경제의 본질은 생산력이다. 마르크스의 생산력은 무엇인가? 그래서 나는 중 2 때 마르크스를 버렸다. 사실이지 사회주의는 상당한 생산력이 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담론이다. 단,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다. 생산력 범위 안에서 밸런스다.


    생산력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사회주의적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왜 나는 초딩 때 사회주의에 매료되었는가? 소년 때 생각했던 것은 그렇다. 전 세계 천재들을 모두 잡아다가 잠실체육관에 가둬놓는다. 상온핵융합을 성공할 때까지 풀어주지 않는다. 길어도 30년 안에 인류는 에너지난을 해결하고 전 세계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것을 해내려면 전 세계 천재 과학자를 죄다 잡아와야 하는데 그렇다면 방법은 세계혁명 외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하자는 말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인류의 지혜를 모은다면 불가능은 없다. 인류가 힘을 합친다면 사하라 사막을 옥토로 만들 수 있다. 호주의 절반 정도 면적만 있으면 100억은 먹여 살린다.


    그런 초대형 프로젝트를 띄울 수 있는 대단한 권력이 지구 어디에도 없을 뿐이다. 인류는 쓸데없이 원자폭탄 경쟁이나 하고 있을 뿐 멋진 프로젝트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런 것은 세계정부가 있어야 가능하다. 세계혁명이 필수적이다. 엄청난 생산력의 혁명으로 국가에서 개인에게 무한히 퍼주는 이상사회는 가능하다. 못할게 뭐람?


    소련이 한때 무한히 퍼주는 권력이었다. 북한이 혜택을 받았다. 소련의 위성국가들도 혜택을 받았다. 소련은 무한히 퍼주다가 거덜 나서 망했다. 왜 소련은 망했는가? 사회주의 무한 퍼주기는 어느 정도는 기능한다. 시베리아는 넓고 자원은 무한히 많다. 모든 소련 가정은 가스비를 한 푼도 내지 않고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 


    주택은 국가에서 공짜로 준다. 자동차도 식구 수 대로 신청해놓고 기다리면 받을 수 있다. 줄만 서면 다 해결된다. 그런데 소련은 왜 망했지? 혁신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왜 혁신이 안 되나? 효율은 비효율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잘 작동하는 것은 극도의 효율성 때문인데 그 효율성은 동시에 비효율성을 수반한다. 


    어떤 것이 효율적이면 효율적이지 않은 것이다. 낡은 것이 효율적이면 새로운 것은 비효율적이다. 소련의 시스템은 신제품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곧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는 전제하에 성립한다.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사상이다. 필요는 원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필요해서 소비하는게 전혀 아니다. 


    생산과 소비로 돌아가는 유기적인 시스템을 작동시키기 위해 소비하는 것이다. 소비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죽어서 망한다. 인간이 필요에 따라 행동하면 구조론의 마이너스 원리에 의해 점차 마이너스 되어 망한다. 소련멸망은 필연이다. 문명의 본질은 생산력의 제고다. 생산력에서 밀리면 어떤 고상한 이론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전 세계의 모든 과학자가 힘을 합쳐서 인류의 에너지난을 단번에 해결하는 것이다. 이건 왜 안 될까? 어릴 때는 그랬다. 지금부터 50년 후인 2020년쯤 되면 청소는 로봇이 하고 인간은 하루 4시간 정도만 일하며 살 것이라고. 그런데 말이다. 그 로봇은 어디로 갔냐고? 


    인류의 진보는 생각보다 더디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은 2020년에도 오지 않았다. 과학의 발전속도는 생각보다 느리다. 당연히 지금쯤은 모두 개인용 자가용 비행기 한 대씩은 갖고 있어야 하는 것 아냐? 사회주의의 두 번째 방법은 의사결정구조를 단순화하여 극도의 효율성을 달성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특유의 낭비를 없애기다.

   
    모든 불필요한 소비를 제거하고 모든 것을 극도로 효율화한다면? 여기서 구조론과 충돌한다. 효율적인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것이 구조론의 입장이다. 예컨대 문화라는 것은 귀족들의 한가한 뻘짓이므로 지구에서 문화를 모두 없애버리자는 모택동 정신으로 무장한다면? 교회와 사찰을 제거하고, 모든 문화를 없애면 인류는 행복할까?

    

    권력이 깨진다. 문화는 곧 권력이다. 교회에 가는 이유는 교회권력 때문이고 영화를 보는 이유는 먼저 본 사람이 아직 못 본 사람에게 자랑하는 권력을 누리려는 것이고, 음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대중가요의 가사를 먼저 외운 사람이 노래방에서 권력을 잡게 하는 용도다. 인간은 권력적 동물이며 인간의 모든 행위는 권력지향적 행위다.

   
    효율성은 권력의 파괴에 의해 얻어진다. 인간이 전쟁을 하는 이유는 때로는 전쟁이 유일한 권력창출방법이기 때문이다. 특히 북방 유목민이라면 문화가 아예 없으므로 전쟁 외에 권력창출의 방법이 없다. 진정한 답은 오직 생산력이며 권력을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주의를 하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권력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지자체는 비효율적이다. 시장 군수들은 대개 삽질이나 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자체를 없애버리자. 지방의회는 지방유지들에 의해 마피아소굴이 되어 있다. 지방의회 없애자. 이게 우파 꼴통들의 좌파꼴통적 사고다. 대부분 이런 소리 하는 사람은 일베충인데 모택동 논리와 정확히 같다. 지자체를 없애면 의사결정권자 숫자가 줄어든다. 


    권력총량의 감소가 일어난다. 권력총량은 상호작용 총량에 비례하는 것이다. 상호작용 총량은 전쟁총량, 경쟁총량, 게임총량, 충돌총량에 비례한다. 연예를 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커피값을 뜯기고 피자값, 극장값을 손해보므로 국가에서 중매해주자는게 통일교의 마르크스주의적 사유다. 문선명이야말로 모택동의 광신도인 것이다.


    연애총량은 생산총량에 포함되고, 전쟁총량도 생산총량에 포함된다. 단, 전쟁은 멀쩡한 것을 때려 부수는 수가 있으므로 총성 없이 전쟁하자는게 민주주의다. 생산력이 본질이며 생산력은 상호작용 총량에 비례한다. 생산력을 증대하는 방향으로, 상호작용을 늘리는 방향으로 인류는 움직여야 하며 이는 동시에 비효율화를 수반한다.


    인간이 하루 4시간만 일하면 좋겠지만 그 나머지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죽은 것과 같다. 하루에 4시간만 살아있는게 인류의 목적인가? 그 나머지 시간에 무언가를 하려면 더 일해야 한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고 밸런스가 있다. 상호작용 총량증가에 비례하는 생산력 증가가 답이며 이는 경제를 넘어선다.


    정치와 사회와 문화다. 전체를 보지 않고 경제분야만 좁혀서 보는 논의는 유치하다. 알아야 한다. 경제에는 경제가 없다. 행복에는 행복이 없다. 오로지 권력총량, 매력총량, 능력총량, 상호작용총량 증대만이 유의미하다. 인류는 그 방향으로 전진한다. 생산력의 증대방향이다. 그것은 전쟁증대를 상당히 수반하는 위태로운 것이다.


    우파꼴통과 좌파꼴통의 공통점은 위험한 효율만능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효율적으로 실행하려면 어떤 결정도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결정은 동시에 그 결정의 실행에 방해가 된다. 전투 중에 장수를 바꿀 수 없다. 북한은 지도자를 바꾸지 못한다. 효율적 실행은 비효율적 결정이며 효율적 결정은 비효율적 실행이다. 


    좌파는 결정을 고민할 뿐 실행을 못 하고 우파는 실행에 집착해서 결정을 고민하지 않는다. 이는 원래 모순된 것이다. 여기에는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지만 동시에 균형은 균형이 아니다. 기계적인 균형은 오히려 불균형이다. 확률만이 믿을 수 있는 것이며 상대의 대응을 봐가면서 합당한 대응을 할 수 있을 뿐 찍어주는 정답은 없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0]kilian

2020.01.13 (04:59:02)

"상호작용 총량증가에 비례하는 생산력 증가가 답이며 이는 경제를 넘어선다.  정치와 사회와 문화다."

http://gujoron.com/xe/1157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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