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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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115 vote 0 2019.09.20 (14:58:42)

    근원을 사유하는 기쁨


    이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혼자 즐기기 아깝다. 대화가 되는 사람이 어딘가에 한 사람쯤 있었으면 좋겠지만 없다. 검색해도 안 나온다. 비슷한 것도 없다. 근처에 간 것도 없다. 재미로라도 해볼 만한 이야기인데 말이다. 심심풀이 시간 때우기로 좋잖아.


    인간 사유의 한계점을 찍고 오기. 멋지잖아. 흥분되잖아. 나만 그런가? 지구평면설, 기독교 창조설, 라즈니쉬 잡설, 환빠의 염병. 이런 똥 같은 소리에는 솔깃해하면서 말이다. 별수 없이 2500년 전에 다녀간 데모크리토스와 대화해야 한다. 깝깝한 일이다.


    고인과의 대화는 일방통행이다. 바로바로 반응 와주는 쌍방향 의사소통이라야 재미지잖아. 그렇다. 구조론 비슷한 것이 있다면 석가의 연기법이다. 역시 2500년 전에 살았던 할배와 대화해야 한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말이 통하는 사람은 공자다. 


    역시 2500년 전 옛날 사람이다. 공자의 많은 제자 중에 공자 발밑 근처까지 간 인간은 없다. 공자는 그리하여 왜곡되었다. 스승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중구난방으로 각개약진했다. 증자와 자사는 쳐죽여야 한다. 맹자는 한심하다. 순자는 엉뚱하다. 


    공자가 100이라면 50까지 가준 인간이 없다. 증자는 기록만 했고 자사는 타락시켰고 맹자는 팔아먹었고 순자는 왜곡했다. 주자는 도교와 불교의 아이디어를 훔쳤으니 포장지 갈아타기 기술이다. 공자 이후 퇴행을 거듭하여 가식과 위선의 유교가 되었다.


    괴력난신을 물리치고 진리의 정수를 치라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유가들이 써먹는 허례허식은 공자가 반대한 그 괴력난신이다. 그들은 유교를 쇼로 보았다. 본질은 사라지고 보여주기 행동만 남은 것이다. 쇼로 사람을 홀리는 것이 난亂이다.


    순자가 추구한 것은 력力이다. 자사가 추구한 성은 신神이다. 증자가 떠받드는 천天도 신의 변형이다. 천신과 귀신의 전투력 차이가 있을 뿐 본질은 같다. 달을 가리켜도 죽어보자고 손가락만 보는 데는 당해낼 장사가 없다. 현장에서 먹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저 먹히는 짓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데모크리토스의 발끝에 미치지 못하고 플라톤은 괜히 데모크리토스를 질투해서 자기와 라이벌 구도를 만들었다. 플라톤의 여러 아이디어는 상당히 데모크리토스의 것을 훔친 것이다.


    남의 아이디어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자기 아이디어가 만들어진다. 이데아설은 원자설을 먹히도록 종교적으로 변용한 것이다. 그래도 플라톤의 사상은 일부 진보한 데가 있다. 똥은 아니다. 석가의 제자들은 죄다 똥이다. 용수의 공空 사상이 그나마 낫다.


   그러나 공사상은 석가의 연기를 해설한 것에 다름 아니다. 연기라고 하면 동사다. 공이라 하면 명사다. 용수는 동사를 명사로 바꾸어 석가의 개념에 이름을 붙였을 뿐이며 그것이 대승불교의 토대가 된다. 석가 이후 700년간 불교는 퇴행만 거듭했다. 


    대승불교가 일부 힌두교와 티베트 민간신앙과 섞여서 밀교화한 것은 그것이 현장에서 먹히기 때문이다. 그렇다. 2500년 전에 그리스와 인도와 중국에서 동시에 똑똑한 사람이 하나씩 출현했고 이후로는 쭉 바보들만 있어왔다. 도무지 대화가 되겠는가?  


    데모크리토스로 돌아가 보자. 최초의 것은 어떤 대상일 수 없다. 어떤 대상이 있으면 그 대상을 바라보는 관측자인 주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자설은 틀렸다. 그러나 원자설은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회수되어야 할 각종 떡밥이 넘친다는 말이다. 


    구조론은 원자설이 아닌 구조설이다. 원자설은 쪼개지지 않는 아톰atom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런데 쪼개지지 않는다는 말은 물리적으로 단단해서 쪼개려고 해봤는데 잘 안되더라는 말인지 원리적으로 내부구조가 없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벌써 에러가 나와버린 것이다. 구조론은 다르다. 최초의 것은 어떤 하나의 대상이 아니다. 대상과의 관계 그 자체다. 처음 뭔가 있다고 치고 그것은 일단 아무것도 아니다. 한 개거나 두 개거나 간에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서 존재의 정의가 요구된다. 


    우리가 무엇을 존재라고 할 것인가? 있다나 is는 턱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유有는 입술로 대상을 가리키고 무無는 입술을 오므려 닫는다. you도 입술로 상대방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주체의 관점에서 가리켜지는 대상을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주체인 인간의 입장에서 대상화된다는 즉 대칭된다는 말이다. 대칭된다는 것은 토대를 공유한다는 말이다. 즉 나와 대상이 하나를 공유하는데 내가 있으므로 대상도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든, 잠을 자든, 길을 가든 그것은 동사이며 동사는 주어를 필요로 하고 둘은 세트이며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동사는 부분이고 주어는 전체이며 부분이 있다면 전체도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거다.


    머리가 있으면 꼬리가 있고, 기관차가 있으면 객차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고,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고, 왼쪽이 있으면 오른쪽이 있다. 이것이 축과 대칭의 원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분의 단서를 통해 추론하여 전체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존재를 정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히 있는 것이다. 있으니까 있지. 만져보라고. 있잖아. 느껴지잖아. 이런 식이다. 윽박지른다. 있는데도 만져지지 않는다면? 1초에 수천억 개씩 유령처럼 우리 몸을 통과하는 소립자들은? 곤란해진다.


    하긴 2500년 전에 그 정도 했으면 됐지 그 이상을 기대한다는 건 무리다. 존재는 반응하는 것이다. 응답하면 존재다. 있는데도 응답하지 않으면? 그것은 빌붙어있는 것이다. 빌붙어 있는 것은 있지만 없다. 그렇다. 존재와 무 사이에 거대한 세계가 있다.


    하여간 이 부분을 진지하게 논하는 사람은 없더라. 잼있는데 말이다. 짜릿짜릿하잖아? 그렇지 않나? 여기서 하나가 바뀌면 우주가 통째로 다 바뀌는데 말이다. 여기서 각도가 단 1도만 틀어져도 거기에 연동되어 철학과 세계관 가치관을 다 바꾸어야 한다.


    아니 마르크스주의든 자본주의든 무슨주의든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여기에 있는데 다들 어디서 무슨 삽질을 하고들 있는 거야? 그 밑바닥에서 무슨 결론을 내더라도 위에서 틀어버리면 끝장이라고. 한 방에 우주가 통째로 날아간다고. 

 

    철학에 무슨주의 무슨주의하며 잔뜩 많지만 의미 없다. 허무하다. 여기서 방향을 정한다. 큰 것은 작은 것에서 나왔다.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을 이루었다. 그런데 과연 모였을까? 누가 애들을 집합시켰지? 어떤 자식이야? 어떤 놈이든 나와보라고. 너야?


    데모크리토스의 사상은 결국 모음설이자 집합설이다. 과연 모였을까? 누가 모았지? 구조론의 답은 모인 게 아니고 구조되었다는 거다. 그러므로 애들을 불러모을 누군가는 없다. 데모크리토스가 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논리로 모음설은 부정되어야 한다.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이 꼬여 여러 가지 모습을 연출한다. 축과 대칭이다. 세상은 집합된 것이 아니라 복제된 것이다. 세상을 끌어모으는 힘은 외부에도 없고 내부에도 없다. 힘이 외부에 있으면 종교의 신이 등장한다.


    힘이 내부에 있으면 통제가능성이 무너진다. 구성소들이 각자 다른 규칙을 가지고 충돌한다. 바둑판이 먼저냐 바둑알이 먼저냐다. 바둑판이 먼저라면 종교의 신이 출현하고 바둑알이 먼저라면 바둑의 룰을 정하지 못한다. 답은 서로 걸쳐져 있다는 거다.


    그것이 구조다. 구조의 구는 공간의 걸쳐짐이요 조는 시간의 지어감이다. 최초의 것은 빌붙은 것이며 그것은 희미한 것이다. 우리는 있거나 없거나로 알지만 사실은 있거나 없거나 빌붙었거나 희미하다. 있는 것은 반응하고 없는 것은 반응하지 않는다.


    빌붙은 것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고 희미한 것은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를 독립적으로 반응하는 것으로 정의해야 한다. 최초의 것은 그러한 반응을 끌어내는 절차다. 최초에 원자가 아니라 관측자에 반응하는 절차가 있었다.


    우리는 변화를 추적하여 단서를 얻으며 변화는 공간과 시간에서 추적된다. 공간의 최소와 시간의 최초가 있다. 왜 시계가 작동할까? 톱니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간다. 그런데 앵커라는 부품이 앞뒤로 왕복하며 방향을 바꾸는데 순간적으로 멈추게 된다.


    괘종시계의 시계추는 흔들리며 좌우를 오가다 왼쪽과 오른쪽의 꼭지점에서 잠시 멈추고 방향을 바꾼다. 여기서 간격이 정해진다. 우주에 시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방향전환이 있고 그 지점에서 일시적으로 멈추기 때문이다. 공간이 존재하는 원리도 같다.


    반대로 공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시간의 멈춤에서 방향이 틀어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멈추었다면 에너지는 어디로 갔을까? 그것이 공간이다. 공간이 멈추었다면 에너지는 어디로 갔을까? 그것이 시간이다. 시공간은 상호의존적이며 둘이 아닌 하나다.


    공간은 말려있는 것이며 그것을 대상에 입혀서 풀어내면 시간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외부의 관측자에 입혀서 풀려나는 절차다. 그러므로 반드시 관측자가 있다. 공간과 시간은 힘과 운동이다.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으면 힘이고 풀리면 운동이다. 


    힘과 운동은 관측대상에 입혀진 방식이 다를 뿐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힘은 입자고 입자는 질이고 최종적으로는 계가 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9]kilian

2019.09.21 (03:01:48)

"우주에 시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방향전환이 있고 그 지점에서 일시적으로 멈추기 때문이다. ~ 반대로 공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시간의 멈춤에서 방향이 틀어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멈추었다면 에너지는 어디로 갔을까? 그것이 공간이다. 공간이 멈추었다면 에너지는 어디로 갔을까? 그것이 시간이다. 시공간은 상호의존적이며 둘이 아닌 하나다."

http://gujoron.com/xe/1125512

[레벨:5]펄잼

2019.09.30 (22:42:35)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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