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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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917 vote 0 2019.04.04 (08:41:58)

    신철학 제언


    철학은 의사결정학이다. 어떻게든 의사결정해야 한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남이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사건에 휩쓸려 있다. 하거나 아니면 당하거나다. 나는 그것을 게임으로 표현한다. 키를 잡고 사건의 주인이 되거나 아니면 외부의 힘에 휘말려 짓밟히거나다. 거기에 옳고 그름은 없다.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사랑도 없고 눈물도 없다. 참도 없고 거짓도 없다. 수학처럼 건조한 세계다. 게임에 이기면 다음 패를 받고 게임에 지면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뺏긴다. 이긴 자에게는 보상이 없고 진 자에게는 발언권이 없다. 생명과 같다. 이기면 호흡을 이어가고 지면 호흡을 멈춘다. 이긴 자는 다음 카드를 돌리고 진 자는 침묵을 강요당한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정의도 아니고 불의도 아니며 오로지 이기는 결정이 필요할 뿐이며 사람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선이니 악이니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들은 장기전이냐 단기전이냐, 전면전이냐 국지전이냐에 따른 세부전술에 불과하다. 게임의 종목을 바꿀 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토너먼트와 같다. 이기면 다음 시합이 기다리고 있고 지면 끝이다. 이기는 결정을 해야 한다. 허다한 문명이 사라졌다. 허다한 나라들도 사라졌다. 그들은 발언권이 없다. 없어졌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하지 않는다. 옳고 그르고 간에, 선하고 악하고 간에 발언권부터 얻은 다음 말해야 한다. 이긴 자가 말하는 게 규칙이다. 


    철학하자. 어떻게 살 것인지는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이 상당부분 결정한다. 여기는 어디인가? 산이면 나무꾼이 되기 쉽고, 바다면 어부가 되기 쉽고, 들이면 농부가 되기 쉽고, 도시면 장사꾼이 되기 쉽다. 문제는 그 환경이 지속적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21세기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인터넷 시대다. 개인화되는 시대다. 


    환경은 변한다. 수동적으로 적응할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환경을 개척해야 한다. 철학한다는 것은 환경 안에서 주도권을 차지하고 적극적으로 의사결정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쓰지 않으면 작가는 아니고 노래하지 않으면 가수가 아니고 그리지 않으면 화가는 아니다. 


    맞대응해야 한다. 그리고 이겨야 한다. 패배한 자는 발언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이런 철학은 없다. 남산 위의 잠두봉은 천 년째 침묵 중이지만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대응해서 이겨야 한다. 존재는 사건이고 사건은 에너지를 통제하는 방법으로 자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일단 존재해야만 한다.


    패배하면 사라지고 사라진 자는 존재가 없다. 어떻게 철학할 것이냐는 환경과 어떻게 싸울 것이냐다. 어떻게 이길 것이냐다. 어떻게 자기 존재를 성립시킬 것이냐다. 왜냐하면 인간은 희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짓밟히고 휘둘리고 무시당하면 내 존재가 부정된다. 노예는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다. 


    이겨서 떳떳하게 내 존재를 성립시킨 다음에 비로소 발언할 수 있다. 사랑도 행복도 정의도 윤리도 도덕도 성공도 그때 가서 말할 수 있다. 그전에는 말해보기도 전에 이리저리 떠밀리고 배척되고 소외된다. 희미해져 버린다. 존재는 사건이며 이겨서 떳떳해진 다음에야 그 사건이 복제되고 전파된다. 탄탄해지는 것이다.


    생명성이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환경을 벗어날 수 없지만 그 환경은 자신이 제안한 게임의 형태에 따라 변한다. 시골에 처박혀 있는가 천하로 나아가는가에 따라 다른 게임이 된다. 그 게임의 주연이 될지 조연이 될지는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이동기술과 소통기술이 결정적이다. 환경의 제약을 극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 안에서 그 환경적 조건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동기술과 소통기술에 의지하여 그 환경적 제약을 극복하면서 또 그 환경을 변화시키면서 새로운 게임의 형태를 창조하고 외력의 작용에 대해서는 선제대응하여 이긴 다음 그 승리의 기술을 복제하고 전파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럴 때 시인은 노래할 수 있다. 


    화가는 그릴 수 있고 악사는 연주할 수 있다. 자기 존재를 성립시킬 수 있다. 공간으로 전파되고 시간으로 연결되는 사건의 생명성 안에서 인간은 완전할 수 있다. 어떻든 인간이 환경을 부정할 수는 없다. 바둑을 두며 바둑판을 부정할 수 없고, 수영을 하며 물을 부정할 수는 없고, 경작하며 땅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기는가 지는가다. 수영을 하면 물을 이기고 농사를 지으면 땅을 이기고 장사를 하면 물가를 이겨야 한다. 지면 중단된다. 운전자가 자동차를 이기지 못하면 교통사고가 난다. 대상을 장악하고 통제하고 의사결정해야 한다. 이기려면 우선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은 집단에서 나오므로 크게 무리를 이루어야 한다. 


   그때 그 시절 주로 천재지변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좌우되었으므로 예수의 구원사상이 먹혔다. 기독교는 결과적으로 문명권 단위 대집단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종교가 이룬 것은? 신대륙 진출이다. 인간을 이동시켰다. 불교는 동쪽으로 일본까지 갔고 이슬람은 말레이지아까지 갔다. 기독교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천재지변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던 시대에 인간은 대집단을 만들어 하늘까지 가고 땅끝까지 가봐야 했던 것이다. 그 시대의 도전과 응전이다. 환경이 운명을 정한다. 운명과의 싸움이다. 대집단을 이루고 대표자를 뽑아 사방으로 진출했으니 하늘과 땅이 운명을 지배하던 시대에 하늘과 땅의 구석구석을 탐색해 본 것이다. 


    산악으로 바다로 정글로 사막으로 극지로 진출했다. 그리고 산업화 시대다. 환경이 변했다. 발달한 이동기술과 소통기술이 산과 바다와 사막과 정글과 초원의 한계를 극복하게 한다. 이에 국가주의가 대두한다. 국가주의를 넘는 초국가주의로 맞서면 마르크스주의다. 사회주의는 빈말이고 본질은 초국가적 에너지 동원이다.


    국가와 국가가 대결하던 시대에는 용병으로 전쟁을 했다. 국민을 동원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라는 이름은 바닥까지 긁어서 모두 동원하겠다는 의지다. 본질은 제국주의다. 배와 자동차와 비행기를 이용한 이동기술의 발달과 전화와 라디오와 TV를 이용한 소통기술의 발달이 국경을 넘어 제국주의로 치닫게 한다.


    제국주의 뺨치는 초제국주의 아이디어가 공산주의다. 혁명을 일으켜 인류를 하나의 초제국으로 통합한 다음 이름에서 제국이라는 두 글자를 빼면 된다. 제국주의든 초제국주의는 지난 시대의 유행이다. 무역의 발달이 제국을 의미없게 만들었다. 세계가 3개의 제국으로 분할된다는 조지 오웰의 1984년은 실현되지 않았다. 


    소확행이 먹히는 개인주의 시대다. 사회는 점차 마이너스되고 있다. 구조론으로 보면 질 단계에서 커다란 울타리가 만들어진다. 종교가 그 역할을 했다. 입자 단계에서 강력한 지도자가 선출된다. 독재자가 출현한다. 힘 단계에서 실질권력을 장악한 다양한 엘리트 집단이 등장한다. 운동으로 량으로 갈수록 권력은 쪼개진다.


    통제가능성이 증대되기 때문이다. 문명의 발전에 의한 다양한 물적 수단을 확보한 결과로 의사결정의 권력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넘어가고 있다. 장벽을 허물고 국경을 허무는 이동기술과 소통기술의 발달은 역으로 거기에 맞대응하는 능력을 키웠다. 의사결정은 인류단위로 커졌지만 한편으로는 개인단위로 잘게 쪼개졌다. 


    조지 오웰의 예견대로 더 쉽게 이웃을 감시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인류는 더 은밀한 인터넷 도피처를 생산해냈다. 이동기술과 소통기술이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만 영리한 개인들은 더 많은 작은 돌담과 지붕과 옷감으로 자신을 감추고 포장하는데 성공하곤 했다. 인간은 어떻게든 환경변화에 맞대응해서 이기고 만다.


    가족은 점차 쪼개진다. 가부장은 사라지게 되었다. 부족은 무너졌다. 약자를 억압하고 소수자를 차별하고 이방인을 배척하라고 외치는 부족주의 퇴행세력의 권력적 기동은 도처에서 저항에 직면해 있다. 미국인들이 총기소지에 집착하는 것은 한밤중에 도끼를 들고 울타리를 넘어 들어오는 침입자에 맞대응하려는 것이다. 


    그런 시절은 100년 전에 지나갔지만 여전히 그들은 대응하고자 한다. 긴장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때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곤 했는데 지금은 대응하여 이길 수 있다. 이길 수는 있는데 적이 침입해오지 않아 허무하다. 그들은 이길 수단을 손에 쥐었지만 이기지 못하고 있다. 환경변화에 대응하여 새로운 적을 발굴해야 이긴다.


    인간은 사건의 주인이다. 사건은 널리 연결되어야 한다. 존재하지 않는 침입자를 막는다며 횃불 들고 연발총으로 무장한 채 울타리 앞을 서성댄다면 코미디다. 21세기의 돈 키호테다. 21세기의 침입자는 누구인가? 정준영의 몰카인가? 조 바이든의 나쁜 손인가? 게임은 계속된다. 침입자는 있다. 맞대응하고 이겨야만 한다.


    승리의 소식을 복제하고 전파해야 한다. 인류가 사는 방법이다. 철 지난 레파토리를 읊어댄다면 피곤하다. 새롭고 산뜻한 이야기를 찾아내야 한다. 인류의 도전과 응전은 계속된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제는 과학의 언어로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칸트의 도덕이나 윤리나 이성은 공허한 선언이다. 우선 언어답지 않다.


    공자의 정명사상과 어긋난다. 도덕이니 윤리니 이성이니 정언명령이니 하면 제법 고상해 보이지만 엘리트와 비엘리트 간에 차별을 두어 다단계 방법으로 대집단을 만들어보려는 책략에 불과하다. 얍삽한 수작이 아닐 수 없다. 말하자면 귀족 1급 자격시험인 것이다. 합격하면 작위준다. 그런 얕은 수작에 넘어가면 안 된다. 


    예수가 신의 이름으로 팔아먹던 천국이니 내세니 구원이니 하는 것들이 더 이상 먹히지 않자 엘리트의 이름으로 윤색하여 팔아먹는 것이 이성이니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이다. 니들 엘리트 되고 싶지 않아? 내 밑으로 줄 서봐. 일단 권력은 내가 오로지 할게. 이런 거다. 낱낱이 진실을 폭로해야 한다. 인간은 환경과 싸운다.


    게임에서 승리하기 원하고 그러므로 권력을 필요로 한다. 정의, 평화, 평등, 성장, 분배는 개소리고 인간은 다만 권력을 원한다. 사건 안에서 에너지 흐름에 올라탄 채 상황을 장악하고 통제하고 의사결정하기 원한다. 의사결정권을 획득하기 원하고 주도권을 장악하기 원하고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으로 쳐들어가고 싶어 한다. 


    권력은 강자와 약자 사이, 부자와 빈자 사이, 여성과 남성 사이, 지역과 지역 사이에, 기업과 노동자 사이, 전방위적 힘의 균형에 따라 대칭의 축을 장악한 국민의 주도권에 의해 달성된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자신이 권력자가 되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사건 속에서 호흡하기를 원한다. 사건이 있는 모든 곳에 권력이 있다. 


    인간은 정의보다 권력을, 평화보다 권력을, 평등보다 권력을, 분배보다 권력을, 성장보다 권력을 원한다. 발언권을 원하고 마이크 잡기 좋아하고 TV에 나오면 좋아라한다. 사건이 복제되고 증폭되는 과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안에 생명성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의 분출과 약동에 몸이 먼저 반응하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방향성을 얻어 기세를 이루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과정을 목격하고 체험하기 원한다. 그 속에서 호흡하며 얼싸안고 하나되기 원한다. 사건에 그것은 가능하다. 사건도 없고 기세도 없고 흐름도 없이 행복과 사랑은 의미없다. 쾌락도 의미없고 불로장수도 의미없다. 적이 침입하지도 않는데 총 들고 보초 서는 격이다. 


    종교지도자가 행복과 사랑과 평화를 설파하면 군중들이 일제히 몰려가서 듣고 있지만 그들이 실제로 느끼고자 하는 것은 모여있는 군중의 열기 그 자체이지 성직자 입에서 나오는 언어가 아니다. 말은 그냥 가져다 붙인 것이다. 레토릭은 서비스에 불과하다. 지루하니까. 교회에 모인 군중은 그저 군중이 되고 싶은 것이다. 


    선거 때만 되면 유세장에 사람이 모인다. 선거는 군중이 되고 싶은 자들에게 군중이 될 기회를 준다. 정치인이 서문시장에 5천 명 모아놓고 기세를 올릴 때 대중가수는 10만 명을 잠실체육관에 모아놓고 큰소리를 친다. 빌미를 얻어 군중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군중은 권력의 자궁이기 때문이다. 권력자보다 높은 느낌이다.


    성공이나 출세나 쾌락이나 명성이나 불로장수나 행복은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지어낸 허구적 관념일 뿐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만 유의미하다.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에게만 먹힌다. 인간은 진정 무엇을 근거로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진정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그것은 에너지의 계속성이다. 부단한 상호작용이다.


    의미와 가치다. 이동기술과 소통기술이다. 어디든 갈 수 있다면, 또 누구든 연결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만날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인생은 성공이다. 갈 수 없고, 연결할 수 없고, 만날 수 없을 때 고립된 인간은 불안해지고 그럴 때는 광장에 모여든 군중이 되어 안도감을 느끼고자 한다. 자기에게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건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일으켜 놓은 사건에 묻어가려고 한다. 누가 사건 좀 일으켜주지 않나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눈치 빠른 자가 낌새를 알아채고 저기 빨갱이가 있다고 소리치면 인간은 떼로 몰려들어 졸지에 군중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자기 사건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진짜는 환경과의 긴밀한 상호작용에 있다. 에너지는 그곳에 있다. 에너지는 계의통제가능성이다. 입력과 출력 사이에 그것은 있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그것은 있다. 자극과 반응사이에 그것은 있다. 노동과 보상 사이에 그것은 있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조작할 스위치가 있다. 그 스위치를 켜고 꺼서 의사결정하는 것이다.


    거기에 알아야 할 구조가 있다. 구조는 의사결정구조다. 에너지를 태운 계 안에서 구조는 작동한다. 축과 대칭의 구조다. 인간은 축을 움직여 대칭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의사결정한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서 축을 움직여 스위치를 조작한다. 입력과 출력 사이에서 그리고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스위치를 조작하여 결정한다.


    언제라도 계의 에너지 통제가능성을 추구해야 한다. 에너지의 방향성을 추구해야 한다. 자신에게 에너지가 없으므로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사건 뒤에 줄 선다. 그러다가 군중이 되어버린다. 하지 않으면 당한다. 당하지 않으려면 선제대응해야 한다. 군중이 되면 게임에 진다. 떠밀리고 휩쓸리고 발목잡히다 결국 버려진다.


    왜 무대 위에서 노래하지 못하고 무대 밑에서 박수 치고 있나? 왜 BTS가 집금하는 현장에서 그대는 지불하고 있나? 왜 남이 만들어놓은 유행에 몸빵부대로 봉사하고 있나? 왜 자신의 사건을 일으키지 못하나? 왜 자기 노래를 부르지 못하나? 이기지 못하면 지는 것이다. 지면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자신을 배제시키는 것이다. 


    예전에는 사건이 민족단위에 국가단위로 일어났으므로 군중이 동원되었지만 지금은 개인이 각자 평가되는 시대다. 예전에는 '나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 왔어.' 하면 다들 경외하는 눈빛으로 What do you think about Korea?를 베풀었지만 지금은 흥민이형 안부를 물어오는 초딩도 없다. 국적과 피부색에 묻어가기 없다.


    개인의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각자 자기 불을 질러야 한다. 내 안에 쟁여놓은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개인의 미학적 완전성을 추구해야 한다. 외력의 자극에 반응할 수 있을 때 존재는 완전하다. 무엇보다 과정에서의 납득함을 추구해야 한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서,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입력과 출력 사이에서 의사결정한다.


    자신이 직접 의사결정의 축을 조작하여 일정한 결과물을 도출해낼 때 납득하게 된다. 그것은 사건을 연결해가는 것이며 그 어떤 것보다 값지다. 성공이니 출세니 평판이니 명성이니 신분이니 영광이니 행복이니 쾌락이니 하는 것은 남들에게 인정받으려는 태도이니 이미 패배해 있다. 심사위원이 앉아 있으면 이미 진 거다. 


    자신이 사건의 주인이 되어 의사결정해야 한다. 선택하지 말고 거꾸로 선택을 요구해야 한다. 링 위의 선수가 되지 말고 주최측이 되어야 한다. 이상주의가 필요하고, 완전성이 필요하고, 존엄이 필요하고, 주도권이 필요하고, 긴밀한 상호작용이 필요하고, 시스템이 필요하고, 계통이 필요하다. 에너지를 유도하는 절차가 된다. 


    인간의 결론은 계 안에서 에너지의 방향성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간은 위대해진다. 방향이 정해지면 그쪽으로 계속 간다. 사건의 다음 단계와 그 다음단계로 쭉 이어진다. 기업가가 사업을 일으키면 기업은 계속 간다. 정치인이 정당을 만들면 정당은 계속 굴러간다. 개인이 가족을 만들면 가문은 계속 이어져 간다. 


    학자가 학파를 만들면 계속 굴러간다. 문예사조도 그러하고 패션의 유행이라도 그러하다. 거기에 생명성이 있다. 불길처럼 널리 번져간다. 그러한 연결에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연결고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독립적으로 사유하는 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외력을 받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아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이 원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집단 안에서 명성을 떨치고 평판을 높이고 서열을 높이기를 원한다. 우쭐대려고 한다. 인간은 언제라도 선행이나 악행이 아니라 자신을 흥분시키는 행동을 한다.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은 할 말 없는 지식인들이 언어가 궁해서 둘러댄 말이다.


    인간은 그냥 흥분하여 날뛰는 것이며 흥분하면 자기도 모르게 집단에 기여하는 행동을 한다. 어떻게든 상호작용을 늘리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흥분이 잘 통제되면 가수나 춤꾼이 되어 무대 위에 서게 되고, 흥분이 잘못 통제되면 폭력배 되어 감옥에 갇힌다. 어느 쪽이든 집단적인 대응을 끌어내는 것이다. 


    나쁜 짓이든 좋은 짓이든 인간의 행위는 집단의 상호작용을 높인다. 인간의 흥분은 집단에 전염되어 때로는 광기를 이룬다. 흥분을 잘 통제하면 유능한 대중정치인이 되고 악용하면 히틀러 된다. 계의 에너지 통제가능성에 답이 있다. 선이니 악이니 도덕이니 윤리니 하며 지식인이 개인에게 책임을 미룬다면 비겁한 것이다.


    어떻게 집단 무의식의 작용에 따른 개인의 흥분과 집단의 광기 사이에서 입력과 출력의 강약을 조절할 것인지를 말해야 한다. 착하게 살아라는 식의 말은 필요없다. 노력하라는 말도 필요없다. 인간을 흥분시켜야 할 타이밍과 장소가 있고 흥분을 가라앉혀야 할 시기와 장소가 있다. 에너지를 유도하는 절차를 학습해야 한다.


    때로는 격동시켜야 하고 때로는 진정시켜야 한다. 때로는 분노해야 하고 때로는 이성을 찾아야 한다. 무작정 이성과 도덕과 윤리만을 떠드는 샌님들은 에너지를 통제하는 기술을 익힐 수 없다. 진중권들은 절대 모르는 그 기술 말이다. 노무현에게 있고 안철수에게 없는 그 기술 말이다. 완전성의 추구가 아니면 안 된다. 


    완전한 100과 2퍼센트 부족한 98은 큰 차이가 있다. 인간은 좋은 친환경 티코 놔두고 나쁜 그랜저를 탄다. 전기차는 좋지만 여전히 불완전하다. 작더라도 완전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 좋은 것은 9를 주고 10을 받아오는 것이다. 그것은 교환된다. 그러나 완전한 것은 증폭된다. 폭발한다. 전하기 전에 스스로 일어나 있다. 


    완전성을 추구하려면 이상주의가 필요하다. 소스를 플러스해서 맛을 내기보다 불필요한 것을 제거해서 원재료의 맛을 살려야 한다. 맛과 맛이 충돌하는 지점을 노출시켜야 한다. 비빔밥이 맛있어도 외국인은 비벼먹지 않는다. 밥을 비비면 시금치맛, 콩나물맛, 고사리맛, 버섯맛, 호박나물맛을 볼 기회를 놓치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이미 시금치맛, 콩나물맛 고사리맛, 호박나물맛, 버섯나물맛을 알고 있으므로 나물의 종류마다 각각 맛볼 필요가 없지만 외국인은 그렇지 않다. 마구잡이로 비벼서 황금 같은 기회를 날려버린다면 바보다. 거기에 완전성의 문제가 있다. 막히는 지점과 통하는 지점이 있다. 널리 통하려면 준비가 만만치 않은 거다. 


    에너지를 통제하려면 이동기술과 소통기술을 확보하여 환경을 장악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계통을 연결해야 하며 거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거다.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기다. 인류단위 큰 사건에 가담하여 긴 호흡으로 확률을 높여가야 한다. 인간은 신을 믿지 않아도 신은 인간을 믿는다. 


    인간이 대상의 성공확률을 셈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인간이 확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개가 주인을 믿는 게 아니라 주인이 개를 믿는다. 믿음직한 개라면 말이다. 인간은 이미 자연환경과 역사환경이라는 확률 속에 갇혀 있다. 인간은 사건 속의 존재다. 사건이 인간을 장악하고 확보하고 확률한다. 인간은 확률된 존재다.


    믿음은 사건을 믿고, 시스템을 믿고, 에너지를 믿고, 방향성을 믿고, 통제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상호작용을 믿고 계통을 믿는 것이며, 관계를 믿고, 엮여있음을 믿고, 긴밀함을 믿는 것이다. 자극에 따라오는 반응을 믿는 것이다. 그 안에 스위치가 있고 인간이 사건의 스위치를 장악하고 역할을 획득한 사실을 믿는 것이다.


    사건의 입력과 출력 사이, 원인과 결과 사이, 자극과 반응 사이에 조작할 스위치가 있고 그러므로 의사결정할 수 있고 각자에게 일정한 역할이 주어져 있고 그러므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외부인이 평가하는 행복이나 쾌락이나 성공보다 그 스위치의 조작과정에서 역할의 납득을 추구해야 한다.


    내가 납득하면 된다. 내가 스위치를 조작해야 내가 납득할 수 있다. 남이 요리한 음식은 아무리 맛있어도 답이 아니다. 그것은 연출된 것이며 연기한 것이다. 남들이 원하는 말을 해준다. 시청자들이 맛있게 먹어주기 바라므로 먹방을 찍으면서 맛있게 먹는 것이다. 추운 날씨에 다 식어버렸어도 윤택과 이승윤은 맛있게 먹는다.  


    자연인 시청자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입력과 출력, 원인과 결과, 자극과 반응, 노동과 보상, 프로포즈와 수락 사이에서 내가 스위치를 움직였을 때 결과가 어떻든 자신이 납득하게 된다. 데이트하는데 엄마가 따라와서 망쳤다.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납득하지 못한다. 내가 스위치를 조작하지 않았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고 가치를 추구한다. 의미는 사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시키는 것이며 가치는 원인과 결과, 입력과 출력, 자극과 반응, 노동과 보상, 프로포즈와 수락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앞서는 포지션이다. 에너지를 쥐고 선제대응하여 의사결정하는 쪽이 가치 있다. 원인측이 결과측보다 가치 있다. 투자해야 가치 있다.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가치 없다. 빌붙어 묻어간다면 가치 없다. 보상받으려고 하고, 인정받으려 하고, 얻어먹으려고 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 가짜다. 타인에게 자신의 성취를 증명하려는 태도라면 현대사회에 맞지 않는 허무다. 더욱 미성숙한 어린이의 관점이 된다. 사건의 생명성이 가치가 있다. 


    원래 철학은 할 일 없는 철학자가 하면 되는 것이지만 지금은 개인이 각자 철학해야 하는 시대다. 국가 대 국가의 게임, 민족 대 민족의 게임, 종교 대 종교의 게임이 사라지고 페이스북에서 트위터에서 인스타그램에서 개인 대 개인의 게임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을 설계하고 에너지를 모으고 싸워서 이겨야 한다. 


[레벨:15]오세

2019.04.04 (08:47:51)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자신이 권력자가 되기를 원하는게 아니라 사건 속에서 호흡하기를 원한다." 예전 글에서 같은 내용을 'TV에 나오고 싶어서"라고 표현하셨던게 기억나네요. 


인간의 모든 욕구에는 위계가 있고 유형이 있는게 아니라 단 하나, 환경에 대한 '주도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도하면 진보고 끌려가면 보수인 것이죠. 


심리상담에서도 상담이 끝나는 순간은 상담자가 내담자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가 상담자를 이끌더군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9.04.04 (10:24:08)

욕망은 가짜고 상호작용이 진짜입니다.

과거에는 집단에서 밀려날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곳곳에 관문을 설치하고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가리니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신세가 되어 자신이 권력을 쥐려고 하는 거지요.


자신이 일으킨 사건 안에서는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으므로

떠밀릴 일도 없고 채일 일도 없고 소외될 일도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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