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기계다. 입력이 있으면 출력이 있다. 내부에서 에너지를 처리한다. 기계와 다른 점은 자기규정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할 수 있다. 마음은 기계와 같지만, 그 기계를 마음대로 확장하고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는 점이 각별하다. 집단이라는 네트워크와 연결할 수도 있다. 외부환경을 받아들일 수 있다. 기계는 일한다. 마음도 일한다. 기계는 고정된 일을 하지만 마음은 일의 내용을 바꿀 수 있다. 누가 자기편인지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집단 안에서 역할을 찾을 수도 있다. 양부모도 받아들이면 친부모와 같고 적과도 화해하면 친구가 된다. 마음은 나와 타자가 대치하는 전선을 이동시켜 전략을 세우고 이기는 게임을 할 수 있다.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은 마음 내부의 기계적인 메커니즘이며 그것이 외부에 모니터로 출력되어 보여지는 것은 존엄≫자유≫사랑≫성취≫행복이다. 정신은 존엄해야 하고, 의식은 자유로워야 하고, 의도는 사랑해야 하고, 생각은 성취해야 하며, 감정은 행복해야 한다. 비참≫억압≫원망≫좌절≫불행은 마음의 실패다. 이들 중에서 첫 번째 존엄이 중요하다. 존엄을 얻으면 나머지는 일의 진행에 따라 저절로 풀린다. 마음의 실패는 존엄, 자유, 사랑, 성취의 앞단계를 건너뛰고 곧바로 최종단계의 행복을 추구하려 들기 때문이다. 바둑처럼 정해진 수순이 있는 것이다. 행복은 성취에 의해서만 풀리며 성취는 사랑에 의해서만 풀리게 되어 있다. 사랑은 자유에 의해서만 풀리고 자유는 존엄에 의해 서만 풀린다. 이 순서를 지킬 때 마음은 다스려진다. 마음은 '위하여'이기 쉽지만 '의하여' 풀린다. 야망, 탐욕, 희망, 야심, 욕망과 같은 '위하여' 마음은 망하고 외부에서 주어지는 에너지에 의하여, 뜨거운 열정에 의하여, 환경과의 긴밀한 상호작용에 의하여 마음은 흥한다. 집단에서의 역할에 의하여, 주어진 매 상황에서 작동하는 게임에서의 승리에 의하여 마음은 흥한다. 마음은 먹는다고 한다. 야망의 달성을 위하여,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성욕을 해결하기 위하여라고 표현되는 위하여 마음들은 진짜 마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요량으로 꾸며낸 마음이며 에너지가 없으므로 실패한다. 첫 번째 정신의 존엄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나는 본래 어디서 왔고, 지금 어디에 있으며,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좌표를 아는 것이다. 신과 세계와 우주와 자연과 인류와 문명과 역사와 시대정신의 좌표 위에서 뚜렷한 방향감각을 가지고 나의 포지션을 선택하기다. 마음의 병리는 대개 존엄으로 해결이 된다. 존엄은 자존감으로 나타난다. 자부심, 긍지, 사명감, 책임감, 리더십 따위다. 그것은 천하인이 되어 인류의 대표자 마음을 가지는 것이며, 철이 들어 어른이 되는 것이며, 집단의 대표자로 서는 것이며, 무리를 이끌고 광야를 건너는 모세의 입장에 서고, 노무현의 입장에 서는 것이며, 새끼곰이 아닌 엄마곰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 통 크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헌걸찬 기개를 얻어야 한다. 호연지기를 품어야 한다. 한 사람을 만나도 한 우주를 만나듯 해야 한다. 내가 대표자이듯 상대방도 대표자라야 한다. 만남의 레벨이 존엄을 정하는 것이다. 나의 전부를 들어 너의 전부를 만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그럴 때 인간은 전율한다. 그리고 변한다. 존엄이 아니면 비참이다. 존엄과 비참을 결정하는 것은 집단 안에서 의사결정권을 가졌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다. 주인은 권한이 있고 노예는 권한이 없다. 주인은 존엄하고 노예는 비참하다. 환경과의 긴밀한 연결에 의하여 인간은 권한을 획득한다. 친구가 없고, 동료가 없고, 직책이 없고, 가족이 없고, 소속이 없으면 비참하다. 힘 없고, 돈 없고, 역량이 없고, 보호자가 없으면 비참하다. 집단과의 관계가 느슨해지고, 환경과의 관계가 느슨해지고, 국가와의 관계가 느슨해져서 친구와 멀어지고 부부관계 파탄 나면 비참해진다. 의사결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는 달릴 수 없을 때 비참하고 마음을 일 시킬 수 없을 때 비참해진다. 만날 수 없을 때 비참하다. 만남이 존엄이다. 만남으로부터 마음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통 크게 만나고 내밀하게 속삭여야 한다. 만나지 못하면 존엄이 없고 존엄이 없으면 자유가 없고 자유가 없으면 사랑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성취가 없고 성취가 없으면 불행해진다. 언제라도 고립의 비참을 극복하고 만남의 존엄에 이르는 것이 마음을 여는 첫 단추다. 두 번째 의식의 자유는 내가 온전히 나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존엄이 외부와의 연결이라면 의식은 내부의 통제다. 여기서 타자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나와 남을 구분하는 피아구분의 금을 어디에 긋는가다. 친부모도 관계가 틀어지면 남남 되고 타인이라도 관계를 맺으면 부부가 된다. 그것을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진짜 자유다. 그러므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내게 속한 영역을 분명히 해야 한다. 내가 세상과 대립하는 지점을 명확히 설정하기다. 자연과 역사와 진리와 문명과 진보 앞에서 내가 누구편이냐에 따라 나의 재산, 나의 힘, 나의 친구, 나의 직업, 나의 신분, 나의 권리가 연동되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 편들기가 잘못되면 의사결정권을 뺏긴다. 나의 항상성과 일관성을 결정하는 것이 나의 자아다. 나다움을 알고, 나의 캐릭터와 나의 성격을 표방하고, 나의 인격과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나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내 삶의 컨셉을 결정하기다. 철학하여 미리 규칙을 정해놔야 한다. 나의 진면목을 내가 정하지 않으면 상황에 휘둘리게 되고 상대가 정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부모의 간섭이나 학벌과 신분의 형태로 남이 대신 정해주면 안 된다. 부모가 부자니깐. 좋은 학교 나왔으니깐. 귀족 신분이니깐, 성별이 남자니깐, 피부색이 백인이니깐 하는 식으로 된다면 내가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럴 때는 남이 나를 규정하게 되므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수 없게 된다. 더욱 휘둘리게 된다. 너는 노예야, 너는 바보야, 너는 시다바리야, 나는 아웃사이더야 하고 외부에서 정해버리면 모르고 따라가기 다반사다. 너는 범죄자야 하고 사회가 낙인을 찍어버리면 나는 범죄자구나 하고 평생 감옥을 들락거리게 된다. 사회의 낙인도 문제지만 그전에 자기규정에서 틀어진 거다. 정해둔 내 컨섭이 없으므로 휘둘리는 것이다. 자유가 아니면 억압이다. 역사의식, 시민의식, 민주의식과 같은 의식이 없으면 돈에 휘둘리고, 권력에 휘둘리고, 평판에 휘둘리고, 차별에 휘둘리고, 신분에 휘둘린다. 다른 사람이 나를 쥐고 흔들게 된다. 의식하지 못하는 새 타인에게 아부하며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독자에게 아부하는 삼류작가들이 많다. 시청자에게 아부하는 연기자, 팬들에게 아부하는 아이돌, 상사에게 아부하는 부하직원이 되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행동이 아니라 남이 내게 요구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남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다. 왜? 도와줄 자기편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내편인지를 똑똑히 알아야 한다. 미리 자기편을 확보해 둬야 한다. 사회가 만인대 만인의 생존경쟁으로 되면 어떤 경우에도 패배뿐이다. 피아구분 잘해야 한다. 어려울 때 도와줄 자기편이 있는 만큼 내게 자유가 있는 것이며 주변으로부터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다. 모두를 적으로 설정하면 누구를 사랑할 수 없고 인생은 괴로울 뿐이다. 만인대 만인의 생존경쟁 되면 죽음뿐이다. 세 번째 의도의 사랑은 집단의 포지셔닝 게임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게임의 주도권을 잡는다는 것이다. 사랑을 꼭 남녀 간의 사랑으로만 좁혀서 말한다면 좋지 않다. 나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랑이다. 악사는 악기를 사랑하고, 화가는 붓을 사랑하고, 작가는 원고지를 사랑한다.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부을 대상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때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게임의 법칙이 적용된다. 대개 상대방의 행동을 관찰하며 거기에 연동시켜 나의 행동을 결정하게 되는 법이다. 타인과 비교하고 판단한다.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형성하며, 내향형이나 외향형 등의 심리성격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편견과 차별, 고정관념, 선입견 등의 고집으로 나타난다. 사랑한다는 것은 에너지를 가지고 주도권을 쥐고 대상을 향해 열정을 쏟아붓는 것이다. 내가 에너지를 주는 자이므로 열등감이건 편견이건 차별이건 고정관념이건 있을 수 없다. 엄마는 절대적으로 아기에게 에너지를 주는 역할이다. 아기에게 젖을 먹인다. 거기에 내가 이렇게 젖을 주면 아기가 저렇게 나오겠지 하는 타산은 없다.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사랑이다. 받을 것을 셈한다면 거래다. 일방적으로 에너지를 주는 입장이므로 판을 주도하게 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열등감이나 비교나 차별이나 편견이 없다. 젖을 먹이면서 아기에게 열등감 느끼는 엄마는 없다. 사랑이 아니면 원망이다. 원망하는 이유는 상대를 장악하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악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만큼 장악할 뿐이다. 주는 것이 없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에너지가 없으면 줄 수가 없고 줄 수가 없으면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럴 때 인간은 비교되고 평가되고 차별되고 열등감을 느끼고 원망하게 된다. 내 안에 에너지가 넘쳐야 사랑할 수 있다. 에너지가 없는 사람이 나도 사랑을 해봤어 하고 남들 앞에 전시하기 위해 사랑하므로 실패한다. 목적이 따로 있는 위하여 사랑은 가짜다. 사랑은 악사의 연주와 같다. 관객의 추임새에 연주가 바뀌지는 않는다. 연주는 내 안에 미리 갖추어진 악보를 따라가는 것이다. 과연 악보가 있느냐다. 준비된 악보가 없는 사랑은 가짜다. 자기 에너지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자기 논리를 따라가야 사랑이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와 상관없이 줄 수 있는 만큼 주는 것이 사랑이다. 남이 보답함으로가 아니라 내게 에너지가 있으므로 넘치는 것이다. 네 번째 생각의 성취는 공동체 안에서 찾아가는 역할과 포지션이다. 사회에서 일하고, 돈 벌고, 출세하고, 명성을 얻고, 승부하여 이기고, 오락을 즐기고, 자녀를 키우고, 휴식을 취하고, 대화하며 반복되는 일상의 행위들에 모두 상대적인 포지셔닝이 있다. 집에서는 엄마나 아빠가 되지만 출근하면 상사나 부하직원이 되는 거다. 가게에 가면 점원이 아니면 고객이 되고, 극장에 가면 배우가 아니면 관객이 되고, 정치판에 가면 리더가 아니면 지지자가 되고, 버스를 타면 운전사가 되거나 승객이 된다. 생각의 성취는 반복적 업무에 의해 지정되는 집단 안에서의 포지셔닝이다. 좌표를 찾아가기다. 수학문제를 생각한다면 역시 맞는 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한다면 역시 자기에게 맞는 포지션을 찾아가는 것이 성취가 되며 원하는 포지션이 남편이나 부인인데 아직 장가를 들지 못하고 시집을 가지 못했다면 생각대로 성취하지 못한 것이다. 생각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가려고 한다. 그리고 따분한 일상을 반복한다. 생각의 포지셔닝 게임은 시간적으로 반복된다. 성취의 실패는 좌절이다. 역할을 잃고 포지션을 빼앗기고 금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가게에 갔는데 점원도 아니고 고객도 아니면 어색해진다. 잡상인이 아니면 구걸인이다. 집에 갔는데 엄마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고 식구도 아니면 눈치가 보인다. 회사에 갔는데 내 책상이 사라지고 없으면 어색해진다. 그럴 때 좌절하게 된다. 생각한다는 것은 수학문제를 풀듯이 꼬인 것을 풀어 주어진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며 성취한다는 것은 역시 바둑의 행마처럼 맞는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다. 좌절은 거기서 차단되고 밀려나는 것이다. 내가 설계한 게임이면 실패해도 맞대응할 방법이 있다. 다음 게임을 이기면 된다. 내가 설계한 게임이 아니므로 좌절하게 된다. 다섯째 감정의 행복은 마음이 일하여 그 결과를 행동으로 출력하는 데 따른 뇌의 보상이다. 혹은 이를 증폭시켜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방해자를 만나 행동이 막히게 될 때 호르몬을 분비하여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장치다. 호르몬의 분비가 과다하면 의사결정의 결과로 피드백되는 신체상태가 각인된다. 중독되는 것이다. 각인되면 같은 행동을 의미 없이 반복하게 된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욕망이다. 욕망한다는 것은 각인된 호르몬을 기억하고 반추하는 것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에너지다. 에너지는 마음의 원인이고 감정은 결과인데 에너지를 표현할 단어가 없으므로 겉으로 보여지는 감정으로 사건을 설명하지만 이는 오류다. 희망, 야심, 욕망, 탐욕, 신념 따위는 타인에게 설명하기 위해 지어낸 거짓이고 에너지가 진실이다. 식욕과 성욕도 사실은 무언가를 회피하기 위해 마음이 지어낸 거짓이다. 무언가 불편한 상황을 회피하려 할 때 그 심리적 스트레스를 식욕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동물실험으로 밝혀졌지만 스트레스가 없는 동물은 비만이 없다. 마약중독도 없다. 생쥐실험으로 밝혀졌지만 넓은 공간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행복한 생쥐는 마약을 제공해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불행한 생쥐만 마약을 찾았다고. 인간은 언제라도 일의 기승전결 연결을 원한다. 마약은 자연스러운 일의 연결을 차단하므로 원하지 않는다. 역할을 뺏기므로 거부한다. 동물원에 갇힌 동물의 정형행동과 같다. 그런 행동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갇힌 상태의 억압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외부자극이 없으므로 자해를 해서 내부자극을 만들어낸다. 뇌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에너지를 조달한다. 환경의 자극이 없으므로 자해를 해서 물리적 자극을 생산하는 것이 동물의 정형행동이다. 도박이나 흡연이나 마약도 무언가를 싫은 것을 피하려는 것이다. 감정은 대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 지어낸 거짓이다. 감정은 자신의 상태를 타인에게 알리는 장치다. 그 과정에서 증폭시킨다. 한 사람이 하품하면 모두 하품하고 한 사람이 기절하면 모두 기절하고 한 사람이 흥분하면 모두 흥분한다. 행복의 실패는 불행이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감정을 사건의 원인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느낌이 들었다고 해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는 없다. 미운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되고 떡 하나 더 줘야 한다. 화가 난다고 해서 곧 화풀이할 대상을 물색하면 안 되고 자신의 상태를 상대방에게 알리는 수단으로만 써야 한다. 배가 고프다고 곧 밥을 먹으면 안 된다. 그것은 위장의 입장일 뿐이다. 위장에게 항복하면 안 된다. 감정은 풍경과 같다. 배가 고프고 섹스가 고프고 기분이 우울하다면 그것은 그려진 추상화와 같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감상하면 된다. 우울할 때는 우울아 너는 그토록 우울하거라 하고 비켜서서 우울한 감정을 지켜보면 된다. 슬플 때는 슬픔을 그 슬픔에게 맡기고 내 일을 하면 된다. 슬퍼하는 것은 슬픔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다. 슬픈 일이 일어났는데도 헤헤거린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감정의 관조는 버스를 타고 가며 창밖의 풍경을 보는 것과 같다. 우울한 풍경을 보게도 되고 화사한 풍경을 보게도 된다. 어느 쪽이든 감상이 있다. 억지로 감정을 참을 이유는 없다. 나의 인내심 한계는 여기까지다 하고 내 상태를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수단으로 써도 좋다. 혹은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여 그 고여 있는 통제되지 않는 에너지를 밖으로 배출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감정을 내게 전해오는 어떤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나쁘다. 감정에게 복종하지 말자. 마음은 기계다. 기계는 일한다. 정신의 존엄과 비참, 의식의 자유와 억압, 의도의 사랑과 원망, 생각의 성취와 좌절, 감정의 행복과 불행, 이 다섯으로 마음은 일을 한다. 계 내부에 들어온 에너지를 처리한다. 각자 맞는 포지션을 찾아가게 하고 에너지의 밸런스를 맞춘다. 지속적으로 이겨가야 한다. 통제가능한 상태로 가야 한다. 에너지는 언제라도 낙차를 따라간다. 하기 쉬운 것을 한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행동을 했다면 그 이유는 대개 그것이 제일 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거창한 야심이나 기획은 없다. 야망이 있다고 말하지만 질문하니까 대꾸할 뿐이다. 얼떨결에 할 수 있는 것을 하다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고 한 번 했던 짓을 반복한다. 왜냐하면 이제 그것을 할 줄 알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고양이도 덩치 큰 집쥐는 못 잡고 작은 생쥐만 잡더라. 어른 주먹 두 개만 한 집쥐를 자기 구역에서 쫓아낼 수는 있어도 싸워서 이기지 못한다. 참새 크기의 생쥐는 고양이에게 만만하다. 잘만 잡더라. 만만한 대상을 향해 에너지 낙차를 발생시킨다. 그래야 성공하기 때문이다. 실패하면 꼴이 우습잖아 말이다. 일의 자연스러운 연결과 그에 따른 시스템의 유지가 더 중요하다. 자의적으로 설정된 목표의 달성보다는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서 에너지 순환구조 안에서 호흡하는 게 중요하다. 판사가 잘못된 정치판결을 하는 이유는 동료 판사들로 이루어진 패거리 안에서 호흡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한당 의원들이 쉬지 않고 꼴통 짓을 하는 이유는 정권의 획득보다 자한당 안에서 위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보수정치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고 그저 패거리 안에서 서로 손발을 맞추고 서로 부추기고 혹은 대립하고 호응하며 분주하게 상호작용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 안에 에너지의 순환이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아내를 때렸다면 그 이유는 만만하기 때문이다. 때리고 싶은데 때릴 수 있는 사람이 아내 외에는 없다. 때릴 수 있으니까 때렸고 한 번 때리면 두 번 반복하게 된다. 이제 할 줄 알기 때문이다. 때리는 기술을 익혔기 때문이다. 써먹어 보고 싶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주변에 말려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특별히 선이 영혼에 사무쳤다거나 악에 물들었거나 한 것이 아니다. 타고난 천사도 없고 타고난 악당은 없다. 품성론에서 말하는 품성 따위는 없다. 인간은 주변에서 부추기면 대개 넘어간다. 보이스 피싱에 속듯이 인간은 부추기는 악에 속는 것이다. 직업 마술사에게 속는다. 직업 종교인에게도 속는다. 속여먹자고 달려들면 대부분 속아 넘어간다. 자기 자신에게도 속는다. 한 번 자기감정에 속으면 두 번 속는 것이며 주변에 말려주는 사람이 없으면 제 발로는 빠져나오지 못한다. 평소 주변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서 자신이 실수할 때 말려줄 사람을 미리 지정해두어야 한다. 말로 타일러서는 절대 해결되지 않고 옆에서 물리적으로 제압하고 자극하고 상호작용해야 한다. 말로 타일러서 해결된다면 말이 납득되어서가 아니라 말을 듣는 상황이 쪽팔렸기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려서 그러한 물리적 자극에 의해 되는 것이다. 말로 설명하여 바로잡는 경우는 없고 말로 자극하여 바로잡는 경우는 있다. 마음은 정신, 의식, 의도, 생각, 감정이라는 에너지 처리 메커니즘을 부려먹는 방법으로 외부에서 에너지를 조달한다. 이들을 잘 일 시킬 때 마음은 다스려진다. 자연스러운 상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도 마음이 일하는 것이다.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는 게 일이다. 마음은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게 일이다. 그래야 라인이 유지되고 네트워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점잔 빼고 가만있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말이다. 적극 참여하고 때로 참견해야 한다. 단 말려줄 사람이 지정되어 있어야 한다. 말리는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즐거움도 여기까지 하고 금을 그을 수 있어야 한다. 집단에서 소집신호가 떨어지면 언제든 출동할 수 있어야 하고 언제든 동작그만 상태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사소한 일을 뒤로 물리고 외부와 연결되며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더 중요한 일을 우선할 수 있어야 한다. 에너지라는 큰 것을 먼저 해결하면 목표라는 작은 것은 저절로 따라온다. 그것이 마음의 다스려짐이다. |
"정신은 존엄해야 하고, 의식은 자유로워야 하고, 의도는 사랑해야 하고, 생각은 성취해야 하며, 감정은 행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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