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정보를 처리하는 뇌와 외부정보를 받아들이는 눈코귀입몸 신체감관과 타인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언어를 쓴다. 언어는 원시인이 얼떨결에 발명한 것이니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 눈코귀입몸의 감각신호는 호르몬에 의해 감정으로 증폭되는 과정에서 왜곡된다. 인간의 뇌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 인간의 뇌와 감각과 언어가 잘못되어 있음을 알아채고 그것을 바르게 고치는 것이 깨달음이다.
인간의 뇌는 야생에서의 생존환경에 맞추어져 있다. 초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의 정보처리 능력이면 충분하다. 맹수와 다투는 야생환경에서는 즉각적인 대응능력이 필요할 뿐 고도의 추론능력은 필요하지 않다. 영리한 사람보다는 용맹한 사람이 살아남는다. 자신의 지혜로 생각하기보다 경험이 많은 동료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능은 의사소통 위주로 발달했다.
간단히 말하면 깨달음은 귀납에서 연역으로 사유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귀납이 개별적인 정보들을 다룬다면 연역은 이미 획득한 확실한 정보를 개별적 사실에 대입하여 복제한다. 귀납은 자신의 지식을 동료들에게 전달하는데 쓰고 연역은 새로운 지식을 창발하는데 쓴다. 인간은 대개 귀납에 의지하지만 착각이다. 뇌기능적으로는 연역만 있고 귀납은 없다. 정확하게는 '귀납적' 태도라 하겠다.
귀납은 부분에서 전체로 간다. 개별적 사실에서 보편적 원리를 구한다. 그냥 보편적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바람이 분다. 비가 올 조짐인가? 할아버지는 알고 있다.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자. 인간은 대개 이러한 귀납적 학습방법으로 지식을 획득한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알려준 것이다. 즉 귀납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보급하는 것이다.
개별적 사실에서 전체의 원리를 추측할 수 있으나 그 자체로는 지식이 될 수 없고 반드시 검증과정을 거쳐야 한다. 검증원리는 연역이다. 연역적 검증의 수단은 대개 수학이다. 진정한 지식은 모두 수학에 의지하며 수학이 연역을 쓰므로 연역이 유일한 지식의 획득수단이다. 귀납은 현장에서 자료를 모으고 학습하고 전달하는데 쓰인다. 지식의 획득수단은 연역이며 귀납은 보조적 수단으로 쓰인다.
그렇다면 그 수학의 근거는? 가장 확실한 것은 인간에 의해 가리켜지는 개별적인 지식내용이 아니라 이를 처리하는 인간의 뇌구조 그 자체다. 왜냐하면 뇌구조가 틀렸다면 연산을 할 수 없을 테니까. 만약 언어가 틀렸다면 서로 간에 말이 안 통할 테니까. 수학 위의 것은 뇌구조와 언어구조다. 뇌구조와 언어구조는 의사소통하는 과정에서 확실히 검증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연역되어 수학이 일어난다.
문제는 인간이 뇌기능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천재가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는 그냥 생각이 떠오르는 거지 논리적으로 사유해서 답을 찾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연산작용은 무의식 영역에서 일어난다. 아인슈타인도 자신이 어떻게 생각해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머리에 쥐가 나도록 힘을 주다 보면 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스티브 잡스는 CPU에 모니터를 달았다.
컴퓨터가 일하는 과정을 모니터로 보여준다. 인간에게는 그런 게 없다. 뇌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면밀히 살핀다면 뇌 안의 컴퓨터 메모리 역할을 하는 영역에서 적확하게 연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뇌 속에 가상의 테이블을 펼치고 거기에 여러 카드들을 배치해 보면 대칭과 호응에 의해서 적합한 짝이 찾아진다. 바둑고수라면 바둑알의 배치를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다.
훈련된 사람이라면 무의식 영역에서 일어나는 직관적인 사유를 논리적으로 재현해 보일 수 있다. 그것은 근원의 완전성이다. 그 완전성을 복제하는 것이다. 수학으로 치면 덧셈과 뺄셈은 자의 눈금을 옮기는 것이다. 낮은 수준이다. 눈금을 입체적으로 쌓으면 자에서 콤파스로 도약한다. 콤파스를 다시 입체적으로 쌓으면 됫박이 되고 됫박을 입체적으로 쌓으면 저울이 된다. 바둑판은 평면구조다.
바둑 고수는 머릿속에 평면으로 된 테이블을 펼친다. 직관은 그것을 평면에서 입체로 도약시킨다. 콤파스가 평면이면 됫박은 입체다. 다시 저울로 도약시킨다. 입체에서 한 단계 더 집적한다. 최대한 입체적으로 쌓아올린 상태 곧 밀도를 끌어올린 상태에서 작동하는 대칭과 호응의 구조를 떠올릴 수 있다. 머릿속에 입체 혹은 저울 형태의 고도화된 테이블을 펼쳐놓고 사유를 하는 사람이 천재다.
동물은 서로 간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 혹은 일부 통한다 해도 낮은 수준이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그 안에 어떤 완전성이 있다는 의미다. 그것을 포착하고 복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시스템 그 자체를 지식의 궁극적인 근거로 삼아야 한다. 컴퓨터와 같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것이 뇌의 정보처리 시스템이다. 뇌가 하나의 지식을 열 개의 지식으로 복제하고 있다.
컴퓨터는 복제의 도구다. 컴퓨터는 주산을 고도화시킨 것이다. 주판알은 손가락 끝부분을 복제한 것이다. 주먹구구는 자연의 사실을 손가락으로 복제한다. 주산은 다시 손가락을 주판알로 복제한다. 컴퓨터는 0과 1의 기호로 주판알을 복제한다. 복제의 원리는 모두 같다. 자연이 스스로를 나타내는 방법이나 인간의 뇌가 직관하는 원리나 언어를 복제하여 전달하는 원리나 모두 복제의 원리를 쓴다.
정보의 대량복제 시스템을 쓰는 것이 연역이다. 개별 단어에는 의미가 있고 문장에는 맥락이 있고 언어에는 관측자가 있다. 이러한 언어구조 그 자체로 지식을 낚는 것이 연역이다. 이러한 구조는 뇌에 갖추어져 있다. 단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인간에게는 깨달음이 있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깨달아 있다. 컴퓨터라면 반도체가 이미 완전성을 갖추고 있다. 이를 집적하여 고도화시키면 된다.
점에서 선으로 각으로 입체로 밀도로 고도화시키면 된다. 소립자가 만들어지는 원리도 같다. 우주는 작은 입자가 모여들어 크게 이룩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에너지가 복제되어 망라된 것이다. 우주가 복제를 쓰고 생물이 복제를 쓰고 뇌가 복제를 쓰므로 인간 역시 복제를 써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복제를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인간에게는 원래 그러한 능력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쓰지 못한다. 인간의 언어는 기본 모드가 대화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핑퐁과 같다. 머리 안에 테이블을 펼쳐놓고 카드들을 놓아보면 답을 알 수 있는데 상대방에게 말을 떠넘긴다. 묻고 답하는 대화를 통해 지식을 구하므로 실패한다. 대화는 자기를 개입시킨다. 관측자가 사건에 개입하므로 실패다. 호랑이와 마주친 아기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울어서 어른을 부르는게 가장 빠르다.
인간은 상황을 당하여 생각하기보다 그냥 아는 사람을 부르는게 빠르다. 거기에 뇌구조가 맞춰져 있으므로 실패한다. 천재가 있다. 머리가 좋다고 해서 천재는 아니다. 천재는 뇌를 다르게 사용한다. 천재들은 관측자인 자기를 배제하고 그 자리에 체계와 구조와 패턴을 놓는다. 머릿속에 테이블을 펼친다. 사과가 있다. 나는 사과가 좋더라. 나는 사과가 싫더라 하고 자기를 개입시키므로 실패한다.
중력을 발견하려면 뇌 속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 둥근 지구의 위와 아래와 오른쪽과 왼쪽에서 지구 중심을 향해 사과들이 일제히 떨어지는 그림이다. 사과들은 모두 지구중심이라는 한 방향을 바라본다. 어떤 사실을 알아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깨달음은 도구를 쓴다. 뇌구조와 언어구조 자체가 도구다. 천문학자는 망원경이 있어야 성과를 낸다. 무사는 칼이 있어야 힘을 쓴다.
작가는 펜이 있어야 하고 의사는 청진기가 있어야 한다. 깨달음은 체계와 구조와 패턴을 쓴다. 그리고 연역한다. 어떤 대상을 보는게 아니라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본다. 사물이 아니라 사건을 본다. 에너지가 드나드는 입구와 출구를 본다. 그사이의 의사결정구조를 본다.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본다. 에너지가 들어오는 입구와 나가는 출구는 형식에 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직관하면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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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들이 지구 중심을 향해 일제히 떨어지는 그림!
관측자인 나를 배제해야만 가능한 그림이군요.
세게 뒤통수를 한방 맞은 느낌입니다. 감사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