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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192 vote 0 2018.07.30 (13:10:34)

      
    구조론의 개요

       


    ● 구조론은 사건의 과학이다.
    세상은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연결이다. 사물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사건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사건의 연결 성질을 이해하는 것이 구조론의 요체다.


    ● 구조론은 사건의 플랫폼이다.
    사건은 문제를 해결하는 플랫폼이 있다. 모든 사건은 에너지를 처리하는 하나의 플랫폼을 공유한다. 구조론은 우주 안의 모든 사건이 공유하는 근원의 플랫폼이다.


    ● 사물은 다르고 사건은 같다.
    사물은 관측자인 인간이 드러난 결과를 보고 사건은 원인자인 에너지가 계 내부에 숨은 플랫폼을 운용한다. 사건의 결과는 데이터가 각기 다르지만 사건의 원인은 플랫폼이 같다. 원인의 같음에 주목해야 플랫폼을 조정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 세상은 패턴의 복제다.
    세상은 원자의 집합이 아니라 패턴의 복제다. 플랫폼에 에너지가 입력되면 사건의 진행에 따라 동일한 패턴이 반복적으로 복제되므로 우주는 널리 망라된다. 원인측에서 하나의 플랫폼을 제어하는 방법으로 많은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


    ● 존재는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외력의 작용에 맞서 자신을 유지한다는 것이며 외력의 작용에 대응하려면 계 내부에 축과 대칭의 구조를 갖추어야 하며 계 내부에 축과 대칭의 구조를 갖추고 외력의 작용을 1회 처리하는 것이 바로 사건이다.


    ● 사건은 에너지를 처리한다.
    양자역학의 깊은 경지로 들어가면 사물은 사라지고 사건만 존재한다. 사건은 에너지의 입력에서 출력까지 1사이클을 진행하면서 계 내부의 에너지 모순을 처리한다. 1회의 에너지 작용에 따른 원인에서 결과까지 일처리의 진행이 사건이다.


    ● 세상은 구조로 되어 있다.
    구조는 의사결정구조다. 구조는 사건의 플랫폼 안에서 축과 대칭을 써서 계 내부의 모순을 처리한다. 구조는 축과 대칭을 갖추고 갈림길에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의사결정한다. 구조는 에너지 처리에서 효율적인 쪽을 선택한다.


    ● 사건은 다섯 매개변수가 있다.
    하나의 사건은 질, 입자, 힘, 운동, 량 다섯 매개변수로 이루어진다. 다섯 개의 의사결정구조가 하나의 사건을 이루며 단계적으로 작동한다.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량은 침투한다.


    ● 구조론은 의사결정학이다.
    하나의 사건은 원인에서 결과까지, 입력에서 출력까지, 시작에서 종결까지, 머리에서 꼬리까지, 문제에서 해결까지 일처리를 진행하며 그 과정에 세상은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의 다섯 차례에 걸쳐 의사결정한다.


    ● 세상은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다.
    에너지는 고유한 활동성이 있고 활동이 수렴방향으로 교착되면 축과 대칭의 구조를 갖추어 물질이 되며 공간은 축의 이동이고 시간은 에너지 보존에 의한 패턴의 반복이며 정보는 외부의 대상에 침투한 그 결과값을 인간이 인식한다.


    ● 사건에는 방향성이 있다.
    에너지의 고유한 활동성과 생명성에 따른 사건의 방향성이 세상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에너지의 활동성은 플라즈마와 같은 고유한 움직임이며 생명성은 에너지가 수렴방향일 때 1회의 시작과 끝을 명확히 드러하는 사건의 완전성이다.


    ● 존재의 방향은 확산에서 수렴이다.
    플라즈마의 확산방향 ←→에서 물질의 수렴방향 →←로 바뀌면서 계를 성립시키고 사건은 계를 중심으로 1회의 에너지 입력을 처리하여 내부의 모순을 해소한다. 방향의 2에서 1로 가는데 따른 효율을 사용하므로 역방향의 진행은 없다.


    ● 의사결정에는 비용이 든다.
    대칭은 짝수이므로 자투리가 발생하는 만큼 비효율적이다. 사건은 계 안에서 손실되는 비용을 조달할 수 있는 보다 효율적인 방향으로 진행된다. 계는 닫혔으므로 외부개입은 없으며 자체해결만 가능하므로 사건은 결따라 간다.


    ● 세상은 대칭과 비대칭이다.
    대칭은 외부 에너지 작용을 받아 축의 형태로 특이점을 형성하여 비대칭을 도출한다. 대칭에 따른 효율성이 방향을 조직하고 비대칭이 방향을 틀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형태로 의사결정하여 사건은 진행한다.


    ● 세상은 마이너스다.
    대칭은 토대의 공유를 통해 효율을 달성하며 효율성이 사건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 방향은 엔트로피 증가방향이며 곧 마이너스 방향이다. 손실이 일어나는 방향이다. 이 방향일 때 에너지 손실에 따른 잉여에 의해 사건은 통제가능하다.


    ● 속성이 아니라 관계다.
    문제해결의 답은 언제라도 바깥에 있다. 사물 내부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사건은 주변환경과의 관계가 결정한다. 내적 속성은 대칭에 의해 교착되므로 의미없다. 내부교착을 타개하는 에너지는 외부에서 조달된다. 답은 외부에 있다.


    ● 계는 균일해야 한다.
    계가 균일하지 않으면 에너지가 계 전체에 전달되지 않아 외부 에너지의 작용에 일의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계가 깨지고 흩어져서 플라즈마 상태로 복귀한다. 계가 불균일할 때 사건은 불발하거나 혹은 희미해진다. 죽거나 시들어간다.


    ●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
    계가 에너지 작용을 처리할수 있는 균일상태인지가 중요하다. 에너지 전달방식이 사건의 향방을 결정한다. 인간은 가족이나 학교 등 상부구조에 형식을 의존하므로 내용만 감당하면 되지만 자연은 모두 책임지며 형식이 우선이다.


    ●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사건의 계에는 부분의 집합에 없는 에너지의 경로가 지정되어 있다. 계는 균일성을 갖추고 입자는 축과 대칭의 구조를 갖춘다. 보이지 않는 질서가 세팅되어 플랫폼을 이룬다. 인간은 플랫폼의 갖춤을 무시하는 오류를 저지르곤 한다.


    ● 세상은 통제가능성으로 이루어진다.
    에너지는 계의 통제가능성이다. 외력의 개입 없이 자체의 통제가능성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와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가 있다. 에너지가 균일한 계에서 축과 대칭의 구조를 이루면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사건은 질서가 있다.


    ● 세상은 엔트로피로 모두 설명된다.
    사건의 진행은 축의 이동을 통해 계 내부의 모순을 처리하는 것이다. 100에서 50으로 받치고 50으로 진행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 각 단계에서 50씩 제외되므로 점차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사건은 진행하면서 질서를 잃는다.


    ● 사건 안에서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사건은 균일한 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각 단계에 보다 작은 내부 계가 작동하며 사건 진행 중에는 그 단계의 계가 작아진 만큼 닫힌계 전체의 통제가능성은 사라져서 질서를 잃고 그만큼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 세상은 균일과 불균일이다.
    계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균일하나 대칭과 비대칭의 작동에 의해 일을 처리하는 지점에서 국소적으로 불균일하여 통제가능성은 사라지고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완전히 처리하면 다시 균일해져서 제 2의 사건을 맞이한다.


    ● 양질전환은 없다.
    사건 진행 중에 단계적으로 통제가능성이 줄어든다. 이미 시동이 걸린 차에 시동을 걸 수 없다. 사건이 일어나 움직이는 상태에 개입할 수 없다. 통제하려면 사건을 종결시킨 후 외부 에너지를 끌어들여 제 2의 사건을 일으켜야 한다.


    ● 세상은 상대성이 아니라 절대성이다.
    둘이면 상대성-주관성이고 셋이면 절대성-객관성이다. 둘이면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어 방향성이 없고 상대적이며 주관적이다. 사건은 통제되지 않는다. 셋이면 축과 대칭이 조직되고 축의 이동에 따라 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 세상은 3으로 작동하고 5로 복제된다.
    축과 대칭의 구조를 이루는 3자에 에너지 입출력을 더하여 5자를 이루면 플랫폼을 완성하고 사건은 복제된다. 복제본은 원본 주변에 자리잡고 에너지를 의존한다. 플랫폼에 에너지를 태우면 세상은 생명성을 얻어 발달한다.


    ● 세상은 귀납이 아니라 연역이다.
    귀납은 관측자 인간이 개입한다. 관측자를 배제하고 사건 안에서 인과관계를 규명해야 한다. 외부의 인간이 아니라 사건 내부 구성소가 관측해야 한다. 사건 내부에서 축과 대칭의 3자를 도출하여 방향성을 얻어야 답을 알 수 있다.


    ● 자연은 에너지고 사회는 권력이다.
    자연은 에너지의 방향성이 통제가능성을 이루고 사회는 권력의 진보성이 통제가능성을 이룬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 의사결정원리를 적용하여 해석할 수 있다. 자연의 진화원리와 인간의 진보원리는 같다.


    ● 구조론은 수학과 과학의 중개자다.
    물리학은 주체의 맞은 편에 대상인 물物이 있지만 구조론은 대상이 없다. 구조론은 대상화 되지 않는 주체의 학문이다. 구조론은 수학이지만 모든 수학의 위에 있다. 구조론은 보편의 의사결정원리를 제 분야에 적용하여 해석한 철학이다.


    ● 구조론은 쉽다.
    구조론은 간단히 세상은 사건이며 원인에서 결과로 가는 방향성이 있고 축과 대칭의 구조를 움직여 통제할 수 있다는 견해다. 사물 내부를 보지 말고 외부환경과의 관계를 보라고 말한다. 어렵게 들어가면 어렵지만 이러한 근본은 쉽다.


    ● 구조론사람이 되라.
    모든 사람이 수학 전문가는 못되어도 좋지만 수학적 사유는 익혀야 한다. 구조론은 간단하다. 세상을 사물로 보지 말고 사건으로 보라는 거다. 근본적인 깨달음을 얻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고 진보의 편에 서는 자세가 중요하다.


    


   

      
    구조론의 세계



    구조론의 세계가 방대해서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으므로 과목을 나눈다면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구조론


    세상은 구조로 되어 있다. 구조는 의사결정구조다. 의사결정구조는 하나의 사건 안에서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매개변수로 이루어진다. 세상은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에너지에 의한 사건의 복제와 연결이다. 하나의 사건은 에너지의 입력에서 출력까지 5회의 의사결정으로 이루어진다. 사건은 닫힌계 안에서 5회의 대칭과 대칭성 깨짐을 통해 에너지의 모순을 처리한다. 사건은 원인에서 결과까지, 시작에서 종결까지, 입력에서 출력까지, 질문에서 답변까지, 머리에서 꼬리까지 진행하며 그 안에 3개의 매개변수를 포함하여 다섯 단계를 가진다. 에너지의 입력과 출력 사이 가운데 셋은 저울 형태의 대칭구조를 만든다. 가늠자와 가늠쇠와 타겟을 정렬시킨다. 우리가 아는 사물 자체의 고유한 속성은 실제로는 없으며 어떤 둘의 양자역학적 간격과 상관관계가 칼라를 결정한다. 그 관계를 바꾸고 간격을 조정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사건의 전개에 대응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 사물을 소유한다는 관점을 버리고 에너지의 통제를 통해 사건에 대응한다는 관점을 얻어야 한다.



    1) 존재론 

    

    세상의 근원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전체에서 부분의 한 방향으로 가며 그 역은 없다. 이는 연역법에 해당된다. 점차 범위가 좁혀진다는 점에서 세상은 마이너스다. 플러스는 통제할 수 없고 마이너스는 통제된다.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에너지는 고유한 활동성에 의해 계를 이루므로 방향성이 있다. 계를 깨지 않는다는 전제를 지키는 것이 방향성이다. 에너지는 결따라 간다. 의사결정이 쉬운 쪽으로 결정한다. 에너지는 효율성을 따른다. 5단계에 걸쳐 범위를 압축하여 잉여를 발생시키고 그 힘에 의지한다. 엔트로피는 닫힌계에서 성립하며 열린계는 비축된 에너지나 외부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으므로 착오가 일어난다. 열린계라도 사건의 규모가 커지면 닫힌계가 되므로 플러스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인간은 옳고 그름의 논리보다 집단의 결정하기 쉬운 방향으로 결정한다. 집단이라는 계를 깨지 않는다는 전제 때문이다. 집단은 에너지를 보존하고 의사결정구조를 유지하려다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게 보통이다. 집단 내부의 의사결정구조를 개혁하지 않으면 발전은 없다.



    2) 인식론


    존재론이 자연의 전개방식이면 인식론은 인간의 접근방식이다. 인식은 부분에서 전체로 가는 점에서 엔트로피와 어긋난다. 이는 귀납법에 해당된다. 인간은 사건의 원인단계에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바둑알이 놓이기 전에 바둑판 전체의 형편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은 역설이다. 계 내부에 감추어진 의사결정구조라는 저울이 작동해서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를 얻게 한다. 우리는 사물을 건드리지만 배후의 에너지가 작동하여 복원시키므로 실패한다. 이중의 역설에 의한 동적균형이 정답이다.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사물을 건드려서 배후의 에너지를 끌어내고 다시 그 에너지를 점령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배후의 에너지는 주도권이다. 사건 안에서 두 번 방향을 틀어 주도권을 얻어야 한다. 그 과정에 내부에 대칭구조를 조직하여 저울을 이루어야 한다. 사물 뒤에 사건 있고 하부구조 위에 상부구조 있다. 인간은 사물을 건드리다가 실패하지만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거쳐 배후의 에너지를 끌어내면 통제에 성공할 수 있다.



    깨달음 


    인간은 집단의 일원으로 존재하며 호르몬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집단의 통제를 받는다.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집단으로부터 에너지와 동기를 부여받으며 자기도 모르게 집단이 원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인간은 쾌락과 명성과 평판과 지위에 얽매이지만 이는 집단이 개인의 마음을 조종하는 수단이다. 링위에 올라 게임을 뛰는 선수의 관점을 버리고 하우스를 운영하는 주최측의 관점을 얻어야 한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이 돈을 따는 것이 주최측이다. 사건의 주최측이 되어야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다. 인간은 평판, 명성, 쾌락, 신분, 재화 등의 형태로 작동하는 심리적 에너지에 지배되지만 에너지는 쉽게 고갈된다. 에너지 없이 개인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소승적 차별주의 이원론의 집착을 끊고 팀의 결성을 통해 에너지를 조달하여 집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승적 일원론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에 맞게 자신의 무의식과 호르몬을 바꿔야 한다. 사건 안에서 3대의 계통을 조직함으로써 집단의 대표성을 얻어 에너지를 끌어내고 통제하는 것이 의리다.



    1) 언어 


    집단의 일원인 개인은 직접적인 문제해결보다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 더 중요하므로 인간의 언어는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맞추어져 있으며 이 때문에 인간은 대화를 통해서만 집단과의 부단한 상호작용 과정에서 우연히 진실에 도달하게 되며 스스로의 사유로는 결코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진실에 접근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언어가 틀렸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부분 관측대상에 자기를 대입시켜 대칭구조를 끌어내는 자기소개형 언어습관에 길들여져 있다. 언어는 인간의 대화를 떠나 사건을 반영해야 한다. 자기를 배제하고 객관화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언어는 담론, 명제, 문장, 어구, 단어로 조직되며 각각 조건문과 반복문, 전제와 진술, 주어와 술어, 명사와 동사, 기표와 기의의 대칭구조를 가진다. 인간은 답을 찾지 못하는게 아니라 문제를 명확히 파악지 못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언어 그 자체의 본질적인 한계 때문이다. 언어를 바로잡아야 문제가 해결된다. 사건의 전개절차에 맞게 언어를 바르게 사건에 대입시키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



    2) 인간 


    인간은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다. 인간이 추구하는 명성, 평판, 지위 따위가 모두 권력과 긴밀하다. 인간은 정확히 주어진 환경 안에서 의사결정권의 행사를 원한다. 집단의 권력구조 안에서 호흡하기를 원하고 역할을 가지기를 원한다. 집단과 밀접하고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인간은 평화를 원하지만 그것은 역할을 수행하려는 것이며 동시에 전쟁을 통해 역할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평화가 오면 자식을 낳아 가부장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전쟁이 없고 경쟁이 없다면 가부장은 필요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동은 모순된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집단에 필요한 상호작용 행동을 한다. 집단의 주목을 끌고자 일을 벌인다. 소규모 부족민 사회라면 상관없지만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무의식적인 권력지향적 상호작용 행동은 위험하다. 대중의 평판권력, 지도자의 정치권력, 자본가의 경제권력, 예술인의 문화권력, 개인의 도덕권력이 있다. 인간의 심리적 에너지는 집단의 통제가능성 곧 권력에서 얻어지며 이를 팀 안에서의 역할분담으로 조직하는 것이 의리다.



    3) 마음 


    사건의 원인과 결과 중에 인간은 결과측의 보상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원인측의 에너지를 원한다. 결과측의 보상이 행복이라면 원인측의 에너지는 무의식이라서 이름이 없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마음은 정신, 의식, 의도, 생각, 감정으로 이루어진다. 각각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으로 나타난다. 결과측인 행복의 감정은 표현할 수 있으나 원인측인 존엄의 정신은 표현할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자존감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에너지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긴장과 스트레스로 나타난다. 그것을 설명하는 단어가 없으므로 오판한다.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안다. 에너지를 주는 원인은 집단에서 나오므로 표현할 수 없다. 사랑의 감정은 표현할 수 있지만 사랑의 원인은 유년기부터 뇌에 축척된 무의식이므로 깨닫지 못한다. 환경과의 관계설정을 통해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성격문제로 잘못 알려졌지만 대부분 호르몬 차원의 대인관계 장애다. 잘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을 회피하는 패턴이 습관화 되면 그것을 성격으로 규정하지만 오류다.




    사건철학 


    인생은 게임이다. 세상은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연결이며 인간은 사건의 전개과정 대응할 수 있다. 그것을 게임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인간은 링 위의 선수가 되어 사물을 획득할 것이 아니라 게임의 주최측이 되어 사건의 흐름을 통제해야 한다. 사물에 맞서는 자는 진학과 결혼과 취업의 갈림길에서 하나를 선택하려고 한다. 어떤 선택을 해도 불리해진다. 사건을 통제하는 자는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거꾸로 상대방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에너지의 입구를 틀어쥐어야 한다. 약자의 철학이 아닌 강자의 철학을 가져야 한다. 승객이 아닌 운전기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물을 건드리면 에너지의 작용에 의해 반대효과가 나지만 에너지를 틀어쥐고 사건을 통제하면 일은 순리대로 풀린다. 사건의 원인측에 서서 주도권을 쥐고 상황을 이겨야 한다. 적을 제거하기보다는 달고다니며 제압해야 한다. 노자는 약자의 철학이고 공자는 강자의 철학이다. 게임에 이기려면 3대의 계통을 만들어야 한다. 사건 내부에 대칭을 조직하여 저울을 이루고 그 저울을 장악해야 한다.



   1) 진화 


    자연의 존재는 정적 존재가 아니라 가속도를 통해 상대적인 위치를 가지는 동적 존재다. 그러므로 우주도 진화하고 생물도 진화하고 사회도 진보한다. 생물의 진화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유전자 시스템의 수학적 완결성에 따라 고유한 방향성이 있다. 에너지가 계를 이루면 엔트로피에 따라 방향성이 생긴다. 에너지의 작동은 효율성을 따르며 효율적인 배치가 수학적으로 정해져 있고 그것이 진화의 방향성이다. 생물의 진화는 유전자가 외부환경을 생물체의 통제권 안으로 끌어들여 내면화 해온 역사다. 바깥에 빛이 있으면 눈의 형태로 끌어들이고 소리가 있으면 귀의 형태로 끌어들이고 바람이 있으면 털의 형태로 끌어들인다. 생존전략과 세력전략이라는 두 가지 방향성이 있다. 환경이 나쁠 때는 유전자를 남길 확률을 높이는 생존전략을 추구하고 환경이 좋을 때는 영토를 장악하는 세력전략을 추구한다. 종은 환경을 보다 깊게 장악하는 한 가지 방향으로 진화한다. 그 결과 종은 환경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문명의 진보도 이 원리를 복제해야 한다.



   2) 역사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권력을 행사하려는 지식인 특유의 비뚤어진 권력의지가 영웅주의와 계몽주의의 폐해를 낳았다. 영웅주의로 사람을 차별하는 방법으로 목표를 제시하고 학생을 다그치며 그 과정에서 권력을 행사하려는 교육자의 나쁜 의도가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탓 하지 말고 역사주체가 과연 주어진 상황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했느냐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쁘고 합리적인 결정을 해도 운이 없으면 결과가 나쁠 수 있으므로 확률로 판단해야 한다. 결과를 떠나 인류전체의 성공확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의사결정했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인간은 시행착오와 오류시정를 통해 전진하는 존재이므로 설사 잘못된 결정이라 해도 집단 전체의 성공확률에 기여할 수 있다. 전쟁에 패배해도 싸우면 경험치를 얻는데 그 부분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개인의 영웅성이 아닌 시스템의 효율성을 위주로 논해야 한다. 역사는 대부분 지정학적 구조와 집단 내부의 의사결정구조가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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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은 철학과 다르다. 분류하기에 따라 깨달음을 철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도 있겠지만 철학이 주어진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곧 문제에 내가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라면 깨달음은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노예의 대응법과 주인의 대응법은 다른 것이다. 노예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면 그만이지만 주인은 집단을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 각별하다. 그런 점에서 나의 존재가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답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먼저 깨달아 자신의 존재를 확정한 다음에 환경의 도전에 응전해야 한다. 구조론은 세상 돌아가는 원리가 이렇다는 것이며 깨달음은 내 존재가 이렇다는 것이며 철학은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관계이고 나는 권력이다. 그러므로 이겨야 한다.


      
        의사결정에는 비용이 든다.


    구조론은 한마디로 의사결정학이다. 의사결정에는 비용이 든다. 자연은 의사결정비용을 조달할 수 있는 한 방향으로만 작동한다. 그 방향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는 수렴방향이다. 역방향은 없다. 확산방향으로는 가지 않는다. 곧 엔트로피다. 은행에서 만 원짜리를 천 원짜리로 바꿔주는데 돈을 받지 않는다. 그럼 공짜인가? 자연에는 공짜가 없다. 은행이 선심을 쓰는 거지 반드시 비용이 지불된다.


    자연은 결따라 간다. 닫힌계 안에서 자체적인 비용조달이 가능한 방향으로 전개한다. 그런데 인간은 수시로 역주행을 시도한다. 부분에서 전체로 간다. 아버지 빽 믿고 가는 거다. 이때 아버지가 뒤로 개입했으므로 사실은 전체가 움직인 것이다. 자연에 없는 이런 식의 외부개입이 착시를 불러 일으킨다. 부분에서 전체로 갈수 있을 듯 착각된다. 구조론은 닫힌계를 설정하여 이런 오류를 걸러낸다.


    닫힌계 내에 대칭과 호응의 구조를 조직하는 방법으로 비용조달은 가능하다. 이때 구조는 효율화되며 닫힌계 안에서 이를 뒤집을 수 없다. 뒤집으면 비효율이므로 비용이 추가되는데 계를 닫아걸었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은 에너지의 방향전환이며 방향이 바뀌므로 추가 에너지 투입은 불가능하다. 날아가는 총알을 다른 총알로 맞춰 밀어주기는 불가능하다. 총알은 이미 총구를 떠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입자단위로 사고하지만 사건단위로 사고해야 바르다. 사건은 1회의 에너지 투입에 의한 원인에서 결과까지의 전개다. 에너지를 투입하면 방향이 바뀌므로 추가 에너지 투입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데서 오류가 일어난다. 날아가는 총알을 다른 총알로 밀어주겠다는 식이다. 밀어줄 수 없다. 등교한 학생의 시험을 아버지가 밀어줄 방법은 없다. 이에 천하의 질서가 작동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

   

    질이 뭐냐며 어렵다는 분이 많은데 이보다 쉬운게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은 원인과 결과다. 원인이 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필자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어떤 사건의 원인 말고 그냥 원인 말이다. 결과 앞에 있는게 원인이다. 반대로 결과를 모르겠다는 사람도 없다. 원인 뒤에 따라오는 말이 결과다. 너무 쉽잖아.


     앞이 뭔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없다. 뒤가 아니면 앞이다. 뒤가 뭔지 모르는 사람도 없다. 앞이 아니면 뒤다. 앞과 뒤는 쌍을 이루고 항상 같이 다니므로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특정한 사건의 질을 모르겠다는 말은 성립하지만, 그냥 질 자체를 모르겠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원인이 질이다. 국어사전을 참고하자. 


    '어떤 사물이나 상태를 변화시키거나 일으키게 하는 근본이 된 일이나 사건.' 어이쿠! 이게 뭐야? 어렵게도 써놨다. 결과는? '어떤 원인으로 결말이 생김.' 이건 더하다. 하나마나한 소리다. 국어사전은 잊자. 하나의 사건 안에서 앞의 결정과 뒤의 결정이 맞물려 일어날 때 앞의 결정이 원인이고 뒤의 결정이 결과다.


    둘 이상의 서로 다른 변화가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맞물려 돌아가는 상황에서 앞에 오는 놈은 원인이고 뒤에 오는 넘은 결과다. 너무 쉽잖아. 원인과 결과는 두 단어다. 구조론은 좀 풀어서 다섯 단어나 된다. 원인은 문제요 결과는 답이다.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람도 없다. 답을 찾게 하는 바로 그것이 문제다. 


    답이 뭔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없다. 어떤 특정한 문제의 답을 풀어내는 방법은 몰라도 그냥 답이 무슨 뜻인지는 안다. 문제를 풀어놓은 것이 답이다. 반대로 답을 꼬아놓으면 그것이 문제다. 량을 꼬아놓으면 운동이다. 운동을 꼬아놓으면 힘이다. 힘을 꼬아놓으면 입자다. 입자를 꼬아놓은 것이 질이다. 간단하다. 


    질은 입자 두 개가 하나의 토대를 공유하여 꼬인 것이다. 토대의 공유라 하면 어렵게 느껴질 텐데 그냥 겹친 거다. 질은 입자의 원인이다. 입자는 힘의 원인이다. 힘은 운동의 원인이다. 운동은 량의 원인이다. 입자가 겹치면 질이다. 힘이 겹치면 입자다. 운동이 겹치면 힘이다. 량이 같은 위치에서 겹치면 운동이다.


    겹친다는 것은 반복한다는 거다. 한 방 맞았는데 한 방 더 맞으면 운동이다. 냄새나 소리와 같은 신호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면 량이고 길게 이어지면 운동이다. 량은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몸의 감각으로 느낀다. 인간 내부로 들어온다. 어떻게 들어왔을까? 운동하여 들어왔다. 


    그러므로 운동은 량의 원인이다. 어떻게 운동했을까? 힘으로 방향을 틀었다. 힘은 자리바꿈이다. 힘은 운동의 원인이다. 어떻게 틀었을까? 방향을 틀려면 코어가 계를 장악하여 축과 대칭의 구조를 갖추고 대칭이 자리를 바꾸어 힘을 행사한다. 그것이 입자다. 어떻게 입자는 계를 장악했을까? 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계가 만들어졌을까? 질은 결합한다. 결합해서 계가 만들어졌다. 왜 결합할까? 에너지의 확산방향이 수렴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주변의 사물들은 인공적인 것이다. 목수 아저씨가 나무를 짜 맞추어서 결합되어 있다. 만두는 밀가루 반죽을 만드는 요리사가 주물러서 반죽이 결합되어 있다.


    도자기는 1600도의 고온에 구워서 결합되었다. 자연상태에서는 어떤 균일한 구성소들이 흩어져 있을 때 외력이 작용하면 일정한 조건에서 결합된다. 잘 결합되지 않으면 에너지를 더 강하게 작용시키면 결합된다. 끝까지 결합되지 않으면 플라즈마 상태가 된다. 혹은 암흑물질이다. 대개 일정한 조건에서 결합된다.


    결합조건은 중력과 강력, 약력, 전자기력으로 설명된다. 인간들은 대개 외부의 적이 침투할 때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서 결합된다. 혹은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자식이 부모를 떠나지 않고 주변에 머물러 있으므로 계통을 이루어 결합된다. 즉 인간은 먹고살려고 먹이활동을 하다 보니 그 사건에 의해 결합된 거다.


    맘모스를 이기려면 적어도 100개체의 무리가 필요하므로 부족이 탄생한다. 네안데르탈인은 결합규모가 작아서 적은 씨족의 구성원 숫자로 맘모스를 용이하게 사냥하지 못했기 때문에 멸절한 것이다. 전기차라 치자. 사건이 여러 가지다. 사람을 태우는 기능도 있고 전기차 하나에 여러 가지 있다. 핵심만 논해야 한다.


    에너지 계통만 가지고 이야기하자. 배터리가 질이다. 에너지를 모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결합되어 있다. 입자는 모터다. 힘은 모터의 회전이고, 운동은 바퀴 구동이고, 량은 주행거리다. 주행하면서 에너지가 빠져나간다. 그동안 에너지를 통제한다. 핵심만 추려서 생각하는 추상능력이 없어서 산만해진다.


    핵심은 에너지고 에너지만 보면 된다. 너무 쉽잖아. 문제와 답은 쌍이다. 원인과 결과는 쌍이다. 문제와 답 사이에 과정이 있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의사결정이 있다. 구조론은 문제를 질로 놓고 답을 량으로 놓고 그사이 풀이과정으로 포지션 셋을 추가한다. 중간에 자리 잡은 것들은 밸런스의 성립과 붕괴과정이다.


    밸런스가 만들어지면 입자고, 밸런스가 작동하면 힘이고, 붕괴의 진행은 운동이며, 그 결과로 에너지 이탈은 량이고, 최초의 에너지 유도는 질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밸런스 성립과 밸런스 작동과 밸런스 붕괴가 있으며 그 앞뒤에 에너지의 유도와 에너지의 처리가 있다. 모든 것은 에너지의 밸런스 하나로 설명된다.


    질이 뭔지 모르겠다는 식의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질은 문제요, 원인이요, 최초단계다. 시작이 뭔지 모르겠다는 말과 같다. 시작은 끝이 아닌 것이 시작이다. 시작과 끝 사이에 중간과정이 있다. 그 과정은 밸런스의 성립과 작동과 붕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질은 닫힌계를 지정하여 외부 에너지를 끌어들인다.


    입자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천칭저울처럼 축과 대칭의 구조를 만든다. 힘은 천칭이 한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운동은 계속 기울어지는데 한참 기울었는데도 더 기울 수 있는 것은 바퀴다. 사람이 팔을 움직이는 것이 저울을 움직이는 것이다. 팔을 움직여 가는 방향을 정하는게 힘이요 팔을 움직여 가는게 운동이다.


    량은 그 과정에서 이탈하여 멈추게 되는 것인데 멈추지 않고 계속 운동하는 것은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다. 그러나 언젠가는 멈추게 된다. 지구도 해마다 태양과 멀어지고 있다. 일 년에 15센티씩 태양과 멀어지니 표가 안 나지만 말이다. 15센티를 수억 년 모으면 꽤 멀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에너지 처리는 그러하다.


    이 쉬운 것을 왜 이해하지 못할까? 내용을 보지 말고 형식을 보라고 백번쯤 말해도 악착같이 내용만 보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그냥 앞뒤의 순서를 정한 것이며 질과 량은 동시에 성립하므로 모를 수가 없다. 질을 모른다면 량도 몰라야 한다. 질량이라는 말도 있다. 량은 측정되므로 량이고 질은 측정이 안 되니 질이다. 
   

    풀어져 있으니까 측정되고 꼬여 있으니까 측정이 안 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을 정해놓았지만 다르게 말하면 량의 질이 운동이고, 운동의 질이 힘이고, 힘의 질이 입자고, 입자의 질이 질이다. 꼬임과 풀림이다. 입자가 둘 꼬여있으면 질이다. 남자와 여자가 꼬여서 가정을 이루면 질을 이룬다. 에너지는 꼬인 상태다.


    토대의 공유로 설명하지만 걍 꼬인 거다. 에너지 작용은 꼬인 것이 풀리는 방향으로만 작동하니 엔트로피다. 문제의 답은 푸는 것이다. '답을 풀었냐'고 말하지 '답을 꼬았냐'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왜 답을 꼬았냐고 하지 않고 풀었냐고 할까? 묻는 말 자체가 꼬는 것이다. 물음표?만 봐도 꼬여 있잖아. 


    고리 ?가 있어서 걸고 자빠진다. 물을 때는 까?를 쓰는데 쿠오바디스나 퀘스천이나 Q가 까다. 영어의 의문사는 모두 H나 WH로 시작되는데 원래는 C다. 라틴어 Q다. 목에 가시가 캑 걸리는 소리다. 꼬이고 걸렸다. 풀어야 한다. 입자가 꼬이면 질이고 풀리면 량이며 그 과정은 밸런스를 만들고 작동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쉬운 것을 자꾸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은 의리 없는 배신자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그냥 포지션이고 순서라고. 얽히면 질, 풀려고 잡으면 입자, 풀려고 당기면 힘, 풀면 운동, 풀리면 량이라고. 질이 뭐냐고 물으면 안 된다. 량이 아니면 바로 질이다. 운동도 량에 대해 질이고 힘도 운동에 대해서는 질이 된다.


    무조건 순서가 앞에 있으면 질이다. 머리가 앞에 가므로 질이다. 꼬리는 량이다. 진보가 앞에 가므로 질이다. 보수가 량이다. 전기차라면 배터리에서 에너지가 작동하므로 배터리가 질이다. 모터에서 사건이 시작된다고 우기는 자는 개념이 없는 자다. 보통은 입자가 덩치가 커서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입자에 홀린다.


    눈에 띄는 형태에 홀리지 말고 에너지 흐름을 추적해야 한다. 이건 절대다. 순서 1번은 질이다. 반대로 뒤에 있으면 량이다. 입자는 질량, 힘은 입자량, 운동은 힘량, 량은 운동량이다. 그냥 순서이므로 공부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다. 외우면 된다. 저울을 작동시키는 순서와도 정확히 같다. 천칭과 물체가 결합한다.


    결합하면 질이다. 결합했다는 것은 꼬였다는 말이다. 풀어야 한다. 물체가 올려지면 축이 움직인다. 사람과 상관없이 저울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니 독립하여 입자다. 저울이 어느 한 방향으로 기울면 지구 중력과 교섭하니 힘, 추를 움직여 계량하면 변화하니 운동, 바늘의 눈금 정보가 인간 눈에 침투하니 량이다. 


    저울이 아닌 다른 무엇이라도 마찬가지다. 연필을 잡고 글씨를 쓰자. 연필을 잡아야 한다. 결합해야 한다. 에너지가 꼬여야 한다. 질이다. 연필에 힘을 가하면 연필 자체의 내적인 밸런스가 작동하니 입자다. 연필이 종이와 교섭하니 힘이다. 글씨가 움직여가니 운동이요 그 씌어진 글자가 나타나 눈에 보이니 량이다. 


    어떤 것이든 에너지가 드나드는 출입이 있으면 모두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있다. 질은 입력이요 량은 출력이며 그 과정의 에너지 처리는 입자 힘 운동이다. 전기를 입력하면 전구에서 입자, 불이 켜지면 힘, 빛이 쏟아져 나오면 운동, 빛이 사람 눈에 도달하면 량이다. 일의 시작과 끝 사이에 의사결정을 추가한 거다.


    어려울래야 어려울 수가 없다. 질과 량은 쌍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면 그게 량이고 량이 아닌 것이 질이다. 사건이 일어나면 보이는 결과가 량이고 결과가 아닌 것이 원인이며 원인이 네 가지다. 결과, 원인, 원인의 원인, 원인의 원인의 원인.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원인이다. 시간과 장소와 주체를 특정하기 때문이다. 


    사건은 에너지와 주체와 장소와 시간과 결과로 존재하며 이 중에 하나도 빠질 수 없다. 우리는 보통 이 중에 하나만 알아내면 원인을 알았다고 착각한다. 태풍이 왜 오지? 여름이니까 태풍이 오지 겨울이면 태풍이 오겠냐? 아 그렇구나. 여름이니까 태풍이 오는구나. 알았다. 태풍이 오는 이유는 여름이기 때문이었어. 


    이런 식이다. 원인을 구성하는 에너지, 주체, 공간, 시간 중의 시간만 알아놓고 원인을 다 알아낸 듯이 의기양양해 한다. 인간들 수준이 이 정도다. 사건을 구성하는 에너지, 주체, 공간, 시간, 결과를 다 알아야 원인을 안다고 할 수 있다. 에너지, 주체, 공간, 시간, 결과를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라 하는 건 구조론 용어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그 이상은 없다. 꼬임과 풀림 곧 에너지를 들여와서 계 내부에서 처리한다는 사건의 본질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사건은 에너지로 시작된다. 에너지를 들여오는 루트를 확보하면 사업을 하든 정당활동을 하든 뭐를 하든 성공된 것이다. 거기서 완결된다. 질을 모른다는 말은 량도 모른다는 말이다.


    에너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밸런스도 모른다는 말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아는 게 하나라도 있어야 그걸 고리로 설명하지 참. 사건은 각 포지션들이 고리로 연결되어 있고 고리가 ?이며 고리는 꼬여있는 것이며 꼬임을 푸는 것이 답을 찾는 것이며 그 절차는 밸런스를 작동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표현을 쓰지만 같은 말이다. 원인과 결과나 시작과 끝이나 앞과 뒤나 문제와 답이나 꼬임과 풀림이나 질과 량이나 에너지와 데이터나 전부 같은 말이다. 시작과 끝은 아는데 질은 모르겠다는 말은 시작도 모른다는 의미다. 문제와 답이 뭔지는 아는데 질은 모른다는 말은 사실 문제가 뭔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에너지는 오직 꼬인 상태와 풀린 상태가 있을 뿐이며 그 풀리는 절차를 해명한 것이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며 저절로 풀리는 수는 있어도 저절로 꼬이는 수는 없다는 것이 엔트로피의 법칙이며 곧 우주의 근본질서가 된다. 질은 에너지이며 시작이며 원인이며 꼬임이며 문제이며 앞이며 두 개의 방향성이 겹쳐진 것이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입자를 찾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입자는 보이기 때문이다. 자석은 보여도 자기장은 보이지 않는다. 태풍은 보여도 기압골은 보이지 않는다. 모터는 보여도 배터리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다. 잘 보면 배터리가 잘 보인다. 기상도를 보면 기압골도 보이고 쇳가루를 뿌리면 자기장도 눈에 잘 보인다. 


    에너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아니다. 보인다. 볼 줄 모르므로 못 보는 것이다. 개인은 보이지만 사회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다. 사회도 보인다. 대통령은 보이는데 국민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다. 국민도 보인다. 차는 보이는데 운전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다. 운전기사도 잘 보인다. 앞을 봐야 보인다. 앞을 살펴라.

     

    원인과 결과는 관념적 한자어다. 관념어를 쓰므로 모르는 것이다. 꼬임과 풀림으로 해야 한다. 쉬운 우리말 놔두고 어려운 한자말 쓰니까 모르는 것이다. 원인이라고 하면 막연하지만 꼬임이라고 하면 어디가 꼬였는지 언제 꼬였는지 누가 꼬였는지 연애해 보면 알 수 있다. 다 꼬드김에 넘어가는 절차와 과정이 있는 거다.


    보이스 피싱에 꼬여도 그렇고 남자한테 꼬여도 그렇다. 언제 어디서 누구 때문에 꼬이는 거지 그냥 꼬이냐? 회사에 취직했다면 1) 돈에 꼬이고 2) 대기업 회사에 꼬이고 3) 직책 팀장자리에 꼬이고 4) 실무 판매일에 꼬이는 거다. 가장 크게 꼬인 것은 결국 돈에 꼬인 것이다. 돈이 인간을 꼬드기므로 꼬이는 게 질이다.


    cause와 effect도 그렇다. cause는 꾸짖는다는 뜻이고 effect는 업히다는 뜻인데 까?를 반복하는 것 왜 그랬습니까? 왜 그랬습니까? 왜 그랬습니까? 하고 반복하여 까?를 시전하는 것이 꾸짖는 거다. 까+짖다(반복하다)가 꾸짖다이다. 엄마가 아기한테 너 왜 그랬니? 왜 그랬니? 왜 그랬니? 하고 반복하면 안 좋다.


    effect는 업히다인데 량은 침투한다고 했지만 량은 업힌다고 해도 된다. 페인트를 칠하면 덧입히는 것인데 업다나 입다나 어원은 같다. 아기를 업는 것이나 옷을 입는 것이나 드레스 업이나 같다. 업 하는 것이 입히는 것이요 결과다. 꼬인 것을 풀면 풀어 해쳐진 것이 어딘가에 달라붙는데 그게 업히고 입히는 것이다. 


    cause는 꾸짖다이고 꾸짖다는 까?+짖다이고 짖다는 반복한다인데 까?를 반복해야 한다. 원인과 그 원인의 원인과 그 원인의 원인의 원인과 그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effect는 입혀진 것이며 원인은 시간이고, 원인원인은 장소이고, 원인원인원인은 주체이고, 원인원인원인원인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계를 형성하는 것이고 계는 두 가지 방향성이 꼬여 있는 것이다. 꼬임이 풀리는 절차를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설명하는데 입자는 천칭저울 형태로 꼬여 있는 것이고 힘은 천칭의 두 접시가 자리를 바꾸는 것이고 운동은 하나가 튕겨 나가는 것이며 량은 그렇게 튕겨 나온 것이 어딘가에 업혀 effect 된다. 


    김연아가 피겨를 하더라도 크게 원을 그리며 속도를 올려 에너지를 얻은 다음 회전을 하며 에너지 방향을 바꿔 몸을 꼰다. 상체와 하체를 틀어 몸을 꼬아서 천칭저울을 만들었다가 그 저울을 풀어버린다. 그 저울을 만들고 풀어내는 역동적 과정을 보고 심판들이 점수를 주는 것이다. 오승환이 공을 던져도 마찬가지다. 


    와인드업을 해서 몸을 꼰다. 천칭저울을 만든다. 그 저울을 풀면서 공을 패대기치는 것이다. 공에 에너지가 입혀진다. 공이 에너지를 업고 간다. effect다.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우주 안에 없다. 몸을 꼬아서 두 개의 방향을 만든 다음 두 방향이 자리바꿈을 하는데 그 과정에 에너지가 한 방향으로 몰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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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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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 안에는 사과가 없다.


  사과 한 개가 있다. 우리가 사과의 존재를 아는 것은 사과의 색과 향과 맛과 촉감과 무게를 통해서다. 우리는 이것들이 사과 내부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착각이다. 사과의 질량은 지구의 중력이 결정한다. 색과 향과 맛과 촉감도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상이라 할 것이니 그림자와 같다. 사과를 사과로 규정하는 요소들은 사과 자체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사과와 바깥 환경과의 관계로 존재한다. 어떤 그것을 그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것 안에 있지 않고 바깥과의 관계로 걸쳐 있다. 사과 안에는 사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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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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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는 대칭이고 조는 호응이다.


  구조構造의 구構는 얽음이고 조造는 지음이다. 구構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돌을 어긋나게 겹쳐 쌓는 것이라 이는 공간의 얽힘이 되고 조造는 지음이니 이는 시간의 진행이 된다. 건물을 짓되 공간상에서 기둥과 보를 짜맞추는 것이 구構라면 시간 상에서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조造다. 구조는 공간과 시간에서 존재를 짓는다. 만물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대칭과 시간의 호응으로 지어져서 존재한다. 그 존재를 짓는 주체는 에너지다. 대칭과 호응은 각각 공간과 시간에 대응하는 에너지의 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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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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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너지는 계를 형성한다.


  존재의 근본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방향이 있을 뿐 형태가 없다. 에너지의 방향에는 확산방향과 수렴방향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에너지는 최초 플라즈마 상태의 무질서한 확산방향으로 존재하다가 일정한 조건에서 수렴방향으로 방향을 바꾸며 질서있는 존재의 형태를 연출한다. 인간은 그렇게 연출된 형태를 보고 사물을 분별하지만 많은 중요한 결정들은 형태의 성립 이전에 일어난다. 곧 형이하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다. 에너지가 확산에서 수렴으로 방향을 바꾸며 닫힌계를 형성할 때 많은 부분들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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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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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사물은 형태가 있고 사건은 형태가 없다. 근래에 보고된 영자역학의 성과로 알수 있듯이 물질의 형태는 인간이 존재를 바라보는 방식일 뿐 존재 자체의 전개하는 방식이 아니다. 물질의 형태는 외력에 대항함으로써 얻어진다. 외력에의 대항은 그만큼의 에너지 손실을 야기하므로 보다 효율적인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일정한 조건에서 닫힌계 내부가 균일해졌을 때 확산을 수렴으로 바꿔 축과 대칭의 구조를 갖추면 상대적인 효율성을 얻어 외력의 작용에 반작용으로 대항하게 되고 그럴 때 인간은 비로소 존재를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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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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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사건 안에서 에너지의 상태를 변경하는 데는 반드시 비용이 든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그 비용을 고려하지 않는다. 반면 엔트로피의 법칙은 그 비용을 감안한다. 상태변경에 비용이 지불되므로 1+1+비용=2다. 2에는 1+1에 없는 입자들 간의 상호작용이 포함되어 있다. 1+1+비용=2+상호작용이다. 비용문제에 따라 사건을 논할 때는 닫힌계를 설정하여 외부변수를 닫아야 한다. 사건은 닫힌계 안에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한다. 비용조달은 효율에 의해 가능하고 효율은 대칭에 의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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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5:31)
*.92.147.219

  에너지는 결따라 간다.

  모든 존재는 그것이 그것으로 되는 절차를 거쳐서 그렇게 된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조달되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조달되는 경로가 결이다. 사건은 결따라 간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신념이나 의도나 목적 때문으로 본다면 틀린다. 심리적인 동기는 거짓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것이 가장 쉬웠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할줄 아는게 그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수렁에 빠지듯이 빠져드는 것이 진짜다. 에너지의 흐름에 휩쓸려서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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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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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칭과 호응이 존재의 날줄 씨줄이다.


  날줄은 공간에 칼날처럼 날이 서 있고 씨줄은 시간의 북에 씨앗처럼 심어져 있다. 구조의 구構가 날줄이면 조造는 씨줄이다. 최초 플라즈마 상태의 무질서한 에너지가 외력의 작용에 의해 닫힌계를 형성하며 질서를 얻어 확산방향 <- ->를 수렴방향 -><-로 바꾸어 대칭시킨다. 대칭축이 만들어져 원래 2였는데 외력의 작용에 1로 맞서므로 보다 효율적이다. 존재는 그 효율성을 따라간다. 이때 큰 파장 <- ->를 짧은 파장 -><-로 바꾸는 것이 호응이다. 파장이 짧아졌으므로 상호작용이 감소한 만큼 효율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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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6:37)
*.92.147.219

  엔트로피가 결정한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공간의 대칭과 시간의 호응에 따라 상호작용이 감소한 만큼 효율이 발생한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정부가 두개에서 한 개로 줄어드는 것이 공간의 대칭에 따른 효율성이고, 호주에서 사오는 철광석을 북한에서 가져오면 운반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시간의 호응에 따른 효율성이다. 짧은 파장이 긴 파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므로 원상복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엔트로피다. 다시 두 개의 정부로 쪼개지려면 상호작용이 증가하는 만큼 비용이 청구되며 닫힌계 안에서는 비용조달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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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6:50)
*.92.147.219

  토대의 공유가 효율성을 만든다


  대칭은 둘이 하나를 공유하는 만큼 상호작용이 감소한다. 구조가 촘촘해진 만큼 파장이 짧아졌다. 이때 에너지의 자투리가 발생하여 이탈한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5회에 걸쳐 촘촘해져서 더 많은 내부 방향전환이 일어난다. 자동차가 엔진에서 바퀴 사이에 뭔가 촘촘하게 들어서는 만큼 에너지가 손실된다. 손실을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엔트로피다. 이때 공유되는 토대를 움직여 계를 통제할 수 있다. 에너지가 전체를 관통하지 않고 토대가 되는 코어를 타고 빠르게 이동한다. 코어를 조작하여 사건을 통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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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7:02)
*.92.147.219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량은 침투한다.


  두 팀이 하나의 협회를 공유하면 질의 결합이다. 협회를 조작하면 두 팀에 동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두 팀이 하나의 그라운드를 공유하면 입자다. 그라운드를 조작하여 시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두 선수가 하나의 공을 두고 경합하면 힘의 교섭이다. 역시 공을 조작하여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질에서 입자를 거쳐 힘으로 운등으로 량으로 갈수록 통제범위가 좁아진다. 대신 세밀해진다. 이때 조작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순서로 진행해야 한다. 엔트로피에 따라 파장이 짧아지는 방향으로만 통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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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3:37:36)
*.92.147.219

귀납이 아니라 연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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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4 (16:35:10)
*.29.28.42

공간이 시간이다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는 완전히 같다. 에너지는 포지션이 꼬여 있는 것이고 물질, 공간, 시간은 꼬인 것이 풀리는 절차이며 정보는 풀린 것을 인간이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은 알겠는데 시간은 모르겠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시간을 모른다면 공간도 모르는 것이며 물질도 모르고 에너지도 모르는 것이다.


    앞은 알겠는데 뒤는 모르겠다거나, 오른발은 알겠는데 왼발을 모르겠다거나, 밤은 알겠는데 낮은 모르겠다거나, 북쪽은 알겠는데 남쪽은 모르겠다거나, 손은 알겠는데 손가락은 모르겠다거나, 버스는 알겠는데 자동차는 모르겠다거나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 그것은 언어도단이다. 언어도를 단절하니 언어를 공격하는 행위다.


    다섯은 세트로 가므로 알면 다 아는 것이고 모르면 다 모르는 것이다. 존재는 대체로 꼬여있다. 만약 꼬이지 않으면 외력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무언가를 봤다면 그것은 일단 꼬인 것이다. 꼬인다는 것은 둘인데 하나로 행세한다는 거다. 부부는 둘인데 호텔 객실을 하나만 잡으니 보나마나 팔자가 꼬인 거다.


    둘이 꼬이지 하나가 꼬이지는 않는다. 꼬인 것을 풀려면 둘의 중심을 찾아야 한다. 중심에 아기가 있다. 아기가 없다면 그 부부는 이혼할 확률이 높다. 꼬인 것이 풀린다. 그 중심이 꼬인 둘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물질이다. 날아가는 총알이 허공에서 방향을 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가능하다. 아니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총알을 둘로 쪼갠 다음 둘이 자리를 바꾸면 된다. 총알의 탄두 속에 화약을 넣어서 터뜨리면 된다. 화약을 기술적으로 배치하면 원하는 각도로 틀 수 있다. 이때 둘이어야 한다. 혼자서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 그것이 공간이다. 시간은 그 바꿈의 계속된 진행이다. 문제는 그 상태를 멈추지 못한다는 점이다. 관성의 법칙 때문이다.


    에너지 보존에 의해 관성력이 지속되므로 한번 운동하면 계속 운동한다. 공간은 방향을 틀고 그걸로 끝난다. 시간은 그 상태를 지속한다. 보통은 입자 상태에서 밸런스가 어긋나고 그 밸런스를 보정하는 과정에서 둘이 자리를 바꾸고 그 바꾸기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빛이 튀어나오는 것이 그렇다. 강한 에너지로 철판을 때린다.


    철판 안에 에너지가 높아져서 밸런스가 붕괴되면 보정하느라 축이 이동하여 자리를 바꾸게 되고 그 과정에서 튀어나온다. 광전효과다. 처음에는 철판 내부에서의 밸런스가 붕괴되었으나 다음에는 튀어나온 전자로 인해 공간의 밸런스가 무너졌고 그 밸런스를 바로잡다보면 빛은 광속으로 계속 이동하게 되니 그것이 곧 시간이다.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는 계 내부에서의 에너지 밸런스가 붕괴되어 그것을 보정하는 과정에서 계가 깨지는 절차다.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마치 문재인과 대통령과 김정숙 남편이 별도로 있다는 생각과 같다. 셋은 한 사람이다. 같은 것의 덩어리를 볼 것인가 아니면 해체해서 볼 것인가다.


    공간은 진행하는 것이 방향을 틀 수 있다는 것이며 시간은 돌아가는 팽이는 계속 돌게 되고 제 발로 멈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두 물질의 성질을 설명하고 있다. 물질은 공간과 시간의 방법으로 우리가 어떤 대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며 에너지는 그 통제가능성이다. 에너지는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통제가 된다는 특징이 있다.


    에너지 - 계를 지정하면 통제할 수 있다.

    물질 - 내부질서에 의해 자체적으로 통제되고 있다.

    공간 -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시간 - 운동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정보 - 인식할 수 있다.


    만약 시간이 없다면? 운동하는 것은 그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 곧 깨져버린다. 시계태엽이 너무 빨리 풀려버린다. 인간은 조로해 버린다. 물질 중에는 0.1초만에 붕괴해 버리므로 과학자의 실험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있다. 실제로는 많은 물질들이 곧바로 붕괴한다. 드물게 일부가 살아남아 우리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광속이 무한대라면 우주는 바로 붕괴한다. 우주의 먼 곳에 있는 빛과 가까운 곳에 있는 빛이 동시에 도착하면 지구는 바로 터져버린다. 빛이 허공을 이동하는 것은 자리를 바꾸는 것이므로 공간의 고유한 진동속도가 광속을 결정하기에 우주가 폭발하지 않고 보기 좋게 유지되는 것이다. 자리를 바꾸려면 일정한 속도로 가게 된다.


    시계 속에는 앵커라는 것이 있어서 톱니가 둘 있는데 앞으로 두 칸 갈때마다 뒤로 한 칸을 간다. 즉 2보전진 1보후퇴를 반복하므로 내부에서 부단히 자리를 바꾸며 그 방향전환 순간 속도가 0이 되기 때문에 즉 순간적으로 운동을 멈추기 때문에 시계태엽이 단번에 풀리지 않고 천천히 풀려서 우리가 시계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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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2 (08:55:10)
*.36.40.206

구조론은 특별히 설명할게 없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똑같은 이야기를 5회 반복한 것이다. 질이 입자고, 입자고 힘이고, 힘이 운동이고, 운동이 량인데 힘과 운동의 차이를 설명해달라고 하면 난감하다. 힘은 힘이고 운동은 운동이지 달리 설명할게 뭐 있다는 말인가? 무엇보다 이게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설명을 요구한다면 이게 에너지에 대한 논의라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에너지를 논하는데 그게 에너지라는 사실을 모르면 수학시간에 국어교과서 펴놓고 있는 격이라서 애초에 말이 안 통하는 장면이 된다. 그렇다면 설명할 것이 아니라 500방을 앵겨야 할 일이 아닌가? 정신 못 차리고 한 눈 팔고 그러기냐?


    숭산처럼 막대기를 들고 있다가 머리통을 때려줘야 할 장면이다. 에너지는 사건 안에서 계의 통제가능성이다. 사건은 1회의 에너지 입출입에 따른 변화다. 인간은 먼저 변화를 포착한다. 즉 모두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변화는 복잡하므로 마디를 끊어주되 그 마디가 사건이며 사건의 원인은 에너지이며 1회의 에너지 출입에 따른 변화를 논한다.


   질은 그 에너지가 모여서 사건을 일으키려는 상태이며 입자는 축과 대칭으로 교착되어 안정된 상태이며 힘은 외력의 작용으로 그 안정이 깨져서 축이 움직이는 상태이며 운동은 축이 움직여서 변화가 바깥으로 드러난 상태이며 량은 그 사건의 종결이다. 이걸로 설명은 끝났으며 구체적인 적용은 내게 묻지 말고 본인이 직접 관찰하면 된다. 


    모를만한 구석이 없다. 어디를 모를 수 있다는 말인가? 중요한건 의사결정 중심으로 보는가이다. 필자가 컵이나 저울이나 공으로 설명해도 실제로는 그 안의 에너지 방향을 설명하는 거지 컵을 설명하는게 아니다. 전봇대로 이를 쑤시면 이쑤시개다. 그건 이를 쑤시는 사람이 결정하지 전봇대가 결정하는게 아니다. 전봇대는 에너지가 없다.


    이를 쑤시는 사람에게 에너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봇대에서 질 입자 힘 운동 량을 찾지 말고 그 전봇대로 이를 쑤시는 사람이 전봇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봐야 한다. 어차피 그 관측대상과 상관없는 거다.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은 사용목적이 있기 때문에 용도에 따라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정해져 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거다.


   예컨대 컵에 손잡이가 있지만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손잡이를 질로 놓는 것은 사람이 손잡이를 쥐니까 그런 거다. 즉 질은 에너지의 입구이며 사람이 손잡이를 입구로 쓰니까 입구인데 성격이 괴팍한 사람이 손잡이 놔두고 다른 곳을 잡으면 그곳이 질이 된다. 그냥 에너지의 입구가 질이지 꼭 컵의 그 부분으로 에너지가 들어가란 법은 없다.


   에너지가 들어가면 그 에너지가 작동하며 그 작동의 시작점인 코어는 있을 수 밖에 없다. 코어가 없어도 코어 역할을 하는 무언가는 있다. 우리가 만든 도구들은 대개 코어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편의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자연에서 그것은 순간적으로 결정된다. 수학적으로 대칭에 의해 에너지 균형점이 도출되는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움직이려면 움직임의 시작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건 수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접근하기다. 필자가 컵의 코어는 여기다 하고 가르쳐주면 아 거기구나 하고 외어서 추상적 논리를 구체적 사물로 바꿔치기 할 것 같아 설명할 수가 없다. 설명할수록 왜곡해서 받아들인다는 느낌이 든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꼭 토를 달아야 하나?


    힘은 용수철이 눌려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놔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냥 안정되게 눌려있는 상태는 입자다. 놓으면? 스프링이 튀면서 펼쳐진다. 어디로? 여러분은 스프링이 어디로 튀는지 안다. 왜? 만져봤거든. 눈으로 봤거든. 그러나 자연의 에너지가 튀는 방향은 모른다. 스프링이 어디로 튈지 안다면 정부규제로 집값이 어디로 튈지 알어?


    국민 여론이 어디로 튈지도 알겠네? 진짜 알어? 알긴 개뿔을 알어. 스프링이 어디로 펼치는지는 스프링 내부의 밸런스가 순간적으도 도출하는 것이다. 김연아가 연기하며 움츠린 몸을 펼칠때 어디로 튀지? 투수가 와인드업 했다가 어디로 튀지? 스프링은 알면서 김연아는 모르고 오승환도 모르고 강남 집값도 모르고 국민 여론도 모른다면? 

    

    즉 스프링이 어디로 튈지는 여러분은 그냥 봐서 알지만 스프링 안에서는 결정해야 한다. 자기들끼리 가위바위보 해서 정하는 거다. 이 말 듣고 스프링이 어떻게 가위바위보를 하지? 이러는 사람은 오백 방을 맞아야 한다. 어휴. 밸런스를 말하는 거다. 중요한 건 그 방향이 결정된다는 거다. 운동은 그 진행을 멈추지 못한다. 이론적으로 보자.


    우주 공간에서 총을 쏘면 총알은 영원히 날아간다. 날아가는 상태로 정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추가설명이 필요한데 운동하는 물체는 두 개의 축이 내부에 있으면서 교대한다. 부메랑을 떠올리면 된다. 그 둘의 상대적인 관계는 안정적으로 균형을 이루므로 정지해 있는 것이다. 물론 외부 관측자에 대해서는 움직인다. 내부에 축이 두개이다.


    축은 원래 한개인데 계속 바뀌는 거다. 아령을 회전시키며 던져보자. 명왕성과 카론처럼 서로를 공전한다. 모든 운동은 명왕성과 카론 상태로 서로를 공전하는 것이다. 그냥 허공을 진행하는 공도 내부적으로 에너지는 그런 상태에 있다. 하여간 이런 것은 몰라도 된다. 힘은 그냥 축이 위치를 바꾸는 것이고 운동은 둘이 교대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은 인간의 눈에 보인다. 둘이 자리를 바꾸기 때문이다. 사람이 걷는 것도 두 다리가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허공을 날아가는 총알도 에너지적으로는 내부에서 자리를 바꾼다. 광자의 경우 그것을 파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운동은 보통은 마찰력이나 중력에 의해 정지되지만 이는 외부의 개입이고 자체로는 영원히 진행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힘은 각도가 정해져야 하고 운동은 시간 곧 속도가 정해져야 한다. 눈에 보이는 물체에서 질 입자 힘 운동 량을 찾으려 말고 에너지의 의사결정을 봐야 한다. 아무리 설명해도 말귀를 못 알아 잡수는 것 같이 느껴져서 언어를 보태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에너지는 다섯차례 결정한다. 


    물체를 외부에서 타격하면 즉 계에 에너지를 투입하면 밸런스 붕괴로 그 물체는 깨지거나 반작용하거나 정해야 한다. 그걸 정하는 것이 질이다. 깨질지 반작용할지는 밀가루반죽이냐 유리냐 돌이냐 나무냐로 정하며 그것이 질이다. 깨지면 사건은 사망이고 반작용하면 반작용의 시작점을 정해야 한다. 내부적인 에너지의 밸런스가 결정한다. 


    보통은 원심력과 구심력 사이에서 코어를 정한다. 인간이 미리 정해놓은 것도 있다. 일부러 심을 삽입해 둔 것이다. 야구공 골프공에도 코어가 있다. 축구공은 비어 있지만 그 비어진 것이 코어가 된다. 딱딱한 코어든 빈 코어든 반드시 반작용의 시작점이 있다. 밸런스의 균형점은 수학적으로 있다. 인간의 근육이라면 뼈가 코어가 되는 것이다.


    문어는 뼈가 없어도 코어가 있다. 대신 문어는 코어를 정하는데 시간이 걸려서 동작이 사람처럼 재빠르지 않다. 뱀은 코어를 잘 못 정해서 몸을 S자로 꼬아서 그 S의 중간점을 코어로 삼는데 이게 꽈배기 하는 시간이 걸려 뱀은 동작이 느리다. 문어나 낙지도 느릴 수 밖에 없다. 그래도 탄력 받으면 잘 간다. 지렁이도 코어를 만드는데 느리다.


    뼈가 있으면 확실히 코어를 정하는 속도가 빨라 대응이 빠른 것이다. 갑각류는 속이 비어있지만 대신 껍데기가 대칭을 이루므로 코어를 의외로 빨리 정한다. 그래도 척추동물보다 느리다. 껍데기의 대칭에 의지하므로 복잡한 동작을 하지 못한다. 갑각류는 대칭적인 동작에만 능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코어는 있다. 없어도 즉각 도출한다. 


    축구공 속은 비어서 코어가 없는데요? 이런 소리 하는 사람은 500방을 맞아야 한다. 대나무라도 코어는 에너지적으로 반드시 있다. 균형점이 코어다. 힘을 가하면 균형이 생기므로 코어는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없어도 있고 있어도 있는 것이다. 단 코어가 있어야 그 코어의 이동이 빠르게 되어 동작이 빠르다. 게는 동작이 빠를 수가 없다.


    코어가 있으므로 반작용이 진행되는 방향 곧 코어의 이동이 있는 것이며 힘은 그 이동방향을 정하는 절차고 운동은 코어를 이동하면 멈출 수 없으므로 운동거리가 벌어지는 것이다. 량은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 이걸 추상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추상을 추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무한복제 되어 어디든 적용할 수 있다.


  볼펜이 하나라고 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볼펜을 갖고 와서 어디가 하나냐고 묻는 사람은 없다. 하나라는 것은 볼펜과 상관없다. 숫자 1과 대응시킨 것이다. 마찬가지로 질 입자 힘 운동 량도 볼펜과 상관없이 에너지의 매개변수에 따라 대응시킨 것이다. 볼펜을 쓰려면 일단 잡아야 한다. 볼펜을 잡으려면 다섯개 루트로 에너지가 들어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볼펜은 다섯개 루트로 에너지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볼펜에는 다섯개의 발이 있어야 하며 다섯개의 발은 볼펜을 구성하는 인자들이 서로를 붙잡고 있는 결합력 그 자체다. 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 등이 결합력을 결정한다. 발이 네개면 로봇은 볼펜을 잡을 수 없다. 포크로 음식을 집을 때는 콱 찌르면 되니 발이 한개면 된다?


   아니다. 우주공간의 허공에 떠 있는 음식을 포크로 찍을 수 있나? 접시를 이용하여 뒤를 받치고 중력으로 붙잡아놓고 있으미 이미 두 개의 발을 써먹었다. 로봇의 발이 둘이면 옆으로 삐져나온다. 음식의 무게가 지탱하는 역할. 접시의 받침역할. 이미 두 개의 발을 제공받고 있다. 우주공간에서 다섯 발이 아니면 움직이는 물체를 집을 수가 없다.

    

    이미 잡았으면 발가락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통제한다. 다섯발을 사용한 상태에서 물체를 원하는대로 조작할 수 없다. 다섯손가락 중에 하나를 빼야 한다. 손가락을 하나씩 빼서 0에 도달하면 물체는 원하는 위치에 가 있다. 그럼 손가락을 다쳐 네 손가락인 사람은 어쩌지? 그 경우 한 손가락을 교묘히 움직여 두 손가락의 역할을 겸해야만 한다. 


    이건 단순히 수학이다. 아직 이런 분야를 연구하는 수학이 없지만 조만간 나와야 한다. 이 수학이 만들어지지 않으니 로봇이 걷지를 못하는 것이다. 로봇이 걷는 것도 다섯 손가락을 쓰는 것이며 로봇의 무게와 지표면의 단단함이 둘을 해주므로 발이 두 개이면 되는데 이는 발바닥의 길이가 하나의 역할을 대행하기 때문이다. 다섯발로 걷는다.


    젓가락으로 물체를 집어도 일단 그릇이 받치고 음식의 무게와 질감이 받치니 두 개를 날로 먹는다. 젓가락 두개+젓가락 길이+음식의 질감+접시로 5개의 발을 사용한다. 우리가 노상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으면서도 이런 것을 세어보지 않은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건 그냥 세어보면 된다. 음식을 먹는 건 거기서 하나씩 뺀다.


   집으면 접시가 떨어져 나간다. 입속에서 혀와 목구멍이 젓가락을 대체하므로 0까지 가는 절차가 복잡하다. 최종적으로 음식의 중력을 버리면 위장에 투하된다. 투수가 공을 던져도 먼저 5를 완성한 다음 하나씩 빼는 것이다. 투수의 와인드업은 지구 중력까지 끌어와서 5를 만든다. 5, 4, 3, 2, 1을 거쳐 0에 이르면 공읕 투수의 손을 떠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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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6 (16: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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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론과 인식론


    구조론 안에 존재론과 인식론이 별도로 있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원래 수학 안에 대수학과 기하학이 있듯이 같은 표현이 중복되는 경우는 흔하다. 구조론은 간단히 세상을 알갱이 입자가 아니라 구조 곧 관계로 보는 관점이다. 주파수가 대표적이다. 파동의 간격이 색깔을 결정한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 관측대상 속에 내포되어 있는 어떤 알갱이나 혹은고유한 무엇이 아니라 대칭된 둘 사이의 간격이다. 두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만나는지에 따라 부부가 되기도 하고 형제가 되기도 한다. 침실에서 만나면 부부요 거실에서 만나면 형제다. 그 간격은 상대적이며 고유하지 않다.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움직여도 결과는 같다. 부부 중에 어느 쪽이 외도를 하든 결과는 이혼이다. 그래서? 다양성이 있다. 구조론은 모든 것을 구조 하나로 설명하는 일원론이지만 오히려 그 안에 다양함을 감추고 있다. 둘이 만나는 간격을 조정하여 얼마든지 다양한 칼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구조론 안에 존재론과 인식론이 있다. 인식론은 인간이 어떤 대상을 관측하는 것이다. 우리는 관측되는 세계가 알갱이 입자로 되어 있으며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는 인간의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사과, 배, 감, 복숭아, 포도, 잣, 대추들이라면 각각 고유한 형태와 속성을 갖추었다.


    금, 은, 구리, 납, 철, 주석, 아연이라도 마찬가지다. 굳기의 차이로 판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판별할 수 있는 입자는 많지 않다. 몇 종의 과일과 몇 가지 물질 뿐이다. 소립자 단위 미시세계로 가면 이런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컴퓨터로 봐도 0과 1 밖에 없어서 얻어낼만한 알맹이가 없다.


    인간사회의 다양한 부분은 고유한 입자가 아니라 상대적 간격으로 존재한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문화든 예술이든 간격이 칼라를 결정한다. 고유함도 없고 입자도 없다. 인식론적 접근으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별로 없다. 남녀구분이라도 입자와 고유성으로 보면 고작 성기형태 차이 뿐이다.


    인위적으로 표지를 달아 고유성을 강조하지만 가짜다. 한국인이든 중국인이든 차이가 없다. 고유성을 발견할 수 없다. 태극기니 일장기니 하며 깃발을 내걸어 차이를 말하지만 가짜다. 해부학적인 증거가 없다. 오장육부 외에 뭐가 없다. 그러나 상대적인 관계 곧 간격으로 보면 많은 것이 보인다.


    신분, 지위, 계급 등은 모두 상대적인 관계다.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엘리트와 비엘리트, 서울대와 지방대, 승자와 패자는 관계다. 그것은 사건 안에서 구분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대한 갈림길이다. 원래 고유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우연히 만나 상대적인 관계로 파악되는 사건을 일으켰는가?


    아니면 원래 커다란 하나의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이 특정한 조건에서 교착되어 우리가 아는 고유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는가다. 구조론의 답은 원래부터 사건이 있었다는 거다.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돌아다니다가 여러 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원래 사건이 있고 사건이 진행되며 존재로도 된다.


    너와 내가 만나 국가를 결성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인류가 있고 그 인류가 번성하여 너와 내가 된 것이다. 가지와 가지가 붙어 나무가 된 것이 아니고 나무가 자라서 가지가 나누어진 것이다. 여기서 딜레마다. 인간은 나누어진 가지다. 나누어지기 전의 본체를 볼 수 없다. 진면목을 볼 수 없다.


    너와 내가 만나 국가를 결성한게 아니라 원래부터 집단의 일원으로 태어났고 무의식의 형태로 집단의 조종받지만 자신이 집단의 일원이며 조종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자신이 가족과 부족과 국가의 일원임을 모른다. 국명을 내걸지 않아도 국가단위 의사결정은 존재한다. 타자성이 있는 거다.


    국가는 없어도 단위는 있다. 집단이 있다. 무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세상은 고유성을 가진 입자 알갱이의 집합이 아니라 대칭구조 안에서 상대적인 관계와 간격으로 존재하지만 인간은 대칭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의 인식에 제한이 걸린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밖을 모른다.


    사건의 전모를 볼 수 없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자신이 소속한 집단을 모른다. 누가 자기를 조종하는지 모른다. 그것을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존재론과 인식론을 구분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인식의 메커니즘과 존재의 메커니즘이 별도로 있는 거다.


    인식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없기 때문에 인식은 인식대로 가고 존재는 존재대로 가야 한다. 인식은 나와 타자의 경계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존재로 보면 그 경계는 희미하다. 산모에게서 엄마와 아기의 정확한 경계를 정할 수 없다. 이익이 일치하면 가족은 내 일부이고 이익이 불일치하면 남이다.


    나와 타자의 경계는 그때그때 정하는 것이다. 인식에서 단서를 얻은 다음 존재로 재구성해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자동차를 분해해서 부품을 익힌 다음 재조립해봐야 한다. 세상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진행하지만 우리는 부분에서 전체로 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머리 속에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부분에서 전체로 간 다음 다시 전체에서 부분으로 놓아봐야 한다. 바둑을 두어도 그렇다. 흑백의 대결은 부분에서 일어난다. 전체를 봐야 하지만 전체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전체는 아직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석대로 두면 전체가 연출된다. 머리 속에서 전체로 갔다가 다시 부분으로 와야 한다.


    나무는 줄기에서 가지가 나오는데 바둑은 가지에서 줄기가 나온다. 줄기는 없지만 있다치고 머리 속에 그려야 한다. 세상은 언제라도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벤처기업에 투자하더라도 투자가는 전체를 보고 투자하지 부분을 보고 투자하지 않는다. 그런데 전체를 보여줄 수 없다. 전체는 계획이다.


    전체는 CEO의 서랍 속에 있는 것이다. 인식론은 잘못된 것이지만 바로잡을 방법이 없다. 손정의가 내 마음 속에 이런 대담한 계획이 있노라 해봤자 믿어줄 사람 없다. 그러므로 인식론으로 가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존재론으로 틀어야 한다. 처음에는 이상한 아이디어로 유인하여 투자를 유치한다.


    일단 투자를 받은 다음에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 이상한 아이디어는 보여줄 수 있지만 진짜배기는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세돌 9단의 머리속에 있는 것이며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론은 잘못된 것이지만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구조론은 철저히 존재론이다.


    존재 그 자체가 스스로 대칭하고 관계하고 간격을 조정하는 방식이다. 인간과 관계없다. 인간을 떠나 독립적으로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보여줄 수 없다. 설명할 수 없다. 보여주려면 왜곡시켜야 한다. 인류는 원래 한 가족이다. 무의식이므로 보여줄 수 없다. 적이다 하고 외쳐야 알아듣는 것이다.


    적을 때려죽여라고 선언하면 개라도 알아듣는다. 적을 제압하려면 우리편이 필요하고 우리편을 만들려면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류는 한가족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오지 않고 그냥 원래 한 가족이라고 하면 먹히지 않는다. 찢어죽일 놈의 사탄이 없으면 하느님도 없다.


    나쁜 것이 없으면 좋은 것이 없다. 악이 없으면 선을 납득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업은 처음부터 좋은 것으로 바로 가지 않고 항상 나쁜 것을 거쳐 간다. 선을 가르치려면 악을 경험시켜야 하고 하느님을 가르치려면 사탄을 만들어와야 한다. 차별하고 배제하고 미워해야 통합되고 사랑한다.


    그러나 진실로 말하면 악은 원래 없다. 선의 지체가 있을 뿐이다. 적은 원래 없다. 문제해결이 있을 뿐이다. 사탄은 원래 없다. 리더가 있다. 모든 차별되고 미워하는 것은 통합하고 사랑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 어리석은 시행착오를 인간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누구도 진리로 바로가지는 못한다.
   

    존재론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인식론은 부분에서 전체로 간다. 존재는 양자적이다. 둘이 교착되어 하나가 된다. 처음부터 둘로 시작된다. 세상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원래 고유한 활동성은 가지고 있다. 인식은 원자적이다. 그냥 하나가 있는데 누가 외부에서 건드리면 사건이 일어난다. 틀렸다.


    원래 사건은 일어나 있다. 137억년 전 빅뱅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사건은 일어나 있었다. 사건이 교착되어 에너지의 고유한 활동성을 감추면 존재가 포착된다. 그러나 속임수다. 드라마의 빌런은 원래 동적 존재다. 원래부터 돌아다니며 일을 벌인다. 주인공은 정적인 존재다. 주인공은 가만 있다.


    주인공이 가만 있는데 빌런이 찾아와 일을 벌인게 아니라 반대로 주인공이 일을 벌이는 것이 구조론이다. 우주는 처음부터 일이 벌어져 있었다. 이브가 아담을 꼬셔서 사건이 일어난게 아니다. 원래부터 사건으로 시작했다. 사건 자체의 논리를 따라가는게 존재론이다. 그러나 사건을 볼 수 없다.


    인간은 정지한 것만 볼 수 있다. 정지한 것은 애초에 잘못 본 것이니 눈을 다시 뜨고 에너지의 활동성을 봐야 하지만 인간은 그게 원래 안 되기 때문에 일단 정지한 것을 봤다가 다음 그 모순에서 사건을 유추하고 다시 정지한 것을 뇌에서 지우는 번거러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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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6 (19: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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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역과 귀납 그리고 이중의 역설


    인식론은 귀납이고 존재론은 연역이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된다. 귀납은 진술로부터 전제를 추측하는 것이며 연역은 정당하게 전제로부터 진술을 끌어내는 것이다. 연역은 언어구조와 맞고 귀납은 어긋난다. 그러므로 귀납은 추측과 사유에 쓰이되 추론에 쓰이지 못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추론은 연역이며 귀납은 없다. 단 적的을 붙여서 귀납적 접근이라는 표현은 쓸 수 있다. 이 경우는 추론이 아니라 추측이며 사유다. 새로운 가설을 세우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수학은 통째로 연역이다. 먼저 룰을 정하고 룰 안에서 세부를 채워가는 거다.


    엄밀하게 논하자면 모든 논리적 추론은 연역이며 귀납은 있을 수 없다. 단 연역추론을 하기 전에 자료수집 단계에서 귀납적 접근이 가능하며 이는 접근일 뿐 추론이 아니다. 연역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는 방향이고 귀납은 부분에서 전체로 가는 방향이다. 여기에서 딜레마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야 연역인데 추론단계에서 전체를 알 수 없으므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귀납하여 부분에서 전체로 가다가 오류를 발견하고 전체를 찾은 다음 다시 방향을 틀어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야 한다. 반드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거쳐야 한다.


    어떤 사유가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의 방향전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무조건 틀렸다고 봐야 한다. 그것이 역설이다. 사건은 하부구조와 상부구조가 있다. 결과측의 단서를 포착하는 사실단계와 배후에서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원인측의 사건단계가 있다. 이중의 역설이 성립한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두 번 방향을 바꾸어야 바르다. 예컨대 진보를 주장한다면 그냥 진보가 옳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역설을 적용하여 사실은 보수가 옳다를 찍고 와서 다시 에너지는 진보가 옳구나 하고 틀어야 한다. 이러한 이중의 역설을 거치지 않으면 일은 실패로 돌아간다.


    사건은 문제의 해결이며 문제의 해결은 에너지를 공급하는 상부구조 단계와 방해자를 제거하는 하부구조단계로 조직된다. 에너지 공급은 주로 진보의 관심사가 되고 방해자 제거는 주로 보수의 관심사가 된다. 에너지 공급이 전제이면 그 범위 안에서 방해자의 제거가 진술된다.


    진술은 전제의 제한을 받는다. 그러므로 추론은 연역 밖에 없다. 진술에서 전제를 추측할 수도 있지만 이는 논리적 증명이 아니라 연역추론을 하기 위한 자료수집이다. 인간은 사건의 전모를 모르므로 전체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입수한 단서를 통해 가설을 세울 수 밖에 없다.


    전제를 알 수 없으므로 가설은 틀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틀렸다는 사실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거짓을 뒤집으면 진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바른 길을 가려면 어긋난 길을 한 번 가보고 와야 한다. 선은 악을 거쳐야 한다.


    대포 사격을 한다고 치자. 처음 아무 데나 한 방을 쏘고 낙하지점을 지도에 표시한다. 다음 각도를 1도 틀어서 다시 한 방을 쏘고 낙하지점을 지도에 표시한다. 이 과정을 거쳐야 세번째 사격에 필요한 정확한 각도를 알 수 있다. 준비사격은 반드시 2회라야 한다. 삼각측정과 같다.


    정설에서 역설로 다시 이중의 역설로 세 개의 설을 조직해야 진실이 찾아지는 것이며 처음부터 정답으로 바로 갈 수는 절대 없다. 먼저 어떤 것을 찾고 다음 그 어떤 것의 움직임을 찾고 다시 그 어떤 것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에너지원을 찾는다. 이 과정이 없으면 보나마나 가짜다.


    존재론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회에 걸쳐 대칭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범위를 압축하여 사건의 원인에서 결과까지 접근한다. 질 입자 힘의 상부구조에서 에너지를 조달하고 힘 운동 량의 하부구조에서 대상을 통제한다. 보통은 대상을 통제하려다가 대상이 움직이므로 실패한다.


    미꾸라지를 잡으려다가 미꾸라지가 도망가버려서 실패하는 식이다. 미꾸라지를 잡으려고 하므로 미꾸라지를 잡을 수 없다는게 역설이다. 그러나 통발을 설치해두면 미꾸라지는 제 힘으로 통발 속에 들어와 있다. 미꾸라지의 자체 에너지를 통제하여 잡는 것이 이중의 역설이 된다.


    대상이 움직일 것을 예상하고 의도적인 실패를 저지르는 방법으로 대상을 움직이게 해서 잡는 것이 이중의 역설이다. 그물을 쳐놓고 물을 들쑤셔서 물고기가 그물 속으로 숨게 한다. 두 번의 방향전환이다. 그물을 친다. 방향을 바꿔 물을 흔든다. 다시 방향을 바꿔 그물을 당긴다.


    인간은 실패를 통해서만 성공하는 존재다. 물론 이 과정을 실패라고 말하지 않고 투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치라면 이 과정이 실패로 보여야 작전이 성공한다. 정치는 항상 새롭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실패해서 탄핵당한 것으로 보여야 한다. 일부러 탄핵을 당했다고 하면 안 된다.


    새로운 발명이나 창의라도 외부의 관측자에게는 실패로 보여진다. 이 패턴이 반복되어야 의도적인 투자로 이해한다. 미끼를 던져야 물고기를 낚을 수 있다. 물고기가 미끼를 가져가니 실패로 보여진다. 정치와 예술과 발명과 도전은 새로우므로 언제나 오해되는 과정을 거친다.


    귀납추론은 무조건 틀린 것이며 응수타진으로 써먹을 수 있다. 바둑이라면 사석작전이다. 귀납은 반드시 죽지만 그것으로 적을 함정에 끌어들일 수 있다.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져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진실을 파악하려면 의도적으로 오류를 저질러야 한다.


    진리는 오직 존재론과 연역 뿐이며 인식론과 귀납은 존재론과 연역을 쓰기 위해 필요한 장치다. 우리는 틀린 인식론을 구사하여 적을 게임에 끌어들여서 적이 틀리게 하는 방법으로 바른 길을 찾는다. 오조준을 거쳐 정조준이 가능하다. 가늠자와 가늠쇠를 거쳐 타겟을 겨냥한다.


    첫 번째 발사가 가늠자 역할을 하고 두 번째 발사가 가늠쇠 역할을 해서 세번째 발사로 타겟을 때린다. 이에 예외는 없다. 만약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이 과정을 거쳐서 내부에 감춰놓은 것이다. 오조준으로 실패를 경험하고 가늠자와 가늠쇠를 장치 내부에 갖춰놓은 것이다.


    정치나 예술이나 발명이나 도전에는 가늠자와 가늠쇠가 없기 때문에 만들어야 한다.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창당이 가늠자가 되고 적들이 탄핵소동이 가늠쇠가 되어주어야 국민이 정조준을 할 수 있다. 최저임금을 올려도 약간 무리하다 싶게 올려야 가늠쇠 기능을 충실히 해준다.


    적당한게 좋다 싶지만 적당하면 판단이 불가다. 국민이 납득하지를 못한다. 요리를 해도 약간 싱겁게 했다가 다시 소금을 쳐야 한다. 이러한 흔들기 조절과정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왜인가? 존재는 에너지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에너지에 도달할 수 없고 장악할 수도 없다. 


    에너지는 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장은 둘 이상의 상호작용 형태로만 존재하므로 우리는 절대 에너지에 도달할 수 없다. 에너지를 장악하는 절차로 귀납적 접근이 필요한 거다. 오른주먹을 앞으로 내밀기 위해서는 왼주먹을 뒤로 당겨야 한다. 반드시 대칭구조를 조직해야 한다.


    신체의 코어를 중심으로 왼팔과 오른팔이 저울을 이룬다. 반드시 저울을 만들어야 한다. 두 번의 오조준을 거쳐 세번째 정조준으로 저울이 만들어진다. 가늠자와 가늠쇠와 타겟이 저울의 수평으로 정렬한다. 왼발을 앞으로 내밀기 전에 오른발을 뒤로 힘주어 밀어 저울을 만든다. 


    가려는 방향의 반대로 갔다와야 한다. 당신이 진보주의자라면 보수주의를 거쳐와야 한다. 그렇게 저울을 만들고 가늠자와 가늠쇠를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선을 지향한다면 악을 한 번 거쳐와야 한다. 사건의 장을 조직하고 대칭을 조직하고 저울을 조직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젊었을 때는 진보였다가 세상 물정을 알고나서 보수로 생각을 바꾸었다가 에너지에 대한 통제권을 얻어 다시 진보로 와야 하는데 이 과정을 거쳐온 제대로 된 진보는 없더라. 에너지에 대한 통제권은 창의하는 자에게만 있다. 에너지는 반드시 닫힌계의 외부에서 오기 때문이다.


    닫힌계 안에서는 대칭구조가 작동하므로 에너지가 성립하지 않는다. 가늠자와 가늠쇠가 없다. 반드시 밖으 나갔다가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안에서만 껍죽대는 자는 물정을 모르는 무뇌진보다. 밖으로 나가면 보수의 일탈이다.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제대로 된 진보다. 


    노무현처럼 바깥의 밑바닥 세계로 한 번 갔다와야 한다. 진짜에게는 에너지에 대한 통제권이 있다. 노무현은 밑바닥 사람을 통제하는 기술이 있다. 밖은 닫힌계의 밖이다. 닫힌계가 반드시 국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라면 공방이 벌어지는 판도 바깥이다. 그라운드 밖이다.


    한 번은 야인이 되어봐야 한다. 밖에서 신무기를 얻어오거나 외교하여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 오거나 창의하여 새로운 방법을 얻어오거나 공방이 벌어지는 기존의 판도 안에 없는 것을 끌어들여야만 진보는 가능해진다. 닫힌계 안은 대칭적으로 조직되므로 절대로 에너지가 없다. 


    반드시 밖에서 힘을 가져와야 내부를 조정할 수 있다. 밖으로 나가면 보수다. 노무현이 찾아간 밑바닥 세계는 보수가 먹는 세계다. 그 보수에 대한 통제권을 얻어와야 진짜 진보가 가능해진다. 밖으로 나가야 하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는게 딜레마다. 누가 밖에서 끌어내줘야 한다.


    노무현은 정치권 바깥의 문재인이 당겨줘서 가능했다. 문재인도 정치권 바깥의 김어준이 당겨줘서 가능했다. 바깥과 연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대개 진보는 안에서 힘이 없어 움쭉달싹 못하고 보수는 밖에서 힘을 찾아 겉돈다. 진정한 자는 밖에서 힘을 이루고 안으로 쳐들어온다. 


    변방에서 중앙을 침범한다. 그러나 오늘날 진보와 보수는 상대의 실패에 힘입어 기생할 뿐이다. 스스로의 역량으로 길을 열어젖히는 진짜는 없다. 보수는 호남과 노무현의 연결부위에서 약한 고리를 끊는 방법을 쓰고 있고 진보는 이명박근혜의 실정을 심판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할 뿐 스스로의 힘으로 전진하지 못한다. 자체 역량이 없는 가짜이기 때문이다. 도덕과 명분으로 말하면 가짜다. 그것은 상대방의 실패를 이용하려는 것이며 상대방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자체 역량을 가져야 한다. 천하와의 큰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에너지는 언제라도 천하에서 온다. 우리가 세계와의 대담한 전쟁을 벌이지 않으면 희망은 없는 것이다. 천하인이 아니면 안 된다. 조중동과 박근혜의 허약한 연결고리를 끊기만 하면 집권은 가능하지만 상대방의 실패에 따른 반사이익에 안주하면 안 된다. 큰 그림을 그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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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9 (13:3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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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와 언어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것은 언어다. 그 언어는 훌륭한가? 그러지 못하다. 인간과 자연을 연결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인류는 이 문제에 대한 명석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연과 자연을 연결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원리를 모방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언어가 그다지 훌륭하지 않으므로 자연의 언어를 모방해야 한다. 자연이 스스로 연결하는 방법은 구조다. 자연은 구조로 소통한다. 자연의 근본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고유한 활동성을 가지고 있다. 에너지의 활동성에 계를 지정하면 방향성이 보인다.


    자연의 에너지 활동에 계를 지정하고 대칭성을 조직하여 방향성을 유도하면 구조가 작동하여 사건이 일어난다. 인간은 그 사건을 목격하고 존재로 인식한다. 거기에 무엇이 있다는 것은 사건이 일어나서 에너지의 활동성이 계에 가두어져 통제된다는 의미다.


    인간은 사건을 조작하는 방법으로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 자연의 구조는 효율성을 따른다. 만약 효율의 달성에 실패하면 에너지 부족으로 사건은 작동을 멈춘다. 계가 깨지고 사건이 중단된다. 그 경우 인간은 그 사건을 목격할 수 없다. 이야기는 중단된다.


    태풍이 육지에 상륙하여 사라지듯 존재가 흩어진다. 생물은 죽는다. 별은 수명을 다하고 초신성 폭발을 일으킨다. 우리는 사건을 장악하고 효율성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자연을 다스릴 수 있다. 자연과 자연이 구조로 대화하듯 인간과 자연의 대화는 가능하다.


    효율적인 구조는 대칭적인 구조다. 대칭적이면서도 그 대칭성이 깨져야 구조가 작동한다. 지속적으로 대칭을 이루면서도 대칭성을 깨려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정렬하여 엔트로피를 이루어야 한다. 자연은 기본적으로 대칭적이다. 그러면서 엔트로피적이다.


    머리와 꼬리가 50 대 50의 대칭을 이루면서도 51 대 49로 머리가 약간 커야 한다. 이 구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쇄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며 엔트로피를 달성한다. 이러한 자연의 구조를 모방하여 효율을 달성하는 방법으로 인간은 자연을 복제해낸다.


    인간사회도 보다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운용할 수 있다. 우리는 선과 악 중에서, 진보와 보수 중에서, 정의와 불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려고 하지만 틀렸다. 그러한 자세는 엄마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의 태도다. 선생님의 격려를 바라는 초딩들의 자세다.


    주최측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주최측은 게임을 벌이고 판돈을 올리며 꽁지돈을 빌려줄 뿐 승부에 관여하지 않는다. 승부는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한쪽이 판돈을 쓸어가면 도박장 하우스는 망하는 거다. 아니다. 승부는 아슬아슬하게 진보의 우위여야 한다.


    가만 놔두면 보수가 이기도록 세상은 만들어져 있다. 세상은 당연히 비겁한 넘이 이기고 반칙하는 넘이 이긴다. 세상은 나쁜 넘이 이기고 의리없는 넘이 이기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하우스는 망하도록 되어 있다. 2천년 전에 중국에는 4천여개 국가가 있었다.


    모두 망했다. 놔두면 경쟁하고 경쟁하면 승자독식에 의해 하나만 살아남는다. 하우스는 문을 닫는다. 하우스는 은밀히 사건에 개입해야 한다. 주최측은 카지노를 관리할 뿐 승부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지만 실제로는 개입하여 젊은이가 돈을 따게 한다.


   그래야 고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주최측은 엔트로피가 작동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대칭을 유지하되 교착되지 않도록 속도조절을 하는 것이다. 진보가 승리하도록 하는게 역사의 목적이다. 그러나 너무 빠른 승리는 되레 수명을 단축시킨다.


    조로하지 않으려면 천천히 이겨야 한다. 진시황은 너무 빨리 이겨서 너무 빨리 망했다. 계를 통제할 수 있도록 기본적으로 대칭을 끼고 가되 대칭이 교착되지 않도록 부단히 대칭성을 깨뜨리는 것이 주최측의 역할이다. 그러려면 언제나 약자를 편들어야 한다.


    강자가 이기면 사건은 종결되고 존재는 죽기 때문이다. 약자가 연대해 강자와 맞서 50 대 50의 균형을 이루되 약자가 살짝 이겨야 한다. 대승은 부메랑을 이루므로 좋지 않다. 자연은 이 방법으로 존재를 여기까지 달성해 왔다. 인간도 이 방법을 써야 한다.


    자연의 소통법을 복제해서 사회발전에 써먹어야 한다. 자연은 연역이므로 인간도 연역을 익혀야 한다. 자연은 에너지와 엔트로피를 위주로 하는 존재론을 사용하므로 인간도 존재론을 익혀야 한다. 그런데 그럴 수 없다. 인간은 귀납과 인식론으로 세팅돼 있다.


    인간의 언어가 귀납과 인식론에 맞추어져 있다. 인간의 언어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전달에 맞추어져 있다. 인간에게는 호랑이를 때려잡기보다 호랑이의 존재를 알리는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본래를 익혀 한 단계 더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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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 개요 [16]

구조론의 개요 ● 구조론은 사건의 과학이다. 세상은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연결이다. 사물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사건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사건의 연결 성질을 이해하는 것이 구조론의 요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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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사람의 약속 세상을 구조로 바라보는 구조론연구소다. 당신은 지금 이곳에 와 있다. 공자의 문하에 들면 공문의 사람이 되고 구조론 문하에 들면 구조론 사람이 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지나가는 눈팅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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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의 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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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의 기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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